《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아트선재센터 2025.9.3~2.1
《적군의 언어》너머, 상태로서의 미술관

김경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hibition

〈엘 핀 데 라 이마히나시온 III (상상의 종말 III)〉 95×160×160cm 2024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아트선재센터 전시 전경 2025
사진: 남서원 이미지 제공: 아트선재센터

폐허로 기념하다 — 30주년의 역설
미술관의 기념 전시는 통상적으로 제도의 영속성과 견고한 역사를 축하하며, 성과를 정전(正典)화하는 ‘기념비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아트선재센터가 30주년 기념전으로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적군의 언어(The Language of the Enemy)》를 선택한 것은 이러한 제도적 관습에 대한 가장 파격적이고 자기 비판적인 거부 선언으로 보인다.

작가는 미술관의 정면 출입구를 거대한 흙더미로 봉쇄하고, 내부의 인위적인 ‘화이트 큐브’ 벽체를 철거하여 건축가 김종성이 설계한 건물의 콘크리트 골조를 노출시킨다. 작품 보존의 핵심인 온습도 조절 시스템(HVAC)마저 의도적으로 정지된 이 공간은 미술관의 기본 기능을 일거에 마비시키는 극단적인 ‘장소 전복적 설치’ 행위이다. 이러한 자발적인 ‘제도적 해체’와 ‘자기 재구성’은 단순히 시각적인 충격을 넘어선다. 미술관이 30년 전 처음 싹을 틔웠던 원형적 실험 정신을 포스트-인류세적 위기 속에서 가장 첨예하게 갱신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일까. 이 전시는 “미술관과 예술은 미래에 어떤 형태로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스스로의 형식을 해체하고 변이함으로써만 지속 가능하다”는 역설적인 답을 제시하며, 한국 현대미술계에 가장 비판적이고 혁신적인 전환점을 제공하는 듯하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아트선재센터 전시 전경 2025

감각의 탐색
《적군의 언어》는 관객을 지하 강당으로 안내하며 시작한다. 이 선택은 전시적 효과를 노린 장치라기보다, 전시의 태도를 명확히 드러내는 선언에 가깝다. 행사 때가 아니면 거의 사용되지 않던 극장, 비닐로 덮인 좌석, 긁어내다 만 이전 전시의 벽글 흔적, 그리고 곳곳에 남아 있는 녹색 비상등. 이 공간은 인류 멸망 이후를 상상한 미래의 폐허라기보다, 이미아트선재센터 내부에 존재해 왔던 시간의 상태다. 기능은 남아 있지만 의미에서 밀려난 장소, 제도가 스스로 방치한 기억의 층위가 전시의 출발점이 된다. 비닐로 덮인 극장 의자들은 단순한 폐허적 장치가 아니라, 근대 이후 집단적 감각과 서사를 생산해 온 시네마의 장례처럼 보인다. 동일한 방향을 바라보며 동일한 이야기를 소비하던 이 공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문명의 서사를 얇은 막 아래에 봉인한 채 남아 있다. 녹색 비상등은 생존과 탈출의 신호이지만, 이곳에서는 오히려 위기가 일상화된 문명을 상기시키는 잔광으로 작동한다.

