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준 Byungjun Kwon
듣는 행위가
소리를 만든다
ARTIST FOCUS
권병준/ 1971년 출생, 서울대 불문과 학사 졸업 및 헤이그 왕립 음악원 아트 사이언스 석사 졸업. 《올해의 작가상 2023》수상. 1990년대 초반 싱어송라이터로 음악경력을 시작하여 토마토, 삐삐롱스타킹 등 총 6개의 앨범을 발표했다. 이후 2000년대부터는 영화 사운드 트랙, 패션쇼, 무용, 연극, 국악 분야에서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2005년부터 네덜란드에 거주하며 전자악기 연구개발 기관 스타임(STEIM)에서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2011년 귀국하여 현재까지 소리와 관련한 하드웨어 연구자이자, 새로운 악기, 무대장치를 개발, 활용하여 극적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음악, 연극, 미술을 아우르는 뉴미디어 퍼포먼스를 기획 연출하고 있다.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로봇〉
혼합재료 가변 크기 2023
사진 : 박승기 제공 :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듣는 행위가
소리를 만든다김정현 | 미술비평
단절 또는 전환 이후의 작가 권병준
‘작가’라는 명칭은 미술 전문지나 미술관과 같은 곳에서 별다른 의문 없이 통용되지만, 미술계 제도 바깥으로 나가서 사용할 때는 모호한 표현이 된다. “그 사람 글 쓰는 작가예요, 그림 그리는 작가예요?” 모처럼 미술계 바깥의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멈칫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의식해서 대신 미술가나 시각예술가라는 호칭을 쓰는 사람도 있지만, 화가도 조각가도 아닌 누군가, 또는 한 가지 매체에만 집중하지 않는 경우를 가리키는 임시방편의 말 같아서 어딘지 석연찮을뿐더러 입에 잘 붙지 않는다. 권병준의 작업에 대해 글을 쓰면서, 특히 2024 년 상반기가 저물어 가는 현재 시점에 자연스럽게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만한 사례는 작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올해의 작가상 2023》전에서 발표한 작업일 것이다. 중요한 미술상을 수상한 권병준을 미술 제도의 맥락에서 작가라 칭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그의 작업세계를 심층적으로 살피기 위해 그간의 작업을 들여다보자면, 미술의 역사와 이론만으로 맥락을 잡을 수 없는 영역에 가닿게 된다. 많은 관객에게 올해의 미술-작가로 수용되는 한편, 특기할 만한 과거의 이력으로 199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 신(scene)에서 주목받던 싱어송라이터였다는 사실은 그를 미술-작가로 수용하는데 있어 더없이 효과적인 후광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 글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 후광을 구성하는 과거와 거리를 두고자 한다. 우선, 동시대 미술 현장의 한편에서 작가의 작업적 성취와 미학적 의의를 그와 무관하게 명성 자본으로 환원해버리고 마는 자본주의적 순진함 또는 문화적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다른 이유는 좀 더 소박하고 간단하다. 동시대 미술과 미술관의 실천을 비평적 사고의 맥락으로 삼는 이 글에서, 장르 음악의 성취를 분석하고 현재의 작업과 연계하여 조망할 관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피상적인 인상에 근거하여 한 가지 가설을 세우자면, 권병준이 밴드 음악을 통해서나 미술관 작업을 통해서나 일관적으로 주류에서 벗어나고, 제도화된 예술의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고수한다는 것이다. 실험의 대상과 방법은 변했다. 장르 음악을 짓고 향유하는 것을 넘어, 인식의 대상을 음악에서 소리로 넓히며 새로운 악기를 상상하고 만들어낸다. 이는 중요한 단절이자 전환이다. 미국의 실험음악가 앨빈 루시어 (Alvin Lucier, 1931 ~2021) 는 “기존의 음향 엔지니어링 관행이 같은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결과물을 전달하기 위해 소리의 공간적 특성을 무시해왔다” 고 지적한다. 소리는 특정한 공간적 특성을 지닌다. 파장이 짧은 소리 (고주파)는 지향성이 있고, 파장이 긴 소리 (저주파)는 확산된다. 음파는 대략 3차원 동심원을 그리며 발원지에서 멀리 퍼져나가는데, 특정 상황에서는 실내에서 바이올린의 현이 진동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는 노드와 안티노드가 존재한다. 또한 각 공간은 흡수, 반사, 감쇠 및 기타 구조적으로 관련된 현상을 통해 소리를 수정, 위치 및 이동시키는 경향이 있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루시어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하면 음악 작곡의 새로운 영역이 열린다.”1
