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희 & 윤난지
김홍희 & 윤난지의
허스토리(Herstory)
The Interview
김홍희/이화여대 불문과 학사, 캐나다 콩고디아 대학원에서 미술사 석사,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1회 월간미술대상(큐레이터 부문, 1996), 석주미술상(평론부문, 2003), 대통령 표장(1996) 등을 수상했다. 쌈지스페이스 관장(1998~2006), 경기도미술관 관장(2006~2010), 서울시립미술관 관장(2012~2016)을 역임했고,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2000),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2003), 광주비엔날레 총감독(2006)을 지냈다. 《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예술의전당, 1993), 《여성, 그 다름과 힘》(한국미술관, 갤러리 한국, 1994)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저서로 『페미니즘·비디오·미술』 (재원, 1998), 『굿모닝 미스터 백』 (디자인하우스, 2007), 『큐레이터 본색』 (한길아트, 2012), 『페미니스트 미술 읽기』 (열화당, 2024), 『Korean Feminist Artists: Confront and Deconstruct』 (파이돈, 2024) 등이 있다.
윤난지/이화여대 미술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했고 이화여대박물관 관장 (2001~2005)을 지냈다. 석주미술상(평론부문, 2000), 석남미술이론상(2007), 한국미술저작출판상(2021)을 수상했다. 저서로 『현대미술의 풍경』 (한길아트, 2005), 『추상미술관 유토피아』 (한길아트, 2011), 『전시의 담론』 (눈빛, 2017),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한길사, 2018), 편저로 『그들도 있었다 1·2』 (나무연필, 2024) 등이 있다.
김홍희 & 윤난지의 허스토리(Herstory)
심지언 편집장
올가을 한국 여성미술가를 정리한 책『페미니스트 미술 읽기』와『그들도 있었다 1·2』가 나란히 출판되었다. 한국미술 현장과 여성미술을 연구하고, 작가들과 함께 현장을 만들어 온 김홍희, 윤난지 두 연구자의 오랜 경험과 연구가 바탕이 된 질적, 양적으로 묵직한 의미가 있는 저서이다. 올해 한국미술 현장은 여성미술, 여성의 시각을 조명하는 미술관 전시와 더불어 한국 여성 작가들의 활발한 해외진출 등 ‘여성미술가’들이 주목받았다. 이러한 시점에 한국 여성미술의 역사와 현장을 정리한 저서가 출간되어 전시와 담론의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 두 저자를 만나 신간과 ‘여성’ 그리고 ‘미술’과 함께 해온 그간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란히 출간된 두 권의 한국 여성미술가 연구서
『패미니스트 미술 읽기』와 『그들도 있었다 1 · 2』가 나란히 출간되었습니다. 두 권 모두 신문 연재, 그리고 연구모임과 칼럼을 통한 오랜 시간의 연구와 준비과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먼저 두 분은 왜 여성 작가에 주목하게 되었는지 질문드립니다. 그리고 책의 출판 배경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윤난지 페미니즘 미술이론을 공부하면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나의 공부와 불가분리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도 있었다』는 페미니스트 작가를 연구한다는 접근보다 린다 노클린의 질문인 “왜 미술사에는 위대한 여성미술가가 없는가”를 우리 근현대 미술사에 적용한 것으로, 모든 여성미술사학자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인 것 같아요. 여성미술가도 분명히 ‘있었고’, 그들의 작업도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죠. 이 책은 여럿이서 함께 한 일로 저는 화두를 던지고 다양한 필진이 다양한 각도로 여성 작가들을 호명하는 과정을 함께한 것입니다. 제목 그대로 여성미술가들도 남성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김홍희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여성의 시선과 삶의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여성은 이 다름을 극복하고자 하는데, 그것이 차이가 아니라 차별적인 인식이 있었기에 젠더 평등을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항상 생각해왔다고 봐요. 여성 의식,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남성과 차이를 말하고, 또 그들의 작업을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 이유가 되겠죠.
지난 30년간 큐레이터, 평론가, 미술사가로 여성미술, 페미니즘 미술과 행보를 같이해 온 것이 책을 쓰게 된 배경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여성미술 혹은 페미니즘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재조명받는 분위기가 형성됐어요. 이럴 때 여성 작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앞으로 여성미술은 어떻게 흘러갈까 하는 질문과 해답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신문사 연재 요청이 와 페미니즘 미술에 대한 연재를 17회에 걸쳐 진행했어요. 신문원고에서 출발하였지만 주석도 달고 내용을 심화시켜 열화당과 파이돈에서 두 권의 책을 국-영문으로 동시에 출판하게 되었어요.
