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도, 판소리도,
냄새로 확장된 영토와 국민도
거기엔 없었다.
권근영 중앙일보 기자
Special Feature
세계 비엔날레 재단에 등록된 비엔날레, 트리엔날레는 282개. 올해도 세계 곳곳에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비엔날레가 열렸다. 그 중 미리 30주년을 기념한 광주비엔날레, 그리고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들여다본다. 결산은 그다음을 위한 것, ‘30주년 이후’는 어떠해야 할까.
클레어 퐁텐의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가 설치된 아르세날레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 모두의 울림’이 남긴 것
소리꾼과 고수가 펼치는 한국 전통 국악 공연. 판소리의 사전적 의미다. “판소리는 ‘공공장소에서 나오는 소리’를 뜻하며, 소리꾼의 목소리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제15회 광주비엔날레의 제목 《판소리 : 모두의 울림》에 대한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 예술감독의 설명이다. 공간과 소리를 키워드로 한 이번 전시는 ‘부딪침 소리(feedback effect)’, ‘겹침 소리(polyphony )’, ‘처음 소리(primordial sound )’, ‘소리숲(resonance )’으로 구성됐다. 노벨문학상의 작가 한강이 전시 소제목을 우리말로 옮겼다. 감독은 “전시의 첫째 주제는 공간, 그래서 판소리라는 공통의 공간을 생각했다. 공간을 결정하고 정의하는 게 오늘날 예술에 중요한 이유는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나이지리아 라고스의 도시 소음(에메카 오그보 )을 들으며 암흑 터널을 지나는 전시장 초입 동선부터 그릇 안의 생태계에서 출발해 우주까지 생각하게 하는 〈휘젓다〉(마르게리트 위모 ), 초록 분수와 오염물질ㆍ폐기물의 잔해에서 기후위기와 지구 온난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용해의 들판〉(맥스 후퍼 슈나이더 ), 소금 사막의 깊고 어두운 우물에서 식물이 자라나는〈길고 어두운 헤엄〉(비앙카 봉디 ) 등 시각적으로도, 거기 담은 문제의식으로도 완결성을 뽐낸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30개국에서 온 72명의 참가자 모두 생존 작가였고, 절반 이상이 신작이었다는 점도 의미 있었다.
잘 짜인 전시였다. 그러나 ‘판소리’보다는 영문 부제 ‘21세기의 사운드 스케이프’가 전시의 성격을 더 잘 설명한다. 감독의 최근 관심사인 인종 문제부터 인간과 비인간, 미생물, 인류세, 선사시대와 우주, 기후위기, 생태 등을 주제로 한 전시였다. 제목이야 하나의 수사라 해도, 전시에서 광주를 찾기 어려운 것은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광주가 아니라 이스탄불이나 타이베이 비엔날레였어도 비슷했을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돋보인 건 미라 만(Mira Mann)이었다. 한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 서독 출신 작가는 양림동의 빈집에 판소리 ‘심청가’를 모티브로 한 영상 설치와 서예 퍼포먼스 〈엄마의 기억은 다를 수도〉를 보여줬다. 비엔날레 전시관에는 풍물 사운드와 함께 파독 간호사를 기리는 대규모 신작 설치를 내놓았다. 개막 기자회견에서는 이런 질문도 나왔다. “판소리로 ‘광주정신’을 어떻게 보여줬나. 이번 비엔날레는 어떤 점이 특별한가.” “아시다시피 광주는 주민 90~95%가 민주당을 지지한다. 지역적 편파성, 지역감정이 전시로 극복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질문자는 영국에서 온 기자와 해외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들도 광주가 안 보이는 광주비엔날레 전시가 의아했던 모양이다. 한국이 처음이라는 미국의 한 미술전문지 기자는 프레스 투어 중 “5 · 18 민주묘지를 가보고 싶다고 요청했는데 주최 측이 멀어서 곤란하다더라”고도 했다. 맥락에 안 맞는 질문도 있었지만, 멀리서 광주까지 오는 이들의 기대와 호기심이 이 정도다. “이제 광주비엔날레도 광주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이 호명된 뒤 국내 일각에서 “5 · 18은 허구다, 노벨상에 반대한다”며 벌인 민망한 해프닝을 보면 광주 이야기는 계속 나와야 할 것 같다. 노벨문학상 심사평도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지 않나. 마침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한강이 쓰고 낭독한 신작으로 개막 공연을 올렸다. 국회의원부터 인근 대학 총장단까지 50분 가까이 내빈 소개와 축사를 이어간 끝에 폭우와 함께 무산될 뻔한 공연이었다.
광주비엔날레는 곧 새 수장을 맞는다. 비엔날레 사무국이 연차에 걸맞은 전시와 운영의 역량을 쌓아나가도록 이끌 대표로는 누가 적합할까. 또 광주에서 한국, 아시아로 탄탄한 담론을 확장해 나갈 새 예술감독은 누가 좋을까. 명망가 감독을 앞세워 성대한 30주년 잔치는 치른 마당이니, 경력이 한창인 야심만만한 감독의 면밀한 지역 연구가 돋보이는 전시라면 좋겠다. 광주비엔날레의 올해 예산은 151억 원, 단일 전시 주체로는 국내 최대 금액이다.
