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층의 세계로부터

·《 알고 보면 반할 세계》

2025 월간미술대상 우수 전시 10

12월 특집기사 ⑥

동시대의 상상력은 무에서 새로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이미지·개념·형식의 조건을 다시 짚는 데서 출발한다. 민화의 기복과 해학, 주술적 상징은 현대의 소비문화와 디지털 언어 속에서 변형되고 재해석될 수 있다. 전시는 전통·아카이브·대중 이미지·디지털 전유 같은 익숙한 구조들을 조합하고 변주하며 그 의미의 기반을 흔든다. 있는 것으로부터 건져 올린 이미지는 변용과 확장을 반복하며 고정된 개념과 상을 흔들고, 이미지가 품고 있던 본질이 어디에서 다시 드러날 수 있는지를 묻는다.


《 알고 보면 반할 세계》
경기도미술관 2024.11.15~2.23
전시기획 | 방초아 전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지민석 〈스타벅스〉(왼쪽에서 두 번째) 캔버스에 아크릴 175×100cm 2024
《알고 보면 반할 세계》 경기도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사진: 박형렬 제공: 경기도미술관

‘민화와 K팝아트’라는 특징적인 주제의 전시에 착수하도록 나를 이끈 것은 ‘한국성’에 관한 호기심이었다. 동시대 미술에서 한국적 색채를 우연하거나 자연스럽게 또는 전략적으로 적용한 작품이나 전시들을 보면서 이러한 범주에서 한국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은연중에 맴돌았다. 그러던 중 경기도미술관에서 제안한 이 주제가 동시대 미술에서 한국적인 것을 탐구해 볼 기회가 될 것이라 여겨졌다. 한국성이라는 가없는 범주를 이 전시에서 확정할 수는 없으나 이 기회를 적어도 하나의 관찰지점으로 삼고자 했다. 대중문화와는 또 다른 맥락에서, 미술에서의 K의 면모와 여러 해석, 그 개념의 역사적·담론적·정책적 연원은 다양한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영역이다. 이는 서구 미술사적 맥락을 단순히 대입하는 것으로서가 아닌, 한국적 팝아트의 또 다른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연결의 중심에는 민화가 있다. 삶에 밀착된 그림으로서 조선 민화는 그 독창적인 표현만큼이나 균일하지 않은 방식으로 한국적인 장면과 상상들을 담고 있다. 얼핏 대중성이라는 공통점만으로 연결된 교집합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주제를 오히려 민화와 K팝아트, 나아가 예술과 한국성에 관한 담론을 다층적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계기로 삼았다.

김재민이〈소인 연구 중간 발표 소인에게 사랑을〉 혼합 매체 가변 크기 2024
사진: 박형렬 
제공: 경기도미술관

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시의 공간을 채우는 동적인 기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 흐름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전시의 중층적 세계관과 어우러지는 공간감의 구성과 작품 간의 조응을 중시했다. 특히 조선 민화와 동시대 예술작품이 전시의 세계에서 이루는 조화와 긴장의 관계 속에서 《알고 보면 반할 세계》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또한, 기획자의 문제의식이 전시를 추동하는 기제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수많은 난관이 있더라도 개막에 이르게 하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획자를 경유한 질문과 매혹의 장면들은 전시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공유될 것이다. 내가 보는 어떤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하는 바람으로, 어떤 것이든 그들의 경험 안에 의미 있는 지점이 하나라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했다. 이번 전시에서 동시대 미술의 관점에서 바라본 조선 민화의 특별한 매력과 가치, 또 그 관계에서 길어 올린 K팝아트의 색다른 가능성에 대해 화두를 나누고자 했다.

이수경〈쌍둥이 춤〉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1분 52초 2012
사진: 박형렬 제공: 경기도미술관

한편, 언제나처럼 전시는 기획자의 계획에 따라서만 돌아가지 않는다.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획자로서 매 문제의 과정에서 기획의 밀도를 다져나가는 과정은 중요하지만, 작품과 작가, 심지어 관람객에 앞서기보다 각자의 질문이 서로 환영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이번 전시의 과정은 특히 생소한 민화 유물을 포함하기에 시설, 예산, 관계자 등 변수가 많았으나, 여러 관계자의 협력 안에서 개막에서 종료까지 무사히 이르렀고, 이 유난하고 특별한 역동성이 전시의 운명과도 같았다. 이번 전시는 이 모든 과정이 쌓여 조선 민화와 동시대 예술이 공간 안에서 서로가 품은 질문을 들추어내며 관람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읽어갈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전시를 준비하며 기억에 남는 순간은 외부에 전시가 처음 공개되던 기자간담회다. K팝아트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개념이 단정적이지 않지만, 2000년대 초반의 한국 팝아트와 다르게 상상해 보는 지금을 제안하는 것이라 용기가 필요했다. 또 한편으로 현대미술 영역에서 주로 전시를 해왔으나, 조선 민화를 선별하고 동시대 미술의 맥락에서 선보이는 것이었기에 민화 애호가와 연구가의 관심과 동시대적 해석, 대중적 반응까지 고려했을 때, 그 공개가 꽤 긴장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백정기〈촛불 발전기와 부화기〉양초, 유정란, 열전소자,
방열판, 금속파이프, FRP 캐스팅 등 
가변 크기 2023
사진: 박형렬 제공: 경기도미술관

