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이며, 생활이고, 돌봄이며, 꿈인 것
– 탈장소와 장소로서 비어있는 몸
김정현 미술비평
Art Critique
서영란의 ‘누빔 워크숍’(2024 ) 현장 기록 사진 제공 : 서영란
위기가 일상화된, 또는 그러함이
기어코 드러난 동시대의 삶에서
위기는 특수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이며, 생활이고, 돌봄이며, 꿈이다.
요즘에는 어쩐지 위기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마다 구차한 느낌이 든다. 최근 몇 년간 직접 보고 겪은 사건에 더해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비극적 참사가 끝도 없이 이어져서인가. 가깝게 경험한 사례로 코로나19 팬데믹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재진화가 떠오른다. 먼저 ‘가깝게 경험’했다는 단서를 달았듯이, 주체의 위치와 삶의 맥락에 따라 어떤 위기를 강하게 의식하는 시점과 계기는 달라질 수 있다. 일단 지척에서 엄습하는 사건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난 이후에 주변을 돌아보면 위기는 놀랍도록 항시적이었다. 그러므로 동시대의 위기에 관한 논의의 실마리는 사건의 특수성이 아니라 일반성 속에서, 새로운 화두보다는 구태의연한 질문 속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이렇게 구실을 꾸민 후에야 밝힌다. 이 글은 이동하는 삶의 위태로움에 주목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몇 년 전 필자가 거주지를 서울에서 헬싱키로 옮긴 이후에 부쩍 이주하는 삶의 고단함을 의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현대미술 관광객 또는 답사자이던 때와는 주제와 질문, 아니 그것의 내용보다는 체감의 강도가 달라졌다. 여행과 거주의 차이, 자발적 이주와 이재이주1의 차이를 드러내 가르려는 태도는 그러한 주체의 정체성이 이방인보다 고향에 속한 자에 여전히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 주체는 땅과 집에서 벗어난 후 그를 매어두었던 관계, 돌봄, 투쟁의 현실로부터 풀려나 텅 비어있다. 이렇게 비어있음으로부터 야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몸이 이동하며 어딘가를 방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이 장소 그 자체라면 어떨까. 장소로서 이 몸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장소로서 몸에 깃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깃들게 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글은 빈 몸에 닿거나 스민 위기의 감각에 관한 이야기이자, 비어있음을 계기로 비로소 가능하게 된 예술적 표류기이다.
보안(security)의 기술
미국 작가 노엘 메이슨(Noelle Mason)의 〈엑스레이 비전 vs. 비가시성〉(2020~2021)에 주목해 보자. 작년 핀란드 탐페레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잔인한 광채(Cruel Radiance)》(2023)에서 가장 강력하게 시선을 사로잡은 작업이다. 이 작업은 기묘한 엑스레이 사진 연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정적인 검푸른색으로 흐릿하게 채색된 피사체에는 가방이나 트럭과 같은 사물 이외에 인간 신체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향하는 미등록 이민자들로, 트럭 짐칸이나 여행용 가방에 숨은 몸이 엑스레이 촬영으로 적발됐다. 이 작업에 사용된 충격적인 이미지는 미국 국경순찰대와 국경감시자경단의 웹사이트에서 수집한 것이다. 작가는 치밀한 국경 순찰을 위해 사용되는 ‘머신 비전’ 기술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재매개하고자 한다. 매체의 미묘한 변화가 어떻게 이미지에 새로운 정서적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탐색하며, 감시 매체 자체가 기계 이미지의 피사체를 탈인간화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전유는 새로운 시각 기술이 어떻게 땅과 몸을 바라보는 신식민주의적 세계관을 강화하는지 폭로한다.2
