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낮게, 힘 빼고—
함께 (그러나 모두 다른 방향으로)
더 멀리
권태현 독립 큐레이터
Special Feature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올림픽의 모토이다. 신학자 겸 교육자였던 앙리 디동(Henry Didon)이 1881년 청소년체육대회에서 했던 연설의 일부로,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이하 IOC)를 창설하면서 제안한 역사가 긴 구호다. 이 문구는 라틴어로 “Citius, Altius, Fortius”라 쓰고, 영어로 번역하면 “Faster, Higher, Stronger”로 모두 비교급이다. 올림픽 정신이나 스포츠맨십을 표상하는 이 구호는 자신과의 투쟁이든, 상대방과의 경쟁이든 무언가와 비교하여 더 나은 상태로 가는 하나의 방향성을 지녔다. 가슴 뜨거워지는 신체성의 향연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 구호가 본격적으로 쓰인 1924년 파리올림픽으로부터 100년. 다시 돌아온 파리올림픽을 맞아 여기 얽혀 있는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예술 담론장에 발을 딛고 돌아본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서기 393년을 끝으로 막을 내린 고대 올림픽을 부활시키자는 올림픽 추진 운동을 주도한다. 그는 1894년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IOC를 조직하였고, 1896년에 첫 번째 근대 올림픽을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그리스에서 개최한다. 쿠베르탱은 올림픽이 오늘날까지 굳건히 이어지고 있는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로 여겨지지만, 그는 월등한 백인에게 다른 인종들이 충성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으며, 여성의 스포츠 참여를 극심히 반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창시자의 이러한 태도에서 올림픽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신체성의 이면에 우생학과 인종주의, 성차별이 도사릴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염려가 기우가 아닌 것이, 쿠베르탱은 악명 높은 히틀러와 함께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기획하기도 했다. 올림픽을 아리아 민족의 우월함을 널리 알릴 프로파간다의 기회로 여겼던 히틀러는 쿠베르탱과 함께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꾸몄는데, 그중에서도 성화(聖火 )를 그리스에서 개최지까지 릴레이 형식으로 봉송하는 퍼레이드는 당시 나치 치하 독일의 올림픽조직위원장이었던 카를 디엠이 제안한 것이었다. 그리스에서 독일까지 연인원 3,422명이 참여해 봉송한 성화 루트는 공교롭게도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나치 독일의 진군 경로가 된다. 그렇기에 성화 봉송이 나치의 잔재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잘 알려져 있듯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올림픽은 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는 몸짓이나, 차별 반대를 상징하는 무릎 꿇기 등 아주 구체적인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하며 정치적 운동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순수한 경쟁을 내세우는 스포츠의 세계에서 이런 기계적인 정치적 중립은 합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 엄연히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위에서 언급한 초기 올림픽에서 드러나는 노골적인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근본적으로 더 나은 신체를 지향하는 경쟁은 과연 순수하다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스포츠와 신체성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들을 입체적으로 돌아보기 위해서 스포츠와는 다른 위상으로 몸을 매개하는 예술의 관점을 도입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예컨대, 댄스 스포츠에서의 춤과 예술 담론장에서의 춤이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스포츠도 예술도 모두 몸과 몸짓을 특정한 방식으로 매개한다. 어떤 경우에는 예술과 스포츠 양쪽에서 거의 똑같은 움직임이 나타날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각각의 담론장에 발을 딛고 그 둘의 차이를 감각해낸다. 가장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차이는 경쟁 요소의 유무인 것처럼 보인다. 댄스 스포츠로 자이브를 출 때에는 채점을 통해 등수를 가린다. 하지만 똑같은 라틴 댄스라고 해도 스포츠가 아니라 예술적 목적일 때에는 단지 사람들 앞에서 공연될 뿐이다. 숫자로 점수를 매기는 경우도 없고, 그 목적 역시 기술적 완성도와 같이 명확하게 구조화되지 못한다. 때로는 그 어떤 담론과 상관없이 단지 즐기기 위해 춤을 출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일단 예술적으로 매개된 신체들은 스포츠와 달리 하나의 선상에서 모두 같은 목표로 경쟁하지 않는다는 점을 중요하게 짚을 수 있다.
