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선정 4인
《올해의 작가상 2024》
2024.10.25~3.23
Artist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은 한국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기관에서 운영하는 수상 제도다. 그동안 한국미술의 표면을 확인하고 위상을 제고하는 역할과 동시에 몇몇 논란도 함께 일으키면서, 그 부표로 기능했다. ‘권위적인 기관의 선언’이 아닌, 협의의 장이 되길 바란다는 기획의 글처럼 올해의 작가상은 위계의 생산이기보다는 한국 동시대 미술 작가의 다양성을 포괄하고 또 그 속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운동으로서의 제도여야 한다. 월간미술은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동시대 미술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2024 올해의 작가상에 선정된 작가 4인의 면면을 인터뷰했다. ‘대한민국’이라는 지형적 공통점 이외에 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엇인가. 매체 이외에 어떤 성질이 한국 동시대 미술을 팽창 혹은 침잠시키고 있는가. 지금 동시대 미술의 의미는 나와 우리에게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네 명의 기자가 각각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그 결을 느껴보시길 바란다.
권하윤 Hayoun Kwon
노재민 기자
권하윤/ 영상과 가상현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억과 기록의 방식을 논의한다. 그의 작품은 접근할 수 없는 장소, 물질적인 증거가 없는 기억, 기록되지 못한 사건 등 역사에서 사라진 이야기를 다루며, 가상의 공간에서 기억을 확장하고 기록의 방식을 재고한다.
권하윤은 전시 《2024 올해의 작가상》에 참여하며 신작〈옥산의 수호자들〉(2024)을 비롯해서 〈489년〉(2016),〈모델 빌리지〉(2014),〈증거부족〉(2011)을 선보였다. 그에게 가상현실은 “현실의 제약을 넘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구현함으로써 공동의 기억 경험을 생산하는 매체”인데, 이번 전시의 소회로 “‘나’라는 개인이 전시에 참여한 것보다 가상현실이 현대미술의 표현의 매체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 것 같아 더욱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우선 신작 〈옥산의 수호자들〉(2024)을 소개해달라.
신작은 과거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학창 시절 일제 식민지 역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일본인의 역사 인식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일본에 가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 해석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하며 일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당시 내 작업의 의도를 알게 되었던 한 일본인 학생과 마지막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 갑자기 그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나의 조국이 저지른 만행에 대하여 미안하다”며. 순간 내 작업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식민지 시대의 책임을 이 후손들에게 물을 자격이 있는가? 한국으로 돌아와 식민지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조사하던 중 2010년 서울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계획했다. 같은 공간을 2021년에 다시 방문해보았는데 다행히 전시 방향이 많이 호전된 것을 확인하였으나 당시에는 고문 장면을 재현한 마네킹과 사형선고 체험, 버튼을 누르면 비명이 들리는 등 호러 관광지처럼 구성되어 있어 자극적인 한국의 교육방식에 비판을 제기했다. 일본과 한국의 교육방식을 동시 비판한 이후에 작가로서 무언가 새로운 제안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감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꼈고 그저 다 풀지 못한 숙제처럼 마음 한편에 남아있었다. 긴 시간이 흐른 후 대만 소수민족인 부눈족의 족장 아지만과 일본 인류학자 모리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국가 간의 대립구조를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서 두 사람이 이뤄낸 우정이 하나의 제안 또는 답변처럼 느껴졌다. 내가 풀어내지 못한 숙제를 100여 년 전에 두 사람이 이루어낸 것 같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옥산의 수호자들〉은 전시장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데, 한 번에 1~2명만 참여할 수 있다. 작품에 참여하는 관람자는 빨간 조명과 바닥의 검은 그림자로 채워진 넓은 공간의 무대를 혼자 유영하는데, 그와 그를 보는 다른 관람자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 참여자가 전시장에서 퍼포머로 기능하는 가능성도 생각했는가?
관객의 행위는 작품 속 중요한 요소이다.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의 모습이 작품의 일부분이 되길 바랐다. 전등을 들고 무언가를 찾아가는 관객의 행위는 주변에 설치된 벽에 비쳐 그림자극이 된다.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관객은 현실 세계 속에선 그림자극 속 등장인물이 된다. VR 속 이야기는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전개되는데, 관람객은 숲속을 탐험하는 행위자가 된다. 동시에 관객의 행위에 의해 이야기는 비로소 완성되며 관람객은 부눈족과 모리의 서사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한다. 처음엔 아지만이 모리를 죽이려 추적했지만, 대만의 자연에 대한 모리의 사랑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둘은 친구가 된다. 작품 속 두 개의 태양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두 등장인물의 그림자는 하나가 된다. 해가 뜨는 광경을 관찰해 보면 굉장히 짧은 순간이지만 태양이 붉고 강렬한 때가 있다. 붉은 조명은 이처럼 상황이 전환되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작〈옥산의 수호자들〉(2024)을 비롯해서 기존 작품 중〈증거부족〉(2011),〈모델 빌리지〉(2014),〈489년〉(2016)을 출품했다. 전시 출품작 선정 기준은 무엇이었나?
