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희 Myonghi Kang
강명희의 반향적 풍경
Artist
강명희/ 1947년 대구 출생. 현재 제주에 거주하며 활동.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석사 졸업 후, 1972년 프랑스로 이주하여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77년 파리 하리 양코비치 화랑에서 열린 단체전 《차이 Disparité》에 참여했으며, 1978년 낭트 국립미술학교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1981년 서울 구기동에 남편 임세택과 함께 서울미술관을 설립하고, 1984년 같은 공간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 작가 최초로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2인전 《비 온 뒤의 한국: 임세택과 강명희》(1986), 국립현대 미술관 과천관에서의 2인전 《임세택과 강명희》(1989), 대전 엑스포 기념 국제전 《미래저편에》(1993), 항저우 산샹미술관 《L’écruiture et la différence》(2023)에 참여했으며, 베이징 중국미술관(2005), 경남도립미술관(2006), 닝보미술관 및 상하이미술관(2007), 제주 약천사 대적광전 및 법화사 구화루 (2010), 베이징 황성미술관(2011), 칭다오 시하이 미술관(2023), 서울 키르서울(2023), 샤토 라 코스트의 렌조 피아노 파빌리온(2024)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사진:박홍순
〈레퀴엠〉캔버스에 유채 340×288cm 2024
이미지 제공: 강명희
강명희의 반향적 풍경
박윤조 미술사
강명희는 1972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50년 넘게 주변 풍경을 화폭에 담아온 작가다. 그의 작품에는 몽환적 바탕 위로 빠른 세필과 갈필이 지나가고, 간결하면서도 중첩적인 색채들이 화면을 압도한다. 선과 색으로 가득한 그의 회화는 형식상 서정적 추상화다. 그러나 그의 추상화는 은유나 상징의 추구, 감축적 방법론의 설파, 정신성 구현의 강조 등 여느 추상적 경향과는 구분된다. 사실 그 화면은 철저하게 자연에 대한 직관적인 감성을 비구상적 언어로 기록한 풍경화다. 그것은 프랑스 투렌 작업실 안에서 바라본 창밖의 풍경이고 제주도 서광동리 작업실 너머 솔밭의 모습이다. 이는 그의 작업이 하늘과 땅 사이 자연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한 사생(寫生)에서 출발함을 의미한다. 작가는 그러한 일상적 자연과의 직관적인 교감의 순간을 오랜 시간 압축해 오면서, 재현과 표현, 실경과 그 변용적 구현을 넘나들며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재현과 표현 사이
강명희는 서울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1972년 파리로 건너가면서 왜 그림을 그리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한국 화단에서 그의 이름은 민중미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현실동인의 일원으로 먼저 등장했다. 작가는 1969년 현실동인 창립전 준비에 참여한 바는 있으나 그 지속적 영향 관계와 거리를 둔다. 전시가 불발에 그치고 3년 뒤 남편 임세택과 함께 파리에 정착한 그는 평생 재현의 문제에 천착하게 된다.1
이보다 앞서 재현에 대한 강명희의 관심은 한국 근대기 서양화의 수용과 정착 과정을 다룬 서울대 대학원 졸업 논문에서도 발견된다. 문화평론가 염무웅의 제안으로『창작과 비평』(1971)에 실린 그의 논문 일체를 보면, 작가는 서구인의 시각체험과 조형 방법이 한국 근대 화단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현실에서 후퇴하여 철두철미 심미적이고 감각적이며 순수한 미적 요소로 이루어진 자기충족적 유희로서의 인상주의”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회화까지 소급해 올라간다.2 여기서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한계 속에서 “전통의 창조적 계승의 문제는 이론의 영역을 넘어 뜻있는 작가들의 절실하고도 고통스러운 과제로 제출되고”3있다고 설명한다. 강명희의 이러한 진단은 서구 미술 경향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 행태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직접 발로 뛰며 모은 사례와 자료를 통해 ‘자연재현’과 ‘자율적인 회화공간’을 구분하면서 재현과 표현의 문제에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탐색은 1986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렸던 전시에서도 발견된다. 《한국의 남성/여성, 임세택과 강명희(Corée Masculin/Féminin, Yim Setaik et Kang Myong Hi)》 전시를 통해 한국 여성 작가로는 최초로 해당 센터에서 전시를 연 강명희는 부속 프로그램으로 ‘비 온 뒤의 한국(La Corée après la pluie)’을 임세택과 공동기획한다.4 본 프로그램은 정통 오페라와 대중적 드라마의 접점을 꾀한 ‘오페라마(Operama)’의 형식을 빌려 동양과 서양, 재현과 실재, 자연과 회화, 남성과 여성, 과거와 현재 등의 관계를 규명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작가는 문화 전반에 대한 레퍼런스를 ‘이미지, 소리, 시, 행동’의 4개의 파트로 나누어 소개했다. 특히 소주제였던 ‘거울’ 섹션에서 그는 콰트로첸토(Quattrocento) 시기를 시작으로 동서양의 작가들을 소환하는데, 가령 알브레히트 뒤러와 빈센트 반 고흐, 윤두서와 강세황의 자화상을 비교했다. 이상이 1933년 발표한 시 제목에서 빌려온 제목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거울을 매개로 회화적 재현에 대한 작가의 깊은 탐색의 과정을 방증한다.
