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할 추상적 감각의 세계
-기억, 냄새 그리고 반역사

서동진 계원예대 교수

Special Feature

후각예술
노르웨이 출신 작가 시셀 톨라스(Sissel Tolaas)는 세계 35개 도시의 향기를 추출해 전시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도시라는 근대적 장소는 특유의 냄새와 불가분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그녀의 작업은, 2004년 베를린비엔날레에서 베를린을 이루는 4개 구역의 냄새를 합성하여 전시하는 작업,〈베를린의 냄새를 맡아라(Smell Berlin)〉로 널리 알려졌다. 기분 좋은 방향(芳香)만 애호하는 아로마 자본주의 세계의 경향에 거슬러 모든 냄새의 균등한 상징적 지위를 인정하는 까닭에, 그녀는 냄새의 분야에서 존 케이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존 케이지를 끌어들이는 것은 그가 좋은 음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운드(심지어 침묵조차)가 응분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작가 리사 커크(Lisa Kirk)는 ‘혁명 파이프 드림(revolution pipe dream)’(2008)이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혁명’이란 향수를 제조하고 뉴욕 현대미술관 분관에서 그 향수를 담은 용기를 설치 작업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름난 좌파 활동가나 저널리스트에게 혁명이란 말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냄새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모았다. 그리고 그를 참조하여 향을 조합해 작업의 제명이기도 한 향기를 제시하였다. 짐작할 수 있듯 그 냄새란 최루탄 가스의 냄새나 고무 타는 냄새 혹은 휘발유 냄새 같은 것이었다. 이 역시 방향(芳香) 산업이 쏟아내는 감미로운 냄새와는 다른 사회적 색채를 담은 향기를 구성하는 작업일 것이다.

“후각예술 선언(Olfactory Art Manifest)”을 작성하고 그를 전시 대상으로 삼는, 얼핏 보아선 유사-다다주의적 도발을 시도했던, 자칭타칭 후각예술의 거장 피터 드 퀴퍼러(Peter De Cupere)도 있다. 그는 ‘후각예술’을 주창하고 이에 관한 담론을 주도한 작가이자 기획자, 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냄새를 일차적 매체로 채택하는 자기의 작업을 후각예술로 명명한다. 그리고 자신이 기획하고 조직한 전시 《전쟁의 냄새(Smell of war)》(2015)에서 역시 동명의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처음으로 시도되었던 살상 무기인 가스 공격의 냄새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화약과 나무 탄 냄새 등을 합성한 향기를 설치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살상용 독가스 냄새를 설치함으로써 유럽을 잠식하였던 전쟁의 기억을 소환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접근은 후각예술을 선도하는 작가들의 작업에서 거의 공통적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후각예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큰 명성을 떨친 우에다 마키(上田麻希)의 대표작 〈코도(香道, Kōdō)〉(2005)는 일본의 정교한 감각의 기예를 나타내는 여러 전통예술(일본 꽃꽂이인 이케바나(生け花)나 다도 같은 것) 가운데 하나인 코도를 참조한다. 이는 서로 다른 마을 사람에게 각 마을의 향기를 맡게 하며 서로 장소에 관해 품고 있던 기억을 나누고 대화하는 놀이의 형태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미국 작가 브라이언 고엘첸로히터(Brian Goeltzenleuchter) 역시 자기 고향인 샌디에이고를 배경으로 〈잔향(Sillage)〉(2007)이란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 작업은 샌디에이고의 여러 동네의 냄새를 통해 향수(鄕愁)와 기억을 고양하고자 함을 역설한다. 나이지리아 태생의 작가로서 유럽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오토봉 응캉가(Otobong Nkanga) 그녀는 한국의 양현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한〈회상(Anamnesis)〉(2018)이란 프로젝트에서 커피콩, 다진 담뱃잎, 정향과 여러 향신료 등의 향기를 코 높이에 맞춰 화이트큐브에 설치된 틈새를 통해 맡도록 하는 작업을 제출했다. 이 역시 아프리카 식민 무역의 주된 거래품이었던 향신료를 끌어들이며 식민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작업임을 웅변한다.