뒤돌아보니 작업의 성향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새(鳥) 여인〉(2017),〈피치가든〉(2019), 〈잠재적인 마법의 순간을 위한 XX 번째 시도〉(2021)처럼 상상적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룬 작업들도 있고 어떤 작업들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의 경험이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모두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들과 이미지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작업이 형성된다.
이번 전시는 신작과 연결되는 초기의 작품들로 함께 구성하였다. 우리가 맞닥뜨린 사회와 연결된 네 작품을 선정했다. 주요 키워드는 국경선, 이방인, 개인의 기억, 역사의 기록과 해석,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충돌 등이다.
가상의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 각기 다르다. 〈증거부족〉에서 선으로 공간을 만들면, 〈모델 빌리지〉에서는 공간의 모형을 만들며, 〈489년〉에서는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증거 부족〉에서는 물질적 증거가 없을 때 어떻게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바탕으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3D 이미지 사용이 내용적으로 적합했다. 등장인물의 이야기와 그의 현실이 충돌하듯이 3D로 만들어진 가상공간의 반듯하고 완벽한 선은 어린아이처럼 손으로 그린 그림의 현실 속 삐뚤빼뚤한 선과 대조된다.
〈모델 빌리지〉는 선전마을의 원리를 조형적으로 분석하고 차갑게 표현한 작업이다. 실존하지만 가상 같은 공간을 연출하기 위하여 모형을 만들어 실사 촬영을 택했다. 건축물이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단지 보이기 위한 이미지로 전환되는 과정을 그림자로 연출하였다. 투명한 아크릴 건축 모형은 강력한 조명 아래 선명한 그림자만 남기고 이내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이미지가 물질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이를 위해 빛이 투과하는 투명함이 필요했고, 투명함은 선전마을의 빈 공간을 부각시킨다.
〈489년〉에서는 감정 전달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모델 빌리지〉와 대조되는 새로운 작업 방식이 필요했다. 비무장지대(DMZ)에서 근무한 군인들을 인터뷰하던 중 김 씨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고 그분이 DMZ에서 수색하던 중 있었던 일을 나에게 얘기해 주셨는데 마치 내가 그곳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분의 감정을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풍부한 색채와 많은 음악을 넣었고 공간적 성찰이 가능한 새로운 매체가 필요했다.
〈옥산의 수호자들〉 상호작용 가상현실 설치, 컬러, 사운드, 3D 애니메이션 가변 크기 2024
《올해의 작가상 2024》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2024
〈증거부족〉(스틸) 애니메이션, 단채널 비디오,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9분 20초 2011
〈증거부족〉은 다른 출품작과는 다르게 이번 전시에서 유일하게 사운드가 오픈된 작품이다. 다른 작품은 헤드셋을 착용해야만 하는 반면, 이 작품의 사운드가 예외적으로 전시장에서 울리도록 구성한 이유는 무엇인가?
보여줄 물질적 증거가 없다면 그의 이야기라도 울려 퍼지길 바랐다. 우리는 부조리한 사회 속 규범에 너무 익숙해진 건 아닐까. 함께 질문해 보면 좋겠다.
〈모델 빌리지〉에서 조명, 그림자, 아크릴 모형을 클로즈업하며 여러 각도에서 담아내는 영상은 탐미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투어 음성, 선전 방송, 새소리 등을 경유하는 사운드는 이질감을 증폭시키는 것 같아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다. 이전에 한 인터뷰에서 〈489년〉을 제작하면서 “소리만으로써 공간을 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며 “공간감을 부각시키는 데 소리가 얼마나 큰 요소인지 알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신의 작품에서 사운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다 더 상세하게 말해달라.
이 세상은 다양한 감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서로 다른 감각이 충돌할 때 의아함을 느끼고 긴장하게 된다. 질문하게 하고 집중하게 되는 순간이다.〈모델 빌리지〉는 가득 찬 소리와 빈 공간을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선전마을의 핵심을 드러냈다.
특히 가상현실에서는 360도 사운드 연출과 상호작용 시 실시간 연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운드는 공간 연출하는 데 시각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관객의 주의를 인도하는 소중한 길잡이이다. 작업 과정 중에 눈을 감고 소리만 듣기도 한다. 영상 없이 소리만으로도 작업의 완성도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소리만으로도 작업 전달이 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작업이 완성된다.
《올해의 작가상》 제도에 관한 의견 혹은 소회가 궁금하다.
“‘올해의’라는 단어가 ‘당대성’의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라고 하신 이주연 학예사님의 말씀에 적극 동의한다. ‘나’라는 개인이 전시에 참여한 것보다 가상현실이 현대미술의 표현의 매체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 것 같아 나에게 더욱 의미가 크다.