〈이웃담 II〉캔버스에 유채 130×145cm 2024
〈대평바다〉캔버스에 유채 91×116.5cm 2009~2013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적 간극은 재현의 문제에 천착해 온 작가에게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작업관에 있어서 절충적 혜안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흥미롭게도 강명희가 프랑스에 처음 정착한 곳이 엑상프로방스(Aix en Provence)였다. 그곳의 생 빅투아르 산(Mont Sainte Victoire)은 폴 세잔이 자연의 외현 너머로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수많은 연작을 그리던 곳이다. 그 연작은 시시각각 변하는 시지각적 경험을 넘어 대상의 본질을 탐색하던 세잔이 자신만의 실재를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이다.5 그의 풍경 또한 실재와 재현 사이에서 지각과 사고의 경계를 오간다. 자신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정해놓지 않는다고 말한다. 수면 위로 다른 빛들이 반사되는 것이 흥미로워서 그때그때 기록하듯 화폭에 담는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오전이 될 수도, 해질녘이 될 수도 있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경험되는 빛의 효과들을 포착한다. 서로 다른 시간적 층위에서 시각적 경험의 “공통분모”6를 찾아간다는 작가의 설명은 전통적 환영에서 벗어나 산과 그 주변의 비가시적 풍광을 상호침투시키는 세잔처럼 사물의 외관을 해체하며 정수를 추출해 나가는 추상화가의 모습이다.
1990년대 들어 강명희는 선으로만 그린 수많은 작품에서 형태의 보조적 역할을 하던 색채를 데생과 동등한 표현수단으로 격상시켰다. 이는 외관의 닮음보다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광 속에서 작가의 표현대로 “정수”를 찾고자 함이었다. 즉 그의 작업은 윤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감각의 경계점”을 포착하고자 한 것으로, 사물의 외현에 충실한 디세뇨가 아니라 오히려 “신호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designare(데시그나르)”에 가까운 행위인 것이다.7 궁극적으로 구체적 형태 대신 색들의 중첩만 남은 그의 풍경은 자연의 외관을 온전히 담기 위해 사물의 표피와 그 외적 조건들에 스스로를 맡기고 그 신호에 반응해온 결과다. 수년간 혹은 수십 년 후 기존 작품을 다시 손보고 완성해 내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러한 ‘신호’들은 선들의 나열로 수신되기도 한다. 작품 〈북원〉(2002~2010)이 남은 물감을 모두 짓이겨 그린 네 그루의 엉겅퀴인 것처럼, 1990년대 그려진 빠르고 간결한 선묘들은 브나즈 호수(1991)였고 설악산 비룡폭포(1993)였으며 프랑스 생-말로(1998), 즉 실제 풍광의 주관적 표현이었다. 선들 사이에서 색을 지칭하는 단어들도 풍경 속에서 자신이 본 미묘한 시각 정보를 표기한 것이다. “극단적인 압축과 절제로” 그려진 강명희의 선묘들은 추상을 넘어 바다, 나무, 바람 등 자연(현상)에 대한 작가만의 고유한 지표이자, 사생을 기반으로 재현과 표현을 오가는 강명희의 자웅동체적 풍경화인 것이다.