재현 비판으로서의 감각적 직접성
그리고 지난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맡은 구정아의〈오도라마 시티(Odorama Cities)〉(2024)가 있다. 오랫동안 냄새를 주요 매체로 삼아 작업해 온 구정아의 프로젝트는 그녀의 오랜 ‘향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냄새와 향기가 기억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집중하며 우리가 공간을 감지하고 회상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라 간주된다.1 그러나 구정아의 이번 프로젝트를 지배하는 것은 ‘기억’일 것이다. 그는 전시를 위해 사전에 공모한 각 개인의 ‘향기 메모리’ 600여 건을 수집하고 이를 통해 향기가 기억을 촉발하는 매체로서 지닌 위력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각예술이라는 이름을 빌려 매체 시각에 대한 부정을 앞세우는 입장이 강변하는 것과는 다르게 냄새와 향기에 의지하는 예술의 특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 까닭에 우리는 후각예술이란 이름으로 냄새나 향기를 주된 매체로 삼는 작업을 망라하기보다는 후각적 감각이 미적 경험의 주된 경험이 되게끔 이끈 조건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미 살펴보았던 냄새와 향기를 매체로 삼는 작업들을 가로지르는 주된 주제와 관심은 ‘기억’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후각예술을 옹호하는 작가와 비평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미술에서의 시각중심성에 강한 반론을 제시한다. 그들은 이제는 익숙한 미술의 근대성에서 치명적 맹점으로 시각중심주의(ocularcentrism)를 공격한다 (‘망막예술’을 성토하며 냄새를 전시 대상으로 삼았던 마르셀 뒤샹에 대한 참조는 거의 모든 후각예술 담론의 상투어구이다). 그런데 이때 시각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후각예술의 손을 거치며 기이하게 초라한 모습으로 축소된다. 시각중심성이란 시각이라는 지각적 매체에 일차적인 의의를 부여하는 생각으로 둔갑된다. 그리고 시각과 다른 감각적 지각 사이에 우열을 가리고 그를 비평하고자 덤빈다. 그러나 이는 시각중심주의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펙터클의 사회이니 이미지의 사회이니 시뮬라크르의 시대이니 하는 주장들은 모두 시각적인 이미지에 의해 압도된 세계를 힐난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이미지로 환원되거나 축소되었다는 주장은, 시각에 지나치게 큰 의의를 부여하는 주관적인 태도나 편견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후각예술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예술적 실천의 주장에서 당혹스러운 점은, 후각을 미적 경험의 주된 감각으로 삼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후각예술이 은밀하게 운반하는 생각, 즉 감각적 경험과 인식적 경험이 분리될 수 있다는 전제일 것이다. 후각이라는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부터나 인식과 반성으로부터 분리하여 고립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후각적 감각이라는 것도 상당한 지적 추상을 경유한 것이다. 후각예술을 내세우는 작가들의 작업 모두에서 실제 확인할 수 있듯 그들은 냄새를 과학적으로나 인위적으로 조향한다. 그렇기에 후각예술은 온전히 감각적 지각에 속한 것이기는커녕 사회적 추상에 밀접히 닿아있다.

어떤 감각적 경험도 기억되고 전달되고 또 공유되고자 한다면 언어적 세례를 거쳐야 할 뿐만 아니라 감각적 경험의 전체로부터 솎아내어져 고립되고 추상화되어야 한다. 제아무리 후각예술이란 것도 그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경험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후각예술이(시각적, 언어적) 재현과 적대하며 여기에서의 감각적 현전(presence)의 예술이 되길 꿈꾼다 해도, 그것은 애처로운 소망사고일 뿐이다. 라일락 향기 가득한 섬유유연제의 냄새는 화학적인 공정을 거쳐 추상화된 냄새이며 그 냄새가 유래하는 동일화할 수 없는 다양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삶의 세계 역시 추상화한다. 그렇기에 오직 현전의 편에 서 있다고 엄호되는 후각적 감각 역시 전적으로 재현이며 심지어 다른 어떤 재현보다도 더 고도의 농축된 재현일 것이다.