양정욱 Jung-uk Yang
정소영 기자
양정욱/ 경원대 조소과 졸업 후 사루비아다방 전시 《사이의 변칙》(2012) 을 통해 주목받았다.《인사만 하던 가게에서》 ( 2013, 갤러리소소),《말이 없는 사람》 ( 2015, 두산갤러리),《어제 찍은 사진을 우리는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다》 ( 2019, 갤러리현대),《Maybe, It’s like that》(2021, OCI미술관) 등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키네틱 조각이라고 그룹 짓기에 양정욱의 작업은 움직임이 아닌 작품의 이야기와 사람에 대한 표현에 중점을 둔다. 평범한 일상의 장면에서 떠오른 일을 이야기로 만들고, 이를 다시 조형의 언어를 통해 작품으로 구현한다. 양정욱은 때로는 사람으로, 풍경으로 평범한 일상을 따뜻한 동화로 표현하는 작업을 이어간다. 이번 전시에서 양정욱은 작업의 시작이 되는 작가의 글을 읽을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그동안 작품명으로만 유추할 수 있었던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작업을 위한 전시가 있고, 전시를 위한 전시가 있다. 이번 전시는 후자에 가까웠다. 국립현대미술관이다 보니 관객이 오래 머물 수 있는 전시이면서 여러 번 방문할 수 있는 전시가 되기를 바랐다.
전시 구성은 사람들이 어우러지고 그런 풍경을 보는 사람들이 작품 너머 계속 겹쳐질 수 있도록 했다. 작품으로 표현하는 주제는 항상 동일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형식적으로 다양하게 구성하려 한다. 또한 시간을 내서 전시장을 방문한 관객을 위해 볼거리가 많고 다채롭게 전시를 구성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번 전시에도 그런 점이 잘 구현될 수 있게 공간 구성을 직접 했다.
전시를 위한 신작은 두 점이다. 두 작품 모두 공통적으로 가상의 아버지가 등장하기 때문에 감정선이 비슷해 동시에 작업하고 싶었다. 몇 년 전부터 누군가의 흔적이 타인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신작 〈아는 사람의 모르는 밭에서〉에는 그런 면이 강조되었다. 관객은 작업을 보지만 사실은 흔적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장 벽에 직접 그은 하나의 선, 누군가 만져 색이 번진 선, 긁어서 남긴 그림, 부스러기를 모아 놓은 약도, 피아노를 연주하는 연주자의 손에 건반이 눌리는 소리, 점점 너덜너덜해지는 책자와 벤치의 흔적, 침침한 가운데 글을 읽으려 노력하는 사람들, 높이를 낮춘 전시장의 터널을 지나며 마주하는 사람들.
작업은 욕심내지 않고 하던 방식을 고수했다. 비유하자면 밥과 국은 적당히 준비하고 어울리는 반찬을 조금 늘린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작품 제작 단계에서 작성한 글을 함께 전시했다. 많은 글 중 이번 전시를 대표하는 글을 한 편 소개하자면?
단연 〈일시적인 약도〉이다. 그간 창작활동을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이 담겨있는 글이다. 있어야 할 수 있고, 없어서 못하는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마음은 최선을 다하게 하고 정성을 들이게 한다. 정성은 따뜻한 면이 있고, 사람들은 그런 따뜻한 곳에 모이기 마련이다. 이런 종류의 창작은 일상과 구별되지 않고 동시에 진행될 수 있게 한다. 언젠가 이런 작업방식을 ‘아상블라주’라고도 소개했는데, ‘원래’라는 허상이 사라진다는 면에서 그렇게 설명했다. 아이들의 놀이 방식이 아상블라주 작업방식이다. 아이에겐 돌멩이가 차가 되고 마을이 된다. 작은 소음이 리듬이 된다.
“종이가 없어도 연필이 없어도
나무가 없어도 모터가 없어도
기억이 안 나도 용기가 안 나도
우리는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마음이면 충분하다”
-〈일시적인 약도〉 中-
이번 전시 또는 전시 출품작 표현에 있어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엇이었나?
누구나 사정이 있고 운이 있다. 이번 전시에도 수많은 사정과 운이 있었다.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계단 설치작업을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계단 설치작업은 1년간의 소리를 이용한 작업으로 현재 전시장의 위치에 전시를 결정하게 된것은 사실 계단공간이 필요해서 였다.
모든 일은 뒤돌아볼 때 더 잘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아쉬움이 생기는 것 같다. 그 마음이 우리가 뒤를 돌아볼 때마다 오히려 조금씩 나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앞만 보고 나아가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아쉬운 점을 많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좋은 일이다.
《올해의 작가상 2024》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2024
〈우리들의 주말을 거북이만 모른다〉나무, 모터, LED, 실 290×290×160cm 2024
움직임이 있는 작품에 저마다의 리듬과 소리가 존재한다. 사람과 일상에 대한 관찰은 글로 엿볼 수 있지만 리듬과 소리는 어떻게 구상되고 표현되는지 궁금하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리듬과 소리가 있다. 나의 일은 그 소리의 수를 줄이는 일이다. 각 작업의 이야기에 맞는 리듬과 소리만 남기려면 제목을 지을 때처럼 중요한 것만 남게 된다. 집에서 나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문이 열리고 닫히는 크고 작은 소리가 들리고, 창으로 넘어 들어온 흔들리는 그림자의 모양, 방바닥에서 조금씩 옮겨가는 빛의 속도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것들이 모두 리듬이고 소리다. 이것들을 반복적으로 관찰하게 되면 어느 순간 리듬을 알게 되고 차이를 알게 된다.
