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브래드포드
Mark Bradford
도시의 파편으로
쌓아가는 공동체의 서사
김유미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Artist

마크 브래드포드 / 1961년생. 캘리포니아 예술대(CalArts)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도시의 거리에서 수집한 포스터, 전단지, 지도, 미용실의 파마용지 등 버려진 종이를 주재료로 사용하여 겹겹이 쌓고 갈아내는 독창적인 데콜라주 기법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시각화하는 대형 추상회화로 잘 알려져 있다. 제57회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작가로 선정(2017)된 바 있으며, 하우저앤워스(런던), 롱뮤지엄(상하이), 허시혼미술관(워싱턴 D.C.), 해머미술관(L.A.) 등 세계 유수의 미술 공간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뉴욕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테이트 모던, 워커아트센터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비영리 예술 단체 ‘아트앤프랙티스(Art + Practice)’를 공동 설립하여 지역 사회와 예술 교육을 지원하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마크 브래드포드, 도시의 파편으로 쌓아가는 공동체의 서사
김유미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증언한다. 예술가 본인의 삶에 집요하게 파고들어 내밀한 부분을 꺼내는가 하면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 역사의 기념비를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진실에 닿고자 실체에 다가가려 할수록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재현의 프레임에 갇힌 그림 속 ‘리얼리티’가 허구임이 밝혀진 이상 애초에 미술은 증언할 수 없다. 증언 행위 자체도 사건과 진술 사이에 시차가 발생함에 따라 온전히 실제에 다가갈 수 없는 불완전하고 취약한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예술은 시간과 공간의 파편을 주워 담아 연약한 토대 위에 하나씩 조각을 쌓아 올린다. 사실인가, 진실한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마크 브래드포드는 거대한 크기의 회화와 설치 작품을 선보이며 증언한다. 스스로의 삶을, 자신의 인생에 흔적을 남긴 다른 이의 삶을, 그리고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의 여정을. 겹치고 덮고 뜯어낸 작품 표면에는 무엇 하나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증언함과 증언할 수 없음을 오가는 그의 작품에서 궁금해진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었고 드러낼 수 없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크 브래드포드는 로스앤젤레스의 남부 흑인 커뮤니티에서 나고 자랐으며 현재에도 그곳을 중심으로 작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의 삶에 남아있는 기억과 커뮤니티의 서사는 자연스레 예술 세계를 구성하는 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새겨진 흔적을 중심으로 작품을 영역을 확장했다. 작가 또한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사회적인 기억이 깃들어 있다고 진술했으며 그에 따라 그의 작품은 ‘사회적 추상(Social Abstractio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작가의 정체성에 엉켜 있는 권력과 불평등, 불합리한 조건은 거칠게 각인된 그의 작품에서 암시하고 있는 주제이다. 현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브래드포드의 개인전은 2000년대 초기부터 최근까지 이어진 작업 세계를 조망한다.1 회화, 영상, 설치 등 40여 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작가가 목격하고 경험하고 기억하는 도시의 삶 속으로 관람객을 초대해 함께 거닐어 보길 권유한다.

〈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캔버스에 혼합 재료 2024
전시 공간에서 처음 관람객을 맞이하는 작품은〈떠오르다(Float)〉(2019)이다. 약 180평 남짓한 공간의 바닥을 가득 덮은 대형 작품을 맞닥뜨리는 순간 벽화처럼 거대한 색띠의 추상회화를 마주한 것 같다. 바닥에 발을 들이는 시점부터는 거리를 두고 관람하는 모더니즘식의 추상이 아닌 시각예술로 번안된 도시 공간을 경험하는 설치미술로 전환된다. 광활한 색면 평원은 도시의 흩어진 잔해로 가득하다. 브래드포드는 작업실 주변 거리에서 광고 포스터, 전단지, 현수막, 신문지를 수집했다. 작가는 도시의 부산물을 자르고 노끈으로 이어 붙인 수많은 알록달록한 긴 띠로 전시장 바닥 전체를 덮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색 노끈과 스트랩이 삽입되어 있다. 색띠로 직조된 표면을 걷는 행위는 그리 매끄럽지 않다. 바니시로 마감된 반짝거리는 표면이 아니라 빳빳하고 거친 천이 겹치면서 미세한 틈과 단차가 생겨 지면이 고르지 않다. 이곳은 어떤 장소를 지시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걷는 동선이 수평인지 수직인지 모호할 뿐 아니라 방향 상실의 감각이 느껴진다. 거칠고 성긴 도시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걷는 이에게 질문한다. 이 도시의 흔적 아래에는 어떤 시간의 층위가 겹쳐 있는지, 그 층 사이에 만들어진 틈에는 어떤 기억이 끼어 있을지, 우리는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무심코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떠오르다〉는 단순히 캔버스 위를 걷는 행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향한 그의 여정에 참여하는 이정표를 만든다.

