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모 Jung Mo Kim
비생산성의 의례와 무형의 감수성:
김정모 작가론
조주현 한화문화재단 큐레이터
Artist

김정모/ 1980년생. 서울대 조소과 학사 및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글라스고 스쿨 오브 아트에서 석사 학위, 홍익대 미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더 화이트 큐브》(인스턴트 루프, 2019), 《Light Therapy Room》(리드빌딩, 글라스고, 2016), 《Good bye》(사이아트갤러리, 2013), 《Let me in》(우석홀, 2012)가 있다. 단체전 《드리프팅 스테이션》(아르코미술관, 2025), 《협업의 기술》(인천아트플랫폼, 2024), 《아트스펙트럼 2022》(리움미술관, 2022), 《RAINBOW TOMORROW: #내일의#무지개》(포스코미술관, 2021),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일민미술관, 2021), 《(_____) 관둬라》(백남준아트센터, 2018), 《관객행동요령》(SeMA 벙커, 2018), 《한강건축상상전》(문화비축기지, 2017), 《시간여행자의 시계》(문화역 서울284, 2017) 등에 참여했다. 레지던시로는 고양레지던시(2019), 인천아트플랫폼(2018),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2017), 아고라 에펙트(2015, 베를린)에 참여했다. 사진:박홍순
비생산성의 의례와 무형의 감수성: 김정모 작가론
조주현 한화문화재단 큐레이터
I. 프리즈 서울, 클라인의 금괴, 김정모의 시간 9월의 서울, 코엑스 전시장은 세계 미술 자본이 한국을 시험대 삼아 밀집적으로 교환되는 실험장이 되었다. 가고시안, 하우저앤워스, 페이스, 데이비드즈워너 같은 세계 최고의 갤러리들이 몰려들어, 부스마다 수십억 원대의 작품들이 오가는 열기로 가득 찼다. VIP 오프닝 날, 마크 브래드포드의 대형 캔버스가 450만 달러(약 62억6000만 원)에 팔리며 프리즈 서울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고, 조지 콘도의 신작과 루이즈 부르주아의 조각 역시 기록적인 속도로 거래되었다. 이곳에서 작품은 단순한 미적 대상이 아니라, 자본의 네트워크와 희소성, 그리고 세계적인 수요가 얽혀 만들어내는 가격의 메커니즘 속에서 가치를 부여받는다. 화이트큐브에 걸린 작품은 더 이상 고유한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금융 상품처럼 가격과 가치를 등식으로 묶는 시장의 언어 안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나 가격이 곧 가치로 등치되는 순간, 작품은 예술적 경험의 층위를 상실한다. 시장은 가격을 통해 작품의 위상을 규정하지만, 그 과정에서 작품은 자본의 지표로 전환되며, 감각적이거나 사유적 잠재성은 구조적으로 지워진다. 이 긴장은 1950년대 프랑스 예술가 이브 클라인(Yves Klein)이 전례 없는 실험을 통해 드러낸 바 있다. 1959년 3월 《움직이는 비젼(Vision in Motion)》에 참여한 클라인은 자신의 전시 공간을 텅 비워두고 작품을 거는 대신 오프닝에 모인 청중에게 “우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고 더 심오한 부재가 있고, 또 더 깊어진 청색이 있다”고 외쳤다. 작품은 어디 있는지 묻는 큐레이터에게 “여기, 바로 내가 말하고 있는 순간에”라고 답한 후 1kg의 순금 덩어리를 그 작품 가격으로 요구했다. 클라인에 따르면, 회화는 미술의 재(灰)일 뿐이며 그 정통적인 특성은 한번 창조되면 보이지 않는 것으로 회화적 감수성 안에서 물질로 환원된다. 따라서, 작가인 자신이 발언하는 순간 순수 물질(raw material)로서의 회화적 감수성이 특화되었고, 그 가치는 순금으로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1
클라인은 이 실험을 더욱 급진적으로 밀어붙여, “무형(비물질)”을 실제 경제적 거래와 의례 속에 위치시켰다.〈비물질적 회화적 감수성의 영역(Zone de Sensibilité Picturale Immatérielle)〉(1959)에서 작가는 물리적 대상이 없는 작품을 쪼개서 금값을 받고 판매하고, 금괴를 지불한 관객은 “무형의 영역”을 소유했다는 영수증을 받는다. 그러나 진정한 소유는 영수증을 불태우고, 클라인이 금의 절반을 센강에 던지는 의례를 통해서만 완성된다. 결국 남는 것은 물질도 기록도 아닌, 소각과 투척이라는 행위 그 자체이다. 이 의례적 퍼포먼스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작품”을 판매하는 엉뚱한 제스처가 아니었다. 클라인은 예술의 본질을 소유할 수 없는 것, 즉 공허와 감수성의 차원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클라인은 “작품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랜 질문을 가장 기묘한 방식으로 다시 던졌다. 그림도, 조각도, 설치도 없지만 그는 거래와 의례, 불태움과 흘려보냄을 작품으로 제시했다.
김정모의 작업은 미술품의 가치를 순수 교환가치로 분리해 낸 클라인의 실험을 동시대적으로 갱신한다. 그는 클라인이 열어젖힌 화두를 동시대적으로 다시 이어받으며, 예술의 가치와 비생산성, 무형성에 대한 질문을 오늘의 서울, 오늘의 미술 제도 속에서 다시 던진다. 2013년 본격적으로 한국 미술신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김정모는 제도와 시장이 만들어내는 효율적, 생산적 가치 체계에 균열을 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전개해왔다. 그는 계약서와 봉투, 줄을 서는 시간, 숨을 참는 퍼포먼스, 무심히 찍히는 발자국 같은 장치들을 작품의 중심에 배치한다. 이 장치들은 전통적인 예술적 매체와는 달리 성과를 산출하지 않고, 관객에게도 ‘소유’의 확실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은 낭비된 시간, 비어 있는 봉투, 무용한 제스처 같은 사소한 흔적들 속에서만 작품을 경험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김정모의 대표작들〈시간-예술 거래소〉(2022), 〈프로파간다 룸〉(2022), 〈당신의 발밑에서〉(2021, 2025), 그리고 최근작 〈비생산적인 미술을 위한 의식〉(2025) 을 경유하며, 그의 작업이 ‘비생산성의 의례’를 매개로 어떻게 오늘의 예술 제도를 교란 하고 새로운 감각적, 사유적 지평을 열어가는지를 추적한다.