『그들도 있었다 1 · 2 -한국 근현대 미술을 만든 여성들』 (나무연필, 2024, 사진 왼쪽),
『페미니즘 미술 읽기 :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저항과 탈주』 (열화당, 2024, 사진 오른쪽)
한국의 여성미술가를 다룬다는 공통점 외에 책의 구성과 서술에 큰 차별성이 있습니다. 책의 구성과 특성에 대해 각자 소개 부탁드립니다.
윤난지 20세기 주요 여성미술가들을 호명하는 것이 『그들도 있었다』의 일차적 목표였어요. 누가 있는지 미술사에 호명되어야 작업의 예술적, 미술사적 의의가 논의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죠. 그래서 현대미술포럼의 연구자들과 작가를 선정하는 과정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 책은 53명의 필자가 함께 쓴 것으로, 105명 작가와 필자들의 대화이자 편집진의 지속적인 대화로 탄생했습니다. 2020년 2월부터 3년 3개월간 『서울아트가이드』에 칼럼으로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하고, 내용적으로 작품세계뿐 아니라 작가의 전 생애에 걸친 활동을 포괄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김홍희 매회 화두 중심으로 2~3명의 작가를 매칭하는 방법으로 진행했던 신문연재를 따라 단행본 『페미니즘 미술 읽기』도 페미니즘이 당면한 주요 화두 15가지를 설정하고 그에 부합되는 작가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42명의 여성 미술가들을 초대했습니다. ‘담론 들여다보기’, ‘현장 내다보기’를 두 축으로 화두와 작가를 교차, 병치하는 매핑 방식을 취했더니 연대기적 서술과는 결이 다른 프리즘 효과가 발생했습니다.
같은 화두에 배정된 작가들의 동질성과 차이가 페미니즘의 다양성과 복수 음성의 메시지를 동시적으로 발산하는 듯했고, 화두와 작가의 조합마다 달라지는 분절적이고 분산적인 배열로 인해 각 장에 독립성이 주어져 앤솔로지처럼 순서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장점도생겼습니다.
이 책은 본문을 중심에 두고 이를 돕는 글 두 편을 앞뒤에 배치했습니다. 서문「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흐름」에서는 페미니즘 미술 운동의 발아기인 1980년대 중반의 민중계 페미니즘으로부터, 1990년대~2000년대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거쳐, 2010년대 이후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리부트된 소위 ‘넷페미’ 현상을 짚어 보았습니다. 후기에서는 페미니즘 미술의 역사적 연속성을 가시화하기 위해 근대기 여성 운동과 여성 화단의 ‘허스토리’를 재조명하고,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문을 연 나혜석과 천경자의 작품세계를 소개했습니다.
책 집필과 발간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또는 가장 인상적인 작가나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케이스가 있나요?
윤난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작가도 많고, 알고 있었지만 작업세계를 재발견한 작가도 많습니다. 저는 조각가 김윤신을『월간미술』2022 년 8월호 기사에서 발견했어요. 기사를 보고 전시장을 찾아가 작가를 만났어요. 그 기회에 김윤신을 책에 포함시켰고, 그 외에 양광자, 이향미 등의 작가도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죠. 우순옥, 민영순, 이수재 등은 인연이 있었으나 이 프로젝트를 통해 작업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집필 중에 돌아가신 작가도 있고, 몸이 많이 편찮으신 분도 계세요. 책의 제작이 미술사적이고 비평적인 관점이 동시에 동원되어야 하지만 아무래도 미술사에 가까운 작업이기에 편견 없이 작가를 선정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김홍희 15개 챕터 중 ‘불편함의 미학–정서영, 김소라, 양혜규’ 챕터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어요. 세 작가의 작품이 난해하고 페미니즘으로만 독해할 수 없는 어떤 소통 불가능성을 가진 작품이라 거기서 무엇을 더 끌어낼지 고심을 많이 했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에 남아요. 페미니즘의 지평을 넓히는 확장성의 맥락에서 볼 때, 이들의 작품은 시사하는 바가 컸어요. 페미니즘과 무관해 보이는 이들의 작업에서 아이로니컬하게도 페미니즘 독해가 가능한 미학적 특성과 정치적 메시지가 발견되고, 페미니즘이란 결국 젠더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을 넓혀주는 인식론이라는 점을 확인시킨 점에서 비평적 흥미를 느낀 것입니다.
