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신 Yunshin Kim

절대를 향한 초월 의지:
김윤신의 회화-조각

ARTIST FOCUS

김윤신/ 1935년 출생. 홍익대 조소과 졸업,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조각과 석판화 전공 수학, 홍익대, 상명대, 성신여대 등 출강, 한국여류조각가회 설립 주도,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 후 멕시코, 브라질에서 재료 탐구를 지속, 200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김윤신미술관 개관, 《Kim Yun Shin》(국제갤러리, 2024 ), 《더하고 나누며, 하나》(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2023 ) 등 개인전 및 2024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한국 추상화가 15인의 어제와 오늘》(안상철미술관,2015 ), 《Green Life》(주워싱턴한국문화원, 2012 ),《스톤랜드》(익산 국제돌문화프로젝트, 2012 ),《Encuentro》(주아르헨티나한국문화원, 2011 ) 등 단체전 참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립현대미술관, 멕시코 국립현대미술관, 베이징 국제조각공원, 로사리오 중앙우체국 등에 작품 소장 사진 제공 : 국제갤러리

〈예감〉 시리즈 종이에 석판 1967
제공 : 작가

〈성좌의 신화〉
시리즈 캔버스에 잉크, 혼합 기법 90 × 70㎝ 1967

〈기원〉 콜라주
37 × 26㎝ 1984 제공 : 작가

절대를 향한 초월 의지:
김윤신의 회화-조각

김이순 | 미술사

I. 미술, 삶이 되다
요즘 미술계는 김윤신 신드롬에 빠진 듯하다. 이승택, 하종현 같은 원로작가들과 미술대학 입학 동기지만, 이 작가들에 비해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는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파리 유학을 다녀온 후 한국에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불현듯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물론 아르헨티나에서도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지속했고 한국에서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지만, 한국미술계에서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러던 그가 2021년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절대적 고립과 단절의 시간을 보내다가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2022년에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갤러리 반디트라소에서 한국과 아르헨티나 수교 60주년 기념 특별 초대전 《지금, 이 순간》이 열렸다. 코로나로 인해 조각 재료조차 원활하게 수급되지 못하던 시기에 폐목을 활용해서 제작한 김윤신의 조각 작품과 함께 최근의 회화 작품들을 선보인 전시였다. 이어 2023년 봄에는 국공립미술관으로서는 처음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기획전이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초기작부터 최근 작품까지를 아우르는 약 2개월간의 전시는 그의 진면목을 살펴보기에 충분했고, 이구동성으로 ‘작품이 좋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2024년 2월, 그는 창작의 거점을 국내로 옮기게 된다. 1984년에 아르헨티나로 떠난 지 꼭 40년 만의 귀향이다. 그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인 듯 국제갤러리와 리만 머핀 같은 대형 화랑들과 전속 계약을 맺었고,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주제전에 선정되는 등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는 생애 최고로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했다.

김윤신의 미술가로서의 삶은 70년 전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다. 작업하는 것이 너무 좋아 4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학교 실기실에 나갔다던 그는 대학 졸업 후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이 20대 여성 작가에게 도불(渡佛)은 결혼과 맞바꾼 것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1980년대 중반만 해도 여성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던 대학교수직마저 과감하게 포기한 채 그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곳에는 그가 전념하던 목조각 재료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물론 산으로 둘러싸인 한국의 지형과는 다르게 끝없이 펼쳐진 대지가 선사하는 자유로움과 여유로움도 간과할 수 없는 이유였다. 조각가로 출발한 김윤신은 아르헨티나에서 조각뿐 아니라 회화 작품도 함께 제작했다. 심지어 회화 작품의 수가 훨씬 많은데, 2006년 한 해에 제작한 회화 작품만 해도 300여 점에 달한다. 게다가 폐목을 활용한 최근의 목조각 작품은 표면이 완전히 그림으로 뒤덮여 있어 마치 회화 작품을 입체화해 놓은 것 같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회화-조각”이다. 그렇다면 김윤신의 회화는 어떤 과정을 거쳐 조각과 유기적으로 통합된 ‘회화-조각’에 이르게 된 것일까.