〈북원〉 캔버스에 유채 462×528cm 2002~2010
실경과 차경 사이
“당시 내 아뜰리에 창밖에는 강이 있었어요. 왜 노란색 그림 있죠? 그것이 바로 그 광경을 그린 거예요”8 강명희는 자신의 풍경이 철저히 사생적임을 강조한다. 인혁당 사건 등 사회 문제를 다룬 초기 작업 이후 그의 소재는 대부분 작업실 창밖의 실경이자 차경(借景)이다. 그림 속 ‘갈라진 틈, 나뭇가지, 바람에 날리는 나무들, 굽이치는 강줄기, 길이 난 산들’9 등은 창문 너머의 풍경을 매일매일 관찰하면서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캔버스에 담고자 한 작가의 작업관을 반영한다. 이처럼 강명희의 풍경화는 구체적인 현장에 기반한 귀납적 작업의 결과다. 이는 그가 〈초록물〉(1989~1990)을 시작으로 비구상 회화로 옮겨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비구상적 경향이 본래 〈운하에서〉(1983)도, 심지어 고등학교 시절에 그린〈비원〉(1965)에서도 이미 예견되고 있었다. 이 작품을 위해 수학여행도 반납하고 창덕궁에 달려갔다는 그는 특정 광경을 실견하고 싶다는 생각에 갑자기 혼자 여행길에 오르기도 한다. 중년의 작가는 수많은 나라를 돌며 빙하를 여행하고 고비 사막을 8번이나 다녀왔다. 이는 여가가 아닌 ‘제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소재를 그리기 위한 결단이었다.
강명희에게 타 문화권으로의 이동은 ‘구체적 대상’을 시각화하기 위한 작업적 선택이자 또 다른 탐색의 기회였다. 1972년 파리에 정착 후 재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모든 가능성에 “문을 열어뒀다”고 회상한다.10 이는 기존 재현의 역사와 방법론을 유산으로 삼아 자신만의 구현 방식을 모색해 갔음을 의미한다. 전술한 작가의 졸업 논문과 오페라마에서 소급해 올라간 르네상스,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중국과 한국의 문화는 작가에게 또 다른 차경이 된다. 즉 실경을 담은 그의 작업은 서양과 동양의 재현적 특성을 하나의 차경으로 끌어와 전개된다. 하지만 기존 규범의 답습 대신 그것을 ‘거울’ 삼아 자신의 화업을 구축해 나갔다. 사생작가로서 그가 동서양 미술에서 ‘빌려온’ ‘재현의 풍경’은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도출하는 계기였고 2007년 제주도에 정착한 이후에도 고수된 초의(初意)가 된다.
위 왼쪽〈낮〉캔버스에 유채 150×150cm 1981~1982
오른쪽〈차경〉캔버스에 유채 190×210cm 1987
아래〈접시꽃〉캔버스에 유채 97×146cm 2023
강명희가 실경의 본질을 추출하기 위해 상호‘참조’하는 또 다른 정경으로 시적 언어가 있다. 실제로 그는 퐁피두센터에서 직접 시 낭송을 하는가 하면 프랑스와 중국 시인들과의 교류 속에서 서로 반향을 일으키는 작업을 이어왔다. 프랑스 시인 도미니크 드 빌팽(Dominique de Villepin)은 시를 통해 2005년 강명희의 개인전에 공동 참여하여 울림을 주는가 하면 2017년 강명희가 중국해를 여행하는 서신을 교환했다. ‘그 부재 속에 담긴 풍경’, ‘진동과 움직임, 그리고 조화일 뿐’이라는 빌팽의 화답과, 시리아 시인 아도니스(Adonis)의 “이 신기한 색채 속을 여행하면서/ 두 눈은 파리의 가을에 취하고/ 두 손은 몽골의 얼굴을 만지는 듯하네”라는 시구는 강명희의 그림을 참고한 상호보완적 풍경이 된다.
