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각인(刻印)-한국근현대목판화 100년
안정민 〈가로·세로·깊이-海印 21~24〉(사진 오른쪽) 목판, 실리콘캐스팅 4점 (각)244×61cm 2011
한국 근현대미술 안에서 목판화가 갖는 위치는 독특하다. 근대기 목판화는 계몽과 항일의 시기를 거쳐, 광복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기에는 좌파와 우파의 이념을 퍼뜨리기 위한 출판미술로 쓰였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순수미술 매체로서 당시 모더니즘 미술 실험과 맞닿았다가 이후 1980년대 광주를 중심으로 민중미술의 한 갈래로 발전했다. 1980년대 민중목판화를 주도했던 작가들이 흩어져 작업을 이어가면서 2021년 현재까지 목판화는 그 양식과 규모의 변주를 이루며 지금에 이르렀다.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각인(刻印)-한국근현대목판화 100년〉(2021.10.29~2.6)은 지금 우리 미술에 목판화가 미친 영향을 재고하며, 1883년의 《한성순보(漢城旬報)》부터 오늘의 국토와 인간상을 담아낸 12인의 작품까지를 망라해 “시대상의 거울”인 목판화의 켜를 다시 세어보라고 말한다.
하늘, 땅, 사람이 새겨진
한 세기를 돌아보며
경남도립미술관은 1, 2층 전시실에서 〈각인(刻印)-한국근현대목판화 100년〉 전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20세기 한국 근현대 목판화의 도전과 성취’, ‘2000년대 목판화의 확장-공간과 존재’, ‘특별전 – 조선시대 능화판을 만나다’의 3부로 구성되었다. 각 영역별로 20세기 한국 근대기의 출판미술과 목판화를 포함해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실험적 판화와 1980년대 민중미술목판화를 전시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목판화의 확장-공간과 존재’에서는 동시대 목판화의 실험적인 성취를 보여주고 있어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2층의 긴 복도에서는 조선시대 책 표지를 상서로운 문양으로 장식한 목판인 ‘능화판’을 선보이는 ‘특별전 – 조선시대 능화판을 만나다’를 볼 수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의 소장작품과 기탁작품으로 구성된 전시에서는 아름다운 꽃과 나비 등 동식물을 담아내거나 하늘과 땅, 우주를 상징하는 기하학적 문양, 길하고 복된 의미를 담은 문자 등이 사용된 능화판과 그 인쇄물로 전통적인 목판화의 섬세한 기술뿐만 아니라, 목판화에 남겨진 상징과 모티프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번 전시는 한국 목판화 100년의 역사 전체를 조망하게 해준다는 점과 소외와 고립을 넘어 목판화의 동시대성을 일궈낸 작가들을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둘 수 있다. 목판화는 그동안 미술계 내에서 예외적인 장르였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미학적 원류였음을 감안하면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한 장르로만 치부되어왔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가 주는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전시가 목판화 100년의 역사를 담아내기 위해 다양한 콘텐츠를 보여주려 했음에도, 전시 전체의 맥락이 유기적으로 결합돼있다는 느낌보다는 부족한 디테일이 군데군데 드러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2전시실에 위치한 ‘20세기 한국근현대목판화의 도전과 성취’ 전시 전경
(왼쪽부터) 강경구 〈다섯개의 문-공재 윤두서 초상〉 나무에 판각 230×150cm 1998
〈다섯개의 문-표암 강세황 초상〉 나무에 판각, 230×181cm 1998
〈다섯개의 문-소정 변관식 초상〉 나무에 판각, 230×150cm 1998
〈다섯개의 문-나〉 나무에 판각 235×170cm 2021
