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PORTS/SURFACES 쉬포르 쉬르파스》
대구보건대학교 인당뮤지엄 5.15~8.13
김주원 큐레이터, 한빛교육문화재단 이사
Exhibition
루이 칸 〈Floor/Wall〉(사진 가운데) 면천에 유채 288×242×214cm 1973 《Supports/Surfaces》 인당뮤지엄 전시 전경 2025
제공:인당뮤지엄
‘쉬포르/쉬르파스’, 질문의 필요성을 질문하기
김주원 큐레이터, 한빛교육문화재단 이사
미술의 역사에서 1960년대는 다양한 경향이 잇달아 등장하고 전위적인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시기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기간 중 가장 큰 사건은 무엇보다도 모더니즘의 몰락과 그에 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일 것이다. 이 시기 프랑스 현대미술의 마지막 아방가르드이자 최후의 모더니즘 스타일로 지목된 것은 ‘B.M.P.T.’와 최근에 와서 재조명된 ‘쉬포르/쉬르파스(Supports/Surfaces)’의 활동이 있다. ‘B.M.P.T.’는 다니엘 뷔랑(Daniel Buren), 올리비에 모세(Olivier Mosset), 미셸 파르망티에(Michel Parmentier), 니엘 토로니(Niele Toroni) 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결성한 미술 그룹이다.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B.M.P.T.’’는 미국의 할 포스터, 로잘린드 크라우스 등 『옥토버』 편집진이 공동 집필한 『Art Since 1900』(2004)이나 영국 미술사학자 마이클 아처의 『Art Since 1960』(1997/2007) 등 다수의 주요한 현대미술사 저작들에서 빠짐없이 다뤘다.
이에 비해, 참여 작가 대부분이 파리가 아닌 남프랑스 지역 출신으로 구성된 ‘쉬포르/쉬르파스’는 사실상 동시대 미술운동으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1990년대 들어 기획된 두 전시 《쉬포르/쉬르파스, 1966 1974》(생에티엔 현대미술관, 1991)와 《쉬포르/쉬르파스 시대》(주드폼 미술관, 1998)를 통해 동시대 다른 전위미술 운동들, 그중에도 특히 ‘B.M.P.T.’와 더불어, 프랑스 전후 현대미술을 후기 현대미술로 전환케 한 중심 역할을 평가받으며 미술사적 의미와 위상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간 한국에서도 ‘쉬포르/쉬르파스’를 다룬 잡지 등의 지면과 일부 작가의 개인전 혹은 소장가의 컬렉션 전시가 몇몇 있었다.1 이들 운동과의 제한적이고 간접적인 국내에서의 대면만으로 동시대 미술 문맥 내에서 ‘쉬포르/쉬르파스’의 실험성과 전위적 독자성을 온전히 체감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기존 회화작품과 전시 등의 제도적 관행에서 벗어나 캔버스 위에 붓질 대신 매듭짓기, 뜨거나 짜기, 염색하기, 접기 등의 수공예적 기법으로 작업했다. 작품은 미술관 벽이 아닌 프랑스 남부 칸의 해변가, 니스, 코아라즈의 길과 광장을 필두로, 이탈리아 북부의 앙포를 위시한 여러 도시들 그리고 몽펠리에, 리모주, 페르피냥, 툴루즈의 공공장소와 그 주변 외곽의 들판, 계곡, 강변과 해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열린 장소에서 전시했다. 이 같은 비문화적 공간에서의 전시는 제도화된 미술관의 권력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임과 동시에 도시/파리로 집중된 예술행정과 분배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도시가 아닌 지역, 미술관 등의 제도 내부가 아닌 밖/야외에서의 전시를 통해 회화 예술의 확장을 의도했던 것을 감안하면, ‘쉬포르/쉬르파스’의 뒤늦은 주목은 이상할 것도 없을지 모른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1970년대 프랑스 현대미술사의 전환점이 되었던 ‘쉬포르/쉬르파스’의 미학적 성취를 조망하는 국내 첫 전시가 대구에서 열렸다. 13명의 작가 55점의 작업이 대거 소개된 전시는, 단순히 과거의 한 예술운동을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시는 ‘쉬포르/쉬르파스’라는 회화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인 ‘지지체’(쉬포르, Supports)와 ‘표면’(쉬르파스, Surfaces)이라는 단어의 배열로 이뤄진 그룹의 이름이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과 공간을 통해 예술가들의 신념과 공명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클로드 비알라의 틀에서 떼어져 벽에 걸린 빨강 강낭콩 〈1968/015〉(1968)의 패턴화된 반복이 주는 경쾌함과 그로부터 대각선 방향 바닥 벽에 포개져 깔린 두 장의 채도가 다른 루이 칸의 노랑 회화 〈Wall/Wall〉(1973)은 ‘말’과 ‘실존’, ‘개념’과 ‘현실’ 사이 벌어져 있던 우리의 관습화된 관념을 꾸짖고 ‘회화는 무엇인가? 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를 근본적이지만 무겁지 않게 질문하고 있다.