이 지점은 아트선재센터의 기원을 자연스럽게 환기한다. 형식적인 개관 전시는 1998년의 《틈》이지만, 이 기관의 태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전시는 개관 준비 과정에서 열린 《싹》(1995)이었다. 미술관이 될 예정이던 자리에 남아 있던 개인 주택을 전시장으로 삼아, 당시 신세대 작가들은 사람이 살던 공간, 곧 사라질 장소의 시간과 기억 속으로 미술을 끌어들였다. 한옥과 일본식 구조, 서양식 증축이 혼재된 그 집은한국 근현대사의 문화적 혼란과 정체성의 문제를 장소 자체로 드러냈고, 《싹》은 멸균된 화이트 큐브 이전에 미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 전시였다. 30년이 지난 지금, 《적군의 언어》는 다시 한번 그 질문을 되돌려 놓는다. 다만 이번에 호출되는 것은 미술관 이전의 장소가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제도 자체다. 지하에서 시작하는 동선은 미래를 상상하기 전에, 이 기관이 지금까지 무엇을 축적하고 무엇을 배제해 왔는지를 먼저 직면하게 만든다. 이 전시는 생태를 약속하지도, 회복을 서사화하지도 않는다. 대신 미술관이라는 제도가 작동해 온 과정을 하나의 대사(代謝)적 과정으로 드러낸다. 흡수와 배제, 유지와 방치가 반복되어 온 느린 대사가 전시의 바닥에서부터 시작된다.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오면 관객은 익숙했던 아트선재센터의 로비가 아닌 낯선 풍경과 마주한다. 흙더미로 봉쇄된 유리문은 미술관의 정상적인 출입을 차단하고, 그 앞에는 외계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철제 조각이 서 있다. 주변에는 양파를 비롯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으며, 내부에는 세탁기를 품은 조각이 무인 상태로 작동한다. 창밖에서는 흰색 전광판의 빛이 내부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 백색의 침투는 화이트 큐브의 중립성을 전복한다. 미술관 내부의 ‘순수한 백색’이 아니라, 상업적 정보와 과잉의 외부 빛이 내부를 점령하며, 미술관이 차단해 왔던 현실의 소음을 강제로 유입시킨다. 세탁기를 품은 조각은 반복 노동과 일상의 기계적 리듬을 상징하면서, 인간의 부재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시스템을 드러낸다. 여기서 기계는 더 이상 인간을 보조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 이후에도 지속되는 조건이다. 1층은 폐허 이후의 낭만적 상상이 아니라, 인간 중심 서사가 이미 붕괴된 상태를 건조하게 제시한다.

〈상상의 종말 VI〉가변 크기 2024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아트선재센터 전시 전경 2025

2층으로 올라가면 긴장은 더욱 고조된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구조물과 종유석처럼 늘어진 형상들은 중력과 보존의 질서를 교란하며, 언제든 붕괴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로 존재한다. 이 층을 지배하는 것은 적색의 긴장이다. 경고와 위험, 생명 에너지를 동시에 내포한 이 색은 폭발하지 않은 채 억눌린 상태로 지속되며, 관객의 신체 감각을 서서히 압박한다. 온도와 습도 또한 미묘하게 변한다. 완전히 쾌적하지도, 완전히불쾌하지도 않은 상태는 미술관이 유지해 온 ‘이상적 감상 환경’의 기준을 흔든다. 관객은 작품을 해석하기보다, 자신의 몸이 이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먼저 인식하게 된다. 흙과 금속, 디지털 시뮬레이션을 통해 생성된 형태들은 인간의 손길과 비인간적 연산의 흔적이 뒤섞인 채 매달려 있으며, 조각은 더 이상 안정된 대상이 아니라 제도의 구조와 직접 충돌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전시의 정점에 해당하는 3층은 불과 푸른빛으로 가득 차 있다. 불은 인간 서사에서 가장 오래된 창조의 기원이자, 문명을 가능하게 한 최초의 기술이다. 동시에 그것은 파괴와 통제의 상징이기도 하다. 《적군의 언어》에서 불은 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을 감싸는 청색은 차가움이 아니라, 가장 뜨거운 온도의 색이다. 이 장면은 종말의 이미지라기보다, 인간 이후에도 멈추지 않는 생성의 조건을 제시한다. 불은 더 이상 인간이 길들인 도구가 아니라, 닿을 수 없고 통제불가능한 상태로 존재한다. 3층에 도달한 관객은 어떤 결론도 제공받지 않는다. 이 전시는 미래를 설계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위로하지도, 구원하지도 않는다. 대신 인간의 서사가 끝난 이후에도 세계는 계속 작동한다는 사실만을 남긴다.

그러나 《적군의 언어》의 핵심은 상승 그 자체보다, 다시 내려오는 과정에서 완성된다. 3층의 불을 지나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동안,관객은 더 이상 관찰자로 남아 있지 않는다. 내가 밟은 흙, 스쳐 지나간 열기, 다시 마주한 비닐과 잔해들은 모두 나의 움직임 속에서 미세하게 재정렬되고 있었다. 작가가 구축한 폐허의 세계를 통과하는 동안, 나는 그 파편을 휘젓고 구조를 흔들며 잔해들 사이를 유영했다. 멸망 이후의 장면을 지나가는 나 자신이 이미 하나의 대사 과정이 되었고, 세계를 다시 쓰는 미세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상승이 타자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었다면, 하강은 내가 이미 그 세계의 일부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내가 밟는 흙, 내가 통과한 열기 뒤의 냉기, 내가 만들어내는 공기의 흐름은 해석이 아니라 실제로 작품의 생태와 물질적 조건에 개입한다. 관객의 신체는 더 이상 중립적인 감상 도구가 아니라, 전시를 구성하는 하나의 변수로 작동한다. 이 전시는 폐허를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통과하는 존재들에 의해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상태로 제시한다.