작업을 할 때는 이런 단순함을 반복해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구체적이라는 것은 차이를 발견하는 일이다. 같은 길을 수십 번 오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길에서 어제와의 차이를 알게 된다. 유난히 사람이 많은 날, 더 짙어진 나무 잎사귀, 도보의 미묘한 변화와 같이 새로운 환경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서서 일하는 사람들〉(2015, 2022), 〈우리들의 주말을 거북이만 모른다〉(2024)와 같은 작품의 작품명과 작품 제작의 순서와 방식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사랑하면 잘 알게된다. 잘 알게되면 설명하고 싶어진다. 글로 설명하고, 제목으로 설명하고, 모양으로 설명하고, 공간으로 설명하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수단을 떠올리게 된다. 저절로 된다. 저절로 그것만 생각하게 된다. 다만 작업은 설명들을 줄이면서 제작이 된다. 이야기가 시가 되고, 시가 되면 제목이 된다. 오전과 오후의 이야기가 하루의 이야기로 되고, 어느 시절의 이야기가 되는 방식이다. 긴 이야기를 한장의 그림으로 그려야하는 것과 같다.
올해의 작가상 후보를 소개하는 기사에서 ‘토종 한국 작가’라는 표현이 있어 인상 깊게 본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면 자연적인 소재, 한국 문화 정서가 담긴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는 친숙한 감성이지만 해외에서 작품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여러 번의 해외 전시가 있었는데, 해외 전시를 위한 작업과 전시에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여행을 갈 때마다 느끼는 대부분의 감상은 유대감이다. “여기도 살아가는 게 비슷하구나” 한다. 사악한 사건은 비슷한 양상으로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고, 반대로 따뜻한 미담 역시 비슷하게 모든 나라에 존재한다. 비슷한 음식, 비슷한 전설, 비슷한 모양, 비슷한 농담, 비슷한 도구, 그밖에 수많은 비슷한 것이 존재한다.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는 전부 비슷하다. 우리는 토종지구인이다.
특정 지역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판돼 여러 나라에서 읽히는 것이 문화의 특이점에 대한 호기심만은 아닐 것이다. 공통으로 사랑받는 이야기에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람은 사람이 늘 궁금하다. 따라서 차이는 없다.
작품 제작 동기를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소망을 나타낸 동화’라 표현했다. 작가가 바라는 동화는 어떤 세상인가.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가 있다. 내가 그랬다. 힘이 들 때마다 상상을 했다. 성냥을 한 개비씩 켜서 불붙이며 가상의 온기로 종이박스를 침대 삼아 잠을 자고, 평소에는 다정했을 취객을 상대하며 살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마음이 어두워질 때마다 주변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들을 상상했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시간을 보냈다. 그런 생각들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지금의 나의 직업을 만들었다. 작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현실에는 드물다. 그래서 이야기에서 그들이 있었으면 한다. 나아가려는 성실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 정성 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았으면 한다. 나는 그럼 사람들을 떠올리며 지금까지 살아갈 수 있었다. 가정을 이루면서는 모든 게 좋아졌다. 안정감이 한동안 성냥을 켜는 일을 잊게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같이 살아갈 모든 아이를 위해, 그 아이들의 세계를 위해서 성냥을 켜게 됐다. 사실 부모가 되고 걱정이 많아졌다. 점점 세계는 좁아지고, 차가워진다. 작가로서 내가 다음 세대에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무엇을 남겨야 할까.
올해의 작가상 전시 이후 행보는?
나의 작업은 늘 비슷하다. 무언가 해보려는 사람들을 다룬다. 그들에는 노력과 정성이 있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어떤 것이든 최선을 다하겠지만, 크게 의미를 두어 실망하거나 들뜬 마음은 싫다. 어떤 일이든지 나에게 지나가는 사건 중에 하나다. 전시도 삶에서 일부일 뿐이다. 요즘은 새벽에 일어나 해를 오래 보고 싶어졌고, 능력이 되는 한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윤지영 Jiyoung Yoon
강재영 기자
윤지영/ 홍익대 조소과, 시카고 예술대 조각과 석사를 졸업하고 다수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활발히 작업을 이어왔다. 현재 DAAD 아티스트 인 베를린 레지던시에 참여중이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관계, 여기서 발생하는 위계를 당연시하지 않고, 이를 조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편함을 조각을 중심으로 다양한 매체를 매개로 전달해왔다.
