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EATH THE CULTIVATED GROUNDS, SECRETS AWAIT》
송은
5.17~7.13
Exhibition Focus
《Beneath the Cultivated Grounds, Secrets Await》
송은 전시 전경 2024 사진 : 박홍순
여전히 모르는 상태에 머물기
고원석 전시기획
어두운 곳에 숨겨진 것을 찾으려는
행위가 의미 깊은 이유는 그 대상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대상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체득하게 되는 것들
때문일 것이다.
2009년 여름 경희궁 경내에 렘 쿨하스(Rem Koolhaas)와 OMA가 디자인한 가설 파빌리온, ‘프라다 트랜스포머’가 만들어져 눈길을 끌었다.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로 여겨졌던 그 프로젝트에서 크게 3개의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Turn into Me’ 제하에 열린 나탈리 뒤버그(Nathalie Djurberg )의 개인전이었다.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뒤버그의 첫 한국 개인전은 프라다 파운데이션의 아트디렉터이며 국제적인 명성을 지녔던 큐레이터 제르마노 셀란트(Germano Celant)가 기획하여 더 화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15년 만에 다시 뒤버그의 개인전 《Beneath the Cultivated Grounds, Secrets Await》가 송은에서 개최되었다. 이전 전시가 뒤버그의 개인전에 한스 버그(Hans Berg)가 음악을 협력한 포맷이었다면, 이번 전시는 정확하게는 나탈리 뒤버그와 한스 버그 듀오의 개인전이다. 이들의 협업은 2004년부터 지속되었는데, 뒤버그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작품을 먼저 만들고 나면 뒤이어 버그가 음악을 만드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종종 그 순서가 뒤바뀌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뒤버그가 원하는 음악의 종류를 버그에게 직접 설명하여 반영시키기도 한다.
갖가지 식물이 자라고 있는 축축한 대지의 지하에 은밀한 이야기가 숨어있다는 제목처럼, 이 전시는 밝은 지상과 깊은 지하 공간으로 이뤄져 있는 송은의 전시장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구성한 흔적이 역력하다. 전체 공간을 지상세계와 지하세계로 가정하고, 각 공간의 특성을 반영한 작품 배치와 동선의 구획은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지상과 지하를 잇는 모종의 통로를 관통하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한다. 이 때문에 개별 작품은 대부분 느슨한 서사 구조를 갖는 데 반해 전시의 전체적인 공간은 일정하게 의도된 서사적 연결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대조적이다.
건물의 1층에서 처음 마주치는 작품은 〈Wolf and Moon〉(2023)이다. 이것은 하나의 조각 작품이자 3층에서 마주하게 될 애니메이션 작품에 등장하는 인형이기도 하다. 기괴한 이미지와 몽환적인 사운드로 구성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 더해 다수의 조각과 평면을 함께 구성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디자인한 공간구조까지 더해지는 이들의 최근 작업은 관객의 피상적 인지를 넘어 능동적이고 공감각적인 개입을 유도한다. ‘늑대’와 ‘달’이라는 제목은 전체 작품들을 관통하는 어떤 속성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데, 선악과 같은 개념적 범주나 물리적 특성을 지시하는 속성을 초월하여 상반된 대상의 복합적 속성을 동시에 은유하는 대상이자 촉수에 전달되는 감각적 인지를 야기한다.
〈Howling at the moon〉(사진 오른쪽)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영상, 음악 5분 37초 2022
《Beneath the Cultivated Grounds, Secrets Await》 송은 전시 전경 2024
사진 : 박홍순
중층의 오디토리움에서 마주하는 〈How to Slay a Demon〉 (2019)은 뒤버그와 버그 듀오가 만들어온 익숙한 분위기의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채 누워있는 여성은 주체성이 제거된 채 철저한 육욕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 위에서 번갈아가며 등장해 음험한 시선과 접촉을 시도하는 주체들은 마법사나 광대, 코끼리, 원숭이, 심지어 곰과 같이 정상적 인식을 교란시키는 의외의 대상들이다. 밀폐된 스튜디오 구조에서 1인칭 시점 기법으로 촬영된 이 작품에서 관객은 관음증적 시선으로 불쾌한 장면을 지켜보는 관찰자이자 접촉의 대상이 되는 여성의 연장된 신체로 존재하며, 나아가 최면적이고 몽환적인 음악과 함께 중독과 욕망의 본성을 공유하는 당황스러운 인식마저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양가적 정서는 사실 이들의 작품이 공통적으로 뿜어내는 아우라인데 이는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비이성적이고 탐욕적인 속성 때문일 것이다.