〈상상의 종말 III〉 776×448×522cm 2022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아트선재센터 전시 전경 2025

《싹》의 유산과 ‘제도’의 전복
아트선재센터의 역사는 이미 ‘반(反)제도적 실험’이라는 DNA를 내포하고 있다. 비야르 로하스의 전시는 이 DNA가 30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두 전시는 모두 ‘장소 특정적 실험’을 공유하지만, 비판의 대상을 ‘부지’에서 ‘제도’로 옮기며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기관의 궤적을 완성한다.

1995년 《싹》 전시는 미술관이 공식적으로 ‘태동하기 전’, 작가들은 이 역사적으로 응축된 ‘미술관 외부’의 실제 삶의 공간에 개입한다. 이는 미술 제도의 추상적 담론이 아닌 장소의 문화적·정치적 맥락을 파헤치는 원형적인 장소 특정적 실험을 시도한 것이다. 《싹》은 새로운 미술관의 탄생을 예고하는 ‘외부로부터의 비판’이자, 장소 특정성을 통해 ‘한국적 혼돈’을 드러낸 실험이었다.

30년이 지난 후, 비야르 로하스는 비판의 대상을 외부의 역사적 부지에서 내부의 제도적 건축물로 옮긴다. 이 전시는 ‘선도적인 동시대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권위가 30년간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한다. 《싹》이 건물의 서사를 읽어냈다면, 《적군의 언어》는 건물의 기능을 멈추게 함으로써, 미술관의 제도적 존재 이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입구를 막고 벽을 뜯어내 건물의 속살을 노출시킨 행위는, 아트선재센터가 자신의 ‘실험 정신’을 제도적 갱신의 단계로 진입시켰음을 선언하는 역사적 행위이다. 30년 역사를 기념비가 아닌 ‘미래의 유적’으로 재건축하려는 가장 과감한 자기비판의 형식이다.

작가의 전복적 행위는 제도비판의 시각에서 극단화된다. “장엄함은 폭력을 필요로 하고, 폭력은 훌륭한 폐허를 만든다(Grandeur requires violence, and violence makes good ruins.)”라는 통찰처럼1, 미술관이 축적해 온 (권력으로 작동하는) 위대함의 이면에는 선별과 배제, 규율과 통제라는 제도적 폭력이 잠재해 있었다. 이 폭력을 분석하고, 작가가 이 공간을 어떻게 전복시켰는지를 엔트로피의 개념과 연결하여 사유할 필요가 있다.

미술관은 본질적으로 엔트로피 증가에 저항하는 ‘반(反)엔트로피 기계’이다. 작품을 시간과 부패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투입하여 낮은 엔트로피 상태(최소 무질서)를 유지하고, 내부가 외부와 격리된 ‘닫힌 시스템’의 허구를 구축한다. 이 통제는 미술관이 작품의 ‘영속적 가치’를 보장하는 제도적 기반이 된다. 또한, 이 통제된 환경은 관람객에게 정숙함, 거리 두기, 이성적 해독을 강요하는 공간적, 기능적 통제의 폭력을 행사한다.

비야르 로하스는 이 제도적 폭력에 맞서 ‘전복적 폭력’을 가한다. HVAC 시스템의 의도적 정지는 미술관을 더 이상 에너지가 투입되어 질서를 유지하는 공간이 아닌, 외부 환경의 변화(자연의 흐름)에 종속되는 ‘열린 시스템’으로 만든다. 흙, 불, 식물 등의 비인간적 요소가 도입되고, 통제되지 않은 습도와 온도 속에서 부패, 변이, 해체라는 엔트로피 증가 과정이 작품과 공간 전체에서 발생한다. 이는 미술관의 ‘보존’이라는 가장 신성한 역할을 마비시키고, 시간의 흐름을 물질에 각인시켜 ‘현재 진행형 폐허’를 창조한다. 이로써 미술관은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난 불안정한 ‘야생적 생태계’로 전환되며, 제도적 폭력에서 해방된 멋진 폐허(good ruins)를 남긴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아트선재센터 전시 전경 2025

‘적군의 언어’와 비인간의 생성
《적군의 언어》가 구현한 폐허는 단순한 멸망의 이미지가 아니라, 인류세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는 포스트-인류세적 존재론을 담고 있으며, 이는 관객의 인식 체계에 근본적인 전환을 요청한다.