미라 만 〈바람의 사물〉 거울 56 E24 조명, 스테인리스 강 선반, 진도 북, 다양한 사물과 인쇄물 2024
제공 : 광주비엔날레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속 한국관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는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를 주제로 지난 4월 개막했다. 남미 출신으론 처음으로 총감독에 선임된 아드리아노 페드로 (Adriano Pedrosa )가 정의한 ‘외국인’은 퀴어, 독학예술가와 민속예술가, 미술계의 변두리에 있는 아웃사이더 예술가, 그리고 자기 땅에서조차 외국인 취급받는 선주민 예술가다. 황금사자상은 선주민 예술가 아키 무어(Archie Moore )를 앞세운 호주관과 뉴질랜드 마오리족 여성작가 4명으로 구성된 마타호 콜렉티브에 돌아갔다. 본전시에 김윤신과 이강승이 초대됐고, 남반구(Global South )의 20세기 모더니즘을 보여준다는 주제전에 이쾌대와 장우성의 초상화가 걸렸다.
한국관 전시 《구정아-오도라마 시티》는 ‘향기(Odor)’와 ‘드라마’를 조합한 제목으로 ‘한반도의 냄새 지도’를 그리기로 했다.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는 본전시 주제와도 조응하는 듯했다. 이를 위해 전 세계 600여 명에게서 한반도의 향과 관련된 추억을 모았다.
입양된 후 27년 만에 처음 내린 김포공항 냄새에서 풍기던 설렘과 상실감, 1930년대 북한 고향의 사과꽃 향기와 햇사과향, 할머니 방에서 풍기던 냄새, 공중목욕탕 냄새, 밥 짓는 냄새, 지하철의 금속향… 혈통과 국경을 넘어 냄새로 통합된 이들 사연은 한국관 홈페이지에 따로 접속해야 알 수 있었다. 뫼비우스의 띠 모양의 나무 조형물과 콧김으로 향을 분사하는 아기 모습의 조각 우스(OUSSS)를 제외하면 텅 빈 전시장은 국가관에서 국가관으로 바삐 이동하는 관람객을 붙잡지 못했다. 도시 전체에 미술이 넘쳐나는 세계 최대의 미술제에서 보이지 않는 향기를 전시한다는 야심 찬 기획안은 전시로 온전히 구현되지 못한 채 향기처럼 부유하다 사라졌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운영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이와 별도로《모든 섬은 산이다》라는 제목으로 자르디니 인근 몰타 수도원 기사단 건물에서 한국관 30주년 기념전을 마련했다. 역대 한국관 참여 작가 중 36명(팀)을 한자리에 초대한 동창회 성격의 전시였다.
이 전시에 관여한 그동안의 한국관 커미셔너와 참여 작가 면면을 보면 전부 한국인 혹은 한국계다. 처음으로 공동감독제를 도입한 올해 덴마크의 야콥 파브리시우스(Jacob Fabricius)만이 예외다.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에 참가하는 ‘한국 대표 작가’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한국관 운영 규정은 반드시 ‘한국 혈통’이어야만 수행할 수 있을까. 30년을 맞아 이 규정부터 재검토하면 좋겠다. 자르디니에 마지막 국가관으로 한국관이 문을 연 계기는 1993년 백남준이 독일관 작가로 참여해 황금사자상을 받으면서였음을 상기하면 더욱 그렇다.
각국의 정부기관이 맡아 꾸려 나가는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은 내셔널리즘과 분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국가관들은 때론 대안적 기획을 선보이며 새로운 담론을 선점하려 각축전을 벌인다. 미국관은 프랑스 작가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의 전시를 꾸미기도 했고, 헝가리관은 미국 작가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 )의 작품을 전시했다. 전후 정치협상 50주년을 맞은 2013년 프랑스관과 독일관은 국가관을 맞바꿔 전시를 열었다. 외국인 커미셔너도 더이상 놀랍지 않다. 올해 일본관과 싱가포르관의 커미셔너는 각각 이숙경 영국 휘트워스 미술관장과 김해주 싱가포르 아트 뮤지엄 선임 큐레이터였다. 한국관이 냄새처럼 가벼워도 무시 못 할 존재감을 발휘하면 좋겠다. 30주년인 2025년이 그 제도 개선의 반환점이 되길 바란다.
비앙카 봉디 〈길고 어두운 헤엄〉설치, 혼합 매체 가변 크기 2024
제공 : 권근영
아르세날레 입구에 설치된 대규모 직조 설치물 ‘타카파우’. 마오리 여성들이 출산 등 의식에 사용하는 전통 직조물이다.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은 뉴질랜드 여성 선주민 예술가 그룹 마타호 컬렉티브에게 돌아갔다.
제공 : 베니스비엔날레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