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수 전시 전경. 〈作品(작품)〉(사진 왼쪽) 혼합매체 182×182cm 1966 유족 소장
대구추상, 모험과 실현의 순간들
위 왼쪽 이복 섹션.〈隨想(수상)〉(사진 가운데) 캔버스에 유채 130×90cm 1962 개인 소장
위 오른쪽 이동진 〈原典(원전)〉 시리즈 사진 제공: 봉산문화회관
아래 정점식 〈형상〉 혼합매체 112.5×152cm 1992 대구문화예술회관 소장
전쟁의 상흔을 견디며 전개된 미술의 현대화
봉산문화회관 큐레이터 조동오와 미술사학자 김영동이 만나 미술의 지역적 기반과 그 의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전시가 기획되었다. 처음 시도된 역사조명 특별기획전 〈대구추상, 모험과 실현의 순간들〉(이하 〈대구추상〉)은 다양하고 복잡한 동시대 흐름 속에서도 ‘지역 미술의 근원’을 파악하고자 하는 전시이다. 1950~1970년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을 주목하여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지역 미술의 자원을 살피는 것이다. 전쟁의 상흔을 견디며 예술의 혼을 불사른 작가를 대면하는 매우 뜻깊은 전시이기도 하다. 실물은 있지만 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작품을 끄집어내어 아카이빙까지 더해 ‘대구추상의 길목’에 놓인 대구 미술 현대화의 깊이와 한국 미술사에서 그 의의를 돌아보게 한다.
현대화의 미술 여정
〈대구추상〉에 초청된 작가는 정점식(1917~2009), 장석수(1921~1976), 서석규(1924~2007), 이복(1927~1975), 박광호(1932~2000), 김구림(1936~), 유병수(1937~2008), 이동진(1939~2015), 이영륭(1940~), 오정향 (1977~)이다. 미디어 아티스트 오정향을 제외하면 모두 대구 추상의 역사를 만들어 온 작가들이다. 전시는 과거와 현재를 아울러 총 네 개 부문, ‘출발 - 다양화 - 확산 - 아카이빙’의 순서로 구성되었다.
챕터1 〈대구추상미술의 출발〉에서는 추상을 실현해간 선구자로 정점식과 장석수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정점식은 서정적인 추상으로 〈조선일보 현대작가 초대전〉에 초청된 작가로, ‘사방의 공격으로부터 추상을 지키며 이해시키는 데 진력’하며, 고유한 추상 양식을 확립했다. 장석수는 당대 미술의 최신 이론과 서구의 추상 경향에 대한 이해가 탄탄하며 1960년대 과감한 붓질 표현의 독보적인 비구상 추상에 도달했다. 이 챕터에는 그간 전시로 소개되지 못한 작품을 선보여 역사적인 의의를 더했다.