윤지영은 서면으로 진행된 인터뷰 서두에서 사건사고로 얼룩진 새해, ‘모두의 건강과 안전’을 바랐다. 그가 올해의 작가상 4인에 선정된 데에는 그의 작품이 그런 것처럼 세상을 두루 바라보고 사람을 배려하는 그의 태도도 유효하지 않았을까. 조각이 예술로서 인간과 어떻게 관계 맺고 조응해야 하는지 그 태도가 투영된 그의 작업이 우리들에게 닿았다는 증명일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에서 윤지영은 〈옐로우 블루스〉와 같은 과거 작업부터 신작 〈Ex-Voto〉와 이를 제작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 〈호로피다오〉 등을 선보이며 자신의 작업 스펙트럼을 충실히 펼치고 있다.
작가가 조각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특히, 이번 전시에서 〈호로피다오〉를 보며 언어와 시각의 서로 다른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작업에서 시각성과 언어는 어떤 관계를 맺으며 작업을 구성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영상 작업 〈호로피다오〉는 영어로 skipping, skip walk 등으로 표현되는 껑충껑충 뛰는 동작을 지칭하는 그리스어를 한국어로 음역한 것이다. 우리말로는 정확히 대응하는 단어가 없지만, 누구나 한 번 보면 알아볼 수 있는 동작이다. 이 영상에는 ‘안다’는 것, ‘본다’는 것, 그리고 ‘없다’는 것에 대한 내 생각이 많이 담겨 있다. 조각이 가진 특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런 질문들을 드러내 왔다. 지금 전시장에 있는 〈옐로우 블루스〉, 〈뱉어내려면 일단 삼켜야 하고〉, 〈한 모서리의 길이가 약 15cm인 나무 입방체는 어떤 것들의 음각을 숨긴 석고가 되었다〉(이하 〈한 모서리〉) 같은 작업들이 그 예다.
특히,〈옐로우 블루스_…〉와〈한 모서리〉에서는 밀랍의 녹아 없어지는 성질을 활용해 ‘사라지는 것’, ‘남는 것’, ‘본다고 믿어지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기존 작업에서 녹아 없어지기만 했던 밀랍이 이번 신작〈간신히 얼굴 하나〉와〈호로피다오〉에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를 통해 서로의 안녕을 비는 마음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세 기독교에서의 종교 봉헌물 엑스보토(Ex-voto)를 중요한 레퍼런스로 삼아, 종교의 유무를 넘어 항상 존재해 온 ‘안녕을 비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밀랍으로 만들어진 봉헌물은 비는 사람의 소원이 바뀜에 따라 녹여지고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를테면 다리를 다친 사람이 밀랍 다리를 바쳤다가 회복 후 다른 소원이 생기면 새로운 모양으로 바꿔 바치는 식이다. 나는 이런 가소성에 주목했다. 밀랍은 에디슨 축음기와 맞물려 소리를 기록하는 매체로도 사용되었는데, 친구들의 목소리를 밀랍으로 만든 실린더에 녹음하고, 이를 다시 녹여 내 얼굴을 만들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을 뉴스를 통해 보면서, 또 베를린에 거주하며 난민 신분이거나 분쟁 지역 출신 작가들을 접하며 가족과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인지 느꼈다. 작업을 통해 그런 끔찍한 일을 단순히 소비하지 않고 언어, 종교, 인종을 넘어 우러나오는 마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영상 제목이 가리키는 움직임은 ‘좋은 기분’과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러닝이나 재활을 위한 몸짓이 아니라 저절로 우러나오는 몸짓은 좋은 기분일 때만 가능하다고 봤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고 싶은 봉헌물의 형태로 이 몸짓을 선택했다. 작업에 나의 질문과 생각이 드러나길 기대하며, 관람객들이 작업을 보며 나와 같은 질문이나 생각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전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업으로〈달을보듯이보기〉(2013)를 꼽았다. 이 작업에 대해 소개해달라.
작업을 구상하던 때는 희생이란 무엇인지, 그 가치를 어떻게 매길 수 있는지, 비교할 수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시기였다. 그 질문 중 하나인 ‘선행된 희생으로 뒤따라오는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를 시각적으로 구조화해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만들고자 했다.
내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 천장에 달린 철봉에 두 팔로 매달린 채로 머리카락을 철봉에 묶고, 좌우에 선 친구들에게 내가 올라간 사다리를 치우고 몇 초 뒤에 묶인 머리카락을 잘라달라 부탁했다. 이렇게 두피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고, 사다리가 사라진 후에도 일정 시간 동안 두 팔로 버틸 때까지 버텼다. 내가 떨어질 자리에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가슴뼈까지 남아 있는 거북이 등딱지를 두었다. 내가 떨어지면 거북이 등딱지는 부서지지만 내 무릎은 무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거북이 등딱지는 죽음을 의미하는 물체였고, 비어 있는 공간이 ‘있었음’을 연상시키듯 이를 통해 삶과 죽음을 상징하고자 했다. 작업 후반부에서도 잘린 내 머리칼과 부서진 거북이 등딱지가 같은 가치를 띠는지 질문을 던지며 마무리했다. 이 작업은 내 질문을 시각 논리로 드러내는 방식의 전환점이 되었다.