〈다섯개의 문-새벽이 오기 전〉 나무에 판각 238×172cm 2015
김억 〈안면도 송림 1〉 한지에 목판 5점 (각)137×74cm 2011
〈안면도 송림 2〉 한지에 목판 3점 (각)137×74cm 2014
김준권 〈산의노래-2〉(사진 가운데) 채묵목판 163×240cm 2021
〈이 산~ 저 산~〉(사진 오른쪽) 채묵목판 188×250㎝ 2017
당대의 시각을 새겨내며
제2전시실의 ‘20세기 한국 근현대 목판화의 도전과 성취’는 방대한 자료와 목판화를 표지로 제작된 출판물을 아카이브 형식으로 풀어내 1900년대 이후 출판미술과 1950년대 이후 목판화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게 구성돼있다. 여기에는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주로 출판을 통한 표지화나 삽화로 동시대를 반영한 대표적인 작품들이 전시된다. 민충정공의 순국을 기린 양기훈의 〈혈죽도〉, 이도영의 〈대한민보 시사만평〉, 1921년 개벽 13호에 실린 나혜석의 〈개척자〉, 1932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이북명의 소설 〈질소비료공장〉에 들어간 이상춘의 삽화 등의 목판화들도 만날 수 있다. 1958년 이항성의 주도로 결성된 한국판화협회 창립을 기점으로, 1968년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창립 과정에서 활동했던 현대목판화 초기 작가들(최영림, 정규, 류강열, 박수근, 김정자, 김종학, 변종하, 이성자, 이응로 등)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목판화가 작가의 표현매체로 인식되기 시작한 1970년대에는 김상유, 김형대, 서승원, 석란희, 오세영, 송번수, 김상구, 이승일, 오윤, 이상국, 오경환 등이 활동했는데,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오윤이 발표한 괄목할만한 출판미술은 목판화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사람과 땅, 세계를 판각하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만한 섹션은 제1, 3전시실에 위치한 ‘2000년대 목판화의 확장-공간과 존재’이다. 1980년대를 경유하며 목판화에 매진해 왔던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해당 부분은 총 12명의 작가를 소환해 현대 목판화의 동시대성을 조망한다. 여기에는 풍경과 산수를 다루는 김준권, 안정민, 유대수, 김억, 정비파, 류연복과 사람을 주제로 하는 서상환, 주정이, 윤여걸, 강경구, 정원철, 이윤엽이 참여했는데, 대부분 1980년대 이래 한국목판화의 핵심적 역할을 지속해온 작가들이다.
먼저 김억(1956~)은 산수와 풍경, 그 사이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는 원근법이라는 시각체계에 갇혀있는 서양 르네상스 이후의 풍경화와는 결이 다른 ‘산수’라는 전통적인 미학이 담긴 ‘풍경화’를 실험하는 작가다. “서양화가 풍경의 세부, 구체의 과학을 중시하면서 사실적 재현에 공을 들인다면, 우리 수묵 산수화는 풍경의 전체, 직관과 기운으로 파악한 이상향에 대한 추상적인 이념으로서의 풍경”(*장석주 〈풍경의 탄생〉 《김억 목판화전 전시 서문》2005) 을 추구하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대형 목판화 작업은 사람들의 삶이 새겨진 땅의 역사에 주목하게 만든다. 또한 김준권(1956~)은 1980년대 민중미술에 참여하였고 1984년의 첫 개인전 이후 최근까지 30여 회의 판화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수묵목판화라는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탐색하고 있으며, 프린팅 과정에서의 미묘한 변화를 활용한 작업을 보여준다. 수묵목판화는 수묵화처럼 먹의 진함과 연함, 번짐 등이 화면에 나타나지만 수묵화나 유성판화와는 다른 깊은 맛을 낸다. 판화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작가의 작업에는 구도자의 ‘수행’과 맞먹을 정도의 깊은 내공이 스며들어 있다.