이는 ‘미학적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근년의 동시대 미술의 추이와도 불가분한 것이다. 숭고(sublime)에서 ‘언캐니(Unheimlich/uncanny)’를 거쳐 근년의 정동(affect)에 이르기까지, 낯을 바꿔가며 연속적으로 등장했던 미학적 개념은 언어적 재현이나 인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즉 추상에 반하는 특유의 경험으로서 미적 경험을 내세워 왔다. 형언할 수 없는 감각적 충격이 미적 경험의 본령일 수 있다는 생각에는 따져보아야 할 것이 많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에 호소하며 자신의 작업을 지시하는 작가들이나 아니면 이에 호응하는 비평가의 주장 속엔, 암묵적으로 세계의 불투명성 혹은 세계의 인식가능성에 대한 깊은 불안과 회의가 자리 잡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역사의 냄새
총체성에 대한 조롱이나 세계의 인식가능성을 구조화하는 근거나 토대에 대한 환멸로 가득했던 완고한 태도는 암묵적으로 ‘비판’으로서의 예술을 부인하거나 조롱해왔다. ‘비판’으로서의 예술적 실천은 미적 자율성을 거부함은 물론 예술적 실천을 감각적 경험 속에 가두기를 마다하는 ‘반(反)미학’을 내세웠다. 그러나 반미학이 반(反)감각이라는 짐작은 황당무계한 것이라 할 것이다. 비판으로서의 예술적 실천이 미적 경험을 정치적 대의에 종속시키거나 의식(意識)의 시녀로 삼으려 했다는 투로 힐난하는 이들은, 정작 반미학이 비판으로서의 예술적 실천으로 주장하고자 했던 바가 바로 자신들과 같은 예술적 실천을 겨냥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비판으로서의 예술적 실천은 어떤 종류의 감각적 경험도 사회적 지배의 구조를 통해 매개되는 경험과 분리될 수 없음을 밝히고 이를 내재적으로 부정하려 한다. 즉 그것은 우리를 현혹하고 사로잡는 어떤 감각적 경험도 무고할 수 없음을 의심하며 지배적인 감각적 경험과 다른 경험을 꿈꾸려 하였다.2

미학이란 예술의 자율성을 전제하고 예술에 속한 미적 경험에 스며있는 특수한 경험과 인식을 헤아리고자 하는 지식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적 경험이 곧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생산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둘러싼 근대미학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논란은 미학을 언제나 요동치게 했음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 경험을 특권화하며 예술에서 인식적 기능을 부인하거나 배척하는 것, 즉 감각의 헤게모니는 미학주의라 불러도 좋을 추세를 생산했다. 이를테면 근년 크게 주목을 받은 자크 랑시에르와 같은 이의 주장을 떠올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는 ‘이데올로기 비판’과 과학 (물론 여기에서 일컫는 과학이란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한 진리 인식으로서의 과학을 가리킨다)의 우위에 관한 깊은 원한을 바탕으로 경험과 인식 사이에 놓인 다리를 제거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줄 과학 따위란 필요 없다고 야유한다. 그들은 이미 자기 경험을 통해 그를 충분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계급의식이나 해방적 의식을 대신하여 노동자의 자생적인 미적 경험, 그들이 창안하고 영유하는 감각적 경험이 해방의 원천임을 주장한다.

그가 근년에 접어들며 직접적으로 비판으로서의 예술적 실천을 옹호하는 주장들을 공격하며 이데올로기 비판으로서의 예술을 기각하고 감성적인 것의 분배로서의 정치적 미학을 주장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이는 미적 경험의 사회적 구속을 인정하되 이에서 벗어날 방편을 비판이 아닌 감각의 생산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 어떤 감각적 경험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질서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는 후각예술이 실은 후각이라는 감각에 대하여 말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우리가 처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매개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세계의 불가시성에 대한 임시방편의 미학적 처방이라는 의심을 일깨운다. 후각예술이란 카테고리에 속한 작가들의 작업이 기억이라는 관념을 쫓고 있음은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는 역사학을 대신하여 즉 지난 시대의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미지를 재현하려는 담론으로서의 역사학을 거부하며 기억학(memory studies)이 부상하게 된 저간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억학은 시간을 기억하는 주체로서의 집합적 주체로서 계급이나 민중 등을 정립하는 역사학과 달리 주관적 개인을 내세운다.