〈시간-예술 거래소〉관객의 참여와 시간, 가변 크기 2022 《아트스펙트럼 2022》
리움미술관 전시 전경 2022

〈시간-예술 거래소〉 관객의 참여와 시간, 가변 크기 2022
II. 무용(useless)의 제스처, 소진의 장치들〈시간-예술 거래소〉에서〈당신의 발밑에서〉까지
2022년 리움미술관 《아트스펙트럼》 전시장 한가운데에는 단 한 사람씩만 입장할 수 있는 밀폐된 공간이 설치되었다. 증권사의 VIP룸을 연상시키는 그 공간은 김정모의 〈시간 예술 거래소〉였다. 입장을 위해 관객들은 길게 줄을 서야 했고, 대기한 시간만큼 계약서에 ‘지분’이 기록되었다.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관객은 작가가 제시한 안내문에 따라 작품 지분에 관한 양도 계약서에 서명하고 증명서를 교환하는 의례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 거래에서 화폐는 존재하지 않았다. 김정모는 교환 단위를 오직 ‘시간’으로 제시했다. 계약서는 거래의 형식을 흉내 낸 문서에 불과했고, 작품의 실체는 그 종이 위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작품은 이미 사라져버린 기다림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형성된 경험과 감각 속에만 자리했다. 자본의 논리가 가격을 통해 작품을 규정한다면, 김정모는 시간을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 시장의 언어가 지워버린 감각적, 사유적 층위를 되살린 것이다.
김정모의 작업은 대체로 사회적 모델의 시뮬레이션 형식을 따른다. 그는 거래소나 계약, 의례, 참여 같은 제도적, 사회적 장치들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효율적 시스템으로 작동하지 않고 언제나 불완전하고 낭비적이며 어쩌면 실패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로 그 ‘실패의 구조’가 그의 작품이 성립하는 핵심이다. 이때 중요한 키워드는 ‘낭비(dépense)’이다. 프랑스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 ( Georges Bataille)가 제시한 낭비 개념은, 효율과 생산을 넘어서는 잉여의 소진을 가리킨다. 태양이 끊임없이 과잉 에너지를 방출하듯, 사회와 인간 역시 필요 이상의 잉여를 만들어낸다. 이 잉여는 반드시 소진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축제나 희생, 예술과 같은 “의미 있는 낭비”로 이루어질지, 아니면 전쟁·폭력과 같은 “파괴적 낭비”로 폭발할지가 사회의 운명을 결정한다.2 클라인의 실험을 경유해 ‘비생산성’을 의식으로 선포함으로써, 김정모는 예술이야말로 가장 우아한 낭비임을 환기시킨다.
〈프로파간다 룸〉에서 그는 기후 위기라는 절박한 의제를 다루지만, 그 방식은 아이러니와 무용한 제스처로 가득하다. 관객은 ‘숨을 참아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구호와 마주한다. 과학적으로 아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은 은폐되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그 무의미함을 통해 기후 담론의 공허를 드러내고, 동시에 관객이 함께 무용한 행동을 수행하도록 요청한다. 숨을 참는 행위는 쓸모없지만, 그 무용함 속에서 관객들은 하나의 공동체적 감응을 경험한다. 이 역시 바타유가 말한 ‘낭비’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효율적이지 않음에도 소진과 손실을 통해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 있는 소진의 의례적 형식이라는 점에서, 김정모의 작업은 쓸모없음의 반복 속에서 예술이 어떻게 또 다른 힘을 획득하는지를 보여준다.