《Supports/Surfaces》 인당뮤지엄 전시 전경 2025

베르나르 파제스 〈The Pile of Straw〉 (사진 왼쪽 앞) 채색된 짚과 IPN 80×300×270cm 1969
클로드 비알라 〈1971/047〉(사진 오른쪽) 천에 메틸렌 블루 염색 180×540cm 1971
《Supports/Surfaces》 인당뮤지엄 전시 전경 2025
캔버스 천을 받치던 나무 틀/스트레처를 벽에 기대어 놓은 다니엘 드죄즈의 〈Stretcher〉(1968), 화포를 길게 뜯어 띠처럼 설치한 파트릭 세이투르의 〈Untitled〉(1970)는 기존의 틀/스트레처에 고정된 캔버스를 떼어내고 해체하여 비교적 단조로운 날것 그대로의 재료, 즉 물질성과 작업 행위의 과정, 흔적으로서의 제스처를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오히려 의미의 과잉을 경계하고 재료 자체가 의미가 되도록 배치하고, 접으며, 놓고 구성한다. 이들의 회화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이들의 회화는 보여주려는 것이 아닌, 스스로 ‘존재’하는 회화이다.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해체, 재정의의 거듭되는 반복과 시도. 1960~1970년대 프랑스 남부의 어느 해안가에서 ‘쉬포르/쉬르파스’들이 되물었던 질문은, 2025년 지금 한국 대구에서 지역사회와 미래세대의 비전을 향한 대학박물관의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쉬포르/쉬르파스’는 화이트 큐브로 대변되는 것들에 의해 규정되고 우상화될 예술(작품)의 운명을 거스리고 그 자체로 존재할 예술, 예술의 자유를 실천하고자 했다. 자유의 실천은 박제화될 정체성 규정이 아닌 현재와 교감하고 날마다 재정의 될 질문에서 가능할 수 있다.
전시장의 작품을 보며, ‘쉬포르/쉬르파스’예술가들처럼 질문을 떠올려 본다. ‘어? 이것도 회화? 그렇다면 회화는 무엇이지?’,‘예술가는 무엇을 위해서 작품을 만드는 걸까?’, ‘내가 받은 우편물도 예술이라고? 일상과 예술의 경계는 뭐지?’
수평적 세계를 위한 실천으로서 거듭되는 질문은 선형적 위계 사회의 모든 것은 물론 권력과 상상력, 과거와 오늘, 현재와 미래 조차도 같은 자리에 서 있게 할 수 있다. 질문의 필요성을 다시 질문하길 제안하는 전시이다.
1 1982년 『계간미술』 봄호에 실린 비평가 성완경의 글 「오늘의 유럽 미술을 수용의 시각으로 본 서구 현대미술의 또 다른 면모」는 ‘쉬포르/쉬르파스’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하고 있다. 한편, 다음 해인 1983년 한국미술관과 원화랑에서 클로드 비알라 개인전(1983.6.28~7.27 )이 열렸다. 한국미술관에서는 길이 3~4m를 넘는 클로드 비알라의 대작 10여 점이 소개되었고 원화랑에서는 소품들을 전시하였다. 이후 2024년 최근까지도 몇몇 작가 전시가 제한적으로 열렸을 뿐이다
2 이들은 몇 차례의 전시회를 열었는데, 1970년 9월 파리시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전시회에서 그룹의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전시에는 뱅상 비울레스(Vincent Bioulès), 마크 드바드(Marc Devade), 다니엘 드죄즈(Daniel Dezeuze), 파트릭 세이투르(Patrick Saytour), 앙드레 발랑시(Andre Valensi)와 클로드 비알라(Claude Viallat)가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프랑스 남부 지역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 해인 1971년 4월, 제2회 전시에는 앙드레 피에르 아르날(André-Pierre Arnal), 루이 칸(Louis Cane), 노엘 돌라(Noël Dolla), 장-피에르 팽스맹(JeanPierre Pincemin)이 합류하였고, 같은 해 6월 토니 그랑(Toni Grand)이 참여한 제3회전이 열렸다. 그 이후 이들과 함께 작업적 신념을 공식화하고 수차례 전시를 함께 한 작가로는 피에르 뷔라글리오(Pierre Buraglio)가 대표적이다. 이들과 함께 수시로 그룹전에 함께 했던 베르나르 파제스(Bernard Pagès)는 제1회 전시에 참여했지만 개막 전에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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