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적 영토를 벗어난
동시대 장애미술에 관하여
정현 인하대 교수, 미술비평, 잇자잇자 조합원
Special Feature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2021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예술과 놀이, 디자인으로 장애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링크마켓 ‘잇장(2018)’에는
로사이드를 비롯한 여러 단체가 참여했다.
‘잇장(2018)’에 방문한 관람객들의 장애인식개선을 위한 프로그램
이미지 제공: 고재필
장애는 그것의 의미를 떠올리기도 전에 훼손되어 그을린 낱말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세속화된 언어는 불투명하고 축축하다. 사회가 진보할수록 균질한 삶을 위한 제도는 다양화된다. 미셸 드 세르토는 도시가 진보할수록 공공장소는 비정상, 질병, 쓰레기 등을 관리함으로써 도시의 위생화를 추구했다고 지적한다. 즉 도시화는 생산력과 자본의 가치로 세워진 헤테로토피아를 향해 속도를 높인다. 미셸 푸코가 제시한헤테로토피아라는 세계는 ‘실현된 유토피아’를 의미한다. 미래를 지켜주는 생명보험, 합격을 보장하는 기숙학원 등이 이에 속한다. 더 나아가 푸코에 따르면 근대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국가의 시대의 진리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존재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따라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의학, 기술, 철학, 미학을 망라하는 다학제적인 영토일 것이다.
장애와 일상
사람들은 내가 장애미술 단체에서 활동한다고 얘길 하면 대부분 어려운 일을 한다며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물론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장애인 작가를 대하는 데에 여전히 서툰 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 편이다. 비장애인 작가를 만나 대화를 나눌 때도 어색한 시간을 벗어나기까지 이러한 내적 갈등은 예외 없이 다가온다. 목적이 앞선 만남은 소모한 감정에 비해 정보만 남을 뿐, 관계의 지속성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새로운 인물을 만나서 대화의 물꼬를 트고 친밀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탐색의 시간과 공감의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이익과 자본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기에 “전체 인구 중 열등하거나 해악적이라고 간주되는 특정 집단을 정리해 버리는 잔혹함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즉, 생명권력은 그 자체로 ‘생물학적 전체주의’의 성격”1을 드러낸 것이다. 장애인예술은 단지 장애인의 예술 창작만을 다루는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활동은 관계 맺기의 방식이다. 누군가는 명확한 질문을 준비하여 원하는 의도와 목적을 피력하겠지만, 나는 일상적인 주제의 대화를 나누면서 서서히 상대방의 세계로 진입하기를 시도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만남의 목적이 모호해지면서 서로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장애인 작가와의 만남이라고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소통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데, 그것 또한 만남의 횟수가 늘어나고 서로 호감이 높아질수록 해소될 수 있는 상식적인 문제다. 오늘날 일상에서 장애인을 만나는 건 놀랄 일도 새로운 경험도 아니다. 그러나 갑작스레 한 장애인이 비장애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순간, 장애는 갑작스레 해결해야 할 중요한 현실로 다가온다. 지하철 노선을 질문하는 장애인 앞에서 마치 모르는 외국어를 들은 듯 멍했던 기억, 저상버스 도착시간과 휠체어 리프트가 장착된 버스인지의 물음에 허둥지둥 정보를 확인한 후 버스 운전자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과정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다림과 침착함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도 장애미술 현장에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다. 카뮈는 그의 가장 초기 원고로 알려진 『안과 겉』(1937)에서 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려면 안과 밖이 분리된 게 아니라 안과 겉으로 이어진 ‘절합’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작가적 사상은 그의 문학 전체를 관통한 “필생의 주제”2였다고 한다.
