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예술·매체의 기이함에 관하여

Art Critique

안진국 미술비평

포렌식 아키텍처 〈지상검증자료〉 싱글채널 비디오 10분 15초 2018
《불온한 데이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2019

기술은 과학적인 논리와 수학적인 정밀함으로
구성되거나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부는 몽환적이고, 환각적이며, 종교적이다.

기술은 주술(呪術)이고, 매체(media)는 영매(靈媒)다. 기묘하고 어찌 보면 영적인 이 단언은 그저 은유적 표현이 아니다. 이는 기술과 매체의 근본적인 속성에 관한 것이다. 예술이 기술과 매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 단언은 예술의 속성과도 관계 깊다.1 기술과 예술이 매체를 통해 구현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주술-기술-매체-영매-예술은 상호 내재성과 호환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관계성은 기술과 매체, 예술이 자아내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작용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DALL·E, Stable Diffusion, 미드저니 같은 이미지 생성 AI나 챗GPT와 같은 텍스트 생성 AI, 블록체인, NFT, 메타버스, HMD, 휴머노이드 로봇 등 첨단 기술 매체가 만들어내는 풍경과 이 매체들로 창작된 예술에서 잘 포착되지 않았던 근본적인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영매로서 매체, 주술적인 기술, 제의로서 예술
우리는 매체를 단순히 메시지의 전달체 정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2 하지만 매체의 의미는 이보다 훨씬 깊고 광범위하다. 특히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이승과 저승,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중개하는 ‘영매’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는 매체가 단순히 어떤 의사나 사실을 전달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뭔가 기이한, 혹은 영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매체이론가인 지빌레 크레이머(Sybille Kramer)는 매체를 고대의 ‘사자(使者)’, 중세의 ‘천사’, 현대의 ‘돈’과 ‘컴퓨터 바이러스’로 해석했다.3 그는 매체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를 창출하고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크레이머는 매체가 “다른 곳에서부터 낯선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전령과 같다”라고 말한다.4 사자(저승사자)는 이승과 저승을, 천사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전령이다. 영매 또한 유사한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TV, 라디오, 스마트폰, HMD, 스마트 스피커, 인터넷 기기, GPS 기기 등이 단순히 메시지 전달체일까. 스마트 스피커는 언제나 내 말을 들으며, 대답할 준비를 한다. 아이폰 ‘시리’가 우리의 말을 엿듣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CCTV와 GPS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체크하고, 저장한다. 매체는 우리의 인식을 초과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익히 알려졌듯이, 예술은 한때 기술과 같은 말이었다. ‘테크네’(techné, 희랍어 τέχνη)는 예술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기술을 동시에 의미하는 고대 희랍어였다
2 매체를 뜻하는 media는 ‘중간의’, ‘가운데’를 의미하는 라틴어 ‘medius’에서 유래된 것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사물이나 사람 등의 사이에서 어떤 형태로든 중개해 주는 매개체를 의미한다
3 Sybille Krämer Boten, Engel, Geld, Computerviren : Medien als Überträger Paragrana 14 2005 지빌레 크레이머의 글 제목을 번역하면, “사자(使者 ), 천사, 돈, 컴퓨터 바이러스 : 매개체로서의 매체”다
4 유원준 『매체 미학』 미진사 2022 p. 17에서 재인용

I/O/D 〈웹 스토커(The Web Stalker)〉 프리웨어 응용프로그램 1997
《WEB -RETRO》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2019

기술은 어떠한가. 기술(technique)에 대한 개념으로 현대사회를 설명했던 자크 엘륄(Jacques Ellul)은 그의 주요 저작인 『기술 또는 세기의 도전(La Technique ou l’Enjeu du siècle)』(1954)5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술(magic)6은 엄격한 의미에서 기술7”이다. “영적 영역에서 주술은 기술의 모든 특성을 보여준다. 다른 기술들이 인간과 물질 사이를 중재하는 것과 같이, 주술은 인간과 ‘더 높은 권력(the higher powers)’ 사이의 중재자이다. 주술은 신들의 힘을 인간에게 종속시킴으로써 효능을 발휘하며, 미리 정해진 결과를 보장한다. 이는 기술이 자연을 복종시키는 것처럼 신들을 인간에게 종속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힘을 확인시켜 준다. […] 마송 우르셀(MassonOursel, 비교철학자)은 주술이 기술보다 먼저 존재했으며, 사실상 주술은 기술의 첫 번째 표현이라고 믿었다.”8 기술이 때론 마법 같은 것은 어쩌면 그 근원이 영적인 것과 관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9