기술(technology)을 활용한 잔혹한 통제의 기술(art)은 같은 전시에 나온 영국 작가 수잔 쉬플리(Susan Schuppli)의 〈콜드 케이스〉(2021~2022)에도 엿보인다. 작가는 추위라는 온도의 상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차별의 경험이 인권 침해와 법적 문제로 이어지는 사태에 주목했다. 영상과 자료를 통해 제시된 현대 및 역사적 사례에서 온도는 폭력의 지표가 되며, 기후 식민주의, 오래된 사회경제적 불평등, 지속적인 구조적 인종 차별을 드러낸다. 그중 한 가지 사례를 자세히 살펴보자. 2003년 미국/멕시코 국경에 설치된 미 세관국경보호국(CBP) 구치소에 수감된 이민자들은 비좁은 냉동고 같은 감방에서 추위와 싸운다. 법률에 따르면 임시 수용소의 온도는 섭씨 20~24도로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수감됐다가 풀려난 사람들은 구금실의 ‘아이스박스’ 같은 환경에서 겪은 끔찍한 일을 반복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간수가 처벌을 내릴 때 온도를 낮추겠다고 위협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얼어붙은 시멘트 바닥에 몸을 가누지 못해서 아이를 안은 채 앉거나 선 채로 잠든 기억을 회고한다. 작가에 따르면 구금실의 온도 조절은 이주민의 삶을 통제하는 또 다른 방식이 된다. 이러한 학대를 통해 이주민이 정식으로 망명을 신청하지 못하도록 반강제하고, 임시 수용소에서 영구 이민세관단속국(ICE) 시설로 옮기도록 한다는 것이다.3
인간의 이동을 억제하고 통제하여 국가주의적 안정을 취하려는 현대적 보안 기술은 나날이 발전한다. 우리 시대의 벌거벗은 생명은 새로운 시각 기술이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실험실의 도마 위에 올랐다. 앞서 소개한 두 편의 작업은 전시라는 시각예술의 형식을 통해 ‘탈인간화하는 보기’를 개념적으로 전유한다. 이를 통해 노골적으로 보는 (그리하도록 권장받은) 관람객의 시선에 마찬가지로 내재한 기계적 속성을 환기한다. 기계적 시선은 일종의 비인간의 것일 테다. 우리는 비인간 주체를 발견하는 인식의 즐거움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고, 인간과 마찬가지로 비인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행하는지, 각기 다른 비인간 주체가 변형시키는 인간의 윤리 감각이 무엇인지 사고해야 한다.
임시 거처에 거주하기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대규모 난민을 발생시켰다. 이후로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우크라이나와 연대해 지지를 표명하며 난민을 기꺼이 수용하는 분위기다. 리투아니아 빌뉴스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불편한 빌뉴스》(2024)에 소개된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이웃 삼기 가장 불편한 인구 집단’ 중에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는 10%대로 가장 낮은 응답률을 보였다. 반면 역사적으로 러시아계 인구 비율이 높은 발트 지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던 러시아계 이민자에 대한 불편감이 30%대로 치솟았다. 이슬람교도가 가장 불편하다는 답변은 가장 높은 수준으로 50% 가깝게 나왔다. 조사 결과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유럽의 관점에서 기독교도 중심의 우크라이나 출신 난민을 수용하는 문제는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로 발생한 난민을 받아들이던 때와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렇게 사안에 따라, 그것을 마주한 주체마다, 각기 다른 감정과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동시에 강조할 것은 다시 전 지구적 삶의 보편적 조건이 된 탈장소(displacement)의 경험이다.
2015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불안정성: 탈장소와 쉼터를 통해 밝히기》는 난민 캠프라는 장소가 임시 거처의 의미를 넘어 인권이 도시 계획과 어떻게 교차하는지 검증하는 장소가 된다고 주장하며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다양한 작업을 소개했다. 해당 전시의 기획자인 뉴욕현대미술관 디자인 및 건축 부문 큐레이터 진 앤더슨(Sean Anderson)은 “수송되고 탈장소화되는 순간, 난민에게 쉼터란 무엇이며, 난민은 우리가 무언가를 고안하는 데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하고 질문한다.4 이 전시에는 예를 들어 유엔아동기금(UNICEF)에서 난민 캠프에 배포하는 ‘스쿨 인어 박스’와 ‘청소년의 표현과 혁신을 위한 키트’가 소개됐다. 긴급 상황 발생 후 72시간 이내에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키트/박스당 약 40여 명의 학생이 사용할 수 있는 지도, 종이, 연필과 펜, 가위, 도화지 등과 같은 용품을 담았다.
