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 위에서, 환대의 지평을, 함께의 감각을
김성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
Special Feature
“미술관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라고 말할 때, ‘문턱’이란 단어는 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미술관의 내용과 형식이 절대적으로 쉬워야 한다든가, 누구든 미술관이 내 것인 양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든가 하는 뜻으로 말이다. 특히 그 미술관이 국공립 기관일 때, 재정적 기반의 공적인 성격 탓에 이러한 문턱의 논리는 반박할 수 없는 명제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는 한다. 최근 사회 전반에 걸쳐 집중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문화 접근성이나 다양성 쟁점들에 있어서도 그렇다. 동시대 미술과 미술관 논의에서 이와 같은 주제는 포괄적인 타자성의 탐구라는 측면에서 작가들의 작업으로, 큐레이터들의 기획으로, 또 미술관의 전시 연구를 통해 관점과 실천의 체계를 오랫동안 세공해 왔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도식화된 정책의 틀은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는 일에 어떤 일률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장애인, 다문화 가족 등 소외되고 취약한 이들을 특정하여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 제도적 드라이브에 의한 시도들이 의미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컨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대규모 기금의 지원은 미술관들이 전시를 만들 때 장애와 접근성의 문제를 소재주의가 아닌 기관의 기본값으로 고려하게 해 주었다. 또한 정책 방향에 맞춘 새로운 기획을 도모할 때 미술관 자원의 배분, 의사결정의 과정 등을 재편하면서 이와 같은 사업들의 지속 가능성, 지속 필요성에 대한 논의의 토대와 공감대를 형성하게도 해 주었다. 소기의 성과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이러한 방향의 움직임들은 대체로 미술관의 기회를 고르게 나눈다는 시각에서 이뤄졌다. 미술관의 공공성이란 대상의 공백을 끝까지 찾아내어 기어코 n분의1로 공평하게 기회를 주어야만 한다는 듯 미술관에서 ‘누락’되었거나 ‘배제’되었던 작가나 관객을 찾는 데 치중하는 것이다.
공공 미술관이 품어야 하는 대상을 ‘모두’로 통칭함으로써, 한정된 자원으로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그 모두를 향해, 그러면서 끝없이 생겨나는 공백을 붙들고 고군분투하는 대신, 사회적 가치를 미술관의 큐레토리얼 개념과 통합시키는 실천 속에서 공공성에 대한 반문이 필요하다. 사회의 다른 제도들과는 다르게 미술관이 예술을 통해 공공적 가치를 실행하는 방식, 기존 제도 질서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에 구조적으로 내면화되어 있는 고유한 방식은 무엇인가? 지난 몇 년간 미술관의 공공성에 대한 이론화의 시도 속에 부상한 커먼즈의 사유를 빌려 오자면, 미술관의 공공성은 집합적인 주체들이 함양하는 공통 감각에 가깝다. 미술관의 자원을 공평하고 균등하게 나누는 평등주의가 아니라,1 그리고 따로 분리된 단일한 소외계층들이 모인 총합으로서의 보편성이 아니라, 이질적인 대상들이 집합적 주체로 서로 연결되는 감각의 형성이다.
‘세마 러닝 스테이션: 전환’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전경 2022
사진: 김윤재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의 국제 공공프로그램 ‘세마 러닝 스테이션: 전환’에서는 미술관 배움의 주체성과 상호성에 대해 토론하고 이 논의를 위해 제안된 주제어들을 시각화하여 발간한 바 있다.2 이 용어 사전이 서술하고 있는 기입어 중 ‘관계 모으기’와 ‘함께 생각하는 감각’은 미술관 접근성에 대한 성찰에도 유효한 축이 될 수 있다.
