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것,
언어로서의 회화를 통해
시대를 사유하는 일

신지현 전시기획

Special Feature

비평가와 기획자가 이 시대 회화를 바라보는 4개의 논점을 제시한다. 기혜경은 1980년대 추상과 민중미술의 이원 구조 속에서 자리 잡지 못한 형상미술의 흐름을 짚으며 현재 나타나는 확장된 형상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임근준은 물질의 행위주체성을 탐구하며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서의 회화를 역설하고, 오정은은 회화의 생존 전략으로 자아, 풍경, 괴물, 추상 등의 핵심 키워드를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신지현은 동시대 미술 안에서 회화는 하나의 언어로서 발언하는 매체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것, 언어로서의 회화를
통해 시대를 사유하는 일
신지현
전시기획

“훼손된 15세기 유화가 디지털 기술에 의해 복원됐다.” 오늘도 심상치 않은 기사를 하나 더 읽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현실계의 가상 인터페이스로의 확장’을 둘러싼 논의가 한창이었지만, 이젠 그마저도 낡은 의제처럼 느껴진다. 요즘 누가 디지털 세계의 진정성을 논하는가? 그러더니 이제는 인공지능(AI)이다. AI는 이미 인간의 많은 일을 대신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 많은 영역을 대리할 것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창의의 영역마저, 이제는 AI 툴이 점령해 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시간’을 얻는다. 생존에 필수적인 고민에서 해방된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그 잉여의 시간 속에서 비로소 가장 창의적이고 엉뚱한 상상을 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기사가 그래 보였듯, 얼핏 디지털 AI 시대의 도래 앞에서 회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쯤에서 논의의 초점을 조정해 보자. 회화가 여기에 정말로 관련이 있는가? 이는 19세기 사진술의 발명 당시 대두되었던 (여전히 때마다 돌아오는) ‘회화 위기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물론 기술과 회화의 관계는 단선적이지 않다. 변화하는 시각적·기술적 환경은 작업과 직간접적인 상관관계를 맺고, 진보하는 기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AI 툴을 창작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회화 작가도 그 수가 점점 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러한 혼종적 방법론의 변용보다는, 오히려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회화의 본질적 층위—즉 감각, 물질, 시간의 밀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고유한 언어로서의 사유—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것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회화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를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AI 기술이 매끄러운 고속도로를 따라 가속하는 동안, 여전히 붓을 손에 쥐고 화면 앞에 선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예술가는 도래하는 기술혁신의 시대 앞에서 매체의 고유성, 대체 불가능한 매체로서의 회화가 강조되는 상황을 다시 한번 맞이한 듯 보인다.

김겨울〈P for Put on Your Parachute〉종이에 수채화, 파스텔, 연필, 목탄 49×51.7cm 2024
사진: 전명은

김겨울 〈So I Wrote A Letter〉 린넨에 유화, 스프레이 페인트 180×130cm 2022
사진: 전명은

“누군가 이 사회의 가치 체계를 불신한다면,
그 대안책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루시 리파드 『오버레이』(1995)

동시대 현대미술 안에서 이미 회화는 재현이 아닌 하나의 언어로서 발언하는 “매체”가 되었다. 기술의 발전과 회화의 위기를 결부시키는 인식 자체가 회화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테크닉 혹은 재현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맹점(물론 미술의 문명사적 관점에선 새로운 재현 방식의 등장이라는 의미가 있겠지만)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이 글에서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고유성을 획득하며 유효해지는 동시대 회화의 사례—김겨울(추상, (비)언어로서의 회화), 이서윤(풍경, 실존으로서의 회화)의 경우—를 살피고자 한다. 이들은 기술의 발전과 무관하게 회화의 본질적 물성을 탐구하고 이를 언어 삼아 발언하는 회화를 구사하는 작가들이기도 하다. AI가 표면을 훔칠 순 있지만, 화면 앞에 쌓인 시간, 그 증거로서 겹겹의 레이어, 감각의 순환과 확장까지 훔칠 순 없다. 이미지가 끊임없이 복제되고 인공지능이 인간 창작의 고유성을 위협할 것만 같은 동시대에, 앞선 루시 리파드의 말처럼, 우리가 회화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들은 왜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이들이 ‘지금 여기서’ 회화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김겨울의 작업은 회화가 하나의 고유 언어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감각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실천한다. 이는 회화가 재현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감각적 언어 체계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놓인다. 일견 선과 색으로 구성된 추상성의 표면으로 그의 회화를 소비할 수도 있겠지만, 김겨울의 회화는 작업을 구성하는 내외의 요소들 간 연동 구조를 통한 개념적 틀을 갖는다. 질료, 그러니까 회화의 본질에 가까운 색과 선에서 출발해 소리나 모양으로서의 문자를 경유한 뒤 이를 다시 인지 가능한 언어(이 경우 1차적으로는 작품명이 되겠다)로 도착하게 만들기까지의 사이 공간 안에서 그의 작업은 매 순간 인식론적 관습을 비켜간다. 먼저 화면 내 가공할 만한 모양이랄게 없을뿐더러, 색이라는 최소 단위가 갖는 사회적 통념까지 해체해 그 어떤 인식도 불가한 상태로의 진입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 그러니까 세계로 환원되지 않는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김겨울의 작업은 오히려 그 불가해함 속에서 스스로의 고유한 논리를 형성한다. 이 세계 안에서 회화적 언어는 인지적 이해를 유보하고, 감각을 통해 사고하게 만든다. 최근 그의 작업은 평면을 벗어나 컷아웃 드로잉으로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화면 내 머물던 색과 선은 이제 공간을 유영한다. 이는 재현을 위한 지지체로서 회화의 개념을 넘어 김겨울의 그림이 이미지나 의미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님을, 나아가 의미가 소거된 언어와 사이 공간에서 발생하는 감각을 질료로 삼는 회화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서윤 〈산이 뱉은 물은 너무 무거워서〉 캔버스에 유채 90.9×72.7cm 2024
사진: 양이언 이서윤 〈첫페이지에 녹색을 띠고 발걸음 소리가 나는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캔버스에 혼합매체 194×30cm 2022
사진: 최철림