2024 한강 멍때리기 대회 참가자들이 대회에 집중하고 있다.
제공 : 웁쓰양컴퍼니
하지만 예술적이라고 여겨지는 영역에서도 이른바 콩쿠르와 같은 방식의 경쟁이 펼쳐질 때도 있기에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예술 담론장 내부에서도 다양한 전통과 그 사이의 오랜 논쟁들이 있고,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담론장에서 스포츠와 예술로 승인되고 있는 것들을 단순히 분간하는 것보다 오히려 예술에서 스포츠적인 것, 스포츠에서 예술적인 것이 발견되는 지점을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한 논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지금 논의하고 있는 맥락의 구체적인 예시를 찾아보면, 흔히 스포츠라고 여겨지는 파쿠르 수련자들이 경쟁이라는 요소를 철저히 거부하면서 포착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파쿠르 대회가 있긴 하지만 파쿠르 수련자들이나 해당 영역을 개척한 저명한 인물들은 모두 경쟁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것에 반대한다. 파쿠르를 수련하는 트레이서들은 파쿠르를 단순한 운동 기술이 아니라, 신체와 환경의 호응을 통한 수행이자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예술로 본다. 그들에게 환경이란 극복의 대상을 넘어 교감의 대상이다. 김효재는 작업 〈파쿠르〉(2021) 이후 일련의 연작을 통해 파쿠르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파쿠르〉에는 파쿠르 수련자들의 움직임, 팬데믹 이후 익숙해진 화상회의 인터페이스, 일인칭 비디오 게임, 파쿠르 수련자 인터뷰 등의 이미지가 교차한다. 그렇게 몰입과 이격이 반복되는 몽타주를 통해 스크린 속 가상적인 이미지의 세계와 넘어지면 뼈가 부러지고 피가 나는 신체를 가진 세계가 어떻게 겹쳐 있는지 드러난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같은 구호로 대표되는 문제는 그것이 (주체든 타자든 상관없이) 끊임없이 무언가와 비교하며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발전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선 위에 무언가 올려놓는다는 점에 있다. 스포츠가 전쟁을 대리하던 냉전 시기를 지나며 심각해진 약물 도핑은 이러한 일방향적인 경쟁에 이기기 위해 신체를 증강시키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는 사이클 선수가 경기 도중 약물 사용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생기기도 했다. 그 이후 약물 사용이 더욱 엄격하게 금지되었지만, 엘리트 스포츠를 추구하는 오늘날 다양한 약물을 체계적으로 투여하여 신체를 증강시키는 일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말 그대로 화학적 포스트 휴먼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웁쓰양은 〈멍때리기 대회〉를 통해 경쟁과 대회라는 스포츠적 요소를 재전유하여 발전론적 증강과 전혀 다른 방향을 설정한다. 〈멍때리기 대회〉는 분명히 대회이지만, 그 무엇도 하지 않는 것을 겨루는 대회이다. 사실 스포츠로 매개된 순간뿐만 아니라, 항상 더 높은 생산과 효율을 지향하는 우리의 세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저항이 된다. 자전이나 공전처럼 느낄 수도 없을 만큼 특정한 방식으로 운동하는 세계를 순간적으로나마 멈추어 낸다면, 그제야 우리의 세계가 끊임없이 하나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종교적 명상을 통해서도 비슷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멍때리기 대회〉는 의도적으로 엄격한 규칙과 스포츠적 경쟁 요소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세계 전체를 작동시키고 있던 규칙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스포츠의 형식을 전유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의 규칙을 이 세계에 겹쳐 놓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 내부에 이질적인 규칙이 작용하는 영역을 잠시라도 만들어내는 실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거꾸로 보면 육상 대회에 나가서 산책을 하면 일종의 정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규칙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또 겹쳐져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스포츠의 체계 안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드러내는 투쟁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이른바 스포츠 정신은 결코 올림픽으로 대표되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높이뛰기 선수인 딕 포스베리는 도약 후 공중에서 몸을 뒤집어 등 쪽으로 바를 넘는 배면뛰기를 최초로 시도한다. 논란이 있었지만 육상 경기에 주어진 규칙 어디에도 거꾸로 뛰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기록을 혁신적으로 경신할 수 있었던 그 방법론은 게임의 방식 자체를 바꾸어 버린다. 그 이후로 높이뛰기 종목에서 이전처럼 앞으로 뛰는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성공한 혁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영에서의 무한 잠영, 멀리뛰기의 서머솔트, 창던지기의 스페니시 스타일, 평행봉에서 코르부트 플립 등 주어진 규칙의 한계에 도전했지만, 다양한 이유를 들어 금지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규칙을 둘러싼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포츠 내부의, 또 어떤 경우에는 스포츠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맥락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규칙의 한계를 밀어내거나 주어진 규칙의 구멍을 찾는 실천은 계속된다. 스포츠맨십은 주어진 규칙을 유순하게 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규칙의 한계를 밀어붙이는 복잡한 역학이 스포츠 내부에 이미 있다.