전시의 준비 과정에서 민화와 팝아트, K의 개념 등 하나의 범주로 정의되지 않는 담론들 사이를 오가며 내부 보고 단계마다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덕분에 전시의 기획이 더 촘촘해질 수 있었고, 전시의 제안과 질문에 관객의 다양한 반응과 의견을 맞이하는 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개성 있는 표현으로 삶 속에 영향을 미치는 민화와 같이 예술은 어디에나 그리고 여러 층위로 삶의 사유와 더불어 있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전하고자 했다. 나아가, 전시의 흐름에 따라 이상향과 현실, 현세 너머의 세계라는 복층의 시점으로 삶과 예술의 접점에서 사유의 폭을 넓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K아트와 관련해 샤머니즘이나 영적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져 왔다면, 민화와 더불어 해학적인 면모에 이르기까지 다각도의 측면을 드러내고자 했다. 팝아트로부터도 보다 역동적인 성찰로 이끄는 K팝아트로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했다. 전시에서 떠올릴 수 있는 질문들이 현실에서의 성찰과 맞물려 예술의 영역을 경험하도록 하고, 나아가 미술사의 한 편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이외에도 관객이 스스로 그 질문을 자유로이 넓고 깊게 발전시킬 수 있게 기획 과정이 고스란히 메모로 담긴 참고 자료와 아카이브 자료 등을 전시장에서 함께 볼 수 있도록 비치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전시의 내용에 대한 호응과 반문, 이어지는 질문 등 여러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삶의 주제와 연관하여 풀어냈던 기획인 만큼, 향후에도 관객들이 이 전시를 돌이켜보며 그때의 상황과 시기에 따라 또 다른 질문과 관심으로 이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전시의 과정과 그것을 형성하는 조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전시는 기획자의 의도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직·공간·예산·작가·대외협력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상황이 서로 얽혀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전시를 형성하는 여러 요소가 바로 그 전시의 형태에 이르도록 하는 것으로 보고, 이러한 전시의 역동적 관계망을 읽고자 하는 관점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방초아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삶과 공간에 관한 주제로 탐구하며 공공미술관의 프로젝트를 실천해 왔다. 경기도미술관 재직 당시 민화, 애니메이션, 벽화 등 다양한 장르를 동시대 미술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전시를 선보였다. 미술사와 예술학을 전공하고 한국 현대미술에서 여성주의 미술에 관한 논문을 썼다


관람객의 선택, 2025년 미술 현장을 말하다
오대우 널위한문화예술 공동대표

2025년은 유난히 풍성한 전시들로 기억될 한 해였다. 고전 거장들의 블록버스터 전시부터 동시대 미디어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기획들이 미술관 문턱을 낮추며 관람객들의 발길을 이끌었다. 실제로 팬데믹 이후 미술 관람객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추세 속에서 대중의 뜨거운 관심이 모이며 연일 화제를 낳은 전시도 다수 등장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월간미술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미술관객을 만나온 ‘널위한문화예술(이하 널위문)’이 의미 있는 시도를 함께하였다. 바로 월간미술대상 전시 부문에 ‘관람객이 선정한 화제의 전시’를 신설한 것이다.