이렇게 반세기 이상 축적된 실험음악의 아이디어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권병준의 작업적 의의를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관심은 특정 매체나 예술적 경향에 관한 지도 그리기나 대상이 위치한 지점을 표시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보다 당대의 예술적 현실과 미술관의 미학적 실천에 관한 비판적 관점에서, 작가의 작업이 상기하는 특수한 감각에 주목하여 비평적 질문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앞서 《올해의 작가상 2023》전을 먼저 살필 대상으로 거론했으나, 한 편의 전시로 다듬어지고 요약된 작가의 미학이란 불가피하게 시각적 스펙터클에 압도되어 왜곡되어 보이기 마련이다. 권병준의 작업에서 ‘소리의 재현’ 과 ‘로봇의 연극’은 종종 상반되는 경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특수 제작한 헤드폰을 통해 녹음/채집한 소리를 들려주는 작업과, 직접 만들어 허술한 미감이 돋보이는 로봇 기계 장치의 연극. 그중 복제와 배포가 유리한 성질로 인해 시각적 이미지가 극적으로 두드러진 ‘로봇’의 형상은 작가의 작업을 대표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무대 퍼포먼스에 익숙할 권병준의 작업을 연극성에 집중하여 평가하는 것이 작가론적 왜곡이라고 일갈할 수는 없다. 그의 의식적, 무의식적 양면성을 두고 한편만을 선택적으로 지지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미술관의 관습적인 관람 방식으로 인해 가시성의 이면, 특히 보이지 않는 감각에 대한 업의 중요성과, 보일 수 없는 과정의 미학적 함의가 간과되는 것에 문제의식이 있다.
1 Alvin Lucier Careful listening is more important than making sounds happen : The propagation of sound in space (c.1979) in Alvin Lucier Reflections : Interviews, Scores, Writings Cologne : Musik Texte 1995 pp. 430~431 참조
〈모든 것을 가진 작은 하나〉 퍼포먼스 장면
LIG아트홀 2010
사진 : 이운식 제공 : 작가
〈오묘한 진리의 숲 2〉 혼합재료 가변 크기 2018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2018
제공 : 작가, 서울시립미술관
〈오묘한 진리의 숲4〉 혼합재료 가변 크기 2019
《2019 파라다이스 아트랩 쇼케이스》파라다이스 아트홀 2019
제공 : 작가, 파라다이스문화재단
보이지 않는 저곳의 장소성
그러므로, 작가의 작품도, 전시도 아닌, 한편의 강연 내용을 중요한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보자. 권병준은 2020년 11월 디지털 사일런스2의 의뢰를 받아「노이즈」라는 제목의 강의를 발표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노이즈, 소음(騷音)은 ‘불규칙하게 뒤섞여 불쾌하고 시끄러운 소리’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일상적으로 불쾌한 것으로 인지하는 소리를 얼마든지 떠올려볼 수 있다. 고요한 오전의 정적을 깨트리는 공사 장비 돌아가는 소리나 글쓰기 작업을 방해하는 카페 옆자리 손님의 끊임없는 수다 따위 말이다.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 의 개념을 널리 알린 R. 머레이 셰퍼는 “소음은 우리가 무시하는 법을 배워온 소리”라고 말한다.3 당장 피하고 싶을 만큼 불쾌한 소리에 더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소리들까지 포함하는 넓은 정의다. 