조희수〈철인3종 경기〉흑경, 4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7분 31초 2023
《flop : 규칙과 반칙의 변증법》소마미술관 전시 전경 2023
사진 : 구지민 제공 : 권태현
이렇게 스포츠와 그것을 둘러싼 규칙들은 결코 하나의 체계를 가진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완전히 다른 규칙의 세계가 복잡하게 겹쳐있는 상태를 감지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다시 예술과 스포츠를 교차해서 보면, 신체가 이미지로 다시 매개될 때 발생하는 규칙들을 살펴야 할 것이다. 스포츠도 예술도 몸과 몸짓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그것에는 각각의 규칙이 있다. 쉽게 말해 스포츠 중계방송과 예술적 무빙 이미지는 아무리 비슷한 인터페이스에 송출되더라도 전혀 다른 방식의 규칙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조희수의 〈철인 3종 경기〉는 스포츠가 이미지로 재현될 때 발생하는 다층적인 규칙들을 입체적으로 탐구한다. 스포츠 중계를 통해 재현되는 선수의 몸은 마치 공공의 것처럼 수많은 사람에게 볼거리가 된다. 조희수는 그렇게 가장 공적인 순간에 놓인 몸의 가장 사적인 상태에 집중하며 힘의 역전을 시도한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마치 하나의 인물처럼 겹쳐 보이는 3명의 인물은 수영, 사이클, 달리기를 연달아 경주하는 트라이애슬론의 구조와 얽혀서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선형적인 시간의 구조를 이상하게 꼬아낸다. 영상 속 내러티브가 빚어내는 픽션의 세계와 그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올림픽 이후 방치된 평창 경기장은 어떤 소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각각의 시퀀스들은 극영화의 문법, 실험 영화의 문법, 시각예술계 무빙 이미지의 문법을 오가면서 서로의 규칙을 뒤섞는 게임을 펼친다. 이런 교차는 이미지의 물질적 기반인 카메라 장치에 대한 실험까지 나아가는데, 예컨대 사이클의 운동성을 담아내기 위해 피사체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찍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자전거에 부착하여 카메라 그 자체의 운동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몸과 운동을 둘러싼 규칙들 사이를 횡단하는 조희수의 작업은 전시와 영화제를 오가면서 시네마와 뮤지엄의서로 다른 규칙을 이중으로 체화하고 있기도 하다. 다채널로 공간에 흩어져 반복되는 형식과 극장의 스크린에서 시간에 맞추어 한 번만 상영되는 형식은 보기와 보이기의 다양한 규칙들을 상기시킨다. 나아가 서로 다른 규칙을 체화하고 있는 관객이라는 공동체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상현〈Overcross〉 퍼포먼스 2014/2023
제공 : 권태현
결국 공동체의 문제가 도래한다. 하나의 스포츠를 한다는 것은 그 스포츠 공동체의 정체성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훈련된 몸은 전혀 다른 규칙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하상현의 퍼포먼스 〈Overcross〉는 펜싱 선수와 복싱 선수가 경기를 치르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상대하기 위해 움직이는 방식, 장비와 도구, 경기장과 몸의 규칙까지 바꾸어야 한다. 복싱 선수는 펜싱 마스크를 써 검으로부터 자신의 머리를 보호해야 하고, 펜싱 검의 부피와 길이는 복싱 글러브에 맞춰 세심하게 조정된다. 그렇게 진행되는 퍼포먼스는 하나의 규범과 체제를 완성해 나가는 모습이 아니라, 개별적인 두 몸이 만나는 지난한 과정을 보여준다. 두 선수 사이의 협상은 결코 이상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불공평함과 불가능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런 불가능성에도 그들이 함께 있다는 점이 아닐까. 홍민키의〈Sweaty Balls〉는 게이 배구 클럽 활동을 기반으로 한 영상과 설치 작업이다. 