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즈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

실존을 담는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음으로 영원을 이야기하다

조희원 미학

Artist

루이즈 부르주아/ 191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2010년 미국 뉴욕에서 타계했다. 파리 소르본대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에콜 데 보자르와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 등에서 회화, 조각, 미술사, 철학을 공부했으며, 페르낭 레제와 폴 콜랭 등에게 사사했다. 1938년 미술사학자 로버트 골드워터와 결혼 후 뉴욕으로 이주해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40년대 후반 〈인물〉 연작으로 조각 작업에 주력했고, 1960~1970년대에는 정신분석 이론과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바탕으로 심리적이고 서사적인 작업세계를 확립했다. 1990년대에는 〈밀실〉 연작을 통해 기억과 감정을 공간화하는 독자적 설치 양식을 완성했으며, 후기에는 드로잉, 판화, 섬유 설치 등으로 자전적 기억을 시각화했다. 1982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미국 여성 조각가로서 최초의 회고전을 열었고,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었다. 2000년 테이트 모던 터바인 홀에 설치된 〈엄마(Maman)〉로 국제적 명성을 확고히 했다. 타계 이후에도 구겐하임미술관, 퐁피두 센터, 허쉬혼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세계 주요 기관에서 회고전이 이어졌다. 부르주아의 작업은 페미니즘, 정신분석, 젠더, 신체, 기억, 트라우마 등을 횡단하며 오늘날 동시대 미술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진: 낸다 프랭코 © The Easton Foundation Licensed by SACK, Korea


실존을 담는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음으로 영원을 이야기하다
조희원 미학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흔히 이런 물음을 철학적 질문이라 한다. 누구나 인생을 두고 한 번쯤 생각해 볼 법한 이 질문은, 그럼에도 모두에게 삶의 화두로 자리 잡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 질문이 성공적인 결과물, 이른바 ‘실존적 삶’으로 맺어지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전쟁이 인간의 삶에 커다란 생채기를 냈던 20세기에 “어떤 삶을 꿈꾸고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는 철학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졌다. 죽음을 가깝게 느끼게 된 인간이 삶의 문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실존철학’이라 일컫는다. 대표적인 실존철학자로 불리는 사르트르와 말년에 ‘실존미학’을 고민하던 푸코는 모두 ‘실존적 삶의 대표적 사례’로 프랑스의 시인이자 미술 비평가, 보들레르를 꼽는다. 왜 보들레르일까?

〈밀실(검은 날들)〉철, 천, 대리석, 유리, 고무, 실, 목재 304.8×397.5×299.7cm 2006 이스턴재단 소장
사진:크리스토퍼 버크 © The Easton Foundation Licensed by SACK, Korea

그들이 보기에 보들레르는 자기 삶의 모습을 스스로 기획하고 실현하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노력했다. 남들에 의해 틀 지워지고 구성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자기 삶을 창조하기 위해 견디며 투쟁하는 보들레르야말로 사르트르와 푸코에게 참된 주체의 전형으로 보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몰락한 귀족을 대신하여 권력의 자리를 차지한 부르주아 계급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새로이 등장한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대량생산을 통한 물질문명과 시장 질서를 내세워 일상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특히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는 것을 권장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청교도윤리가 지배적인 가치관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윤 추구’라는 부르주아 계급의 강령이 마치 만능열쇠처럼 모든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화와 예술의 영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술이 정신적 귀족주의의 산물이라 주장하며 부르주아 계급의 몰취미에 맞섰던 보들레르는 스스로 주인이 된 삶을 살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당대의 주류로 군림하던 부르주아 계급은 보들레르에게 비아냥거림만을 내비쳤을 뿐이었다. 보들레르는 끝끝내 그들에게 굴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았던 당대의 권력, 부르주아 계급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조롱하고 비판했다. 바로 이것이 보들레르가 생각했던 예술의 역할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적 삶을 비판하며 자신이 꿈꿨던 예술을 성취하기 위해 보들레르는 자기 삶 자체를 창조해야만 했다. ‘삶을 창조하는 일’이야말로 사르트르와 푸코가 보여주려 했던 ‘실존의 삶’이자 ‘실존미학’의 핵심이다. 그런데 마치 예술을 창조하듯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일, 그리고 창조된 삶 속에서 예술을 창조하는 일은 여성에게도 가능할까?