권병준은 셰퍼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운드스케이프 운동 혹은 예술장르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밝히며, 노이즈가 “있으되 의식하지 못하는 소리, 들어주기 전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라고 정의한다. 그는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에 열 살짜리 아이에게 지리산 마을의 소리풍경을 들려주었는데,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 하는 질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새들의 지저귐, 개 짖는 소리 같은 마을의 고즈넉한 일상이 아이에게는 소리의 영역이 아니”었다. 작가는 아이의 감각 능력을 의문시하지 않고, 이러한 예시를 거쳐 “소리의 영역에서 노이즈에 관한 정의는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표현”이며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4
소리, 노이즈, 음악은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며, 각각에 대한 인식은 개인의 주관적 사고와 감각에 따라 달라진다. 세계는 무수한 소리로 가득 차 있으며, 노이즈는 우리 주변에 언제나 존재하면서도 존재자로 명명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셰퍼의 질문을 따라가 보자. “우리는 어떤 소리를 보존하고, 장려하고, 증식시키고 싶을까?” 이에 대해 자연인으로서의 권병준은 ‘저마다 다르다’고 답할 것이다. 이어지는 셰퍼의 질문, “예술, 특히 음악을 통해 인류는 어떻게 다른 삶 (other life), 상상력과 정신적 성찰의 삶을 위한 이상적인 사운드스케이프를 만들어내는가.”5 이에 대한 답변은 관객과 독자의 몫이다. 개인의 감수성과 사회적 의식을 조화시키는 예술가로서 권병준의 작업에서 한 가지 단서이자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먼저 현대 도시의 대중적 삶의 사운드스케이프를 떠올려보자. 이견의 여지 없이 교통 소음이 주조를 이룬다고 할 것이다. 녹지가 조성된 공원에서, 대단지 주거시설이 밀집한 골목에서, 번화가의 작은 소극장에서도, 자동차, 비행기, 전철이 작동하며 발생하는 속도의 음향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울린다. 갖가지 인프라를 갖춘 편리한 도시 생활에서 사운드스케이프는 거의 획일화되어 있고,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기계의 작동음에 도시인은 모두 약간의 난청을 앓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사운드스케이프는 어떻게 다른 삶을 상상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권병준은 지난 10 년 동안, 위치인식 시스템을 장착한 헤드폰과 앰비소닉 기술 등으로 녹음하거나 채집한 소리를 들려주는 작업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해 왔다. 이 프로젝트는 무차별하고 혼란스러운 소리 환경(sound circumstance)에서 미세한 개별 음향을 구분해내고 쾌적한 것으로 음미하도록 요구하는 청력 교화 프로젝트가 아니다. 개별 작업마다 사용하는 소리의 의미적 층위가 달라서 일괄적으로 논할 수는 없지만, 직접 감상한 몇 가지 작업에 관한 기억과 작업 관련 기록을 참조하면, 공통적으로 시각과 청각의 ‘이접 (disjunction, 離接)’의 원리가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일반적인 사용법대로 헤드폰을 통해 개인은 눈앞의 시각적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청각적 개별의 세계에 침잠하고, 시각적 풍경과 일치하는 소리, 예를 들어 눈앞에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내는 소리를 듣는 체험과 달리, 시각적 풍경과 유리된 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작가는 헤드폰으로 들리는 소리를 눈 안팎의 물리적 공간과 새롭게 결부시킨다. 이는 영화에서 시각과 청각이 작동하는 원리와 같다. 영화의 시각적 이미지는 소리를 내재하거나 머금고 있지 않기에, 영화에서의 소리는 시각과 마찬가지로 편집되고 몽타주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권병준의 작업에는 영상이나 사진 이미지가 사용되지 않고 실시간으로 흘러가는 자연적 공간을 마주하도록 하지만, 소리의 편집만으로도 시각적 현실의 이미지는 변형된다.