윤난지 교수가 후배, 제자들과 진행한 2017년 1월의 읽기모임
제공 : 윤난지
서로의 책에 대한 추천의 말씀 한마디씩 주신다면?
윤난지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큐레이터가 현장에 대한 생생한 체험에서 건져낸 한국 페미니즘 미술에 대한 이론서이자 한국 페미니스트 미술운동을 기록한 미술사 책’으로 정리해 봤어요. 혼자 오롯이 써낸 김홍희 선생의 책과 저희 책이 함께 이야기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죠.
김홍희 50명 이상의 필자와 105명의 작가를 다루는 책을 만드는 건 커다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카리스마가 필요한 일입니다. 각각의 소리를 하나의 화음으로 만들어내는 지휘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신 것을 축하드려요. 작가는 전시를 통해 성장하듯 평론가는 글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완결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성장해요. 책이 출간되면 다음 방향이 또 설정되죠. 이런 점에서 책의 출간을 함께 자축하고 싶어요.
기획자 그리고 미술사가로서의 김홍희와 윤난지
김홍희 선생은 백남준 선생과 남다른 인연이 있습니다. 지금의 김홍희를 있게 한 사람 중 한 명이 백남준이 아닐까 하는데, 백남준 선생이 본인에게 끼친 가장 큰 영향은 무엇인가요?
김홍희 백남준 선생은 한국미술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위해 공헌하신 분이에요. 광주비엔날레 창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개설뿐 아니라 젊은 작가, 큐레이터들을 위한 울타리 역할을 많이 해 주셨어요. 저도 그 수혜자 중 한 명이죠. 백남준의 예술적 태도와 그 치열한 삶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무엇보다 기획의 의미와 노하우를 알게 되었어요. 그가 감독을 맡은 제1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인포아트》가 말해주듯이, 그는 단지 작품 제작자가 아니라 스스로 큐레이팅하는 치밀한 기획자였어요.
그리고 저에게 많은 기회를 주셨는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며 개최한 국제 심포지엄에 무명의 김홍희를 발제자로 초대해 처음 미술계에 등단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셨죠. 제가 박사논문 주제로 페미니즘을 선택한 것도 백 선생이 힌트를 주신 거예요. 백남준은 항상 존 케이지가 자기 인생을 바꿔 놓은 운명적인 사람이라고 하는데, 저에게는 백 선생이 존 케이지와 같이 길을 터준 은사, 멘토이죠. 백 선생께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후배들, 젊은 큐레이터들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미래의 한국미술을 끌고 갈 사람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을 다하자. 바로 백 선생께 배운 태도죠.
윤난지 선생께서는 사회학을 전공한 후, 미술사 공부를 시작하셨는데 무엇이, 혹은 누가 교수님을 미술사의 길로 이끌었나요?
윤난지 저는 어려서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학창 시절 교과서를 받으면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미술책이었죠. 그런데 부모님 권유로 문리대 사회학과에 입학했어요. 대학에 입학해서도 미술부 활동을 하고, 이종무 선생의 아틀리에에서 구상미술을 배우며 미술 관련 책도 탐독했어요. 당시 현대화랑에서 김구림, 천경자, 이우환, 장욱진 전시를 본 기억도 있습니다. 미술사라는 학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대학시절 유학 준비하면서 도서관의 외국 대학 브로셔를 통해서였어요. 사회학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이걸 계속해야 하나 하는 회의가 드는 거예요. 그래서 서양화과 석사 과정을 들어갈까 하고 학교를 방문했는데 미술사학과가 생겼더라고요. 미술을 정말 좋아하는데 실기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고, 결국 내가 해야 하는 건 미술사가 아닐까 해서 본교 미술사학과 현대미술 전공에 진학하면서 미술사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죠.
제1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인포아트》 광주시립미술관 1995 백남준과 아베 쉬아
제공 : 김홍희
김홍희 선생께서는 1990년대 이래 여러 여성주의 미술 전시를 기획하고 관련 저술을 이어오셨습니다.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용어를 한국에서 처음 사용하셨는데, 당시의 여성주의 미술과 ‘페미니즘’이라 지칭한 여성 작가들의 활동은 어떤 차별성이 있었나요?