전시 동선은 익숙한 정면 입구를 거부하고 지하 강당에서 시작한다. 이는 시간이 직선이 아니라 지층처럼 수직으로 퇴적된다는감각을 부여하며, 관람객을 인류 문명사 아래의 선사(先史)로 이끈다  작가가 개발한 ‘타임 엔진(Time Engine)’은 AI와 가상세계를 결합한 시뮬레이션 도구로, 미래의 잔해와 과거의 유적을 혼합한 혼종적 조각들을 현실에 구현한다. 이 복합체들은 인간의 손길과 비인간적 연산의 흔적이 뒤섞인 상태로, 인간, 비인간, 포스트휴먼 존재들이 마구 뒤섞인 예측 불가능한 세상의 파편들을 제시한다. 미술관은 이로써 더 이상 보존의 장소가 아니라, 비인간적 존재들이 주체가 되어 변이와 해체가 일어나는 생성의 지형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시 제목인 《적군의 언어》가 우리의 인식 체계에 가하는 도전이다. 작가는 ‘적’이 특정 주체나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 해석의 문법, 세계를 읽는 언어 체계 그 자체라고 말한다. 즉, 인간 중심주의, 화이트 큐브적 투명성, 예술 제도의 중립성이라는 오래된 가정들, 그리고 우리가 세계를 ‘이해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문법의 장치가 바로 ‘적’이다. 전시장에서 텍스트적 권위가 의도적으로 무너지고, 층마다 다른 생태, 다른 기후적 조건, 다른 감각이 배치되는 것은 인간의 감각 체계가 얼마나 한정적이었는지를 드러내며 인간의 해석을 마비시킨다. 따라서 ‘적의 언어’는 우리를 위협하는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다시 듣게 만드는’ 낯섦의 언어이다. 이 낯섦을 수용하는 과정이야말로 미래를 이해하는 새로운 인식론적 출발점이 된다.

생태적 상태로서의 미술관
비야르 로하스의 《적군의 언어》가 갖는 궁극적인 의의는 단순히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의 구현을 넘어, 미술관이라는 제도의 ‘자발적 해체’를 통해 미래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 한다는 점에 있다. 이 전시는 ‘동시대 미술관이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용감하고 파격적인 응답이다. 작가는 ‘예술’이라는 이름이 별도로 부각되지 않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인 듯하다. 이제 미술관은 ‘예술을 담는 용기’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규범적 카테고리를 초월하여 시간과 물질의 변이가 진행되는 ‘생태적 시스템’으로 스스로를 탈바꿈시키기를 희망한다.

이 폐허 속에서 관람객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재정의된다. 기존의 규율과 통제가 제거된 환경 속에서, 관람객은 더 이상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다. 그들은 권위가 제거된 공간을 걷는 능동적인 탐색자, 미래의 고고학자, 혹은 새로운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무질서와 혼종성 속에서 인간-비인간 존재의 복잡한 관계와 다가올 문명의 변화를 사유하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 전시를 경험한 관람객이 폐허 속에서 묘한 ‘위로’를 느끼는 역설은, 멸망이 인류의 죄를 고발하는 종착역이 아니라, 문명 이후에도 생명은 다시 자라며 세계는 계속된다는 변이와 생성의 감각을 체험적으로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군의 언어》는 미술 제도의 역사적 맥락에서 ‘자기 해체’를 감행함으로써, 오히려 포스트-인류세 시대의 미술관이 가져야 할 ‘지속 가능한 생명력’을 획득하는 가장 용감하고 자기 비판적인 선언이다. 이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 시기를 마무리하고 다음 시대를 여는 비평적 사건으로, 30년 역사의 가장 빛나는 자기 재구성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1 Doryun Chong “Grandeur Requires Violence, and Violence Makes Good Ruins” Parkett No.93 2013 p.136

2026년 1월호 (VOL.492)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