칸트는 그의 저서 『판단력 비판』(1790)에서 예술적 창조란, 신이 자연에 규칙을 부여하는 것처럼 “예술에 규칙을 부여하는 재능”이라 설명한다. 이후 예술적 창조는 천재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작업으로 이해되었다. 특히 르네상스 이후 일반에게 알려진 천재가 모두 남성이었던 까닭에 창조적 행위는 자연스럽게 남성의 전유물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아주 오랫동안 여성의 창조성은 논의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여성은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제 주인이 될 수 없을까? 필자는 의미 있는 예술 실천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삶을 창조해 냈던 한 여성 미술가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루이즈 부르주아는 미국에서 활동한 프랑스 출신 작가다. 여성주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부르주아는 자신의 작업을 ‘치유의 과정’이라 이야기한다. 무엇을 치유하려던 것일까?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루이즈 부르주아 회고전 《덧없고 영원한》은 전시된 글과 작품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짐작하게끔 한다.

왼쪽 〈집-여자〉 리넨에 유채, 잉크 91.4×35.6cm 1946~1947 개인 소장
가운데〈칼 인물〉 천, 철, 목재 22.2×76.2×19.1cm 2002 이스턴재단 소장
오른쪽 〈작은 소녀〉(부드러운 버전) 천 위에 라텍스 55.9×21.6×22.9cm 1968~1999 이스턴재단 소장
사진: 크리스토퍼 버크 © The Easton Foundation Licensed by SACK, Korea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은 제목인 “덧없고 영원한”이 보여주는 것처럼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공존하는 상황, 이른바 ‘역설’이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에 아무 이유 없이 내던져진, 한낱 필멸의 존재일 뿐이었던 작가는 쏟아지는 불합리와 무질서를 온몸으로 겪어내야만 했다. 태피스트리 공방 주인이었던 아버지는 부르주아 계급의 남성으로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가족 내 모든 권력을 손에 쥔 권위적인 아버지는 가족 위에 군림하려 했고, 때로는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작가에게 이런 아버지는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혐오의 대상이었다. 아버지와 달리 그 어떠한 결정권도 갖지 못했던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 급급했고, 바로 그 점이 작가에게 커다란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감히 맞설 수 없는 가부장제 질서 앞에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연약한 동시에 강한, 역설적 존재로 작가에게 각인된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만신창이가 된 채 약물에 의존하며 삶을 방치했던 다른 형제·자매와 달리 작가는 자신을 지켜낼 수 있기를 바랐다. 불확실성을 거부하며 예측할 수 있는 세계를 꿈꾸었던 부르주아는 합리적인 세계를 만나기를 기대하며 소르본대 수학과에 진학한다. 그러나 수학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실망감과 어릴 때부터 두드러졌던 미술에 대한 재능은 부르주아를 다시 한번 실존적인 고민에 빠뜨렸다. ‘어떻게 살 것인가?’ 작가의 선택은 미술가의 길을 가되 가족을 떠나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는 미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낯선 땅, 미국에서 미술가의 삶을 꾸려가기에 이른다.