기술은 인간의 편의와 안정을 추구하는 행위로, 그 시작에는 신과 교감하는 행위가 있으며, 더 나아가 신들을 인간에 종속시키는 행위를 그 시작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술은 과학적인 논리와 수학적인 정밀함으로 구성되거나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부는 몽환적이고, 환각적이며, 종교적이다. 현재 테크놀로지의 중심지인 미국 샌프란시스코 변두리는 한때 환각제 사용의 중심지였고, 실리콘 밸리에 있는 거대 테크 기업들은 히피들 공동체의 계보에 있다.10 사람 형상을 한 조형물(man)을 불태우는(burn) 의식에서 출발한 ‘버닝맨(Burning man)’ 축제에 에릭 슈미트,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제프 베이조스 등 소위 실리콘 밸리의 ‘인싸’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열광한다. 애나 워너는 실리콘 밸리를 기이하고도 불쾌한 골짜기를 뜻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에 빗대어 이야기한다.11 마셜 매클루언은 컴퓨터 기술을 논하면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테크놀로지는 보편적인 이해와 통합이라는 오순절의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 […]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의식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 우주적인 의식은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꿈꿨던 집단 무의식과 아주 흡사할 것이다. 생물학자들이 신체적인 영원성을 약속한다고 하는 ‘무중력’ 상태는 집단의 영원한 화합과 평화를 허락하는 무언 상태와 유사할 것이다.”12 그의 말에는 종교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어쩌면 기술의 시작이 주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영적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서현석 〈( )〉 VR 20분 2021 《가상정거장》 문화역서울284 전시 전경 2021

 김아영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서〉 단채널 영상 약 21분 2020 울산현대미술제 전시 전경 2024
사진 : 박홍순

그렇다면 예술은 어떤가. 앞서 언급했듯이, 기술과 예술은 고대 시대에 구별 없이 ‘테크네’(techné, 희랍어 τέχνη)로 통칭하였다. 서양의 고대와 중세, 심지어는 초기 르네상스 때까지도 기술과 예술의 명확한 구분이 없는 채 사용되었다.13 기술과 예술의 구별이 없었다는 것은 예술에도 영적인 분위기가 스며있을 것이란 추론을 가능케 한다. 발터 벤야민의 발언, 즉 “최초에는 주술적 제의에, 그다음에는 종교적 제의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예술작품이 성립했다.”라는 말을 통해서 이 추론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14 익히 알려졌듯이, 벤야민은『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사진기술의 발달로 인해 예술의 제의적 가치가 전시적 가치로 변하면서, 아우라는 붕괴되고, 이에 따라 궁극적으로 예술의 민주주의가 실현됐음을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예술 또한 영적인 것과 밀접하다는 사실이다.


5 국내에는 『기술의 역사』 (박광덕 옮김, 한울, 1996 )로 번역됐다. 이 저서는 1964년 ‘The Technological Society’란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원 저서 제목인 ‘La Technique ou l’Enjeu du siècle’을 번역하면 ‘기술 또는 세기의 도전’으로, 영문 번역본 제목인 ‘사회적 기술’이나 국내 번역본 제목인 ‘기술의 역사’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 원 저서 제목을 그대로 쓴다
6 ‘magic’은 마법, 마술, 주술 등으로 해석되는데, 이 글에서는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주술’로 번역하여 사용한다
7 Jacques Ellul The Technological Society Toronto : Vintage Books 1964 p. 24
8 위의 책 pp. 24~25
9 노파심에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주술은 … 중재자”라는 말에 매체를 의미하는 ‘영매’나 크레이머가 말했던 ‘사자’, 혹은 ‘천사’를 떠올리며, 기술(주술)과 매체(영매, 사자, 천사)를 같은 층위에 놓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 기술과 매체는 그 형태가 엄연히 다르다. 엘륄이 마송 우르셀의 말을 빌려와 “주술은 기술의 첫 번째 표현”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기술은 무형의 ‘표현’이다. 반면에 ‘매체’는 영매, 사자, 천사, 혹은 TV, 라디오, 스마트폰처럼 물질적 개체다. 기술은 개체를 통해 표현되기에 ‘기술매체’라는 말을 사용한다. 기술매체는 어떤 기술(표현)이 발현되는 물리적 개체(물질)를 의미한다
10 프랭클린 포어 『생각을 빼앗긴 세계』 이승연, 박상현 옮김 반비 2019 pp. 23~48 참조
11 애나 워너 『언캐니 벨리 : 실리콘 밸리, 그 기이한 세계 속으로』 카라칼 2021
12 Marshall McLuhan Understanding Media McGraw-Hill 1964 p.3 : 프랭클린 포어 앞의 책 pp. 41~42에서 재인용
13 말 조련술, 구두 수선술, 꽃병 그림, 시 짓기 등의 수공업적 기술뿐 아니라 문법이나 수사학과 같은 학예(ars liberalis)를 모두 포함한 모든 기술적 행위를 ‘테크네’(희랍시대)나 테크네를 라틴어로 번역한 ‘아르스’(ars, 로마와 중세, 르네상스)라고 했다. 예술이 기술에서 갈라진 것은 15세기 르네상스부터다