2층 전시공간 대부분은 〈The Enchanted Garden〉(2024)으로 채워져 있다. 이곳에는 비현실적이면서 화려하게 채색된 다수의 나뭇가지와 새, 새장 형태의 조각들이 정교하게 디자인된 공간을 가로지르며 숲처럼 놓여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클레이 애니메이션 중심으로 작업을 선보여 온 뒤버그와 버그 듀오는 2011년경부터 조각 작업이나 몰입을 유도하는 공간 설치 작업도 함께 시도해왔다. 특별한 좌대나 장치를 절제한 채, 많은 조각 작품을 전시장 바닥이나 벽면 등에 자연스럽게 놓아 관객이 입체적 경험과 클레이 애니메이션이 표현하는 가상 세계의 공간적 체험을 하도록 유도한다. 전시장에 구현된 숲은 애니메이션의 분절된 서사구조처럼 비틀리고 분산되어 있지만, 비현실적 색채로 마감된 조각들로 구현된 숲은 클레이 애니메이션이 발산하는 독특한 사실감을 갖춘 모종의 장소처럼 특별한 설득력을 갖는다.
숲은 이들의 초기작업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주요 배경이다. 생태학적으로 숲은 수많은 식물과 동물, 곤충과 미생물 등이 공존하며 자연계의 필수적인 요소들을 공급하는 장소이자 인류의 자원 조달의 원천이며, 동시에 궁극의 피난처였다. 또한 문화사적 관점에서 숲은 근대적 사유체계가 정상작동하지 않는 신비로운 곳으로 초자연적 생명체들이 활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들 듀오가 북유럽 스웨덴 출신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신비로운 정원의 숨겨진 분위기는 뒤버그가 어린 시절에 읽은 동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그러한 감정적 경험의 밀도는 단순히 우뇌가 인지한 정보를 넘어 신체적이고 정서적인 체험이 더해졌을 때 강력한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How to slay a demon〉(스틸)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영상, 음악 6분 20초 2019
《Beneath the Cultivated Grounds, Secrets Await》 송은 전시 전경 2024
사진 : 박홍순
〈Like beads on a string(2022)을 위한 드로잉〉(사진 오른쪽)
종이에 목탄 18장, 각 76 × 57cm 2022
《Beneath the Cultivated Grounds, Secrets Await》 송은 전시 전경 2024
사진 : STUDIO JAYBEE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 reserved
한편의 통로 공간에 배치된 목탄 애니메이션, 〈Like Beads on a String〉(2022) 또한 거칠게 묘사된 숲이 배경이다. 여기서 늑대가 흘리는 눈물은 숲을 관통하며 간헐적인 언어를 만들어내는 여정을 거친다. 슬픔과 애도의 눈물은 고밀도로 응축된 감정적 상태를 표현하며 시간의 선후관계와 논리적 인과관계를 초월하는데, 이는 이들의 다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등장하는 ‘현재의 무한반복’과 맞닿아 있다. 사운드가 한 번 재생되는 동안 영상이 네 번 반복 재생되는 구조는 그러한 현재성을 더 강화시킨다.
목탄 애니메이션은 예상과는 달리 뒤버그가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익히 알려진 이후에 새로 발표한 기법이다. 클레이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스톱 모션 기법으로 제작되는 목탄 애니메이션은 형태의 추상성이나 유동성, 가변적인 명암 등을 표현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클레이 애니메이션 못지않게 집약적 수공을 요하는 작업이기도 한데, 한 장의 종이 혹은 배경 위에 그리고 지우기를 수 없이 반복해야 하는, 고통스럽고 수행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한편 전시장 입구에서 나선형 계단을 통해 2층 전시장으로 들어가기 전 오른편에 종이에 목탄으로 그린 뒤버그의 종이 드로잉들이 걸려있는 별도의 방이 있는데, 이 방은 이번 전체 전시 중 가장 매혹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3층은 세 점의 클레이 애니메이션과 한 점의 목탄 애니메이션, 복수의 오브제들로 구성된다. 2층이 오브제로 번안된 숲의 분위기였다면 3층은 암전공간에 투사된 이미지들과 혼재된 사운드로 더 직접적인 숲의 분위기를 갖는다. 세 점의 애니메이션에는 공통으로 의인화된 자연물이나 동식물들이 등장한다. 〈Dark Side of the Moon〉(2017)에서는 말하는 집, 담배 피우는 늑대, 어린 소녀와 춤추는 달 등이 숲에서 탐욕을 주제로 토론을 벌이며, 〈Howling at the Moon〉(2022)에서 달은 늑대와 돼지로 구성된 한 커플의 불편한 관계와 불완전한 욕망 앞에서 뭔가를 시도하지만 결국 무기력하게 체념한다. 〈A Pancake Moon〉(2022)에서 달걀은 숲속을 춤추며 활보하다가 달을 흉내 내보려 하지만 결국 본연의 형태와 정체성을 상실하고 무참히 패배한다.