〈호로피다오〉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0분 32초 2024
한국 민담과 여성, 그리스 신화 등 작업의 소재로 이야기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또한 이야기 속에서 어떤 부분을 조각으로, 그리고 관객과 맞닿게 하고 싶었는지, 이러한 시각이 작업에 어떻게 담겼는지도 알고 싶다.
민담, 전설, 신화 등 설화 속 여성 서사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오래 해왔다. 2019년을 마무리하면서 〈레다와 백조〉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그해 연이어 일어난 사건들 때문이다. 체육계 성 추문 폭로 사건, 버닝썬 게이트, 그리고 성적 대상화된 여성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 등이 영향을 주었다. 그 속에서 2020년 전시 《밤이 낮으로 변할 때》에 참여하며, 미술을 통해서 어떤 역할이라도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나의 언어로 바꾸어 작업을 풀어가는 방식을 취했으나, 2019년에는 그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구상 조각 〈레다와 백조〉를 통해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그리스 신화를 선택한 이유는 내가 익숙한 한국 민담의 메시지가 작업으로 풀어내기에 대중에 고착되어 있고 내게도 깊이 각인돼 있어 거리를 두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적으로 거리가 있으면서도 서양미술사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어 왔으며, 대중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고민하다가 ‘레다와 백조’ 이야기를 골랐다. 당시 김해주 큐레이터에게 “이번에는 제우스의 목을 자르겠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아트선재센터에서의 전시 당시 작품은 멀리서 보면 서양 미술사 속 분수 조각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백조의 잘린 목이 성기에 물려 있었다. 투명한 손은 내 손을 캐스팅해 만들었다.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이유는 그 이름 그대로 검색했을 때 다른 ‘레다와 백조’ 이야기에 대한 나의 해석이 포함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전시 이후 백조와 레다의 몸은 필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제우스의 목, 레다의 손, 그리고 작업에 도움을 준 여성 타투이스트들이 구성한 서사가 담긴 구 모양의 조각 세 개만 남기기로 했다.
2022년 원앤제이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Yellow Blues》에서 작가로서의 책임에 대해 언급했다. 이번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점이나 최근 관심이 가는 주제가 있다면 이야기해달라.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작업을 통해 풀어나가는 것이 가장 편하다. 직접적인 글이나 말로 전달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작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며 침울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작업을 통해 항상 주장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번 전시에서 중심에 둔 것은 누군가의 안녕을 비는 마음이었다. 물리적 거리와 시간 때문에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질문한 〈맷으로 추정되는〉 작업을 넣고 싶었지만, 공간 제약으로 제외했다. 그럼에도 이번 전시를 통해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었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에게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해 더 넓은 범위로 확장되는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관람객과 주고받은 이메일들이 큰 힘이 되었다. 이번 전시 과정을 통해 작업이 외롭지 않고 애정 어린 경험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올해의 작가상 전시 준비 과정에서 아쉬운 점이나 더 드러내고 싶었던 부분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맷으로 추정되는〉 작업을 꼭 전시하고 싶었다. 스케치업과 작품 목록에도 있었지만, 공간 제약으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의 작가상 도록에 김정현, 이진실 두 분 모두 이 작업을 언급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두 사람이 예전 작업과 이번 신작의 관계성과 의도를 잘 찾아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내장을 꺼내 그물을 짓던 때가 있었다.〉 천, 실, 백금 경화 실리콘 600×400×4cm 2024
올해의 작가상을 준비하며 달라진 점이나 전시를 통해 느낀 점이 있다면 이야기해달라.
올해의 작가상은 ‘욕받이 전시’라고들 한다. 나 역시 관객으로서 가혹한 평가를 지켜봐 왔고, 평가하는 마음이 들었던 적도 있다. 명예로운 자리이지만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참여를 결심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솔직히 무섭기도 했지만, 다양한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전시라는 점에서 나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주변에서는 나 자신이 드러나는 전시로 인해 타격을 받을까 걱정했지만, 이번에 〈간신히 얼굴 하나〉, 〈호로피다오〉, 〈엑스-보토〉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감사하게도 여러 관객에게 이메일로 피드백을 받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호로피다오〉에서는 나를 잘 아는 이들은 작업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모르는 이들에게는 이야기 자체로 감상되길 바랐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더 넓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전시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외롭지 않고 애정을 느끼며 작업했던 경험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전시를 보거나 볼 예정인 사람들과 월간미술 독자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위로가 필요했을 때, 나 자신을 어떻게 도울지 몰랐던 것 같다. 그 시기 동안 작업에 허락된 시간과 힘을 쏟아부었다.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돌볼 수 있게 된 이후에도, 그 과정에서 괴로움을 견뎌야 했지만, 지금은 많은 도움을 받아 좋아졌다.