“관계를 대상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대상 자체보다는 대상을 둘러싸는 것들에 더욱 주목함으로써[…] 미술관이 생산하는 대상들과 함께 살아있는 존재들과의 상호작용에 더 중점을 둘 수 있도록 하며, 더불어 자신의 중심에 대상(objects)보다는 다른 존재(lives)를 위치시킴으로써 미술관이 과거 공공과 맺었던 형식적인 책임 관계에서 벗어나 공공이 새롭고 보다 중심적인 지위를 가지는 전환적 미술관이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함께 생각하는 감각은 추상적이고 초월적이며 신체에 내재한 어떤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감각적 관계로부터 형성된다. 몸의 영향을 받고, 몸의 행위로 증폭되는 생각은 그러므로 언제나 감각적이다. […] 함께 생각하고 함께 느끼고 함께 움직이는 데에는 신체적으로 매개된 감각을 맞춰 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늘 접촉하고 있다고 여긴 이들 간에도 생각 이전에 신체적인 감각의 조응과 조련이 요구된다.” 미술관이 타자와의 관계들이 모여들도록 하고 그 관계망 안에서 신체적으로 서로 조율하는 감각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어 주된 정서는 ‘환대’일 것이다. 환대는 미술관이 누구든 환영하는 자세, 그러니까 미술관이 관객을 향해 지녀야 할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제도 비판 작가인 안드레아 프레이저가 「마치 돌보기 위해 함께 모인 것처럼」3이란 글에서 지적했듯이, 전시에서 실천하는 환대의 ‘돌봄’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미술관의 환대에는 호스트로서 큐레이터가 부모처럼 돌보고 게스트인 관객은 이에 유아적으로 의존하는 관계의 정형이 늘 소환된다는 것이다. 프레이저의 글이 수록된『환대: 관계를 호스팅하는 전시』에서는 미술관 전시의 시공간에서 수혜자와 시혜자의 일방향 관계, 단선적인 시혜자의 지위에서 벗어나야 함을 다각적으로 다루고 있다.
‘세마 러닝 스테이션: 전환’ 메인 포스터 그래픽 디자인: 신신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그런데 행위자들이 가진 가치 체계에 따라 환대의 관계가 유동적으로 변화한다면, 호스트-게스트라는 설정은 각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이 그 환대가 작용하고 있는 사회적 공간에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것으로 전환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큐레이터와 관객만이 아니라 관객과 작가, 작가와 큐레이터, 큐레이터와 행정가 등 다층적인 관계의 고리들이 이루는 연쇄가 미술관이므로, 그 공간에서 낯선 서로의 인식에 관여하며 발생할 수 있는 무수한 질문들의 영역을 열린 마음으로 함께 항해하는 것이 환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미술관이라는 사회에 내포된 복잡한 전제들을 그 항해의 격식에 따라 확인하고 습득하기도 하지만 또한 여기에 질문을 던지며 그 전제들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는 개방성이야말로 미술관 환대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호혜적 환대는 차이나 다름에 무감해서는 허울뿐인 공존에 불과하다. 타자였던 이들과 일시적으로 친밀함을 공유하는 가운데 경험의 조건들, 생각의 형태들을 재고할 수 있도록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감각을 예민하게 하는 매개의 문턱이 필요하다. 거기에 함께함으로써 비로소 생겨나는 개념들과 이로부터 다시 변화의 사건들이 태동하는 토양으로서 문턱이다.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여러 힘이 만나 밀고 당기며 생겨나는 임계의 에너지가 동력이 되는 문턱이야말로 동시대 미술을 다루는 미술관 본연의 정체성이 아닐까? 사회적 개념들을 미술관 경험의 차원에서 검증하거나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생경하고 껄끄러운 관점들의 과잉으로부터 비롯되는 긴장, 유예 상태에서 개념과 경험을 같은 음역으로 소환하는 미술관이다.4
‘세마 러닝 스테이션: 전환’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전경 2022
사진: 김윤재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2024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렸던 SeMA 옴니버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는 무조건 누구든 받아들이겠다는 환대가 아니라 그 ‘누구’에 대해 묻고자 한 전시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미술사적 소장품과 동시대 미술의 문제의식을 횡으로 펼쳐 놓으며 장애, 젠더, 퀴어, 노동, 이주, 인종, 나이 등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는 다양한 매체의 작업들로 구성하였다. 다수와 소수를 나누는 고정된 규범을 벗어나서 집단으로 묶이지 않는, 집단으로 묶일 수 없는 이들에 관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누구를 사랑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과연 그 ‘우리’는 누구인가? 전시의 제목을 차용하기도 한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 도록에 실린 이진실 비평가의「‘우리’를 발명해 내기」라는 글을 비롯하여 전시에 숨결을 불어넣은 여러 텍스트가 있는데, 그중 김초엽과 김원영이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김원영은 여럿이 어울려 선다는 뜻의 ‘연립’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연립이라는 삶의 조건을,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들의 협력과 연대, 연결을 넘어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타자’와도 잇닿는 삶이라 말하고 싶다.”