1996년 시작된 월간미술대상은 그간 기자, 평론가, 큐레이터 등 미술계 전문가들의 시선을 통해 한 해의 중요한 작가, 비평, 전시를 선정하며 한국 미술의 굳건한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올해 신설된 부문은 여기에 ‘대중의 관심’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척도를 더하고자 했다. 비평적 성과뿐만 아니라 동시대 관람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적극적인 담론을 이끌어낸 ‘화제의 전시’를 관람객의 손으로 직접 뽑는다는 점에서 차별화를 두었다. 선정 과정에서는 객관성과 화제성을 동시에 확보하고자 했다. 2024년 6월부터 2025년 9월까지 국내에서 개최된 전시를 대상으로 널위문이 그간 구축해 온 소셜미디어 데이터와 월간미술 편집팀과 협의를 거쳐 22곳의 최종 후보를 엄선했다. 이 후보들을 대상으로 11월 16일까지 관람객들의 온라인 투표가 진행되었으며, 이번 투표에는 총 2,071명의 관람객이 함께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2025년을 빛낸 ‘화제의 전시 Top 5’가 선정되었다. 투표 결과는 그 자체로 2025년 미술계 현주소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표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ACC 미래상 2024: 김아영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는 영상·사운드·설치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감각적 서사로 팬데믹 이후 가속화된 배달 노동과 가상 세계의 문제를 풀어냈다. 관람객들은 작품을 ‘보는’ 것을 넘어 전시장 전체를 여행하듯 따라가며 거대한 세계관에 몰입하는 총체적 경험에 열광했다. 이어 강렬한 색채로 치유의 경험을 선사한 모다 갤러리의 《미셸 앙리: VIVID》가 이름을 올렸다. 원색의 에너지가 가득한 꽃과 풍경화들은 복잡한 담론이나 개념 대신 순수한 시각적 기쁨과 위로를 제공했다. 지친 현대인에게 ‘힐링’으로 작용한 이 전시는 예술이 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정서적 교감의 힘을 보여주었다.

론 뮤익〈매스〉(일부) 유리섬유에 합성, 폴리머 페인트 가변 크기 2016~2017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소장(펠턴 유증, 2018)
《론 뮤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2025
사진: 남기용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다음으로 대구 간송미술관의 개관전 《여세동보(與世同寶): 세상 함께 보배 삼아》는 『훈민정음 해례본』, 신윤복의〈미인도〉 등 교과서에서만 보던 국보급 문화유산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화제였다. 특히 서울이 아닌 대구에서 간송의 핵심 소장품을 만나는 ‘사건’은 지역 관람객들의 폭발적인 반응과 자부심을 이끌어냈다. 이와 함께 국립현대미술관 《론 뮤익》은 50만 관객을 돌파하며 이른바 ‘론 뮤익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구현된 거대한 혹은 작은 인체 조각들은 관람객에게 압도적인 시각적 충격을 선사했다. 익숙한 인간의 형상의 크기를 낯설게 변주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삶과 죽음, 존재의 연약함에 대해 철학적 사유를 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부산현대미술관의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이 선정되었다. 칸딘스키보다 앞서 추상화를 그렸다는 ‘재발견된’ 여성 작가의 서사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미술사적 의미와 더불어 신비주의와 영성을 탐구했던 작가의 독특한 작품 세계가 관람객들의 지적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이번 다섯 전시를 종합해보면 읽어낼 수 있는 특징은 명확하다. 바로 ‘다양성’과 ‘지역성’, 그리고 ‘서사성’이다. 첫째, 관람객들의 취향은 특정 장르에 편중되지 않았다. 최첨단 미디어아트(김아영), 감성적인 모던 페인팅(미셸 앙리), 국보급 고미술(간송미술관), 압도적인 동시대 조각(론 뮤익), 미술사적 재조명(힐마 아프 클린트)까지 그 스펙트럼이 그야말로 전방위적이다. 이는 한국 관람객들이 더 이상 ‘블록버스터’라는 이름값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다채로운 예술을 향유하는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탈(脫)서울’ 현상의 약진이다. 상위 5개 전시 중 3개가 지역 미술관(광주, 대구, 부산)에서 개최된 전시라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거리를 넘어 콘텐츠의 질이 담보된다면 기꺼이 KTX를 타고 ‘전시 여행’을 감수하는 적극적인 관람객층이 두터워졌음을 의미한다. 지역 미술관들의 수준 높은 기획력이 이뤄낸 쾌거이자, 문화 권력의 분산을 보여주는 긍정적 신호다. 더불어 대중투표를 통해 선정된 만큼 각 기관이 긴 시간 구축해 온 팬들의 애정과 신뢰의 척도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셋째, 관람객들은 ‘이야기’에 반응했다. 단순히 작품을 ‘보는’ 것을 넘어, 전시가 제공하는 총체적인 ‘경험’(김아영, 론 뮤익)에 몰입하고, 작품이 지닌 ‘서사’와 ‘유산’의 가치(간송, 힐마 아프 클린트)에 공감하며, 예술을 통한 ‘정서적 교감’과 ‘위로’(미셸 앙리)를 구했다.

‘2025 관람객이 선정한 화제의 전시’ 부문은 이처럼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대중의 목소리를 미술계 담론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첫걸음이다. 전문가의 비평과 대중의 열광이 함께할 때 한국 미술계는 더욱 풍부하고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관람객들의 뜨거운 참여로 완성된 ‘화제의 전시’ 목록이 2025년을 갈무리하고 2026년을 준비하는 미술계에 새로운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기를 기대한다.

2025년 12월호 (VOL.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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