힘든 시기를 보내는 사람들에 게 나의 이야기들이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나에게 힘이 되었던 책, 영화, 미술,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누군가에게도 작은 위안이 되길 바란다.
제인 진 카이젠 Jane Jin Kaisen
황수진 기자
제인 진 카이젠/ 강렬한 시각성을 동반하는 시적이고 수행적이며 다성적인 영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업은 살아 있는 경험과 정치적 역사의 교차점에서 기억, 이주, 국경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주제는 자연과 섬, 우주론, 여성주의적으로 재구성된 신화, 제의적이고 영적인 실천에 대한 참여다.
제인 진 카이젠은 2000년대 초반부터 국제 입양과 이주라는 자신의 디아스포라적 경험을 출발점으로, 제주도의 영적 문화와 정치적 역사, 자연환경을 탐구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연작 〈이어도(바다 너머 섬)〉(2022~2024)을 통해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인간이 신화와 의식을 통해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려는 과정을 조명한다. 이 작품들은 제주의 고유한 문화에서 영감을 받으면서도 인간 경험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측면을 다룬다. 이어도는 실재와 상상의 경계에 있는 공간이자 동시에 다가올 사회를 암시한다. 작가에게 이어도는 사라지기 직전의 의미와 감정을 돌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연결과 관계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 〈이어도(바다 너머 섬)〉(2022~2024) 연작을 출품한 이유는 무엇인가?
올해의 작가상 후보로 지명될 당시, 이미 2년 동안 〈이어도〉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네 편의 작품은 완성되었고, 추가로 세 편의 작품 〈어귀〉, 〈심〉, 〈잔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작품은 처음부터 하나의 연작으로 구상되었기에, 이번 전시는 처음으로 일곱 편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선보일 수 있는 의미있는 기회였다. 특히 〈이별의 공동체〉(2019)와 같은 이전 작업들과 신작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할지도 모를 한국 관객들과 이작품들을 공유할 수 있어서 기쁘다.
제주를 배경으로 한 7편의 영상 작업 중, 독자 여러분께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이번 전시된 〈할망〉은 조상들이 거주했던 마을에서 1970~80대 해녀들과 함께 촬영했으며, 〈잔해〉는 〈이별의 공동체〉의 주요 인물이었던 고(故) 고순안 무당의 목소리가 담긴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제주 해녀들, 무당들과 오랜 교류와 신뢰를 기반으로 탄생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전시작들은 특정 주제, 사람, 장소에 대한 긴 연구와 헌신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이를 확장해가는 작업이었다. 동시에 이 작품들은 나에게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전환점이 되어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이 질서의 장례〉, 〈제의〉, 〈수호자들〉 같은 작품에서 더 상상적이고 수행적이며 참여적인 요소들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또한 섬이라는 장소와 자연, 환경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은 오랜 시간 고민해온 주제였다. 〈어귀〉와 〈심〉 같은 작품에서는 이 관심사를 구체화할 수 있었다.
촬영 감독 거스톤 손딘 퀑(Guston Sondin-Kung)과 지속적으로 작업해 왔고, 제주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협업도 중요한 작업 방식으로 보인다. 협업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작업할 때 어떤 점을 가장 중점적으로 고려하는지 궁금하다.
내 작품들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긴밀한 협업과 참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창작 과정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협업과 촬영 중에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다. 예술가 겸 영화감독 거스턴 손딘 퀑과는 15년간 협업하며 서로 깊이 교감해 왔고, 제주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함께 촬영했다. 이번 신작에서는 음악과 색 보정을 중심으로 뜻깊은 협업을 이뤘다. 제주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협업 또한 내 작업에서 중요한 축을 이룬다. 예컨대 〈할망〉에서 해녀들과의 촬영, 〈제의〉와 〈잔해〉의 잠수부와 다이빙 크루, 〈이 질서의 장례〉에 참여한 이들, 〈수호자들〉에 참여한 아이들과의 협업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또한 제주의 다양한 자연환경에서 촬영하며 자연과의 만남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자연과 자연환경을 작품의 공동 창작자로 여긴다. 작품이 대부분 자연에서 촬영되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날씨가 도전 과제가 되기도 했지만, 이를 장애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며 작업의 일부로 삼으려 했다. 무엇보다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에너지와 창의적 표현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조화로운 순간들에 빠져든다.
시간 기반 매체인 영상을 사용하지만, 단일한 관점이나 서사가 없이 전개된다. 여러 자료를 선별하고 조합할 때 기준은 무엇인가?
이번 작품들은 2년 반 동안 하나씩 완성되었지만, 애초에 이 작품들을 하나의 작업으로 생각했기에, 촬영은 2022년 여름 제주에서 장기간 머무르며 대부분 이루어졌다. 전시는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인간이 신화와 의식을 통해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핵심 주제로 삼고 있다. 각각의 작품은 자연의 힘을 떠올리게 하는 제주의 다양한 자연환경에서 촬영되었다. 또 많은 영상에는 사람들이 다양한 의식을 치르는 모습이 담겨 있다. 제주의 문화적 영적 관습을 참고하면서도,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 젊음의 반란과 조상의 지혜, 역사적 주변화, 분기된 서사의 형성 등 문화적 지리적 경계를 넘어 공명하는 근본적인 주제를 다루고자 했다.