조형적 언어와 시적 언어는 공통적으로 작가의 개입이 최소화된 빈틈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킨다. 구상화를 구현하던 작가가 1980년 중반 〈낮〉, 〈밤〉을 시작으로〈차경〉(1987~1988)에 이르러 구체적 도시 구조물과 숲의 모습을 화면 한쪽으로 밀어냈다. 그 결과 화면의 대부분은 텅 빈 듯한 공간이다. 1990년대 이후 제작한 〈복숭아 나무 건너뛰며〉(1996)나 〈벼락 맞은 벚나무〉(2004~2012) 등에서처럼 구체적 제목과 함께 그 여백에는 시적 상상력이 더해진다. 이런 점에서 “나로서는 보지 못했던, 그러나 그는 볼 수 있었던 것을 나도 보게 된(혹은 어렴풋이 보게 된) 것들”이라는 필립 라퀴-라바르트(Philippe Lacoue Labarthe)의 깨달음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는 필립이 1995년 작가의 개인전 서문에서 적은 ‘수수께끼’와 같은 그의 작품에 대한 소회다. 강명희의 풍경화는 실경을 바탕으로 한 수많은 시간들을 재현의 역사 위로 올려 여러 겹의 층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는 절제된 시처럼 오히려 정제된 선과 색으로 표현된다. 재현과 표현을 넘나드는 강명희의 풍경은 실경과 차경을 오버랩시키며 “소리 없는 시”를 “백지 위에 투명”하게 기록하는 “본원적 쓰기(archi écriture)”인 것이다.11
미술계의 가치 기준과 평가로부터 초연한 은둔적 삶 속에서 ‘자연과 흰 캔버스’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았다는 강명희. 그는 재현에 대한 성찰과 실경에 반응하는 시각적 구현방식을 탐색해 왔다. 재현에 대한 강명희의 오랜 그리고 집요한 고찰은 하늘과 땅, 동양과 서양, 재현과 표현, 실경과 차경, 시와 회화 사이를 오가며 전개되었다. 또한 그는 시인들과의 오랜 교우 속에서 조형적 언어와 시적 언어 사이에서 회화의 본질과 구상/추상에 대해 재질문하는 풍경을 펼쳐 보인다. 마치 그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해온 듯한 강명희의 긴 화업을 장 크리스토프 바이(Jean-Christophe Bailly)는 “추 혹은 안테나”와 같다고 표현한다. 마치 영상이 사진에 의해 지속되는 환상에 다름이 아니듯이 그의 작품은 어떠한 자취도 남기지 않고자 자신을 비워가는 공기와 빛의 시간적 흐름의 흔적이며, 재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은 결국 자아를 내려놓고 필터처럼 자연을 담는(혹은 통과시키는) 최소한의 역할에 이르게 한 것이다.12 이처럼 강명희의 작품은 기존 역사에서 대립적(가치로 여겨져 온) 기준들을 오가는 진자운동 속에서 작업의 속도와 길이를 조절하며 자연이 보내온 (비)가시적 신호들을 화폭에 담고 있다. 재현의 역사 속에서 자연과 교신하며 변위시켜온 강명희의 긴 화업 속에서 우리는 그 반향적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1 강명희와의 인터뷰 2025년 3월 5일
2 본 논문에서 강명희는 일제강점기의 제약적 상황 속에서 서양화의 수용 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서양화 도입과 정착 과정 속에서 제도와 내재한 문제에 주목한다. 강명희는 본 논문에서 서양화의 수용 단계에서 고희동을 위시한 1세대 서양화가들이 일본을 통해 처음 받아들인 양식이 바로 ‘인상주의적 회화’라고 설명하고, 아놀드 하우저의 책을 인용하며 “자기충족적 유희로서의 인상주의”가 근대 화단 작가들의 현실도피적 의식에 부응한 것이었다고 진단한다. 발로 뛰며 사료 조사를 하며 내린 선배 서양화가들의 작업에 대한 그의 해석과 진단은 서양화의 시각경험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강명희 「서양화의 수용과 정착」 『창작과 비평』 통권20호
1971 pp.182~184
3 강명희 위의 논문(1971) p.200
4 본 행사는 강명희 전시와 함께 준비된 프로그램으로, 김민기의 국악 연주 외에도 장고(김명환)와 북(김영동)으로 이뤄진 국악 연주, 한국 방송국의 영상과 광고를 편집한 비디오 상영, 알랭 주프루아의 이상의 시 번역, 김민기의 시 낭송(김지하의 〈빈산〉), 임세택과 강명희의 시 낭송 등이 이뤄진 일종의 퍼포먼스 형식을 띠고 있었다. 강명희와의 인터뷰 2025년 3월 5일
5 강명희 앞의 논문(1971) pp.191~192. 그는 서진달, 백남순, 이인성 등을 초기 인상주의 화풍에서 벗어나 점차 세잔의 형태 분석, 즉 ‘세잔느풍(Cezannisme)’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례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세잔 이후 세대의 한계를 지적하며 야수파를 위시한 표현주의 회화의 고유성에 주목한다
6 강명희와의 인터뷰 2025년 3월 5일
7 Philippe Lacoue-Labarthe La Designation 《MYONGHI》(Galerie di Meo 1995.12.1 ~1996.1.27) p.11
8 강명희와의 인터뷰 2025년 3월 5일
9 Michel NURIDDSANY Myonghi ou l’ampleyr du mondr 『Figaro』1996.9.1 작가 제공
10 강명희와의 인터뷰 2025년 3월 5일
11 Philippe Lacoue-Labarthe La Designation 《MYONGHI》(Galerie di Meo 1995.12.1~1996.1.27) pp.12~13
12 Jean-Christophe Bailly La Trace du Pur Jailli《MYONGHI》(Galerie di Meo 1995.12.1~1996.1.27)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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