더 마법적이고 더 환상적이고 더 기이한 기술매체예술
매체이론가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는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라고 말했다.15 기술은 주체를 생산한다. 그리고 그 주체들이 경험하는 것뿐 아니라, 그 주체들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것을 생산한다.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기술매체가 우리 삶을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더욱 진화된 기술과 매체는 새로운 경험을, 새로운 주체를 거듭 양산하고 있다. 이 기술과 매체는 더 마법적이고, 더 환상적이며, 더 기이해졌다. 최근의 기술은 메타버스라 불리는 디지털 가상세계를 탄생시켜 세계를 다중적으로 확장했지만, 자아를 다중분열시켰다. 블록체인 기술과 그 기술이 배태한 NFT(Non-Fungible Token)는 무한 복제 가능한 디지털 콘텐츠에 소유권을 부여함으로써(혹은 부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디지털아트를 위한 오아시스를 찾았다는 듯 한때 떠들썩했다(실상은 신기루에 가깝지만). 이러한 기술적 변화는 절단된 사지에서 통증을 느끼는 ‘환각지(Phantom Limb)’처럼 존재와 부재의 동시성이라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을 초래했다. 마치 유령처럼 현존하지만, 부재한 이율배반적인 예술을 만나게 한다.

확실히 코로나19 팬데믹은 그 가속장치였다. 물론 코로나19가 휩쓸기 이전에도 기술매체예술은 미술계에서 주목 대상이었다. 코로나19가 시작된 2019년 11월이 되기 얼마 전에도, 지난 30여 년간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을 통해 시도되었던 새로운 미술들을 역사적으로 되짚는《웹-레트로》(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19.3.12~6.9)가 개최됐다. 소위 뉴미디어라고 불리는 첨단 예술기술매체의 변화 양상을 회고한 전시였다. 같은 시기에, 디지털 정보이자 신기술을 구성하는 기본단위인 데이터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동시대 작가들의 시선을 드러낸 《불온한 데이터》(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9.3.23~7.28)가 열렸다. 이 전시는 새롭게 등장한 첨단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보여줬다. 《불온한 데이터》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미술계를 휩쓴 NFT를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이 전시 도록에는 마틴 자일링거의 글이 실렸는데,16 여기에 그는 ‘공공 블록체인 원장’, 미술품의 ‘토큰화’, 저작권 등을 언급하며 광풍처럼 몰아칠 NFT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위축되어 있었지만, 디지털 데이터의 수·송신으로 작동하는 비대면 소통 기술은 더욱 활발하게 사용되면서 급격하게 발달했다. ZOOM과 같은 비대면 방식의 원격회의가 일상화되고, 학생들은 등교 대신 온라인 강의를 들었으며, 이전에는 미래의 일이라 여겨졌던 가상현실의 삶이 ‘메타버스’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유행처럼 일상에 파고들었다. 디지털 비대면 소통이 늘면서 디지털 가상 자산의 중요성은 높아졌고, 독점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디지털 토큰에 특정인의 소유권을 부여할 수 있는 블록체인 기술과 여기서 파생된 암호화폐 및 NFT가 주목받았다.