김홍희 페미니즘이 외래어잖아요. 우리말로는 여성주의 혹은 여권주의인데 이는 여성 분리주의, 여성 중심주의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어, 1970~1980년대의 민중계 페미니즘에는 잘 맞는 용어 같습니다. 외국 경우도 여성 중심주의, 이분법적 분리주의로 출발한 초기 페미니즘을 생각하면 여성주의라는 번역어가 맞겠으나 1990년대 이후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에는 합당하지 않아 보여요.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에 의문을 던지며 남녀 이분법을 해체하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에는 이념적 여성주의보다는 페미니즘이 적합해 보여 저는 외래어이지만 페미니즘이란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어요.
윤 교수께서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이화여대 박물관장을 지내셨습니다. 미술사가로서 박물관장의 경험은 어떠했나요?
윤난지 저는 리더십이 없어서 직책을 맡는 일을 무척 힘들어했어요. 박물관장도 여러 번 거절하다가 결국 맡게 되었는데 현대미술사가가 박물관장 역할을 하려니 내용, 행정력 등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돌이켜 보니 미술사가로서 처음 기획한 전시가 여성미술에 대한 전시더라고요. 《또 다른 미술사: 여성성의 재현》(2002)으로, 남녀 미술가를 막론하고 페미니니티(femininity)를 어떻게 재현했는가에 주목했어요. 제 전공을 박물관 공간 안에서 실현한 것이 박물관장으로서 첫 전시였어요.《시간을 넘어선 울림 : 전통과 현대》(2005)에서는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함께 전시했고, 《미술 속의 만화, 만화 속의 미술》 (2003) 과 같은 전시를 통해 현대 작가들과 박물관에서 전시하며 동서고금 미술사를 하나로 보는 관점을 형성했어요. 더불어 박물관의 현대미술 컬렉션을 보강하고 현대미술 전공 큐레이터도 증원해서 박물관을 현대화하는 작업에 일정 부분 기여했습니다. 힘들었지만 값진 경험이었죠.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전위미술의 메카로 부상한 홍대 앞 문화지형도에서 쌈지스페이스가 차지하는 의미와 위상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미술관과 상업화랑이 할 수 없는 틈새 역할을 하며 입주작가 프로그램을 통해 현재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작가로 성장한 이불, 정연두, 박미나, 박찬경 등을 지원했습니다. “아방가르드의 메카를 꿈꾼다” 던 김홍희 선생의 포부는 어떤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홍희 대안공간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 쌈지스페이스를 열었어요. 그러나 쌈지스페이스를 10년간 운영하면서 대안 자체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어요. 당시에 쌈지스페이스, 풀, 루프와 같은 대안공간은 신세대 작가들의 온상이 되었죠. 그전에는 중진과 원로작가의 시대였다면, 대안공간이 등장한 이후 청년 작가, 신세대 작가들의 시대로 전환되었어요. 신세대가 미술계의 주류로 부상하면서 미술계 지형도 대폭 변화됐죠. 특히 쌈지스페이스는 스튜디오와 함께 국제 레지던시를 운영하면서 해외 작가들을 받아들이고, 외국 큐레이터들이 쌈지를 방문하여 그곳 작가들은 비엔날레 등 국제전에 초대하면서 동시대 해외 교류의 보루가 되었어요.
이제까지 활동을 돌아본다면, 스스로에게 가장 의미있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윤난지 저는 연구자이다 보니 읽기 모임으로 출발한 현대미술포럼의 활동을 의미있게 생각해요. 그중『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는 읽기 모임에서 1995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였어요. 1980년대 중엽부터 국내에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모두 뭐가 뭔지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자료도 다 영문이었어요. 그래서 읽기 모임에서 함께 공부한 것을 책으로 만들어 여러 사람과 공유한 것이 1990년대의 작업으로 저에게 굉장히 값진 경험이었어요. 저와 제자들도 공부가 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도 공부하게 한 자료죠. 다음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는 한국미술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또 스스로 공부하면서 쓴 책으로 큰 애착을 가지고 있어요.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이 반영된 미술사 책이라고 할까요.