제주도는 태어나고 떠나온 곳이자, 10여 년 넘게 작업 주제로 삼아 온 곳이다. 작가에게 제주는 어떤 의미인가? 왜 계속 제주를 작업으로 다루는가? 이번 신작을 포함해 냉전의 역사, 전쟁, 식민주의, 여성차별 등 사회적 주제를 주로 다룬다. 이러한 주제 속에서 개인 경험과 집단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제주도와 개인적으로, 영적으로 깊은 연결을 느낀다. 단순히 생애적 연결을 넘어 제주도의 풍부하고 복잡한 영적 문화, 정치적 역사, 자연환경에 강하게 끌렸으며, 이전 작품에서도 이를 지속적으로 다뤄왔다. 서로 다른 현실이 맞닿고, 상반된 감정이 활발히 조율되는 복잡한 교차점에 자연스럽게 이끌린다. 많은 섬들이 그러하듯, 제주도는 오랜 시간 주변부나 변방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제주도는 20세기의 균열과 긴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국가적 지역적 역사와 지정학적인 맥락 모두에서 드러난다. 오늘날 제주도는 섬이라는 특성상 기후 변화, 대규모 관광 사업, 개발 문제의 최전선에 서 있다. 하지만 제주도의 독특한 우주론, 무속 신앙, 해녀들의 물질문화에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점들에 흥미를 느껴 대안적 계보와 소외된 역사를 추적하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어떻게 새롭게 모색할 수 있을지, 또 인간과 자연, 환경이 이전과는 다른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왔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이는 〈이어도〉 신작들은 제주도를 특정한 지리적 공간으로 그리지 않는다. 제주도는 잠재성을 품은 상상적 공간으로 확장된다. 이 작품들은 제주의 고유한 문화에서 영감을 받으면서도 인간 경험의 본질적인 측면을 다룬다. 나에게 이어도는 단일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깊고 다층적인 제주 신화 속 개념이다. 이어도는 실재와 상상의 경계에 있는 공간이자, 동시에 다가올 사회를 암시한다. 이어도는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향할 무언가를 상징한다. 이어도는 미래를 향한 투영이자, 따뜻하고 섬세한 무언가를 품고 있다. 이어도는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기 직전의 의미와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통해 새로운 연결과 관계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상징한다.
〈할망〉(스틸)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12분 2023
〈이 질서의 장례〉(스틸)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24분 24초 2022
위 질문의 답변 중 ‘다른 방식의 관계 맺기’에 대한 고민이 인상 깊었다. 작가가 생각하는 대안적 관계 맺기는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작품 속에서 어떻게 구현하고자 했는지 궁금하다.
대안적 관계 맺기나 관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개별 작품뿐 아니라 전시장의 공간 배열 전반에서도 표현하고자 했다. 작품들은 인간이 서로, 그리고 자연환경과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상호작용하고 관계를 맺는 문화를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로 볼 수 있다.
작품들은 촬영, 편집, 색 보정, 음악의 구성을 통해 특정한 정서와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람들 간의 교감, 자연과의 조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연속성을 느끼게 하는 정서를 담고 있다. 전시 방식에서도 작품들은 서로 이어지고 대화를 나누는 듯한 방식으로 설치되었다. 각기 다른 작품의 소리가 공간 속에서 어우러지며, 관객은 여러 작품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인식과 상호작용의 흐름을 작업에 담고자 했다. 전시 공간의 좌석 배치와 자연스러운 동선을 통해 강조된 일종의 나선형의 흐름이 그 예다. 이 흐름은 다소 미묘해 보이지만, 관객이 전시에 몰입하면 작품들 사이의 유기적인 흐름과 서로 얽혀 있는 관계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올해의 작가상에 선정된 소회나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작품 활동에 미친 영향이 있다면?
젊은 시절의 나는 내 예술을 통해 이렇게 많은 한국 관객과 대화할 기회를 가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번 경험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동시에 겸허함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모두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간절히 바랐던 관객과의 대화와 만남, 문화 언어 사회적 경계를 넘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젊은 관객이 많이 방문한다는 점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덴마크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예술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술은 관객과 만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으며, 세상에 대한 경험과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내 작업에서 중요한 점은 수많은 예술적 협업, 깊이 있는 대화와 만남이며, 또한 많은 이들의 참여가 작품의 본질적인 일부라는 점이다. 이 지면을 빌려 그들의 기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앞으로 구상 중인 작업이나 방향이 있다면?
현재 덴마크의 자연환경에서 촬영된 새로운 비디오 설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작업은 시인과 음악가와 협업하여 제작 중이여, 이번 여름에 열릴 비엔날레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지금은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기 어렵지만, 여러 면에서 나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매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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