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먹이-이기의 자연
Nature as Being Prey
강영민 〈마장터 가는 길〉(사진 왼쪽) 싱글채널비디오 24분 20초 2022, 권군 〈운주사 할미륵〉 캔버스에 유채 90.9×72.7×cm 2022
김주리 〈모습:某濕_202210〉 젖은 흙, 혼합재료, 향 95×165×1220cm 2022
〈먹이 - 이기의 자연〉을 기획한 ‘인간’ 김남수의 1차 목표는 “휴머니즘의 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본래 악어의 먹이였다는 사실을 환기한 발 플럼우드의 악어와의 만남을 예로 들며 인간의 ‘먹힐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개방한다. 비인간을 인간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말잔치’를 끝내기 위해 인간 자신이 날카로운 이빨에 다리가 찢기고 피가 철철 나는 상상을 해보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품을 만한 타자만 취급하는 미술계의 ‘비인간’에 대해서는 신물이 난 지 오래다. 담론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지향점은 도무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김남수가 ‘먹이 - 이기’라는 말을 들고 나왔다. 여신의 입속을 들락날락하는 건 분명해 보이는 괴상한 기획자는 작가들과 홍천이라는 공간 안에서 호환마마의 시절까지는 유효했을 신화와 철학, 자연을 들여다보며 이 전시를 꾸렸다. 작가 대부분은 먹이보다는 관찰자에 가까워 보였지만 최소한 홍천으로 가는 길목을 온몸으로 훑어낸 흔적은 역력하다.
전시는 홍천미술관,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중앙시장 옥상에 위치한 분홍별관에서 열렸다. 홍천미술관에는 강영민 권군 김도희 김주리 배미정 지현아 용해숙 현지예의 작품이 있다. 시대의 증상을 정치적 인물과 팝 - 하트 - 아트로 드러내왔던 강영민은 이번에 〈마장터 가는 길〉이라는 로드무비를 내걸었다. 버섯을 씹으며 산과 강을 넘는 느슨한 도보여행 끝에 그가 백도사와 만났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숲을 서성이는 맨몸의 인간은 그 자체로 먹이이긴 하다. 김남수가 이전 전시 기획에 ‘구미호’를 소재로 가지고 온 것을 생각하면 강영민이 홍천미술관 전시 작가 중 유일하게 남성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본의 아니게 팔루스처럼 솟은 봉우리를 등진 채 무용가이자 작가인 현지예가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며 필사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모니터 없이, 벽과 천장이 닿는 모서리에 삐딱하게 쏘아올려진 눈부신 화면을 이따금 확인하며 눈먼 채로 필사하는 작가 옆에는 《하느님이 여자였던 시절》, 《알파벳과 여신》, 《여신을 찾아서》, 《여성 관음의 탄생》, 《동아시아 여신 신화와 여성 정체성》, 《암시된 거미》 같은 책이 놓여있다. 작가는 팔봉산 2봉의 삼부인당의 주체인 시어머니, 며느리, 딸을 〈며느리미녀여신〉이라는 새로운 삼위일체로 겹쳐 놓고 흉년의 원인인 불경한 ‘며느리’라는 이름을 씻어내는 일종의 의식을 벌이고 있었다. 아마 전시 중간쯤 미녀가 되었다가 여신이 되어 승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필사 퍼포먼스는 왜 전시 기간 내내 해야 하는지 물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필사적이었으므로.
아카이브전을 보려면 미술관에서 나와 시장으로 가야 한다. 마당 너른 분홍별관에는 나그네가 미처 보지 못한, 기획자 · 작가들이 들춰낸 홍천의 홍수, 삼부인 신화와 신화적 사고로 문학작품을 읽어내는 신범순 교수의 ‘돌’이 있다. 신범순은 남한강 임진강 부론강 홍천강에서 얻어낸 돌에서 각각의 얼굴을 지닌 세계, ‘석리(石理)’를 발견하고 그것을 흰 종이에 옮긴다. 결국 분홍별관에 아카이빙 된 것은 그리핀과 나무와 온갖 것들이 살아가는 세계와 그 이치 같은 것들이다. 먹이 - 이기(Being Prey)는 여기서 완성된다. 우리는 먹이 - 이기일 필요도 없다. 그냥 ‘이기’면 된다. 먹이라는 것도 잊은 채 돌과 눈을 마주치는 몰입의 순간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지도.
그런데 뭔가 후련치 않다. 언제나 봉긋한 가슴의 대지와 비견되는 ‘여신’이라는 말이 전시 내내 쫓아다닌 게 못내 걸린다. 일본 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는 三(삼)과 山(산), 産(산)의 유사 관계를 짚은 일이 있다. 우뚝 솟은 세 기둥의 산은 기가 충만한 장소이며, 생명력의 근원이 되는 정기를 산출하는 장소다. 우리나라에서는 할매로 변신한 삼신. 3이 여성(만)의 수인가? 조자용의 삼신 발견에 약간의 조미료를 치자면 불교와 유교에 밀렸던 샤머니즘이 가장 약한 존재였던 여성의 몸을 빌려 명맥을 유지해온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여신’이라는 건 여전히 남성적 시각에 갇힌 속임수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남신에 대한 반동일 뿐(단지 돈을 나눠 갖는 ‘어머니 하나님’ 같은), 여신이라는 존재가 ‘먹이’가 되려고 하는 인간에게 어떤 초월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작가들이 연구에서도 밝혔듯 여성(신)도 악랄하고, 공격적이며, 에고가 아주 세니까 말이다. 영웅을 낳는 출산드라를 넘어서는 여신이 존재할 수나 있을지. 창녀와 성녀를 오가는 여신, 그녀가 심청이든 마리아든 네팔의 락슈미든 바빌론의 여신이든 브리트니 스피어스든, 여성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성적 대상을 벗어난 일이 없다. 에로스라는 길에 가로막히느니 우회하는 것이 낫다. 차라리 권군 작가처럼 생식기를 초월하는 파동을 그리는 것이 “존졔”, 그리고 기획자가 그토록 갈구하는 ‘애성’에 더 빨리 (다시) 당도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신도 비인간만큼이나 공허하다. 필사적이었던 작가가 여신이 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전시를 보기 위해 서울에서부터 출발한 이라면 감상은 이 두 공간에서 끝나지 않는다. 석양을 바라보며 팔봉우리를 훑어야 하고, 용문산 자락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두물머리도 건너면서 이 산천의 전설과 신화를 복기해야 한다. 영문도 모른 채 동쪽을 향해 내연기관을 타고 터널로 빨려 들어갔던 반나절 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백 년 전만 해도 서울에 가기 위해서는 호랑이 두어 마리 만나 팔 한쪽 내어주었을 수 있다는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마음가짐. 아차차. 기획자의 먹이가 되었다.
위 왼쪽 현지예 〈며느리미녀여신〉 퍼포먼스 가변설치 2022
가운데 지현아 〈머리에 옥수수 싹이 난 사람들〉(사진 왼쪽) 벨벳 위에 자수 110×480cm, 45×230cm, 45×230cm 2022
배미정 〈안녕을 비는 낮의 숲〉캔버스에 아크릴 162.2×162.2cm 2022
오른쪽 김도희 〈배꼽산울림〉관객 참여 조각, 황동, 심벌즈 스탠드 50×50×160cm 2022
아래 분홍별관 신범순 아카이브 전경. 다냥 영춘, 강릉 남대천, 임진강, 김삿갓마을 베리골강변 등에서 발견한 다양한 “샤 ” 석판 사진: 홍철기
배우리 |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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