전시 작품 중 인도 작가 리나 사이니 칼랏(Reena Saini Kallat)의 〈실로 짠 연대기(Woven Chronicle)〉(2011)는 단순한 세계지도 그림이 아니라 다양한 주체의 이주 경로를 나타냈다. 일반적으로 국경은 영토와 주권으로 규정된 고정된 물리적 경계로 정의되지만, 세계와 그 역사는 인간, 동물, 상품 등 무수한 개체가 경계를 넘나들며 이주하고 이동하는 움직임으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이동의 궤적을 기준으로 삼으면 세계지도의 선을 다시 그려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도 난민 수용의 과제가 사회적으로 부상한 이후로 관련한 연구와 프로젝트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 발간된 서적 『춤추고 싶은데 집이 너무 좁아서』(파시클, 2024)는 ‘로힝야 난민 여성들의 집, ‘샨티카나’에 가다’라는 부제대로 저자들이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 위치한 난민 캠프를 방문해서 얼마간 체류한 경험을 담고 있다. 자국에서 난민을 맞이하는 때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이렇게 낯선 곳의 캠프에 찾아가 머물러 보는 것은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이방인으로 만들어보는 것과 같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이방인이 된 이들의 기록 중 시각예술가 오로민경의 페이지를 살펴보면 새롭게 배울 만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작가는 그곳에서 역사와 정치와 자연환경과 같은 것을 조사하는 일보다, 로힝야 난민 여성들과 어울려 노는 데 몰두한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한낮에도 깜깜한 셸터 안에 모여 앉아 그림자놀이를 하고, 카메라 옵스큐라를 만들어 주변을 돌아다닌다. 작가는 ‘어둠’이 “우리가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필요한 상태임을 공유”하고자 했다고 쓴다. 그동안 피해자로서 피사체가 되는 경우가 많던 여성들은 스스로 보고 촬영하는 ‘행위의 주체’가 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카메라’가 “함께 보고 싶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을 때 비로소 한 공간 안의 존재를 서로 만나게 해주는 관계적인 도구가 된다”고 깨닫는다.5
작가 공동체 클룹코(klupko ) 기획으로 열린 행사 ‘집은 꿈을 가꿔준다’(2022 )를 위한 이미지 제공 : 임고은
임시 거처에 거주하는 삶을 예외적이고 특수한 것이 아니라 삶의 보편적 조건으로 삼아 어둠에 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 이러한 감수성의 전환은 이제 정치적이며 실존적인 과제가 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어둠, 집 없음, 뿌리 없음, 흔들리며 부유하는 감각을 상실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환대이자 폭력에 저항하는 투쟁의 감각으로 변환할 수 있을까? 프랑스 건축 및 문화유산 박물관에서 열린 《Mini Maousse 8》(2022) 전시는 한 가지 미래주의적인 기획을 제시한다. 지구 온난화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 중 해수면 상승과 자연재해 증가에 초점을 맞추고, 남반구의 가뭄, 생태계 파괴, 거주 환경이 위협받는 미래에 대비하며 수상 마이크로 건축이라는 과제를 공모에 던진 것이다. 기획의 설명에 따르면 두 해안 사이에 떠있는 50㎡ 미만의 오두막-섬은 생태 위기에 대비한 단순한 대피소가 아니다. 상상과 아이디어, 책과 명상, 유쾌함과 문화 등이 교류하고 교차하는 장소로서 생태적 가치를 지닌 시적인 미시 건축물이다. 위기에 맞서는 상상은 위기 속에서 서로를 환영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과 다름없다.
고독한 이주자에서 환대와 돌봄의 주체로
캐런 캐플란(Caren Kaplan)은 구미 근대 문예 서사에 나타난 이주와 여행에 대한 관념을 분석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유로 아메리칸 모더니즘은 단일성, 고독, 소격, 고립, 장소가 삭제된 미학을 찬양한다. 즉, 망명 예술가는 결코 집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실존적으로 혼자이며, 탈장소화되는 과정의 실험과 통찰에 큰 충격을 받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모더니스트의 망명(Modernist exile)이 우울할뿐더러, 회복할 길 없이 상실한 대상이나 이제 분리되어 버린 익숙하고 사랑하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거의 또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은 특정한 개인들도 있겠지만, 모더니스트 망명 서사의 ‘대형(formation)’은 모더니즘의 실험적인 문화를 생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소격과 분리를 경험한 자들을 위해 복무하는 듯하다.”6 이를 참조하여 말하자면, 물론 주류 모더니스트 망명 서사대로 우울과 그리움에 사무친 고립되고 고독한 특정한 개인도 있겠지만, 동시대의 탈장소, 이주, 망명의 서사는 집단적이며, 환대와 돌봄의 온기, 그리고 탈취된 행위성을 다시 찾으려는 투쟁의 열기로 시끌벅적하다.