〈청주에서 키이우까지〉(2022) 는 미술관 야외 광장에 가상도시의 소리 풍경을 매핑하여, 관람객이 헤드폰을 쓰고 돌아다니며 감상하도록 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와 한국의 지방 도시 청주 사이에는 별다른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작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긴장된 세계정세와 개개인을 사로잡은 불안의 정동에 주목하여, 도시와 소리 감각을 매개하는 포괄적인 미술관의 기획에 과감한 주제로 응답한다. 이번에도 관람객은 작가가 들려주는 ‘긴장과 불안의 소리’를 여느 때와 같이 헤드폰을 통해 개별적으로 접하게 되지만, 여기서는 모든 관람객이 일시에 같은 소리-사이렌 소리와 비행기 소음을 듣는 순간이 설계되었다고 한다.〈오묘한 진리의 숲〉(2017~2019)은 제주에 무단 입국한 예멘 난민의 노래, 북한에 인접한 교동도 소리풍경, 충남 홍성 다문화가정의 자장가 등을 들려주며 마찬가지로 선명한 사회의식과 주제를 담아낸다. 권병준은 그가 염려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사건들과 마주한다. 그가 전국에서 수집한 소리는 미술관이나 극장, 작업실과 교실 등에서 헤드폰을 매개로 익명의 관람객과 접속한다. 관람이 일어나는 장소는 대체로 추상적이지만, 작가가 관람객을 이끌어 보여주는 장소는 ‘탈색된 이곳’이 아닌 ‘다채로운 저곳’ 이다. 관람객은 말 없는 이야기이자, 재현하지 않는 노래, 눈에 보이지 않게 펼쳐지는 연극을 듣는다. 시인 함성호는 권병준의 작업에서 “장소를 지우는 헤드셋의 사운드”에 주목하지만,6 이 글에서는 오직 소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저곳의 장소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2 “디지털 사일런스(Digital Silence)”는 2020년 연세대학교 전파연구센터와 퓨즈 아트프로젝트가 주축이 되어, 뉴미디어를 다루는 공학 기반의 예술가들과 최첨단 과학기술을 다루는 공학자들, 시각예술 이론가들이 구성한 예술 과학기술 장기 협업 프로젝트팀이다
3 R. Murray Schafer The Soundscape : Our Sonic Environment and the Tuning of the World New York : Alfred Knopf, Inc. 1977 p. 3
4 권병준「노이즈」 2020 작가 제공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완벽한 이족보행
로봇이 덤블링 동작을 매끈히 소화해낼 때,
권병준의 로봇은 삼각대 위에서
절뚝거리거나 사다리 다리로 삐그덕거린다.
〈오체투지 사다리봇〉혼합매체 가변크기 2022
사진 : 박승기 제공 :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유령극단 “심각한 밤을 보내리”〉퍼포먼스 장면 홍동저수지 2022
제공 : 작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로봇은 (어떤) 악기인가
근대 이후 미술관의 예술작품 및 전시 제작의 관행에서, 경계를 허물고, 벽을 허물고, 갤러리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를 실천하는 데 있어 사운드 아트는 가장 이상적인 형식이자 장르가 되었다. 소리의 누출성과 확산성 때문이다. 사운드 아트의 역사에서 대표적인 수많은 작업이 이러한 외부 지향성을 지녔다. 2000년대 서구 미술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재닛 카디프와 조지 부어스 밀러의 오디오 및 비디오 ‘산책 (walk)’ 작업을 보라.7 한편 시각문화학자 스티븐 코너는 “사운드 아트의 특징적인 작품 대부분이 외부로 나가거나 외부를 내부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8 소리의 투과성은 갤러리를 관통하며 그로부터 벗어나는 사운드 아트를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예술작품으로서의 소리의 감각을 방해하는 외부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다시 갤러리 내부로 돌아오고, 다른 작품과 이 작품의 소리의 믹싱을 최소화하기 위한 가벽을 설치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권병준의 로봇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직접 만든 로봇의 외형은 허술하다. 