부르주아는 오랫동안 연민의 대상이었던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동시에 그 동일시를 꺼리는 마음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또 다른 한편으로, 작가는 아버지를 욕망하는 동시에 혐오하는 양가적인 감정으로 괴로워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을 공부했던 작가는 당시의 전형적 여성-이미지와 그 전형성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으로부터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1940년대에 주로 그려졌던 〈집-여자(Femme-Maison)〉 연작에서 여성 이미지는 특이하게 구성된다. 여성의 하체는 그대로 그려져 있지만 상체에는 머리 대신 커다란 집이 올려 있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고, 아주 작은 창문만 나 있는 집은 관람자에게 답답한 느낌을 준다. 굴뚝에서 솟아나는 희미한 연기는 일생이 곧 가정인 여성이 내뱉는 한숨과도 같다. 태어나는 순간 누군가의 딸에서 아내로, 그리고 어머니로서 가정에 예속되는 여성은 인식이나 사고를 하는 주체가 아니며 공적인 영역에서 발언할 수도 없다. 여성은 가정의 일부이거나 어쩌면 집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 아래 위세를 떨치던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 여성은 그저 인간 재생산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당시의 여성관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이 작품에 그대로 묻어난다.

이후 작가는 ‘역설’에 한 걸음 다가서는 듯하다. 단단하고 뾰족한 막대기 형태의 조각들로 이루어진〈인물들(Personnages)〉(1940년대) 연작은 작가 개인에게 의미 있는 인물들을 초현실적인 방식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작가의 유년기에 상처와 고통으로 기억되는 이 인물들은 부정적인 감정의 대상이자 상처를 주었던 존재들이다. 이 인물들은 창이나 막대기처럼 무언가를 뚫거나 상처를 내는 도구로 구성되어 있다. 〈인물들〉은 ‘공격적인 남성성’을 모티브로 하여 남성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상처를 주는 존재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하지만 남성을 이런 방식으로 형상화한 까닭에 여성은 반응적이고 수동적인, 상처받는 존재로 느껴진다. 전형적인 이분법적 남성/여성 이미지가 반복된다.

〈아버지의 파괴〉 보존용 폴리우레탄 수지, 목재, 천, 붉은 조명 237.8 ×362.3×248.6cm 1974~2017 글렌스톤미술관 소장
사진: 크리스토퍼 버크 © The Easton Foundation Licensed by SACK, Korea

〈엄마〉 1999 호암미술관 야외 정원 설치 전경 2023
제공: 호암미술관 © The Easton Foundation Licensed by SACK, Korea

작가는 이내 프로이트가 전형화한, 무언가를 꿰뚫는 뾰족하고 기다란, 공격적인 남성-이미지를 떠나 부드럽지만 끔찍한 상처를 줄 수 있는 역설적인 이미지의 남성성을 구현한다. 이 시기 작가가 시각화하는 남성성은 연약해 보이지만 동시에 공격성을 가진 어떤 것이다. 부드러운 라텍스로 제작된 〈작은 소녀(Fillette)〉 연작은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남성성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외침이다. 남성성은 사랑의 대상인가 아니면 폭력의 근원인가? 어쩌면 둘 다일까? 〈작은 소녀〉는 언뜻 보아 알뿌리처럼 보이는데, 우리는 곧 이것이 음경인 것을 알게 된다. 대리석, 브론즈, 플라스틱으로부터 라텍스에 이르는 다양한 재료를 통해 제작되기도 했던 〈작은 소녀〉는 때로는 남근 형태와 배설물 형태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복합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부르주아는 〈작은 소녀〉가 어떤 하나의 정체성으로 특정되기를 꺼리는 듯하다. 이러한 작업으로 작가가 보여주려는 것은 아직 분화하지 않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는 대상이다. 여러 형태가 중첩된, 심지어 생식기와 배설물, 남성성과 여성성처럼 반대되는 것들이 뒤섞인 다형적이고 역설적인 세계가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다. 명확하지도 확정적이지도 않은 세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처음부터 ‘역설’ 그 자체이다. ‘역설’ 덩어리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아니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작가는 이제 실존으로서의 삶을 기획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부르주아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유년의 기억은 끔찍함이라는 감정으로 자리 잡았다. 오랫동안 부정적 감정에 시달리던 작가는 그 기억과 감정을 현재의 시점으로 끌어낸 다음 용기를 내어 그것들과 대면한다.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예술을 선택했던 부르주아는 이제 예술을 통해 자신의 삶을 구성한다. 아버지. 가족을 학대하고 여러 여성을 사랑하면서도 그토록 뻔뻔했던 그에게 작가는 복수를 감행한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언제나처럼 거들먹거리는 그를 가족 모두가 달려들어 잡아먹는다. 테이블 위에 해체된 아버지의 신체가 고깃덩어리처럼 나뒹굴고 천장에는 여성성의 상징처럼 보이는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의 대상들이 매달려 있다. 마치 이 공간이 언제나-이미 여성의 지배 아래에 있었음을 선포하려는 것처럼.(〈아버지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Father)〉(1974~2017))