김홍희 저는 백남준과 비디오 아트, 그리고 페미니즘 미술을 두 축으로 책을 내고, 전시와 비평 활동을 해왔습니다. 첫 활동으로 1993년 3월《플럭서스 페스티벌》을 한국에 유치했어요. 플럭서스 오리지널 멤버들을 초청한 아시아 최대 규모의 플럭서스 측제였지요. 이불, 홍신자 등 내노라하는 한국 아방가르들도 공연에 참여하여 행사를 빛내주었어요. 플럭서스와 같은 미술사적 아방가르드를 한국에 초청한 대규모 국제행사가 큐레이터로서 입문한 저의 첫 경험이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백남준 전시를 수 차례 했습니다만, 그중 스페인의 국제 아트페어인 아르코(ARCO)에서 한《환상적이고 하이퍼리얼한 백남준의 한국비전》(2007)이 가장 의미있었던 전시 같아요. 유럽에서 개최된 백남준 전시는 대부분 유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컬렉션으로 이루지는데, 이 전시는 한국에서 백남준이 제작하여 삼성, 효성, 민속촌 등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가져가서 전시했어요. 외국에서 보여지지 않은 한국발 작품이라는 점에 방점을 둔 것이었죠.
그리고 여성 전으로는 1994년《여성, 그 다름의 힘》과 1999년《팥쥐들의 행진》을 꼽을 수 있는데, 당시 민중미술 대 모더니즘, 진보 대 보수와 같은 화단의 이분법을 초월하여 양진영의 여성작가를 고루 초대한 통합의지에서나 여성미술의 다양성을 보여준 점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페미니즘 전시로서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서울시립미술관장, 경기도미술관의 관장으로 공립미술관을 지휘했습니다. 공립미술관 관장으로서의 그간의 활동에 대한 소회는 어떠신가요?
김홍희 쌈지스페이스 같은 대안공간에서 공립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보니, 미술관이 대안적으로 변화해야 화단이 변한다는 생각이 절실했어요. 대안공간 수장이나 독립큐레이터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 미술관을 운영하면 미술관 개혁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요. 독립군적인 비전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어요. 공공미술관에 있으면서 제일 안타까웠던 것은 공무원 조직과 전문직의 마찰과 불화였어요. 양측을 화해시키고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로 바꾸어 나가다 보니 일에 능률이 생기고 미술관 개혁에 고삐를 당길 수 있었어요.
경기도에서 5년, 서울시립에서 5년, 그리고 쌈지스페이스 10년, 합치면 20년간 미술 기관을 운영하다 보니 포스트 뮤지엄에 대한 독자적인 비전이 생겼어요. ‘뮤지엄을 넘어서는 뮤지엄’이라는 의미의 포스트뮤지엄은 정보화, 다문화, 세계화 시대에 맞게 미술관도 변화해야 한다는 문화정치학적 인식에서 출발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뮤지엄으로 상정된 것이예요. 해체주의 시각, 복합학문적 태도, 공동체 의식에 기초하여 탈중앙화와 분권, 공유와 개방, 타자 배려를 키워드로 삼는 포스트뮤지엄 문제의식에서 뮤지엄 개혁을 도모한 것이지요. 이를 위해 미술관이 직영하는 레지던시와 비엔날레와 같은 대안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이죠. 이것이 경기도미술관 재직 당시 경기창작센터를 설립한 배경이예요.
윤난지 교수께서는 2019년 오랜 교직 생활을 마치고 은퇴하셨습니다. 제자들과 깊은 유대를 이어온 교수님으로 정평이 나있는데요, 교직 생활에 대한 감회가 궁금합니다.