사다리나 삼각대와 같은 도구를 거치대 삼아 꽂은 긴 막대기 몸체 위에 인간을 연상케 하는 손전등-얼굴이 있고, 관절의 기능과 확장에 집중하는 산업용 로봇과 달리 유독 손가락이 강조된 모양새다. 로봇은 더이상 공상과학 소설이나 만화영화의 소재에 그치지 않고, 기술과 산업의 발전에 의해 대중에게 일상적으로 익숙한 사물-존재가 되었다. 값비싼 인조인간의 산업에 관한 새로운 상식이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과 로봇 퍼포머의 모습에 투사된다.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완벽한 이족보행 로봇이 덤블링 동작을 매끈히 소화해낼 때, 권병준의 로봇은 삼각대 위에서 절뚝거리거나 사다리 다리로 삐그덕거린다. 테슬라 로봇이 인간처럼 섬세한 손가락 움직임으로 날달걀을 깨트리지 않고 옮기는 낯설도록 친밀한 기술을 자랑할 때, 권병준의 로봇은 모처럼 인간 신체에 가깝게 구현된 팔과 손가락으로, 악기를 연주하거나 마이크를 쥐지도 않고, 그저 허공을 휘적거리며 마주 본 손전등 불빛을 반사해 빛난다.
로봇 연극은 극장과 미술관에서 펼쳐진다. 처음으로 극장에서 공연 형식으로 선보인〈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2(로보트 야상곡)〉(2020)에서 비틀거리는 로봇이 자아내는 비애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인간 퍼포머가 인형술사처럼 로봇의 동작을 보조하며 과장된 정서에 몰입하도록 하는 고전적인 연극적 연출은 로봇을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존재로 바라보게 한다.《올해의 작가상 2023》전에서도 멜랑콜리한 정서는 여전하다. 작가는 엔지니어링 능력을 발휘하여 전시장 안에 극장 환경을 조성한다. 조명과 사운드 시스템이 1980년대에 이미 구조적으로 완성된 극장과 달리, 전시장에서는 특수한 관람의 관습과 건축적 특수성을 고려하여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이렇게 수고로운 기술적 제작 과정을 거쳐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소리인가? 로봇은 (어떤) 악기인가? 이것은 어쩌면 의도적으로 현상을 왜곡하는 질문이다. 어쩌면 퍼지고 새어나가는 소리의 성질을 다시 억누르고 응집시킨 음악을 균질하게 전달하기 위해 정돈된 실내에 다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로봇의 신체가 악기라면, 아직 누구도 본 적 없는 모습의 악기다. 어떤 자세로 연주해야 할지 모르고, 어떤 소리가 날지 알 수 없다. 〈심각한 밤을 보내리〉(2021)에서 야외 들판에 허수아비처럼 선 로봇이 아직 들리지 않는 소리에 대한 호기심을 부른다.
*본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4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기고이다.
5 R. Murray Schafer The Soundscape : Our Sonic Environment and the Tuning of the World New York : Alfred Knopf, Inc. 1977 p. 3
6 함성호「존재를 넘어서-알 수 없는 장소와 이름 없는 시간들」 2022 p. 9. 해당 글은 권병준 작가 홈페이지에 공개되어있다 http://www.byungjun.pe.kr/xe/page_xubO78
7 재닛 카디프와 조지 무어스 밀러의 산책 작업은 1991년에 처음 고안되어 오디오 및 비디오 출력 장치를 매개로 소리와 이미지를 장소와 결부시키며 야외 공간을 돌아보도록 하는 작업이다. 이는 권병준의 작업을 포함하여 미술관과 극장의 실천을 망라하는 동시대 예술 작업의 원형이자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김정현 「퍼포먼스의 새로운 장소」『아트인컬처』 2020.11 pp.170~175
8 Steven Connor Ears Have Walls : On Hearing Art FO(A)RM no. 4 2005 pp. 48~49 참조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