김겨울의 작업이 언어와 의미를 해체해 이미지로 감산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회화라면, 이서윤의 회화는 증식하는 방향에 가깝다. 이서윤은 자신의 작업에 대하여 “혹부리를 만드는 일” “매끈한 이 세계 안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한 지반을 다지는 행위”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좀비 포멀리즘’ 회화가 지나치게 매끄럽고, 감각적으로 정제된 표면을 통해 자본과 제도의 언어에 안착하는 방식이라면, 오늘날 어떤 회화들은 오히려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감각의 상태를 의도적으로 수용한다. 그런 면에서 이서윤의 회화는 ‘넘어지는 회화’다. 그것은 시각적 완결을 지향하지 않으며, 세계를 감각하는 몸의 휘청거림을 화면에 그대로 담는다. 붓은 물론 빗자루, 손가락 등 온갖 도구를 활용한 분투 끝에 만난 화면은 납작하지 않고, 세계를 의심하고 발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함께 괄목할 만한 것은 문장형의 긴 제목이다. 제목들만 이어 붙여도 단편의 발 없는 이야깃거리가 된다. 이 일련의 제목들은 그가 회화를 대하는 태도, 즉 세상을 관찰하고 발언하는 무대로 삼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한다. 책이나 라디오, 뉴스 등에서 본 문장과 직접 쓴 시, 일기를 발췌해 재조합한, 그러니까 ‘세상에서 수집한’ 문장들은 이서윤의 작업을 시대에 뿌리내리게 한다. 그의 작업은 “삶 속에서 느끼는 모순, 불편함, 부채감을 직시하고, 맞서기보다는 견디는 용기로 “좋은 회화의 상황”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과 수행 의지를 교차”시키며 시대를 선명하게 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것은 자신이 소유한 작은 지반을 상품화시키기보다는 넘어지고, 머물고, 귀 기울임으로써 사유의 감각적 형식을 실천하는 예술이라 할 수 있겠다. 유통됨에 머무는 감각이 아니라, 세계와의 대화를 요청하는 회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각기 다른 형식과 주제의 층위를 갖고 있지만, 김겨울, 이서윤의 회화는 모두 기술적으로 복제될 수 없는 감각, 언어로 치환할 수 없는 경험, 그리고 시간의 축적을 내포한 물질성을 통해 회화 고유의 사유 방식을 견지한다. 이들의 작업은 단순히 이미지나 형상의 제시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회화라는 매체 자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하나의 고유한 사고의 틀로 작동한다.

동시대를 산다는 것은 오랫동안 어딘가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 속에 사는 것과 같다. 실시간 무한 재생되는 콘텐츠들과 권태로이 반복되는 가상의 이미지들 속에서 이제 진정성이라는 단어마저 낡은 것이 된 듯하다. 또다시 누군가는 이 낡음 자체를 창작의 원료로 삼기도 하겠지만, 이를 낡음이라 정의 내리기 전, 그 의미가 성립하게 되는 전제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겠다. 어쩌면 그것은 시간의 흐름, 진일보를 믿는 세계관이 품은 환상의 잔재 아닐까? 일찍이 고유섭이 이야기한 입산불견산(入山不見山)을 나 또한 하나의 구실로 삼는다. 모두가 길을 잃은 것만 같은 미끄러운 정체(停滯)의 감각을 선사하는 이 시대를 그저 가벼이 다룰 수만은 없기에,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이들의 작업을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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