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
이불, 롱 테일 헤일로

이민지 독립큐레이터
Sight & Issue

이불〈롱 테일 헤일로〉2024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 메트로폴리탄 설치 전경 2024
사진 : 유제니아 버넷 틴슬리 제공 : 메트로폴리탄 © 작가

지난 9월 12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이불의 신작〈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 : 이불, 롱 테일 헤일로(The Genesis Façade Commission : Lee Bul, Long Tail Halo)〉를 공개했다. 국내 기업 현대자동차 제네시스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이 프로젝트는 이불이 2002년 뉴욕 뉴 뮤지엄에서 개최한 개인전 이후 22년 만에 미국에서 선보이는 대형 공공미술 프로젝트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작가는 미술관 건물 전면(파사드)을 장식하는 총 네 곳의 니치(niche, 벽감)를 점유했는데, 미술관의 건축양식과 다양한 소장품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자신의 고유한 세계관을 통해 재해석한 작품으로 탄생시켜 관람객뿐 아니라 미술관 인근 지역을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
뉴욕 맨해튼 82번지 5번가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건물 외벽은 미국의 건축가 리처드 모리스 헌트(Richard Morris Hunt)가 설계하여 1902년에 완공되었다. 리처드는 독립된 조각 4점을 설치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 건물 전면 입구 양쪽에 각 두 개씩 총 네 군데의 니치를 설계했지만, 이 공간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못한 채 117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비워져 있었다. 하지만 2019년 가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근현대미술부서의 기획으로 ‘더 파사드 커미션(The Façade Commission)’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더 파사드 커미션’은 매년 전 세계를 무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대미술 작가 중 한 명을 선정하여 미술관 외벽의 니치를 위한 신작을 제작하고 8개월 동안 대중 앞에 선보이는 것이 골자다. 미술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작품 감상이 가능하기에 누구나 작품을 바라볼 수 있고, 작품을 마주하는 시간대와 계절에 따라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뉴요커들 사이에 각광을 받아왔다. 미술관은 2019년 9월 케냐계 미국인 작가 왕게치 무투(Wangechi Mutu)와의 협업을 시작으로 2021년 캐롤 보브(Carol Bove), 2022년 휴 로크(Hew Locke ), 2023년 나이리 바그라미안(Nairy Baghramian)의 신작을 선보였다.

이불은 ‘더 파사드 커미션’에 다섯 번째로 선정된 작가이며, 한국 그리고 아시아 작가로서는 최초다. 앞선 프로젝트에 선정된 작가 모두 서구권에 기반을 단단히 두고 활동하는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연간 방문객 수만 500만 명을 뛰어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외관을 무려 8개월동안 장식하는 이 프로젝트에 한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여성 작가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은 전시 시작 전부터 많은 이들의 기대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불이 선정된 올해의 프로젝트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 아트 이니셔티브가 지난 7월 체결한 5년 파트너십에 따라 진행되는 첫 번째 프로젝트로, 올해부터 ‘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 기업의 스폰서십이 작가 선정 과정에 미쳤을 영향력을 연관 지어 생각하기 쉽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맡은 큐레이터 레슬리 마(Lesley Ma)는 이와 같은 추측에 “이불의 커미션은 현대자동차의 후원이 결정되기 이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상태”라고 분명히 밝혔다.1 근현대미술 부서 큐레이터로 일하며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 연구를 맡게 된 레슬리 마는 2022년부터 이 프로젝트를 준비했는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대변하는 소위 “백과사전식 미술관 (encyclopedic museum)”의 특징과 미술관 파사드라는 장소의 특정성을 잘 반영할 수 있는 작가들을 선정해 미술관 측에 제출했다. 이 중 그가 생각하기에 “최고”이자 “유일한 선택지”로 이불을 적극 제안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이불은 큐레이터로서 오랜 시간 존경해 온 작가이자 현존하는 현대미술가 중 찬사를 많이 받는 조각가 중 한 명”이라며 “특히 그녀의 작업이 인간이 지닌 조건과 오랜 역사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조각과 건축의 관계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파사드 커미션에 가장 적합한 작가”라고 답변했다.