〈프로파간다 룸〉 혼합재료 가변 크기 2021 《Rainbow Tomorrow: #내일의#무지개》
포스코미술관 전시 전경 2021
올 상반기 아르코미술관에서 선보인 〈당신의 발 밑에서〉(2025)는 이러한 비생산성과 감응의 미학을 도시 생태의 맥락으로 옮겨놓았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은 무심코 흰 캔버스를 밟고, 캔버스 천 위에 이들의 발자국이 쌓이면서 점차 서울의 보호 야생생물 55종의 형상이 드러났다. 작가는 창덕궁, 청계산, 한강, 남산 등지에 서식해 온 동식물을 조사해 드로잉으로 옮기고 그것을 시트로 제작해 캔버스에 부착했다. 도시화와 개발로 서식지를 잃고 멸종 위기에 처한 생명들은 관객의 무심한 참여를 통해 비로소 가시화된다. 여기서 참여란 단순히 관객의 체험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여는 곧 작품을 이루는 필수적인 과정이며, 그 과정 속에서 관객과 비인간 존재들은 서로의 존재를 감응하게 된다. 발자국은 의도되지 않은 흔적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모여 사라져가는 생명들의 형상을 되살리는 순간,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비인간 존재들과 감응하는 관계의 장에 들어선다. 이 작업은 인천 간척 사업 이전 갯벌의 멸종 위기 생물들을 조사했던 그의 프로젝트의 연장선에 있으며, 개발로 인해 사라진 생명들을 기록하거나 복원하기보다 무심한 인간의 발걸음을 통해 다시 드러내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당신의 발 밑에서〉 캔버스 위에 발자국 가변 크기 2021
《Hidden Buddy, 숨겨진 존재》 연수갤러리 전시 전경 2021

〈비생산적인 미술을 위한 의식_봉투 디자인〉
트레이싱지 위에 디지털 프린트 23×19cm 20

〈Berlin, Street of Art(your choice)〉 퍼포먼스 2015
《The Waiting Room》아고라 콜렉티브 퍼포먼스 전경 2015
III. 비생산성의 주권과 무형의 감수성 〈비생산적 미술을 위한 의식〉(2025)
10월 15일부터 닷새간 진행되는 신작 퍼포먼스 전시《비생산적 미술을 위한 의식》(아트스페이스 Osisun 10.15~19)에서 김정모는 이러한 사유를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안개로 가득한 전시장에서 작가와 관객은 마주 앉고, 합성된 음성이 실현되지 못한 작품들의 이야기를읊조린다. 마지막에 관객에게 건네지는 것은 제목만 적힌 빈 봉투다. 봉투는 실체 없는 작품을 증명하는 기념물이지만 실제 작품은 오직 되돌릴 수 없는 경험과 감각의 순간 속에서만 성립한다. 오늘날 NFT와 같은 디지털 자산이 예술의 소유를 문서와 데이터의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과 달리, 김정모의 작업은 증거와 기록을 ‘보증’이 아닌 부재와 소진의 증명으로 전환한다. 그는 시간을 지분으로 교환하고, 숨 참기와 발자국을 작품의 매개로 삼으며, 효율과 성과의 언어가 예술을 포획하지 못하는 지점을 파고든다.
뜨겁게 요동치는 동시대 미술의 시장 한복판에서, 김정모는 오늘날 한국미술계에서 드물게 예술을 낭비와 무형성의 차원에서 다시 정의하는 작가다. 예술은 생산이나 축적의 논리 속에서가 아니라, 손실과 낭비, 결핍과 부재 속에서 살아난다. 클라인이 금괴와 영수증을 소각과 투척의 의례로 봉헌했듯, 김정모는 봉투와 계약서, 기다림과 숨 참기를 통해 예술을 무형의 감수성과 비생산성의 의례로 되살린다. 그 순간, 예술은 가장 무형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강렬한 현실로 존재한다. 관객이 남긴 발자국과 그 위에 드러난 멸종 생물들, 숨 참기와 기다림의 체험은 우리에게 묻는다. 예술은 무엇을 남기는가, 혹은 무엇을 잃게 하는가?
* 본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 기고이다.
1 Gilbert Perlein and Bruno Cora eds., Yves Klein : Long Live the Immaterial Delano Greenidge 2000 p.221
2 Georges Bataille The Accursed Share: An Essay on General Economy Vol. 1 New York: Zone Books 1991 (1949년에 출판된 프랑스어 원문 저서 La Part Maudite의 영어 번역본이다)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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