챕터2 〈추상표현의 다양화〉에서는 일산 서석규와 이복의 작품을 조명한다. 자연주의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주관적인 표현이 심화된 경향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름만 무성하던 두 작가의 작품이 상당량 소개되어 그 의미가 크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던 서석규는 일본 가와바타에서 수학한 열정적인 인물이다. 미술제도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현재 대구 도심에 그가 생전에 제작한 타일 벽화도 남아있다. 〈귀로〉(1950)에서처럼 형상의 축약과 과감한 생략으로 추상화된 양감에 색의 흐름이 강조되는 구상적 모티프의 색채추상으로 격정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복은 그 재능에 대한 구구한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 작품을 접하기 어려웠던 선구자다. 이번에 1960년대 〈수상〉 대작이 출품되어 이복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이복은 제국미술학교 양화과에서 수학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해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귀국하여 후학을 양성했다. 그 역시 형상을 단순화하는 구상적인 모티프의 작업을 하였지만 자신만의 고유한 추상 양식을 남기고 있다. 서석규처럼 거칠고 역동적인 색의 흐름에 주력하기보다 표면을 두껍게 표현하면서 중량감을 높이는 방식으로 거친 마티에르와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여 추상적인 표현을 담아낸다. 그 이름에 비해 작품 소개가 드물었던 두 작가의 작품을 다량으로 접할 수 있게 되어 당시 추상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챕터3 〈추상미술의 확산〉은 1960년대 본격적으로 한국화단을 이끌고 형성해간 청년들의 실험과 도전을 보여준다. 양식적인 다양화가 심화되는 양상을 이해하도록 구성된 이 장에는 박광호, 김구림, 유병수, 이동진, 이영륭이 소개된다. 이들은 산업자본주의의 도시문화와 국제적인 미술 동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청년 작가들이다. 박광호는 〈조선일보 현대작가 초대전〉에 초대된 작가로 독보적인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박광호는 마르셀 뒤샹을 석사논문으로 연구 ·제출했고, 산업자본주의가 집약된 첨단의 도시환경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한국의 고유한 미적 모티프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역사의 장〉(1960년 초)의 경우 만화캐릭터와 하회탈의 구상이미지가 콜라주처럼 등장하며 팝아트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주로 전진과 후진의 운동감을 실현한 그는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토대로 옵티컬적인 구성이나 한 쌍의 방식으로 작품을 구성했는데 대표작 〈알파와 오메가〉(1971), 〈괘〉(1960년대) 등이 출품되어 박광호 실험의 면모를 충분히 소개했다. 지역에서 실험적인 활동을 개시했던 김구림의 소개도 매우 값진 것이다. 이번 전시의 협력기획자 김영동의 강의와 글을 통해 김구림에 대한 백락종의 평가를 소개한 점 역시 역사 재조명의 의미를 더한 것이다. 김구림은 대구공회당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고 백락종의 서문을 받았다. 백락종에 따르면 김구림은 ‘모든 종류의 유행어를 이해하고… 무형상에서 필연성을 띤 또 하나의 무형상을, 형상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는 작가로 평가한다. 김구림의 창작세계는 시대정신의 반영을 넘어 생래(生來)로부터 실험을 근간으로 하는 작품이다. 실험영화, 실험음악, 비디오 등을 최초로 미술의 영역으로 이끌고 들어온 현대미술가로 판화사 저서도 출간했다. 1963년 대구 청년의 실험작가 모임 〈앙그리〉의 창립 멤버이며 〈제4집단〉을 이끌기도 한 김구림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을 구성해 온 총아라 부를 만하다. 유병수는 대학 재학 중인 1960년 〈덕구궁 벽전〉을 기획하였고 〈벽동인전〉의 창립회원이다. 유병수는 이동진과 서울대 회화과 동기동창 사이로 1964년 대구에 정착하여, 1967년 경북공보관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번에 출품된 1960년대 여러 작품과 〈흔적 - 7906〉(1979)에 유병수의 초기 작풍이 요약적으로 제시되어 역사 조명의 빛을 발하고 있다. 유병수의 작품은 추상표현적이면서도 모노톤 경향이 강하며 동시에 질서 개념이 역력하다. 선적인 질서라든지 질서정연한 붓 점들의 조합 등에서 유병수의 ‘구축적인 추상’의 특징이 드러난다. 유병수의 1960~1970년대 작품에서 보이는 ‘구축적인 추상’의 면모는 후일 골판지의 콜라주식 구축으로 이어지는 작품이 초기부터 활용된 그만의 고유한 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이동진 역시 〈벽동인전〉의 창립 멤버이다. 