이불 〈롱 테일 헤일로 : CTCS #1〉스테인리스 스틸, 에틸렌 비닐 아세테이트, 탄소 섬유, 페인트, 폴리우레탄
메트로폴리탄 설치 전경 2024

사진 : 유제니아 버넷 틴슬리 제공 : 메트로폴리탄 © 작가

롱 테일 헤일로(Long Tail Halo)
이불의 신작 4점은 미술관 정문을 중심으로 좌우 2점씩 설치되어 있다. 먼저 정문과 가장 가까운 양측의 두 조각 〈Long Tail Halo : CTCS #1〉과〈Long Tail Halo : CTCS #2〉는 머리와 팔, 다리 등의 모양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멀리서 보면 인간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사모트라케의 니케〉와 같은 고대 그리스 여신상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마치 하나씩만 남은 날개가 건물 양쪽을 향해 대칭적으로 뻗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신고전주의 양식의 파사드와 어우러져 항상 그곳에서 자리하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좌측 조각은 검은색으로 덮여 있어 조각의 전반적인 형상에 집중하게 하는 반면, 우측 조각은 마치 오랜 세월이 지나 색이 바랜 대리석처럼 보여 조각의 거친 질감과 색에 집중하게 한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 부드러운 고무의 일종인 에틸렌 비닐 아세테이트(EVA)로 제작되었다는 점은 작업의 흥미를 더한다. 위에서 아래로 무엇인가가 쏟아져 내려오는 형상을 하고 있는 양쪽 끝의 두 조각 〈Long Tail Halo : The Secret Sharer II〉와 〈Long Tail Halo : The Secret Sharer III〉는 얇고, 날카롭고, 반짝거리는, 마치 부서진 거울의 파편들과 같은 작은 프리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작가가 키우던 진돗개가 불편한 속을 달래기 위해 풀을 뜯어먹고 토해내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불은 동서양의 방대한 미술사조와 역사를 가로지르는 미술관의 소장품들의 시각적 요소에 자신의 전작 〈사이보그〉(1997~2011) 시리즈와 〈비밀 공유자〉(2012 ) 등의 조형성을 더해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는 동시에 통일되고 파편적인 조각을 창조했다. 이번 커미션을 위해 작가는 미술관의 건축 양식과 소장품들을 오랜 기간 연구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움베르토 보치오니의 〈공간의 연속성의 고유한 형태들〉( 1913 ), 페르낭 레제의 〈두 형상과 개〉( 1920 ), 파블로 피카소의〈서있는 여인의 누드〉(1910)에서 나타나는 입체주의와 미래주의 양식, 중세의 철제 갑옷, 동양의 수석(壽石) 등의 미감이 혼재해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의 미술 웹진 하이퍼알러직의 하킴 비샤라(Hakim Bishara )는 “마치 누군가 미술관에서 중세 갑옷을 납치해 파블로 피카소의 문 앞에 버려둔 것처럼 보인다”라고 비유하며, “입체주의가 산업혁명 이후 분열된 자아를 반영한 것이라면, 인공지능, 3D 프린팅, 그리고 다른 첨단 기술들의 경이로운 발전에 대응하기 위해 (입체주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현지의 비평가들은 각기 다른 의견을 내비쳤다. 먼저 전시 개막 이전 프리뷰를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앤드류 루세스(Andrew Russeth)는 “이불은 변화무쌍한 경력에서 발전시킨 아이디어를 도전적이지만 풍요로운 영역으로 확장”했다고 평한 반면, 전시 개막 이후 같은 매체에 리뷰를 기고한 마샤 슈벤데너(Martha Schwendener)는 “색의 결핍 때문에 여러 면에서 전체적인 표현이 다소 실망스럽다”, “이전 커미션들과 비교하면 중간 정도의 위치”라고 하면서도 “몇몇 투박한 모더니스트들의 작품들보다는 더 많은 상상력을 자극한다”라고 평했다.

작품명 〈롱 테일 헤일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이불은 전시 개막일 열린 ‘작가와의 대화’에서 이번 작품은 “언뜻 보면 통일된 양식으로 보이지만 수많은 시대와 의미를 내포”한다며 “관객이 작품 해석을 특정 시대나 사조, 지역으로 한정시키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바라봐 주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롱(long)’, ‘테일(Tail)’, ‘헤일로(Halo)’ 이 세 단어는 ‘시간’, ‘물질’, ‘정신’과 관련이 있다. 각각의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고 작품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흐르는 시간과 계절 속에서 오롯이 작품을 바라보는 이에게 달려 있다. 〈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 : 이불, 롱 테일 헤일로〉는 내년 5월 27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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