II. ‘회화-조각’에 이르는 여로(旅路)
김윤신이 회화와 조각이 완전히 결합된 ‘회화-조각’을 제작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이를 몇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960년대의 석판화, 1970년대의 캔버스에 오브제 ‘찍기’, 1980년대에 시작된 캔버스에 유화 그리기, 2015년 이후 목조각에 채색하기를 거쳐, 2021년 이후에는 폐목으로 만든 조각의 표면에 아크릴릭으로 그림을 그리기에 이른다.

1. 회화적 조각의 시원, 석판화
김윤신의 회화적 표현은 프랑스에서 석판화를 전공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1965년에 파리 에콜 데 보자르 조각과에 입학했으나 지도교수가 사망하면서 석판화로 전공을 변경하고, 석판화를 제작하면서 회화적 감성과 표현력을 키워나갔다. 또 조각가로 활동하는 동안에는 드로잉 작업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파리에서는 적잖은 선 드로잉 작업을 했다. 석판화 작품 〈예감〉은 최우수 학생 작품으로 선정되어 파리의 TV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는데, 동양의 태극문양처럼 보이는 소용돌이 형태가 조형의 기본을 이루고 화면 곳곳에는 빛이 확산하듯이 가는 선들이 퍼져 있다. 〈예감〉 연작 중 또 다른 작품 역시 기하학적 형태와 선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원과 마름모, 그리고 다양한 굵기 선들이 다이내믹하게 교차하고 있어 에펠탑의 철 구조물을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김윤신이 시각적 대상물을 묘사하는 데 거의 관심이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선 중심의 순수 추상 작품이다. 이렇듯 당시 석판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선은 일차적으로는 순수한 조형 요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둠을 뚫고 나오는 빛이자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적 에너지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김윤신의 회화와 조각에서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김윤신은 파리에서 석판화에 전념하는 한편, 파리의 미술관과 화랑에서 수많은 미술품을 접하면서 조형 감각을 키우고 표현의 폭을 넓혀나갔다. 달걀을 담는 포장재나 박으로 된 바가지를 깨뜨려서 아상블라주 기법으로 부조 작업을 시도하는 등 비미술적 재료를 이용해 다양한 조형 실험을 시도하면서 현대적 작가로서의 길을 닦아 나갔다.

2. ‘찍기’, 약동하는 생명의 흔적
1969년에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한 김윤신은 파리에서 제작한 석판화들로 파리 시절을 매듭짓는 귀국전을 열었다. 그러나 김윤신은 석판화를 지속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석판화를 찍을 수 있는 프레스기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판화기법을 응용한 여러 가지 표현기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일상적 오브제에 판화 잉크를 묻혀 도장을 찍듯이 캔버스에 찍어 표현하거나 천에 판화를 찍어서 캔버스에 오려 붙이는 콜라주 형식의 평면 작품을 제작하는 등,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이런 작업은 ‘캔버스에 찍은 판화’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1

1970년대 전반기에는 주로 일상의 오브제에 판화 잉크를 묻혀서 그 흔적을 캔버스에 남기는 회화 작품을 제작했다. 말하자면 판화의 ‘찍기’를 응용한 것인데, 1972~1973년〈성좌의 신화〉 연작처럼 스펀지에 물감을 묻혀 찍는 식으로 색면을 표현하는가 하면, 붓 뚜껑의 단면을 찍어 원형 패턴을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건축용 먹줄을 튀겨서 선을 긋는 등의 이색적인 방식으로 추상화를 제작하였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화면은 밤하늘의 수많은 별을, 혹은 송사리 떼가 몰려다니는 형상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수직선이나 수평선보다는 움직임이 내포된 사선을 주로 사용하고 있어 생명의 약동감(躍動感)이 느껴진다.