강원대와 안동대, 경북대에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이동진은 1970년대 〈원전〉 시리즈를 창작하면서 태곳적 원형을 찾아 그 본질을 드러내려는 작업으로 앵포르멜 경향의 작풍을 펼친다. 유희적이고 표현적인 붓질의 감정적인 표현은 점차 색면 유리의 단면과도 같이 정돈되며 한 화면에서 강도 높은 색이 점차 사라져, 극적이면서도 색으로부터 빛으로 변화되는 자연스러운 흐름의 작품이 전개된다. 원전을 탐사하는 이동진의 작품 역시 1970년대 미술계의 흐름 속에 대구 추상의 한 축을 담당한 추상표현 경향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영륭은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대구에 정착하여 대구 추상미술의 형성과 전개에 있어 중추 역할을 한 인물이다. 1961년 대구 상공회의소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장석수 선생의 평이 지상(紙上)에 실려 큰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1963년 〈앙그리〉의 창립 멤버였으며 1972년 대구 추상의 본산을 결집하고자 한 신조회를 창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작가로서 교육자로서 미술계에 헌신한 그의 노력은 2005년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을 수여하는 데 이르렀고 2010년 대구미술대상을 수상하였다. 이영륭의 작품세계는 색감의 세련된 이해를 토대로 한 색채추상의 경향에 도달하고 있다. 1960년대 추상작품 〈혼탁〉, 〈정토〉, 〈작위〉 등에는 본질을 탐구하고 표현하려는 열정이 매우 진지하게 담겨있다. 특히 〈작위〉는 무겁고 진지하면서도 자유로운 비구상의 화면이 매우 세련되게 구성된 대표적인 1960년대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장석수가 평가한 ‘지성을 뒷받침한 대담한 전진’의 의미를 새기게 된다. 장석수가 말한 대담함은 이영륭이 색을 대하는 그 세련의 깊이에서 나온다. 2022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된 이영륭의 대규모 회고전에서 보듯, 후일에 전개된 그의 정제된 색면추상의 근원을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의 다양화와 협력기획의 가치
이번 전시의 특징은 역사 조명 취지에 걸맞게 1950~1970년대에 걸쳐 미술의 현대화를 고민했던 대표적인 작가들의 당시 작품을 성실하게 수집하여 보여준 것과 한발 더 나아가 챕터4에서는 대구 미디어 아티스트 오정향의 색다른 아카이빙을 프로젝션 매핑을 통해 새롭게 구성하여 보여준 데 있다. 오정향 작업은 역사 조명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를 만드는’ 새로운 사건이라는 점을 제시하며 이후 미술계 구성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기획의도를 보이고 있다. 주목하고 싶은 점은 미술관이 아니라도 다양한 전시 장소에서 친근한 방식으로 역사를 되짚어보는 전시가 가능하고, 이러한 태도와 방식은 미술을 널리 이해시키는 데 큰 몫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전시실을 갖춘 아트센터에서도 크지 않지만 성실하고 진지한 기획을 이어간다면 미술에서 현재의 기원과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는 내실 있는 전시가 많아질 것이다. 대구는 이미 문화예술회관에서 일정한 분량의 기획전으로 이러한 선례를 보인 바 있다. 이렇게 전시를 통해 미술의 담론을 다양화하고 일상화하면서 차근차근 되짚어보는 역사 조명은 현재의 위치와 앞으로의 방향타를 제시한다는 측면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이를 통해 지역의 미술에 대한 이해의 길을 열어주고 타 지역의 오해를 극복하며,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한국 미술사의 일부로 확장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나아가 전시는 창의성과 고유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현창하면서도 동시에 지역미술을 보편화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향후 미술을 다루는 다양한 장소에서 역사 조명과 현재의 의의를 묻는 전시에 많은 집중과 지원을 기대한다. 덧붙여 이번 전시처럼 연구자, 미디어 아티스트 등 전공자들과 협력하여 미술의 역량을 공고히 하는 방안이 좋은 선례가 되어 향후 더욱 확산되기를 기대한다.남인숙 미술비평, 2022 달성대구현대미술제 감독
이영륭 전시 전경. 〈淨土(정토)A - 103〉(사진 가운데) 캔버스에 유채 193.9×259.1cm 1961 대구미술관 소장
박광호 섹션. 〈卦(괘)Ⅱ〉(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73.5×100cm 1960년대 유족 소장
글: 남인숙 미술비평, 2022 달성대구현대미술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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