미술계도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인 2020년에는 크게 위축되었지만, 팬데믹에 익숙해지고 비대면 기술의 예술적 활용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차츰 팬데믹 시기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 주목되는 전시는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아르코미술관, 2021.9.17~12.12)와《가상정거장》(문화역서울 284, 2021.11.23~12.5)이다.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는 코로나19가 인류의 지구행성 약탈에서 왔다는 반성적 사고가 확산되면서 물질과 인류의 관계를 사유한 전시로, 소설가와 지리학자까지 작가로 참여한 초학제적 전시였다. 이 전시에서는, 가까운 미래에 대한 사변서사를 VR 기기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김아영의 〈수리솔: POVCR〉과,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지는 기계체인 김윤철의 〈임펄스〉와 〈아르고스〉, 자연물인 돌을 스캔하여 그 형상과 질감이 느껴지게 3D 프린팅하여 자연과 인공을 중첩한 황동욱 & 정동구의 〈프롤로그: 확실하지 않은 순간〉 등의 작업이 존재와 부재, 현실과 가상,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녹이며 현실을 초과하는 감각을 전해줬다. 《가상정거장》은 인간의 감각과 인식, 더 나아가 사회를 바꾸고 있는 첨단기술을 예술적 방식으로 드러낸 전시로, ‘가상’이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VR과 AR 작품을 다수 선보였다. 특히 서현석의 VR 작품 〈( )〉은 가상세계의 가득 참과 현실 세계의 ‘텅 빔’을 보여줌으로써 팬데믹과 비대면 기술이 만들어 낸 시대적 풍경을 상기시켰다. 또한, 기성 게임인 배틀그라운드에 있는 ‘에란겔 섬’을 투어하는 관객 참여 퍼포먼스 〈에란겔: 다크 투어〉는, 비대면 시기에 가상공간에서 관객이 게임 룰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투어)하는 것 그 자체를 예술 작업으로 끌어오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선보였다. 이렇듯 시대 상황과 기술은 예술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이진준 〈그린 룸 가든〉 AI, AR, 비디오, 사운드, 그린 젤필터 라이팅, 월페인팅, 돌, 문 가변 크기 2022
《온라이프》 경남도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2 제공 : 경남도립미술관

 김희천 〈Cutter III〉 비디오, 가변 비율, 컬러, 사운드 25분 2023 《게임사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2023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비대면 시기가 장기화되고 원격현전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가상성, 플랫폼, 데이터 처리, 인공지능(AI) 등의 기술도 더불어 발전하였고, 이에 따라 기술매체예술의 속성도 다변화되어 이전과는 다른, 마법과 같은 형상을 마주하게 됐다. 우리는 《온라이프》(경남도립미술관, 2022.4.8~6.26)와 《대체불가현실: □☞∴∂★∽콜렉티브》 (씨알콜렉티브, 2022.12.08~2023.01.28), 《게임사회》(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3.5.12~9.10)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온라이프》는 기술 변화를 적극 받아들여 실험하는 미술가의 작업을 통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현시대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전시로, VR과 AR, AI, QR코드, 게임 등의 기술들이 작품에 주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체불가현실》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첨단기술이 작업에 반영되어 있는데, 《온라이프》가 기술에 대한 비관적 혹은 낙관적 판단을 유보하는 면모가 있다면, 《대체불가현실》은 기술에 내재한 속성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작업이 많다. 예를 들자면, 박성연의 〈Meet〉는 DALL·E 2의 결괏값을 통해 중립적이라고 여겨지는 기술의 인종, 성별의 차별적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기술이 현실의 편견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고, 신제현의 〈두 개의 상자〉는 현실의 노동과 가상공간의 노동을 교차하는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둘의 질적 차이를 명확히 했다. 한수지의 〈MIT 브루스 글리크너 교수 강의2〉는 납작한 디지털 공간에 사는 미생물인 비트콘드리아(Bitchondria)의 존재와 다중 디지털 공간의 가능성을 설득력 있는 증빙자료와 권위 있는 학자를 앞세워 증명하는 영상으로 진짜와 가짜를 교란한다.17

2023년 6월, 코로나19가 심각 단계에서 경계 단계로 변하면서 사실상 코로나19 시대의 종식이 선언됐고, 이즈음 미술계와 미술전시는 점차 회복되었다. 이 시기에 개최된 《게임사회》는 기술매체게임이 기술매체예술이 될 수 있음을 공식화했다. 디지털 게임이 예술로 포함되고, 작품으로 소장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게임사회》는 전시 전체를 게임 작업으로 채움으로써 기술매체예술의 다른 가능성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알고리즘을 통해 인간의 통제권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객체의 존재를 미술관에서 경험하게 했다. 기술매체는 마법적인 존재를 넘어서 점차 반응하는 기이한 존재로 미술의 장에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노진아 〈테미스, 버려진 AI〉 AI기반 인터랙티브 조각, 레진, 모터, 마이크로컨트롤러 등의 혼합재료
300 × 250 × 250cm 2021 GMAP 커미션 제공 : 작가