왼쪽부터 김동현 〈식품광역시지하철노선도〉 종이에 연필, 마커 38×52cm 2014,
〈국철 딸기 케이크선〉 종이에 연필, 마커 51×52cm 2014,
〈랍국지하철〉 종이에 펜, 색연필 77.1 ×83.5cm 2011,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사진: 홍철기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과연 장애인의 입장에서 매일 마주하는 일상과 도시의 삶은 어떠한가. 실제로 대도시의 공공장소에는 장애인 접근성을 위한 다양한 설비들이 비치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마치 홀바인의 회화 〈대사관〉의 배경처럼 멋지게 차려입은 인물들의 지위를 암시하는 수많은 사물의 기표에 불과한 건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품게 한다. 이러한 사회적 기표들은 전광판, 현수막, 안내 문구, 홍보 영상, 유인물의 형태로 도시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정치가의 현수막은 항상 소수자를 향한 배려의 메시지를 과시하지만, 수어, 점자, 음성 서비스, 램프 설치와 같은 장애 접근성만으로 일상적인 관계가 구축될 수 없음을 자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보편적인 삶은 비장애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장애인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먼저 깨닫게 된 ‘현타’의 경험이다. 예컨대 우리가 언어의 표준을 습득한다고 해서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진다면 예술은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애인의 예술 활동은 표준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차학경의『딕테』(1982)는 언어, 이민자, 동양인, 여성이라는 존재가 백인남성 중심 사회에서 어떤 존재로 재배치되는지를 개념적인 방식으로 다룬 작품이다. 내 박사논문의 시작도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프랑스어로 딕테(Dictée)는 받아쓰기를 의미한다. 차학경은 받아쓰기를 미합중국 시민이 되는 통과의례로 비유했다. 설사 이 과정을 통과한다 해도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존재는 사회적 장애로 이어진다. 최근 들어『딕테』가 20년 만에 재출간되었는데, 여기에는 재미 교포 작가 캐시 박 홍(Cathy Park Hong)의 논픽션 『마이너 필링스』가 차학경을 새로운 관점으로 재소환한 영향이 크다. 이는 ‘SeMA 옴니버스’ 중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2024)를 통해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를 다룬 전시로 이어졌다. 이 전시에서는 내가 속한 협동조합에서 오랫동안 작업하고 있는 김동현3의 〈식품광역시지하철노선도〉(2014)와 장애 당사자성을 다룬 〈따라서 어떤 것은 더 작고 어떤 것은 더 크다〉(이지양×유화수, 2020)도 포함되었다. 그간 장애미술 전시는 장애인 작가 및 장애미술단체를 중심으로 기획되었지만, 최근 들어 장애를 특수한 대상으로 가두지 않고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지운 소수성 담론을 바탕으로 한 전시가 늘어나는 추세다.
《다른 그리고 특별한》 경기도미술관 전시 전경 2012 제공: 경기도미술관
장애미술의 지속가능성
한국에서 장애인예술 현장은 오랫동안 교육과 치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동시대적 관점의 장애인예술의 좌표를 제시한 전시로는 2012년 경기도미술관의 《다른 그리고 특별한》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전시는 발달장애인 예술가를 중심으로 한 단체전으로 수원 에이블아트, 비영리 소수자예술단체 로사이드(이상 한국), 크리에이티브그로스아트센터(Creative Growth Art Center, California), 일본 나라시의 하나아트센터가 참여하여 만든, 당시만 해도 불모지에 가까운 동시대적 관점의 장애미술전시이다. 한국의 경우 창의적인 장애인예술 활동이 부재한 상황에서 크리에이티브그로스아트센터와 하나아트센터의 참여는 장애예술단체의 오랜 경험을 통해 단체가 나아갈 미래의 방향을 배울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특히 2004년에 개관한 하나아트센터는 나라시의 민들레의 집이라는 거점을 통해 장애인 작가와 지역이 연대하여 장애인 창작자의 삶과 일상이 연결된 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장애예술가들의 창작물은 지역 백화점과 협력하여 상품으로 출시되는 구조다. 예술을 중심으로 장애와 지역과 경제가 연동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줬다. 내가 소속된 잇자잇자사회적협동조합의 전신인 로사이드는 발달장애인 작가를 중심으로 교육이나 치료가 아닌 온전한 작가로서의 활동에 집중하여 장애인 작가와 협력자인 비장애인 작가의 유대를 통해 유의미한 미학적 성과를 이루었다. 로사이드는 2018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으나, 여전히 밝은방과 잇자잇자협동조합으로 분리되어 각자의 위치에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무엇보다 밝은방(김효나 김인경 공동대표)은 《다른 그리고 특별한》 이후 당시 참여 작가들을 다시 만나 10년이라는 시간을 되돌아본 전시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를 큐레이팅했다. 20년이란 시간은 장애인 작가들의 작업을 보여주는 방식과 이를 소개하는 서사의 변화로 나타났다. 특정 이미지와 낱말의 반복, 동물, 사물, 자연, 건축물, 모빌리티에 관한 집요함, 전쟁과 천재지변에 관한 민감한 불안도, 대상을 관측하는 특유의 시점은 그들의 장애를 보여주는 지표이자 미술의 원천이 본능적이든 의도적이든 세상을 관측하는 우리 모두의 모국어라는 존 버거의 통찰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동시대미술뿐 아니라 교육, 일상, 관계, 소통에 이르는 삶의 기반이 점점 더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는 경향을 비판 없이 따라야 할 것인가? 미래는 반드시 과거보다 더 진보한 시간인가? 예술의 시간도 테크놀로지의 속도를 따라야 하는가? 나아가 장애는 반드시 의학과 기술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가?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꽤 오래전부터 야기된 담론으로 장애인미술 현장에서도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쟁점이다.