포스트-역사의 대체물인 기억의 담론은 역사적 세계의 객관성이 부재한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지탱할 대체품으로서 기억을 원용한다. 지나간 시간은 이제 수많은 이들이 겪고 떠올리게 될 주관적인 감각 속에 등재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시각적 경험 속에 존재하는 역사성의 약호, 시각적 경험을 속박하는 지배적인 재현의 프로그램으로 인해 시각적인 것은 미덥지 못한 것이 된다. 포스트-역사적인 것에 적합한 시간성의 경험은 후각일 것이다. 후각적인 지각은 역사적인 것의 또 다른 말로서의 시간성에 기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후각적인 경험은 손쉽게 시간성을 공간적인 것으로 치환한다. 이러한 시간의 공간화는 더 이상 가닿을 수 없는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구성된 다양한 공간적 세계로 탈바꿈시킨다. 박물관이 이제는 역사적 시간보다 과거의 감각적 삶을 증언하는 숱한 사물들을 이런저런 주제의 이벤트 형태로 전시하는 것을 상기해 보자.

시간성이 현재로 축소되었음을 가리키는 동시대 미술의 ‘현재주의(presentism)’에 가장 충실히 부응하는 예술적 실천은 후각예술일지 모를 일이다. 어떤 냄새가 돌연 저항할 수 없이 지난 시간을 떠올린다는 것은 실은 서사화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다. 자기 현재의 삶을 생산한 지난 과거의 시간과의 연속성을 더 이상 떠올리고 반성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트라우마나 충격과 같은 감각적 경험을 발판으로 아슬하게 지난 시간과 우리가 연계되어 있음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후각예술이라 지칭되는 예술적 실천들이 기억에 호소하는 것은 시간성의 아이러니한 모순을 가리킨다. 시간에 관한 어떤 표현도 자신이 처한 세계의 모습을 총체화하고자 하려는 노력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 우리가 지난 세계의 모습을 지난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시대라는 관념은 많은 이들이 악취 나는 개념으로 규탄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다양한 경험을 총체화하는 유독한 관념으로 취급당해 왔다.

그런데 후각은 그러한 총체성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운 감각적 경험이 된다. 그것은 역사를 기억으로 재빨리 대체한다. 그리고 서사화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원인’(원인이란 관념은 언제나 총체적 사유의 주범으로 공격받아 왔다)일 지난 시간에 이르려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시간을 부인하며 동시에 시간에 깊이 애착한다. 그렇지만 수많은 후각적 경험을 추상화된 향료와 방향 상품으로 환원하고, 거슬리는 후각적 경험을 표백하는 아로마 자본주의의 논리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간적 경험을 강렬히 환기하는 악취를 봉쇄하고 쾌적한 여기의 향기를 판매하는 상품 세계의 환영은 시각적 환영보다 더 강력한 것이자 반동적이다. 그러므로 후각예술에 가로놓인 곤경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각 중심주의 비판이든 기억 담론에의 호소이든 아무런 알리바이를 들어 후각예술의 의의를 역설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역사적 상상에 실패한 우리의 모습을 가리키는 징후임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1「이탈리아 베니스에 퍼진 한국의 냄새 풍경」헤이팝 2024.4.22
의심의 해석학에 빗대어 우리는 이를 ‘의심의 감성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프레드릭 제임슨이라는 마르크스주의 비평가가 자신의 작업을 일컬어 말했듯 ‘사회형태의 시학(poetics)’이라 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각각의 사회형태는 곧 그에 고유한 감각적 경험의 질서를 가지고 있음을 가리키기 위해 사회형태의 시학이란 낯선 개념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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