거기 어딘가에 있어서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타자가 아니라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타자를 만났을 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그 타자를 우리로 받아들이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는 연계 프로그램들의 기획도 ‘서로 배움’에 초점을 맞췄다. 문화 접근성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나란히 보는 미술관’은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대화를 통해 함께 전시를 관람하도록 한다. 전적으로 장애인들의 신체 조건에 맞춘 여타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비장애인도 장애인의 전시 관람을 돕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장애인의 감각을 통해 작품 감상의 경험을 확장할 수 있다. 전시 참여 작가들도 프로그램 기획에 참여하였다. 새훈은 『휘말린 날들: HIV, 감염 그리고 질병과 함께 미래 짓기』의 저자인 의료인류학자 서보경과 함께 독서 워크숍 ‘『휘말린 날들』 +−×÷, 서로에게 감염하며 옆줄에서 주석 달기’를 이끌었고, 이우성은 뉴욕 할렘의 LGBTQ 현장에서 유래된 보깅댄스에 착안하여 ‘드로잉 워크숍 보깅댄스클럽: 춤추는 사람 그리기’를 통해 참여자들이 무용수의 신체 동작을 관찰하고 그려보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시선을 숙고하게 하였다.
SeMA 옴니버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사진: 홍철기 제공: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우리가 타인에게 다가갈 때, 누군가와 결부될 때, 그 타인과 ‘우리’가 되기 전에 ‘이웃’ 되기가 필요하듯이, 그리고 거기에 있는 문턱의 존재가 그 이웃 되기를 감각하게 해 주듯이, 미술관이 소수자, 소외자를 가시화하는 일은 이들을 직접 포용하려는 노력도 중요하겠으나 서로를 곁에 둘 수 있는 계기, 각기 다른 위치에 있던 이들이 서로를 곁에서 이웃으로 느끼게 하는 문턱을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공통되는 세계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타자의 존재를 계속해서 느끼며, 때로는 견디고 감내하며, 서로의 다른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이 경험 안에서 일련의 개념들을 제안하고 갱신하며 또 폐기하기도 할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말한 “함께함(togetherness)”5, 누군가를 위하거나 누군가에 맞서기 위함이 아니라 함께 옆에 서는 자체가 중요한 공적 영역으로서 미술관이다. 그렇기에 환대의 지평을 가늠하며 함께의 감각을 단련하는 지대로 기능할 수 있다면 미술관의 문턱은 모두를 하나로 합치기 위해 허물어져야 하는 운명만은 아닐 것이다.
1 George Caffentzis and Silvia Federici “Commons Against and Beyond Capitalism” in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Oakland: PM Press 2019 pp.93~96
2「세마 러닝 스테이션 공공미팅 글로서리 토크」 세마 코랄 2022 http://semacoral.org/features/sema-learning-station public-meeting-glossary-talk
3 Andrea Fraser “‘As If’ We Came Together to Care” in Beatrice von Bismarck and Benjamin Meyer-Krahmer eds. Hospitality: Hosting Relations in Exhibitions Berlin: Sternberg Press 2016 p.38
4 Andrew Brandel “The Art of Conviviality” HAU: Journal of Ethnographic Theory 6(2) Autumn 2016 p.338
5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1998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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