판화를 응용한 찍기 기법은 입체 작품에도 응용되었다. 1973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출품작인 〈평화를 사랑하는 자유인들의 영원한 수호신〉은 여러 개의 나무 상자를 조립한 십자가 형상의 작품으로, 앞서 언급한 표현기법과 함께 한지에 판화로 찍은 부적 같은 이미지를 조각의 표면에 붙여 동양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이는 회화와 조각의 결합을 보여주는 초기의 대표작으로, 최근에 제작한 ‘회화-조각’의 시원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조각 작품의 표면에 회화적인 표현을 가한 형식은 홍익대 소장 〈지향적 염원〉(1973)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화살표 같은 기하학적 형태가 작품 표면에 요철의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1975년에는 동일한 제목으로 화살표와 삼각형이 주를 이룬 기하학적인 추상 회화 작품〈지향적 염원 I. II〉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당시 김윤신에게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관심과 함께 ‘예술은 내적 영혼의 반향’이라는 종교적 인식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2 이때 형성된 예술관은 평생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1980년대 초에는 회화 작품을 활발하게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색면 추상의 유화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3. 조각과 회화의 만남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이후부터 김윤신은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염색된 천으로 콜라주 작품을 제작했다. 이전에도 천에 판화를 찍어서 콜라주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법상으로 새로운 시도는 아니었으나 그곳에서 발견한 새로운 재료를 회화적 표현에 활용한 것이다. 〈기원〉이라는 명제의 작품은 빨강, 녹색, 청색, 황토색의 천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잘라 붙인 색면 추상 작품으로, 앞서 살펴본 1975년 작품 〈지향적 염원〉과 조형적, 내용적 측면에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유가 나무였던 만큼 이주 초기에는 목조각에 전념했다. 동시에 멕시코와 브라질에서 생산되는 오닉스와 준보석으로 각 돌이 지닌 고유한 색과 무늬를 살린 조각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가 회화 작품을 다시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5년쯤 지나서였지만, 사실 그 이전의 조각 작품에서부터 이미 회화적 표현이 간취된다. 우선 목조각을 보자. 초기에는 원목을 전기톱으로 잘라 기본 형태를 만든 다음에 겉껍질이 없는 상태로 작품을 제작하여 재료의 고유한 색이나 무늬를 살렸지만, 이후에는 점차로 표면에 반복적으로 음각선을 새긴 표현이 눈에 띈다. 이러한 표현은 앞서 살펴본 석판화의 주된 조형요소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조각 작품에서 덩어리의 표면에 음각선을 긋는 표현이 1960년 작품 〈고대 신화〉라는 시멘트 작품에서부터 발현되었다는 사실이다. 한 쌍의 장승을 연상시키는 타원형의 이 작품들은 현존하지는 않지만, 표면에 선이 그어지고 청동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무 좌대는 둥근 끌로 표면을 파내 패턴을 넣거나 불로 그슬려서 회화적 효과를 냈다. 또 도불전에 출품했던 철 용접조각〈재생의 의지〉( 1962)는 삼족오 혹은 불사조의 형상인데, 표면에 철사 도막을 반복적으로 이어 붙임으로써 선적인 표현을 극대화했다. 이로써 보건대, 김윤신의 ‘회화-조각’은 단순한 영향 관계나 단선적 발전의 산물이 아니라 일찌감치 뿌려진 예술적 영감의 씨앗이 발아하여 자라나고 꽃을 피우는 방식으로 전개된 것이다. 김윤신이 다시 목조각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마푸체 원주민의 그림을 접한 2000년 즈음이다.