윤난지 저는 이화여대를 떠나본 적이 없어요. 학부, 대학원, 석·박사, 강사, 교수까지 1972년부터 2019년까지 47 년 동안 수업하고 논문지도하고 논문쓰기를 이대에서 지속해왔어요. 돌이켜보니, 나의 삶은 여성으로서 여성들과 함께 미술사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학교를 떠나며 제자들에게 한 말이 “미술사도 사람의 일이다.”인데, 나는 여성이라는 ‘사람’으로서 여성을 포괄하는 모든 ‘사람’의 일인 미술사를 공부하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몰두해왔습니다. 내가 제자들과 깊은 유대를 이어온 건 이런 여성적 연대 의식의 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990년대라는 교차점
두 분은 동료, 후배, 제자 등과 함께 다수의 번역서와 공동 저서를 발간했습니다. 두 분이 발간한 출판물은 당시 현장에서 접하기 드문 내용으로 관계자들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먼저 윤난지 선생께 질문드립니다. 현대미술사를 연구하는 여성 연구자들의 모임인 ‘현대미술포럼’을 1995년 이래 이어 오셨는데요, ‘현대미술포럼’의 출발과 활동, 출판물 등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윤난지 현대미술포럼은 1995년 후배, 제자들과 포스트모던 이론 원전 읽기 모임으로 시작해 함께 번역하며 읽은 내용을 모아 여러 권의 번역서를 출간했습니다. 그중『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는 개역판을 최근 5쇄까지 출판했어요.『전시의 담론』 ,『페미니즘과 미술』 ,『공공미술』 ,『추상미술 읽기』등 편역서 다섯 권을 함께 출판했고,『그들도 있었다』 등 공저 6권을 출간하며 연구실적을 풍부히 쌓은 모임이죠. 이름이 ‘읽기 모임’이었다가 공식 명칭이 필요해‘현대미술포럼’으로 정했어요. 이렇듯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유동적인 모임이라는 점에서 ‘여성적’ 모임이라 할 수 있어요. 가입과 탈퇴 절차도 없고 고정된 회원 명부도 없어요. 사안마다 자유롭게 참여하고 있죠. 특별히 여성, 여성성을 의식했다기보다 모임 자체가 여성들로 구성되다 보니 자연히 여성적인 특성을 보이게 된 것 같아요. 시작도 끝도 불분명한, 모든 종류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동적이고, 열린’ 모임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김홍희 선생이 동료, 후배 기획자들과 함께 출판한『큐레이터 본색』은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해 주었고,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에서 번역한『라운드 테이블_1989 년 이후 동시대미술 현장을 이야기하다』는 미술관 학예팀의 연구 기능을 다시금 강조하며 동시대의 화두를 번역한 책입니다. 이렇듯 다양한 후배, 동료들과 현장 중심의 책을 발간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김홍희 1990년대 중반경 한국에 큐레이터라는 새로운 직업군이 등장했지만, 그 역할이나 미술계 내의 포지션은 무척 애매모호한 상황이었어요. 백남준 선생이《인포아트》로 월간미술대상 큐레이터 부문 대상을 공동 수상하시면서 소감으로 “큐레이터는 아티스트 만큼 크리에이티브한 직업입니다… 협업, 교류, 소통에 근간하는 큐레이팅은 사회적인 행위입니다” 라고 피력했어요. 큐레이터에 대한 백선생의 시각을 환기하며 저는 2012년『큐레이터 본색』이라는 앤솔로지를 펴냈어요. 현역 큐레이터의 현장 경험을 모아보면 그 실제가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죠. 참여 큐레이터들이 호응하며 본인들의 경험과 비전을 풀어내 주어 책을 기획한 의도가 잘 살아났어요.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출판한『라운드 테이블』은 큐레이터 재교육을 위한 스터디 그룹으로 시작된 프로젝트인데, 자발적으로 참여를 원하는 큐레이터를 중심으로 진행했어요. 학예사로서 미술관 업무 외에 새벽 일찍 출근하거나 밤늦게까지 시간을 들여가며 정말 열심히 공부한 결과입니다.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한 권의 책으로 끝났지만, 시도 자체는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플럭서스 서울 페스티벌》 예술의 전당 1993
제공 : 김홍희
두 분의 교차점을 몇 군데에서 발견하게 되었는데요, 그 중 하나가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읽기’입니다. 김홍희 선생께서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재직 시《X: 1990년대 한국미술》의 부대 심포지엄으로 현대미술포럼과 공동 주관한 프로젝트입니다. 미술관과 연구모임이 공동 주관한 심포지엄의 의미와 성과는 무엇이었는지요?
김홍희 미술관과 포럼의 협업은 당시 미술관에서 미술단체, 재단, 기업 등과의 협업하면서 새로운 거버넌스를 만든 한 사례였어요. 그 외에도 전국의 공립미술관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컬렉션과 전시를 교류하며 미술관을 거버넌스 운영체제로 바꾸려 시도했었죠.
윤난지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 읽기’는 미술현장과 학술, 이론 분야를 연결한 시도였죠. 즉 포럼은 연구를 현장으로 확장하고, 미술관은 학술과 연구 기능을 확대해 이 둘이 다른 것이 아님을 보여줬다고생각합니다.
