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刊美術 RE-READ]
월간미술 다시 읽기
에밀레미술관과 조자용
범어사 돌도깨비와 조자용(1970) 사진출처: 《비나이다 비나이다》(조자용 지음, 삼신학회 프레스, 1996)
故 대갈 조자용(大喝 趙子庸, 1926~2000)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1954년 한국으로 돌아와 전후 재건에 힘쓴 건축가이자 수집가, 민학자다. 박물관 운동을 벌여 한국박물관협회의 전신인 한국민중박물관협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 도깨비기와 민화 옹기 장승 벅수 등 민예품 수집에 몰두했던 조자용 선생의 자취는 지금 주류 미술계, 문화계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초창기 민중박물관협회 회원들이 차례로 한국박물관협회 회장에 취임할 때 기념 인터뷰에서 그에 대한 ‘전설 같은’ 것을 구전으로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서울공예박물관 허동화 기증관에 남은 이름도 그런 식의 한 조각인데, 허동화 선생에게 자수·보자기를 중심으로 수집할 것을 권한 이가 바로 조자용 선생이다. 《월간미술》에도 그가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고 다만 민화 관련 기사에서 민화 수집과 연구의 선구자로 이름만 두어 번 언급될 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흔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계간미술》 창간호(1976, 겨울), ‘사설미술관 순례’ 첫 번째가 ‘에밀레미술관 - 민화의 매력’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
《계간미술》(1976, 겨울) 창간호에 소개된 ‘사설미술관 순례 1-에밀레미술관’은 〈까치 호랑이〉로 시작한다.
미국에서 돌아온 조자용은 한국의 건축 양식을 계승하는 현대건축을 위해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던 중 신라와당에 새겨진 도깨비에 매혹되어 기와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수집 대상은 민화, 목판화, 민속공예품으로 점차 넓어졌다. 이것들은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관심이 대상이 전혀 아니었지만 일본이나 미국 등지로는 어마어마하게 반출되고 있던 실정이었다. 그렇게 모은 소장품을 잘 보존하고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널리 공개하기 위해 그는 1968년 서울 영등포구 등촌동에 에밀레미술관을 지었다. 미술관 기둥은 범의 발을 형상화한 것으로, 조자용이 추구한 한호(韓虎)의 상을 엿볼 수 있다. 그야말로 ‘호족관’인 셈. 대지 1000여 평(약 3305㎡)에 건평 222평(약 734㎡)인 미술관 2개의 전시실에는 신라와당 5000여 점, 민화 2000여 점, 목판화 100여 점, 민속공예품 500여 점이 소장되었다고 한다. 대부분 국보나 보물급의 문화재는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서 무관심하게 잊혀가는 민중의 혼이 담긴 예술품들이었다. 무려 ‘하바드’대학교 석사 출신의 건축가가 지은 미술관이 당시 주변 개발로 허무하게 허물어졌으니, 이 기사에 남은 사진은 몇 안 되는 에밀레미술관 건물 전경이다. 기사는 에밀레미술관의 가장 두드러진 공로로 역시 민화의 발굴과 계몽을 들고 있다. 1970년대 민화의 붐은 에밀레미술관의 영향을 상당 부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민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정체를 정확히 밝히기도, 정의하기도 어렵지만 조자용이 《韓國民畵의 멋》(1972)에서 ‘민’을 “사회적 지위를 가리지 않고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 때의 벌거벗은 알몸 모습”으로 넓게 정의한 것에 주목할 필요는 있다. 이 말로써 적어도 민화가 박제된 도상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기사의 마지막은 ‘경영난의 사설 미술관’으로 마무리되었다. 활발한 민화 순회전을 개최하면서 병신춤, 각설이춤, 굿까지 누구보다 먼저 해외에 소개하고 있었지만 조자용은 이문에 밝은 사람은 아니었고(후에 본래 ‘모두의 콘텐츠’였던 것으로 재미를 본 사람들은 따로 있으니), 박물관을 제대로 된 사단법인으로 체계화하진 못했다. 말했듯, 에밀레미술관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실 조자용의 활약상은 이후 삼신(三神) 사상을 계승하며 흥풀이 장을 제공한 속리산 시대를 더 들여다봐야 하겠지만 《월간미술》에서 찾을 수 있는 자료는 더는 없다. 건축가로서 그가 지은 건축으로는 정동 미대사관 한옥관저, 구세군 본부, 전주 예수병원, 대구 제중병원, 계명대 대명본관, 백학관, 경북대 본관, 동산병원 본관, 세종대학교박물관 등이 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삼신사와 삼신사 수련장에 초가지붕을 사용한 탓인지, 건축계에서도 그의 이름은 크게 남아있지 않다. 그의 이름도 썩거나 타버린 초가지붕 신세를 면하지 못한 것. 다만 88’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가 탄생한 것과 호암미술관이 걸출한 범 민화를 소장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조자용의 민학에 대한 헌신 덕분이었음을 덧붙인다. 조자용 다시 읽기는 이제 시작이다.
《계간미술》에 남은 에밀레미술관 사진
배우리 기자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