조각에서 회화적인 표현은 석조각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김윤신은 멕시코와 브라질에서 생산되는 오닉스와 준보석으로 조각을 하면서 표면을 곱게 갈지 않고 원석이 지닌 자연스러운 질감을 최대한 살려서 재료 자체의 내재적 아름다움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가 매우 회화적이다. 한 예로, 〈분이분일 합이합일〉(No. 719)은 반원형의 덩어리를 부채처럼 펼친 형태로 재단하여 기본 형태를 만드는 것 외에는 인위적 행위를 더하지 않았다. 매끈한 절단면에서 드러나는 원석의 보라색은 표면을 감싸고 있던 갈색과 흰색의 불규칙한 색 패턴과 조화를 이룬다. 이렇듯 김윤신은 오닉스와 준보석에 감추어진 신비한 무늬와 오렌지색, 청색, 붉은색, 보라색의 다채로움을 고스란히 살린, 회화성이 짙은 석조각을 제작했다.

1998년경부터 김윤신은 캔버스에 붓으로 그린 유화 작품을 적극적으로 제작했다. 낮에는 나무를 잘라 목조각을 하고 저녁에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식이었다. 무거운 전기톱을 들고 작업하다가 쉴 때는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으며, 심지어 여행을 할 때도 작은 캔버스를 마련해서 그림을 그릴 정도였다. 이렇게 제작한 캔버스화는 조각 작품 수를 훌쩍 넘어서 무려 1,000여 점에 달한다.

김윤신의 회화 작품은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 그가 회화를 본격적으로 제작하던 시기의 작품인〈환희〉(2002)를 살펴보면, 삼각형이나 원 같은 기하학적 형태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선, 혹은 불꽃무늬가 자유롭게 화면에서 유동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생기가 넘친다. 이러한 조형적 특징은 오브제를 찍어서 표현한 1970년대 초반 작품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지만, 그즈음 목조각에 반복적으로 그어진 사선들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 〈영원의 노래〉(2006)는 빨강, 노랑, 파랑, 청색, 녹색, 검정, 흰색 등 오방색 중심의 색을 주조로 하여 구체적 형태가 없는 반원형이나 직사각형의 색면으로 구성되었는데, 물감층을 나이프로 긁어서 선을 표현한 것이 특징적이다. 그는 물감을 바르는 작업과 함께 긁어내는 작업으로 잔잔한 선들을 수없이 표현했는데, 그 결과 화면이 진동하는 듯한 활기가 느껴진다.


1 「캔버스에 판화, 여류신작전 마련한 화가 김윤신씨」 『조선일보』1970.12.01 (5면)
2 「영원의 노래 · 김윤신 화업 60년」 『월간 춤과 사람들』 2015 p. 40

폐목을 활용한 최근의 목조각 작품은
표면이 완전히 그림으로 뒤덮여 있어
마치 회화 작품을 입체화해 놓은 것 같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회화-조각”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자유인들의 영원한 수호신〉
한지, 판화잉크, 나무 220 × 80 × 80㎝ 1973
제공 : 작가