〈떠오르다〉 혼합 재료 2019
도시의 파편을 활용하는 것은 브래드포드의 작품 대부분을 관통하는 방식이다. ‘상업 포스터’ 연작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매일같이 수없이 생산되고 버려지는 부산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작가는 도시의 버스 정류소, 공터, 이발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단지를 수집했다. 전단지는 저렴한 보험, 이혼과 친권 소송, 신용불량자를 위한 대출, 신속한 이민 서류 처리를 광고한다. 브래드포드는 한 인터뷰에서 거리 포스터는 일종의 백색소음처럼 자신의 주변 환경을 구성한다고 언급했다. 전단지는 도시를 만드는 환경이자 지역 커뮤니티의 현실을 말하는 사회적인 언어인 셈이다. 작가는 수집한 전단지와 여러 겹의 빌보드지를 겹친 후 사포질하거나 긁고 뜯었다. 〈무제(상업 포스터)(Untitled (Merchant Posters)〉(2024 )에서 전체를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는 찾기 어렵다. 불에 타거나 물에 불었다가 마르면서 만들면서 흑인, 퀴어, 주변부로 밀린 삶까지 지리적, 역사적 표백된 것처럼 해독할 수 없는 상태로 벗겨져 있다. 혹은 여러 장의 포스터가 겹치면서 서로 다른 장의 단어가 뒤섞인다. 작품에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고단하고 절박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말할 수 없고 들을 수 없음이 공존한다. 구체적인 삶의 서사를 진술하기보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사건의 연속에서도 무심하게 이어지는 삶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전단지 위에 또 다른 전단지로 벽면이 도배되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리셋되지만 그 아래에는 시간의 여러 층이 쌓이는 것처럼.

〈사랑도 증오도 아닌〉 캔버스에 혼합 재료 2024
도시의 흔적을 다루는 브래드포드의 독특한 방식은 여러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겹치고 쌓고 긁고 찢고 바르고 새기기.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2023)에서는〈상업 포스터〉에서 진행된 그의 방식이 십자 제단화 형태로 구현되었다. 도시 벽면을 그대로 옮겨온 것과 같이 이 작품에는 여러 장의 부동산 전단지, 공연 포스터가 뜯긴 상태로 콜라주 되어있다. 작품 표면은 옅은 회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어 부산물의 흔적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다. 거대한 규모와 거친 표면으로 물성을 감각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제목에서부터 미국 사회와 정치적 현실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 “명백한 운명”은 19세기 미국의 팽창주의 사상을 나타내는 표어이다. 당시 미국은 원주민의 땅을 정복하고 민주주의와 문명을 전파하는 것을 신의 뜻이자 ‘명백한 운명’이라 믿으며 그 행위를 정당화했다. 작품은 19세기 서부개척 시대의 폭력과 21세기 도시화에서 드러난 경제적 고립을 교차시킨다. 전면에 희미하게 새겨진 “조니가 집을 삽니다(Jhonny, Buys)”와 “잃었습니다(Looses)”는 도시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에서 드러나는 경제적 권력의 역학과 삶의 터전을 잃은 지역민의 현실을 환기시킨다. ‘엔드 페이퍼(End Papers)’ 연작에서 브래드포드는 자신이 경험한 도시 공간을 매핑하는 방식으로 구조화한다. 이 연작은 브래드포드가 작업을 시작했던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러 가지 재료로 회화 실험을 이어가던 중 그는 미용실에서 사용하는 파마용 종이를 쓰기 시작했다. 한때 어머니가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일하며 다루었던 얇고 반투명한 종이, 엔드 페이퍼는 캔버스 위에 올려졌다. 〈파랑(Blue)〉(2015)은 엔드 페이퍼가 등장했던 무렵에 제작된 초기작이다. 연속적으로 촘촘하게 부착된 엔드 페이퍼는 격자 구조를 만들고, 그 위로는 스텐실이 된 파란색 물감이 로스앤젤레스 지도를 그린다. 지도의 상단 일부 블록에는 흑백 신문지가 붙어 있다. 납작하게 보이지만 실제론 세 개 층이 축적된 콜라주 작품이다. 편평한 지도 위에 쌓인 표식들은 작가가 살아온 도시가 오랜 시간이 쌓인 장소임을 상기시켜 준다. 그곳은 공동체의 역사가 누적된, 끊임없는 이동과 이주로 점철된, 불평등과 경계가 생산되는 삶의 현장이다.