정상성 규범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퀴어들은 항상 존재하지만 쉽게 은폐되곤 한다. 이런 맥락에서 퀴어 공동체는 섹슈얼리티를 기반으로 한 사교 모임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그는 배구 클럽을 통해 성적 끌림으로 형성된 관계와 전혀 다른 공동체를 만나게 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배구 클럽에서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이고, 공동체 내부의 또 다른 다양성까지 성찰해 나간다. 팀 스포츠이면서 동시에 상대 팀과 신체 접촉이 발생하지 않는 배구라는 스포츠 특유의 형식에서 다양한 층위의 접촉이 교차하는 문제가 다루어지기도 한다. 중의적인 〈Sweaty Balls〉라는 제목만큼 게이 배구 클럽에는 스포츠의 규칙과 섹슈얼리티의 규칙이 미묘하게 뒤섞여 있다. 홍민키는 배구 클럽을 경유하여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성의 규칙과 퀴어한 규칙의 세계가 겹치는 지점을 다시 감각하고, 나아가 공동체 전반을 다시 생각할 틈새를 만든다.
홍민키〈Sweaty Balls〉수건걸이, 대형타올,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6분 16초 2023
《flop : 규칙과 반칙의 변증법》 소마미술관 전시 전경 2023
사진 : 구지민 제공 : 권태현
공동체의 문제는 기성 스포츠 담론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로 1년 연기된 2021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IOC는 올림픽의 모토를 바꾼다. 기존의 구호 뒤에 “ —함께” ( -Communiter / -Together)를 추가하여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 함께”를 새로운 모토로 내세웠다. 문제는 위에서 살펴본 예술 작업들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듯이 함께하는 것, 그러니까 공동체에는 단수성과 복수성, 가능성과 불가능성 같이 상반된 개념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함께 단결하자는 구호는 전체주의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십상이다. 공산주의(Communism, 어근을 바탕으로 직역하면 공동체주의)의 붕괴 이후 공동체를 고민하는 철학자들의 논의가 소중하게 여겨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장-뤽 낭시와 모리스 블랑쇼 같은 철학자들은 『무위의 공동체』 , 『밝힐 수 없는 공동체』 , 『마주한 공동체』 등 저서를 통해 전체주의로 빨려들어 가지 않는 공동체를 사유하기 위해 분투한다. 탈자태(extase)나 외존(exposition) 같이 복잡하게 번역되는 개념들을 경유해야 하지만, 핵심은 우리가 내재적으로 같기 때문에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 각자는 단수로 존재하되 바깥을 향하며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라는 것은 고정된 공동의 속성에 의해 성립되지 않는다. 나의 존재로도, 타자의 존재로도 환원될 수 없는 공동의 영역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
낭시는 결국 이야기한다.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함께”라는 구호를 생각해본다. 더 우월한 신체성을 향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발전론적 지향을 분산시키기 위해 그것을 반대쪽으로 당겨보자. “더 느리게, 더 낮게, 더 힘을 빼고 —함께”. 비교급 형태도 지워버리자. “느리게 낮게 힘 빼고 —함께”. 그리고 낭시의 문장을 떠올리며 다른 하나의 비교급을 추가한다. 느리게, 낮게, 힘 빼고, 그렇게 다시 가능해진 우리를 통해 더 멀리. 그러나 모두가 다른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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