〈지향적 염원〉
시멘트 220 × 80 × 80㎝ 1973 홍익대 소장
제공 : 작가

〈분이분일 합이합일 No. 719
재스퍼 
(Jasper39 × 61 × 29㎝ 2002
제공 : 작가

4. 고립된 세계에서 탄생한 ‘회화-조각’
팬데믹 시대에 김윤신은 새로운 표현을 모색했다. 관계가 고립되고 단절되는 초유의 상황 속에서 조각용 나무의 수급조차 원활하지 않자 그는 폐목을 활용하여 조각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종류의 폐목을 자르고 이어 붙여 ‘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해 여기에 채색을 더하게 된다.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나무토막을 결합했기 때문에 네 면에서 보는 형태가 다른 작품이 되었다. 피카소가 〈압생트 잔(The Absinthe Glass)〉(1914)을 큐비즘적 방식으로, 즉 보는 시점에 따라 형태와 채색을 달리하여 전혀 다른 작품처럼 보이도록 표현했듯이, 김윤신은 네 면에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려 넣음으로써 역동적인 ‘회화-조각’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와 함께 점과 선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회화 작품을 제작했다. 놀라운 점은 그 하나하나가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온갖 오브제에 물감을 묻혀서 찍은 흔적들이라는 사실이다. 흡사 나무조각을 붙여서 형상을 만든 것처럼 점과 선을 쌓아서 화면에 면과 공간을 부여했다. ‘찍기’라는 기법은 1960년대 석판화에 그 뿌리를 둔 것이다. 대형 캔버스에 일일이 수많은 점과 선을 찍어야 하는 수행(修行)과도 같은 작업은 김윤신에게는 일종의 기도였다. 실제로 그는 창작행위가 절대자를 향한 기도라고 생각했다. 화면 가득히 쌓인 수많은 점과 선들은 일정한 방향을 띠기도 하는데, 이는 은하수 같기도 하고 광활한 우주 속에서 빛을 발하는 무수한 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실제로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되었던 이 시기에 아주 어린 시절로 추억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엄마 등에 업혀 이사 갔던 안변(북한 강원도)은 산골이었는데 친구가 없어서 혼자서 수수깡으로 이런저런 물건을 만들며 놀았고, 밤에는 누워서 쏟아질 것 같은 별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고 한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일제 강점, 월남(越南), 전쟁, 이산 등으로 이어진 고통의 시간들이었지만, 그 시간을 추억하는 일은 그리움과 기쁨을 자아냈던 것이다.

김윤신의 작업 여정을 돌이켜 보건대, 이제는 그를 ‘조각가’로 규정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의 말대로, “그림을 해야 조각을 하고, 조각을 함으로써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무를 자르고 붙이듯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고 나이프로 긁어내면서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장르가 합일의 상태에 이르렀고, 이는 ‘회화-조각’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개화(開花 )했다.

III. 삶과 예술의 ‘합이합일(合二合一)’
1977년 즈음에 ‘합이합일’이라는 제목을 처음 사용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김윤신은 ‘합이합일 분이분일 (合二合一分二分一)’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주 만물은 음과 양의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철학적 함의를 담은 이 명제는, 통나무를 잘라 나눔(分)으로써 선과 면을 만들고, 이를 다시 공간과 합(合)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한다는 창작과정에서 시작된 개념이지만, 수없이 점을 찍고 선을 긋는 회화 작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점과 선, 그리고 다양한 색면은 구체적인 형상 없이 화면에서 자유롭게 유동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의 내면에 있는 원초적 에너지 내지는 생명력(그는 이를 ‘영(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 파동을 이루며 밖으로 표출된 형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라는 개념은 그의 작품세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삶과 예술은 두 영역이지만 김윤신에게는 삶(종교)과 예술이 평생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합이합일’은 그의 삶 자체를 압축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김윤신에게 예술적 창작 의지는 단순히 한 개인의 자아 성취 욕구나 타인과의 경쟁 관계에서 비롯되는 성취욕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김윤신의 창작 의지는 “절대자로부터 축복받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만약 그의 창작 의지가 세속적 명예나 인정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지구의 반대편에 위치한 아르헨티나에서 40년간 쉼 없이 창작에 몰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우리 앞에 놓인 그의 작품을 마주하노라면, “매일 매 순간 절대자와 대화를 나누듯이 기도 속에서 나의 조형언어는 시간과 유한성을 초월한, 작품 자체에뿐만 아니라 주위의 자연과 전체로 결합하는 총제적 합(合)과 분(分)인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란 연작으로 이어졌다.”는 그의 고백이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지금 우리가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삶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다시 삶이 되는, 둘이면서 하나이고자 하는 그의 초월의지에.


본 원고는 (재 )예술경영지원센터 ‘2024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기고이다.

3 「재료와 대화를 시도하다」 김윤신 작가노트 2022.3
4 「1세대 조각가 김윤신, “조각은 내 마음을 찾아가는 여정”」『아트 조선』 2015.6.15

국제갤러리 《Kim Yun Shin》설치 전경 2024
제공 :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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