이렇듯 영상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서로 호기심 어린 소통을 시도하며 탐욕과 금기의 전조를 조심스레 발산하다가 무력한 상태로 환원되기를 반복한다. 의인화는 숲을 다룬 다수의 문학작품이 취해왔던 방법론이다. 또한 이 작품들에서는 비현실적 상황의 조성을 통해 느슨한 서사구조의 전후관계를 흐리고, 결국 반복적인 현재성을 획득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사실 이들의 애니메이션에서 현재는 선형적으로 흐르지 못하고 수시로 반복되곤 한다. 뒤버그는 작품 대부분에서 결론을 염두에 두지 않는 서사구조를 지향해왔다. 숲이라는 공간이 초현실적인 이유도 종종 시공간의 전후 맥락이 와해되면서 무한반복되는 현재의 감옥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곧 현실과 꿈의 혼재로 연결되는데, 이와 같은 상황을 다룬 영화로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의 〈수면의 과학(The Science of Sleep)〉(2006)이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단조롭고 억압적인 일상을 벗어나고자 꿈을 꾸지만 그 꿈조차 계속해서 반복되면서 현실과 꿈의 경계를 혼동하고, 결국 현실의 억압이 꿈의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과 심리적 갈등을 체험하게 된다.
〈The Ehchanted garden〉(50개 중 1개)
목재, 천, 석고 반죽, 폴리머 클레이, 아크릴 페인트, 레진, 철사 가변 설치
2024《Beneath the Cultivated Grounds, Secrets Await》 송은 전시 전경 2024
사진 : 박홍순
이제 전시는 지하 2층 공간으로 연결되며 관객을 지하세계로 안내한다. 지하 공간에는 금박을 한 비버들이 어둠 속에서 푸른 빛을 내는 나뭇가지로 댐을 짓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어두운 조도의 전시장 전체 공간엔 버그의 음악이 재생되면서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연결되는 비밀스러운 동굴의 입구를 생각하게 한다. 어둡고 미스터리한 동굴에는 수많은 개별적 서사들이 은닉되어 있는데, 전시장의 특수한 구조인 중앙의 열린 천장에 매달린 조용한 관찰자 〈The Silent Observer〉(2024)가 그 장면을 은은하게 목도하고 있다. 이곳은 햇빛이 비치는 인식의 장소가 아니라 달빛이 비치는 환상의 공간이다. 달은 낮이 아니라 밤, 이성이 아니라 정서, 정복이 아니라 공존을 상징한다. 물질성은 이 전시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키워드로 존재한다. 이들의 애니메이션이 갖는 생명력의 핵심은 뒤버그가 직접 공들여 제작하는 클레이 인형들의 물성에 기인했다. 여기에 더해 이들이 제작한 다수의 조각은 전시의 물질성을 더 강화시키며, 여기에 전시의 전체 공간을 가로지르는 버그의 최면적인 소리가 더해져 연극 무대와 같은 공감각적 차원의 토대를 형성한다. 이 때문에 버그의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피부로 감각하는 것 같다.
어둡고 불쾌한 배경, 생생하고 대담한 색채, 기괴한 인물과 왜곡된 자연,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는 뒤버그와 버그 듀오의 작품이 견지해온 특질일 것이다. 종종 그림 형제나 안데르센과 같은 동화를 차용하는 이들의 작업은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안기며 사회적 금기와 위계, 개인의 심리적 거부감과 감정적 복잡성을 다뤄왔다. 특히 성과 폭력, 탐욕과 공포 등은 이들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제재들로서 관객의 윤리적 혹은 감각적 저항선을 재고하게 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다분히 격정적으로 질투와 복수, 탐욕과 같은 인간의 본능을 탐구하며 종종 섬뜩하고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이들의 성향은 상당부분 절제되었다. 대신 이 전시는 우화적이고 몽환적이다. 이전의 전시들이 과장된 모습과 뒤틀린 신체를 수시로 등장시키고,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한 탐욕이나 충동, 환상이나 집착과 같은 것들을 드러내며 인간의 어두운 면을 조명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숲속에 편재하는 다양한 생명력에 주목하고, 앎의 세계 이면에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를 인식, 포용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한 세계로 연결되는 통로는 해가 아니라 달, 개가 아니라 늑대의 존재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The Ehchanted garden(Cage)〉
금속, 아크릴, 스티로폼, 금속박, 왁스, 오디오 플레이어, 모터, 트랜스폰더 46 × 46 × 85cm 2024
사진 : 박홍순
이전의 작품들에서 선보였던 충격과 도발의 에너지가 사라져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여전히 ‘모르는 상태에 머무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반갑다. 어두운 곳에 숨겨진 것을 찾으려는 행위가 의미 깊은 이유는 그 대상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대상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체득하게 되는 것들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이 살던 어둠의 동굴을 지나며 얻게 되는 성장이나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해리가 마주한 어둠의 마법에서 얻게 되는 용기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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