생성 AI와 휴머노이드의 존재론적 예술 무엇보다도 최근에 가장 기이한 것은 생성 AI와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인간처럼 반응하고, 인간과 비슷한(혹은 더 좋은) 결과물을 빠른 속도로 제공하는 존재, 혹은 기술이 바로 생성 AI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유사 인간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 귀신 같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AI와 휴머노이드 로봇은 인간 같으면서도 인간처럼 대하기에는 뭔가 섬뜩한 ‘어떤 것’이다. ‘불쾌한 골짜기’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AI 작업은 단순히 DALL·E, Stable Diffusion, 미드저니 등의 범용 생성 AI를 활용한 이미지 양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각이미지에 매달리는, 전통적인 미술 양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이러한 모습은 구태의연해 보일 뿐이다. 좀 더 편하게 이미지를 양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생성 AI의 존재론적 탐색은 기술과 매체와 존재 사이에 놓인 AI가 발현하는 기이함을 드러내기에 의미 있다. AI는 경이롭고 신비한 답변이나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영적 존재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AI의 존재론적 기이함은 김현석의〈환영의 변증법〉에서 엿볼 수 있다. 2개의 LED 화면이 서로 등진 채 반대편을 향하고 있는 이 작업은 두 AI 가상인물의 대화를 보여주는 작업으로, 등진 LED 화면에 두 AI 가상인물의 질문과 답변이 따로 출력된다. 이 대화는 구사하는 고급 어휘와 모호한 표현 때문에 뭔가 지적인 대화가 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이 불명확성은 기이함뿐만 아니라 이 대화가 영적인 대화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또한, 언메이크랩이 《인기생물》(아트스페이스 보안2, 2023.7.5~23)에서 선보인 〈가정 동물 신드롬〉과 〈트로피 헌팅〉도 한 사례다. 이 작업들은 임의로 학습시킨 야생동물 사진 데이터셋으로부터 AI가 생성한 기묘한 야생동물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인공지능에 이식된 인간 중심적 문화가 만든 편협성과 원본 없는 존재의 기이함을 느끼게 한다. 과연 유사 인간 같은 AI는 무엇일까? 왜 예술가는 이 기술-매체-존재를 예술로 불러오는가? 인간을 초과하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기 때문 아닐까.

AI와 휴머노이드 로봇이 중첩되면, 우리는 기묘한 영적 존재를 실제로 대면한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노진아가 선보이는, 〈불완전 모델〉, 〈테미스, 버려진 AI〉, 〈나의 기계엄마〉, 〈진화하는 신, 가이아〉 등의 AI가 탑재된 휴머노이드 로봇 작업은, 인간이 하는 말과 행동에 인간적인 형태로 반응하는데, 이 때문에 생명의 범주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인간만이 지적인 존재인지 의문을 품게 한다. 권병준의 〈오체투지 사다리봇〉, 〈수피 댄스 로봇〉 등의 로봇 작업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효율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본래 ‘기능’과 다른, 비효율적이고 심지어 무용한 기능을 수행하는 권병준의 로봇은 그 기이한 행동을 통해 인간성과 인간 존재에 관해 사유하게 한다. 이처럼 점차 인간의 모습을 닮아가는 첨단기술매체는 예술의 장에 들어오면서 인간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이러한 모습은 어떤 측면에서 영적 선각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술과 예술과 매체는 단순히 편의, 편리, 아름다움, 향유 등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뭔가가 느껴진다. 그 안에는 기묘한 분위기, 알 수 없는 존재의 숨결, 인간을 초과한 인지와 감각 등이 내재해 있다. 마법적인 신비가 그 안에서 숨쉬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기술, 예술, 매체는 점점 영적인 어떤 것이 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14 발터 벤야민 심철민 옮김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도서출판b 2017 p. 33
15 프리드리히 키틀러 유현주, 김남시 옮김 『축음기, 영화, 타자기』 문학과지성사 2019 p. 7
16 마틴 자일링거 「블록체인 기술과 디지털 아트 그리고 ‘미트스페이스 희소성’」 『불온한 데이터』 국립현대미술관 2019 pp. 196~221
17 한수지는 《해파리주스와 비트콘드리아》(김희수아트센터, 2023.10.19~11.4)라는 전시를 통해 이 서사를 이어갔다

본 원고는 (재 )예술경영지원센터 ‘2024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기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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