안쓰럽고 미안하지만 차마 동일시하고 싶지는 않았던 대상인 어머니는 거미로 형상화된다. 작가에게 어머니는 불안정해 보이지만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감수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10m 높이의 철제 구조물인 〈엄마〉(1999)는 길고 가느다란 다리 때문에 불안해 보이는 동시에 커다랗고 단단한 몸체로 위압적인 느낌을 준다. 금세 균형을 잃고 쓰러질 듯한 거미가 대리석 알을 품고 위태롭게 서 있다. 사회가 강제하는 모성과 자식에 대한 원초적 사랑 사이에서 ‘엄마’는 흔들린다.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모성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본능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일종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자식을 위해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는 당위와 엄마와 아이 사이에 자리 잡은 애틋한 사랑은 다르다. ‘현모양처’라는 규범에 짓눌린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내몰린 아이를 지키기 위해 사랑이라는 이름의 용기를 내어 맞선다. 그 위태로운 용기가 길고 가느다란 다리로 쓰러질 듯 견디며 알을 지키려는 거미의 형상으로 제시된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어머니라는 전형적 이미지 대신 작가는 어린 시절 마음속 깊이 자리한, 사랑이라는 유대로 맺어진 ‘엄마’를 이야기한다.

〈꽃〉 종이에 과슈, 12점 연작 59.7×45.7cm 2009 리움미술관 소장
사진: 크리스토퍼 버크 © The Easton Foundation Licensed by SACK, Korea

〈꽃(Les Fleurs)〉(2009)은 과슈를 사용하여 흐르는 듯 투박하게 그린 꽃 이미지다. 이 꽃들은 여성성의 상징이라는 전형성에 더하여 붉은 피가 갖는 강인한 생명력과 에너지, 그리고 인간 생산의 근원인 체액을 상기하게 한다. 5장의 꽃잎이 작가의 가족을 연상시키는 이 붉은 꽃은 작가에게 용서이자 속죄, 재생과 부활을 통한 ‘현재와 영원의 화해’이기도 했다. 부르주아는 덧없음으로만 영원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리라. 작가에게 세계는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 삶은 남성성과 여성성, 강인함과 연약함, 단순함과 복잡함, 의식과 욕망, 과거의 기억과 현재하는 감정 등이 공존하는 ‘역설’ 그 자체였다.

그러나 부르주아는 ‘역설’을 가리기 위해 어떤 것을 희생하거나 종합이라는 명목 아래 무시하지 않았다. ‘역설’을 오롯이 작품에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그가 기획했던 삶의 모습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그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의미 있는 작품으로 창조해 내기 위해 애썼다. 바로 그 결과물이 지금 우리가 만나게 되는 그의 작품이다.

부르주아는 매 순간 온 힘을 다해 주어진 순간을 살아내는 여성이자 작품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치유 받기를 꿈꾸었던 예술가다. 이 모든 기획이 충실히 수행된 마지막 날, 그의 실존은 완성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미술가 부르주아는 이 모든 노력과 시도, 그리고 그것들이 낳은 이미지들의 엮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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