1990년대는 한국미술의 전환점이자 두 분이 왕성히 활동한 시기입니다. 두 분이 체험하신 1990년대 한국미술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윤난지 1990년대 한국미술을 얘기하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인 동시에 2000 년 이후의 미술을 준비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사진, 비디오, 전자 매체 등 다양한 매체와 기법, 경향 그리고 다양한 배경의 작가들이 등장했고 최정화, 이불 등 신세대 작가들이 두각을 드러내면서 전시가 폭주한 시기였죠. 국립현대미술관의《젊은모색》도 그때 생기면서 미술관이 좀 젊어졌다고 할까, 그야말로 신세대 미술, 페미니즘 미술의 시대였고, 작가와 이론가, 비평가들이 굉장히 긴밀했던 시기였어요.
김홍희 1990년대를 겪어본 사람은 모두 윤 교수와 같이 생각할 거예요. 제 중심으로 볼 때 비디오아트와 페미니즘이 뿌리를 내린 시기고 또 대안공간과 함께 신세대 미술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몇몇 작가들의 글로벌 활동이 시작됐죠.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1990년대는 백남준의 한국 활동기라는 점이예요. 백남준이 1984년〈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한국에 상륙하고 1990년대에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한국미술의 선진화에 크게 공헌했어요. 그 영향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1990년대는 아직도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서울시립미술관과 현대미술포럼이 공동 주관한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읽기’ 2016
제공 : 윤난지
한 걸음 물러서
두 분은 월간미술과도 인연이 깊으십니다. 김홍희 선생은 1996년 1 회 월간미술대상 큐레이터 부문 대상을 받으며 기획자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고, 윤난지 선생은 2020년 ‘1990년대의 작가들’ 연재를 총 20회 이어가며 필자로 함께 해 주셨습니다. 미술전문지 월간미술에 기대하는 바, 또는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윤난지 저는『계간미술』때부터 구독자로 현재까지의『월간미술』을 거의 모두 가지고 있어요. 지금도 한 번씩 들여다 보면서 “맞아, 이런 일이 있었지!”하곤 하죠. 잡지야말로 무엇보다 ‘당대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동시대 동향에 깨어 있어야 하고, 또한 저널리즘은 미술사를 만드는 주체라는 의무감을 항상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전통과 현대, 메이저와 마이너를 이어주는, 미술사의 실체를 만들어가는 중심에 있다는 의식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김홍희 종이책 위기의 시대지만 해외에도『아트포럼』등 장수하는 잡지들이 꽤 있잖아요. 한 권 한 권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대표 미술 잡지로서 어떻게 지속성을 유지하느냐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아요. 한국의 미술 잡지이지만 글로벌화 되는 현장을 고려해 해외 작가나 미술신도 더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외국인 필진을 위한 코너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현직을 은퇴하신 후 요즘 일상과 앞으로의 계획은?
윤난지 저는 계속 전시를 열심히 보고 있어요. 미술사 공부하기 전부터 전시 보는 걸 좋아했는데 아직도 그렇게 재미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지역별로 전시를 리스트업해서 부지런히 다니고 있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이 나의 미술관 전시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짧고 쉬운 글을 쓰는 것입니다.
김홍희 앞으로 꿈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번에 출판한 페미니즘 책을 전시로 옮기는 것이에요. 저는 큐레이터 출신이라 그런지 전시 기획의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글을 쓰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전시를 만들었어요. 책에서 정리한 화두별로 공간을 나눌 수도 있고 아니면 큰 공간에 함께 작품을 펼쳐낼 수도 있고.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뜁니다. 두 번째는 이 책의 후속으로 여성적 감수성으로 작업하는 남성작가들에 대해 연구하고 책으로 펴내고 싶어요. 작가의 성별이 아니라 작품 자체에 팽배하는 젠더의 가치와 특성에 주목함으로써 남성적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추상화에서의 여성적 영역을 논하려 했던 것과 같은 논리에서, 남성이기 때문에 부계적으로 표준화, 보편화 되어 있는 남성성, 남성 양식을 기대하기 보다는 남성 작가의 작품에서 여성적 젠더를 발견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지평을 확장하는 일이라 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번 책의 후속이라고 말씀드린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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