제15회 발틱 트리엔날레 리투아니아 빌뉴스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전시 전경 2024 사진 : 김정현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는 영상 작가 임고은은 2022년 한국-네덜란드 수교 60주년 기념 국제교류 지원 사업을 통해 ‘집은 꿈을 가꿔준다’(2022)를 기획했다. 이 기획은 한국과 네덜란드 출신의 작가만을 표현의 주체로 삼기보다, 한국과 네덜란드의 자본과 장소를 사용하여 이방인을 환대하는 시간을 펼치는 데 집중했다. 작가는 중세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에서 약자를 돌보고 방랑자와 순례자가 머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건축의 전통이 있던 데 주목하고, 위트레흐트에 남아있는 바르톨로메우스 게스트하우스를 모임의 장소로 삼았다. “한때 누군가의 피난처였던 이 집에서 우리는 손님이자 주인으로, 또한 주인이자 손님으로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다양한 종류의 돌봄과 환대를 모색하고자 했다.” 이 기획은 예술가 개인의 작품을 제작하는 대신, 자기 집에 난민을 초대해서 같이 사는 실라 하지 헤이다리(Shila Hadji Heydari)가 주인과 손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같이, 동료 예술가가 한데 모여 함께 고민하는 주제를 퍼포먼스 예술의 언어로 풀어내려고 시도했다. “한곳에 고정된 소유로서의 집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곳으로서의 집”이라는7 작가의 말은 모더니스트 서사에서도 낯설지 않지만, 그렇게 유동적으로 된 집은 자유로운 혼자보다, 타자의 유동성이 깃들고 흐를 수 있는 장소이다.
코펜하겐에 사는 안무가/리서처 서영란은 “자신에게 돌봄이 필요해서” 서로를 돌보는 예술가 조합을 만들었다. ‘누빔’은 코로나 팬데믹 이전 결성된 이주민 가족 모임 ‘부모님의 아이들’ 클럽에서 파생된 소규모 신생 예술가 협회다. 코펜하겐의 우크라이나 난민 아이들을 위한 예술 워크숍을 하고, 방학이나 휴일마다 지역 공공도서관이나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위한 예술 워크숍을 운영할 뿐만 아니라, 예술가이자 부모이기도 한 동료들이 각자 작업을 위해 출타한 시간에 자녀를 서로 맡아 돌봐주는 상호 지지의 공동체이다. 기후위기 활동가 단체인 멸종 반란(Extinction Rebellion)에 참여하며 ‘비커밍 스피시스(Becoming species)’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작가는 덴마크 내의 법적 지위가 불안정해서 평화적인 불복종일지라도 “법의 선을 넘지는 못한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그는 난민이 겪는 문제와 외국인으로 겪는 문제를 구분하는 의식을 반성적으로 문제시하며, 연대함으로써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8
관람과 만남의 끝없는 표류기는 의외의 텅 빈 장면에서 일단락된다. 올해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열린 제15회 발틱 트리엔날레(Baltic Triennial)의 주제어는 ‘Same day’였다. 당일, (바로) 그날, 같은 날 등으로 번역할 수 있을 이 표제어가 별다른 구체적인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유럽으로의 이주 직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맞닥뜨린 필자의 경험으로 인해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발트 지역 국가에서 전쟁 발발 후 처음 개최하는 미술 행사가 이러한 ‘비상사태’를 중요하게 대할 것으로 기대했다. 예상외로 전시장은 거의 텅 비어있었다. 국제 미술 행사에서 이렇게까지 정체성과 지역성에 관한 주제가, 정치적인 이미지가 부재한 때가 있었던가. 이 기획은 제목이 의미의 부재를 통해 지시하고 있듯이, 극도로 (그러므로 몹시 익숙하게) 추상화되고, 표현적이지 않으며, 거의 텅 빈 기표적 이미지를 통해, 일상의 범상함, 통속성, 익명성을 부각시킨다. 매일 똑같은 하루, 그러나 그러한 “나날이야말로[나날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투쟁”이라는 것이다.9 위기가 일상화된, 또는 그러함이 기어코 드러난 동시대의 삶에서 위기는 특수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이며, 생활이고, 돌봄이며, 꿈이다.
* 본 원고는 (재 )예술경영지원센터 ‘2024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기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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