정비파(1956~)는 국토 진경을 묘사한 기행 목판화 연작을 제작해 왔다. 통일의 염원을 담은 작가의 작품은 한반도 남북의 주요 산 등을 위에서 내려다본 구도로 묘사한 화면들이 이어진다. 숭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은 목판화의 한계를 실험하듯 장대한 규모로 진행된다. 류연복(1958~)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 벽화운동과 걸개그림 등을 통해 당시 민중의 목소리를 표현해왔고, 1993년 안성에 자리 잡은 이후에는 자연 속에서 살면서 ‘생명’의 경이로움과 관련한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번 전시 출품작은 2020년에 제작한 〈그리움 – 바다〉 시리즈로 바다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고독한 존재, 인간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들 목판화 작가들이 다루는 ‘풍경’은 객관적 실체로서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삶의 흔적이 배어 있거나 동아시아의 근원적인 감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숭고한 이데올로기를, 혹은 생명을 자연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국면은 이들 작가의 작품에서 목판화라는 장르를 넘어 ‘동시대’적인 감각을 확인하게 된다.
사람을 주제로 다루는 작가 중 서상환(1940~)은 서양화와 판화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을 해왔으며,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토착적인 샤머니즘과 유교 등 다양한 종교를 포용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의 이러한 자유로운 정신은 종교화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신과 자연과 인간을 목판에 새기는 작업을 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강경구(1952~)는 자화상을 비롯한 공재 윤두서, 표암 강세황, 소정 변관식 초상의 대형 판각을 제작했다. 평소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주의적인 화풍으로 제작해왔다. 물론 이번에 출품된 작업은 비록 판화라는 장르로 분류하긴 어렵지만, 칼질을 한 나무판으로 거친 표현성과 물리적 나무질감의 물성으로 인물의 정신성을 드러내는, 동양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미학을 목판에 적용한 실험적인 작업들이다. 판화는 에디션을 기본으로 하지만 작가는 이 기능을 부정함으로써 판각이 가지고 있는 목판화의 근원적인 미학을 드러내고 있다.
정원철(1961~)은 위안부 할머니의 초상을 대형 설치작업으로 선보인다. 미술계에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화두로 던진 작가는 유학 중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일이 계기가 되어 한국에 돌아온 후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작품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했다. 이윤엽(1966~)의 목판화는 시위현장에서 강렬하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는 각종 재개발 현장, 용산 참사현장, 구럼비 저항현장, 밀양송전탑 반대운동현장, 김진숙의 고공농성현장 등의 투쟁현장을 찾아 목판화작업을 함께해 온 실천가다. 반면 주정이(1944~)는 소박하고 소탈한 미감을 전통적인 목판화 기법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삶의 소소한 이야기를 소박하게 표현하는 작가의 작품은 해탈과 탈속의 미감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사람을 다루는 목판화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규모를 압도하는 숭고의 미학을 추구하거나 현실의 문제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목판화라는 형식을 넘어서는 실천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복제 기능을 부정하며 판각 그 자체의 미감에 집중하게 하거나 전통적인 목판의 소박한 미학을 드러내기도 한다.
윤여걸 〈유세차!〉 한지에 목판화릴리프 가변설치 100×240cm 2021
정원철 〈마주보기(face to face)〉 PVC 시트에 리노컷 15점
(각)300×120cm 2005
특별전시실에 위치한 ‘조선시대 능화판을 만나다’ 전경
전시에서 나오며
그럼에도 기획자의 관점에서, 전시가 주는 울림은 크다고만 할 수는 없다. 목판화 100년의 역사를 하나의 전시로 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였을 것이다. 3부로 이루어진 전시의 각 섹션이 유기적으로 구성되지 않았고, 지나치게 방대한 자료의 제시가 오히려 전시의 집중력을 떨어지게 만들었다.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목판화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조선시대 능화판을 비롯해 20세기 초 해방공간의 귀중한 작품과 자료로 한국 목판화 100년의 역사를 조망하는 의미 있는 기획이다. 목판화를 표지로 한 방대한 서적들을 아카이빙 하였고, 1980년대 목판화를 활용한 시위현장의 걸개그림도 자료로 제시하였으며, 여전히 ‘각인’을 거듭하고 있는 동시대 작가들의 예술적 성취를 재조명했기 때문이다.
양은진 |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사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 기사 자세히 보기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월간미술》 2022년 1월호 SIGHT&ISSU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