이지양×유화수 〈따라서 어떤 것은 더 작고 어떤 것은 더 크다〉 비디오 설치, 단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콘크리트, 가변 크기 5분 2020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사진: 홍철기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잠수종〉 캔버스에 유채 145.5×112cm 2024 제공: 작가
테크노에이블리즘
〈잠수종〉 캔버스에 유채 145.5×112cm 2024 제공: 작가 나는 홍세진 작가 비평글을 쓴 적이 있다. 작가는 1세대 인공와우를 장착한 뒤 현재까지 새로운 버전이 나오면 디바이스를 교체해 왔다. 발달장애인 작가들과의 경험밖에 없었기에 당연히 소통이 수월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현실은 딴판이었다. 인공와우는 외부의 소리를 인식하게 해 주는데, 다만 이 소리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게 관건이다. 따라서 인공와우를 장착한 당사자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소리와 기계가 번역하여 들려주는 소리의 간극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는 이러한 소리의 간극을 시각화하는데, 그러니까 소리를 이미지로 전환하는 것이다. 작가는 마치 언어와 파롤(parole) 사이를 파고 들어가 주어진 언어 속에서 자신의 언어를 목소리가 아닌 이미지로 번역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맹목적인 기술만능주의일 것이다. 과연 소통과 이동을 위한 기술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전시 경험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최근의 장애인미술 전시는 접근성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다. 실제로 휠체어가 들어올 수 없는 미술 공간이 적지 않기에 이러한 현실은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시를 위해 구축된 접근성은 기본값이어야 한다. 나는 장애접근성을 높였다는 설명문을 볼 때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1936)의 몇 장면을 떠올린다. 건축자재, 자동차, 의류 등의 표준화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표준에 속하지 않은 타자들은 일상과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장애는 실제로 현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고 있으며 산업화의 심화는 장애와 일상의 거리를 역설적으로 더 멀어지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소설가 김초엽은 “장애 언론 비마이너에 실린 「농인이 왜 음성 언어로 말해야 하는가?」4라는 글은 이 광고를 보는 농인 및 청각장애인의 입장을 보여주는데, 가족들이 수어를 배워 김씨와 소통하기보다 김씨가 ‘말을 하고 듣기를’ 바란 것은 전형적인 청능주의(Audism)라고 지적한다.”5 이 밖에도 많은 농인과 청각장애인들이 농인에게 목소리를 선물한다는 발상의 청인 중심적인 관점을 비판했다. 수어 대신 구화(음성 언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일부 청각장애인들도 청능주의에 의한 차별을 경험하며, 이들은 거의 평생에 걸쳐 발음의 어눌함을 지적당한다.
《홍세진: 교차점》 보안여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작가
끝으로 장애인미술 전반에 걸친 관심과 지원이 커지고 있다. 제도의 활성화가 이뤄지면서 전시뿐 아니라 다양한 연구 결과물이 발행되고 있으며 관련 정보와 저작물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양적 팽창에 비해 장애인미술을 조망할 수 있는 공론장은 부족해 보인다. 이음 웹진이 갈증을 없애주기는 하지만, 이제부터는 장애미술의 심도 있는 연구를 위한 장애학의 관심이 필요하다.
*본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기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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