〈파랑〉캔버스에 혼합 재료 2005
20여 년에 걸친 ‘엔드 페이퍼’ 연작은 2020년대 들어 더욱 투명하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최근작에 속하는 〈사랑도 증오도 아닌(Neither Love nor Hate)〉(2024 ), 〈심장이 뛰는 쪽(The Way Your Blood Beats)〉은 엔드 페이퍼를 사용해 정서적인 ‘지도’를 그린다. 브래드포드는 엔드 페이퍼의 가장자리를 토치로 그을려 반투명한 종이에 테두리를 만들었다. 이 투명하고 얇은 면은 여러 장을 겹쳐도 텍스처나 두께감이 없이 캔버스에 납작하게 붙는다. 촘촘하게 짜인 초기작의 격자 구조보다 최근작에서는 더욱 느슨하고 유연한 방식으로 엔드 페이퍼가 활용되었다. 여러 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겹치면서 만들어내는 선의 흐름은 공간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현미경으로 본 세포의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떠오르는 이유이다. 지도 위에 영원히 박제되길 꺼리는 듯 정연함과 무질서, 수축과 완화, 작은 유닛과 덩어리, 침묵과 소란스러움을 오가며 시각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화면의 변화는 도시를 직접 다룬 작품이 아닐지라도 사람들과 커뮤니티로 인해 살아 움직이는 도시를 비유한다. 또한 도시를 오고 가는 이들의 이동 흔적을 (비)가시적으로 보여준다.

〈폭풍이 몰려온다〉 캔버스에 혼합 재료 2025
이동과 이주의 서사는 〈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I Don’t Know What I Am)〉(2024 )를 비롯한 ‘기차 시간표’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1910년대부터 60년 동안 미국 내 600만 명의 흑인이 자발적으로 이동하는 대이주가 일어났다. 인종차별과 열악한 경제·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더 나은 삶을 찾아 그들은 남부에서 북부와 서부로 옮겨 갔다. 브래드포드는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의 이주 역사를 화면 위로 소환한다. 기차역 전광판에 표시되는 시간표에 숫자가 나열되는 것과 같이 캔버스 위에는 도시 간의 거리를 나타내는 숫자가 빼곡히 정렬되어 있다. 브래드포드 특유의 방식대로 화면에는 여러 겹의 종이가 찢어져 있고 안료가 마모되거나 지워져 숫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침식된 표면, 지워진 숫자는 고난의 이주 역사와 이후 공동체가 겪은 단절된 시간을 드러낸다. 대이동 이후 그들의 삶은 더 나아졌는가. 브래드포드는 지난 대이동의 기억을 오늘날 불러들여 미래를 약속한 땅을 향한 헛된 믿음, 착취와 차별이 반복되는 그들의 서사를 애도한다. 쓰이지 않은, 기억되지 못한, 말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명백한 운명〉캔버스에 혼합 재료 2023
전시의 말미로 갈수록 사회 불평등, 폭주하는 권력, 부조리한 현실을 직접 다룬 작품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배구조와 사회규범에 순응하지 못한 불안정한 이를 애도하는 작업을 이어간다. 〈폭풍이 몰려온다(Here Comes the Hurricane)〉(2025)는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신작으로 작가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억압된 개인의 삶과 시공간을 겹쳐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 작품은 7점의 평면 회화와 공간 설치로 구성된 복합적인 작품이다. 작품은 2005년 미국 남부 지역을 휩쓴 허리케인 카트리나에서 출발한다. 당시 정부의 느리고 무능한 대응으로 인해 수천 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특히 흑인과 저소득층 주민의 피해는 막대했다. 브래드포드가 그린 회화에는 미국 최초 드래그 퀸이자 차별과 탄압에 맞선 윌리엄 도어시 스완이 등장한다. 유령처럼 희미한 그의 형상 위에 허리케인에 관한 랩 가사가 덧입혀져 있다. 네 벽면은 휘몰아치는 금빛 선이 그어진 검은 벽지로 둘러싸여 무자비한 재난과 파괴의 공간을 묘사한다. 마치 허리케인이 훑고 지나간 자리처럼 긁히고 균열이 일어난 거친 작품 화면은 재난 이후의 삶에 대해 암시한다. 재난은 어떻게 공동체를 단절시키고 소외시키는가. 작품 속 흔적처럼 남은 스완의 모습, 그가 상징하는 회복과 저항은 카트리나로 무너진 공동체에 어떤 목소리를 보탤 것인가.
태양의 빛이 가득한 로스앤젤레스와 거대한 크기의 예술 작품. 이 두 가지 조합을 떠올리면 브래드포드 작품이 화려한 도시 외피를 스펙터클하게 다루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반대이다. 도시의 버려진 잔해를 모으고 쌓고 벗겨내며 억압된 역사와 부조리한 사회 구조를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표면적으로 거칠고 압도적인 힘을 가졌지만 강력하게 항의하기보다는 애도하고 추모하며 관람객에게 걷고 사유하기를 권한다. 도시 표면에 누적된 공동체의 시간과 아픔에 다가가면서. 불평등과 부조리의 오랜 역사를 통과했지만 그러한 불가항력적인 조건에서도 브래드포드의 작품은 그럼에도 계속해서 걸어야 하고 나아가야 함을 말한다. 동선상 전시의 마지막 작품은 〈나이아가라(Niagara)〉(2005) 이다. 이 영상에는 작가의 이웃인 멜빈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걷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굴곡진 역사와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걷는 것, 느리지만 계속해서 걷는 것, 그가 역사에 저항하는 조용한 몸짓이자 증언하는 방식이다.
1 《마크 브래드포드: Keep Walking》 아모레퍼시픽미술관 8.1~2026.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