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 전시, 어떻게 볼 것인가
홍경한 미술비평
《불멸의 화가 반 고흐》
> 한가람미술관 2024.11.29 3.16
《빛의 거장 카라바조&바로크의 얼굴들》
> 한가람미술관 2024.11.9 3.27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 국립중앙박물관 2024.11.30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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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화가 반 고흐》 한가람미술관 2024.11.29 3.16
《빛의 거장 카라바조&바로크의 얼굴들》 한가람미술관 2024.11.9 3.27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국립중앙박물관 2024.11.30 3.3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형 상업전시들
지난 1997년 6월, 온갖 신비한 소문에 싸여있던 이집트 투탕카멘 황금마스크가 한국에 도착했다. 전시를 통해 인류문명의 위대한 자산인 고대 이집트 문명의 실체를 국내에서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총관람객 약 10만 명, 당시만 해도 예술의전당 최다 관람객 수를 기록한 《고대 이집트 문명전》은 그렇게 막을 올렸다.
이 전시는 문화예술 콘텐츠로도 돈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거대자본을 투입한 대형 상업전시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왔고,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예술의전당 등, 주요 미술관과 전시관들도 앞다퉈 블록버스터 전시에 안방을 내줬다. 2000년대 대규모 상업전시의 시발점은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개막한 《러시아 천년의 삶과 예술전》이다. 한국과 러시아 수교 1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 전시는 말로만 듣던 구(舊)소련의 미술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점에서 주목도가 높았다.
그 뒤로는 가히 상업전의 춘추전국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영박물관, 오르세미술관, 루브르박물관, 퐁피두센터, 베르사유, 벨베데레, 내셔널갤러리와 같은 세계적인 미술관(박물관)들의 소장품 전시에서부터, 르네상스와 바로크, 로코코는 물론 인상파를 위시한 19~20세기 미술사조들을 내세운 전시가 연거푸 개최됐다.
작가의 이름을 내세운 전시도 많았다. 밀레, 모네, 앤디 워홀, 반 고흐, 피카소, 렘브란트, 달리, 샤갈, 뭉크, 르누아르, 호퍼, 클림트, 미로, 에곤 실레, 마크 로스코, 자코메티 등 한둘이 아니다. 이들은 대부분 모더니즘에 철저히 종속되는 작가 및 작품으로, 미술사적 연보 아래 당대 동일 미술운동을 공유한 작가들과 함께 전시되거나 단독 형태로 대중과 만났다. 이런 흐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특정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 명성이 확립된 예술가, 대중적 화제성을 띠는 주제를 중심으로 기획되곤 하는 거대 규모의 ‘이익추구형’ 전시들은 한국 내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왔고, 이제는 하나의 경제적 현상이 되었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 한가람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서울센터뮤지엄
‘알맹이’ 빠진 불멸의 거장전
블록버스터 전시들의 목적은 영리의 극대화에 있다. 이는 전시를 마련하는 실질적인 이유이자, 내용과 형식을 규정짓는 요소이다. 실제로 블록버스터 전시 기획사들의 전략은 ‘미술=경제성’에 맞춰져 있다. 그들은 언론과 결탁해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벌이고, 관람객의 머릿수를 중시하는 미술관(박물관)에선 권위를 빌린다. 다음엔 수교 몇십 주년 기념 혹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와 결연 등의 이유를 달아 전시의 의의를 만들며, ‘불멸’, ‘거장’, ‘빛’, ‘여정’ 등의 단어를 전시제목 어딘가에 포함시키거나 ‘지금 보지 않으면 다시는 볼 수 없다’ 내지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작가)작품’ 등의 관형절 명사구를 붙여 대중의 관심을 유도한다.
여기서 그들이 애용하는 ‘불멸’이나 ‘거장’은 미술역사 속 끝없이 회자되는 작가의 이름값에 기댄 표현이지만, 마치 그 작품을 보지 않으면 제대로 죽지도 못할 것처럼 들리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작가)작품’이란 말은 인생에서 반드시 경험해야 할 가치가 있는 예술 작품을 의미하면서도 기꺼이 돈을 쓸 만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전시 자체도 그에 합당해야 한다. 당연히.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전시들은 관람객을 존중하지 않는다. 도떼기시장 같은 전시장, 다닥다닥 걸린 수십 점의 작품들, 가독성 떨어지는 캡션, 작품의 특징이 반영되지 못한 전시구성까지, 관람환경은 엉망이기 일쑤다. 관람객들은 앉아서 쉴 곳조차 드문 공간에 마구잡이식으로 구겨 넣어지고 주마간산처럼 소위 명작이란 걸 봐야 한다. 어떻게든 빨리 회전시켜야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의 결과다.1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작가)작품’이라더니 막상 가보면 ‘알맹이’가 빠진 경우도 다반사다. 뭉크 전시에 〈절규〉가 없고, 호퍼 전시에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없다. 쿠르베의 전시에 〈돌 깨는 사람들〉이나〈세상의 기원〉 등의 작품이 누락된다. 이런 현상은 최근 진행 중인 전시들도 매한가지다.
《빛의 거장 카라바조&바로크의 얼굴들》 한가람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식회사액츠매니지먼트
반 고흐와 카라바조, 그리고 비엔나 1900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3월까지 진행되는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2은 네덜란드 크뢸러 밀러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최 측은 엄선된 원화 76점을 한자리에 모은 ‘기념비적인 전시’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카페 밤의 테라스〉나 〈해바라기〉,〈조셉 룰랭의 초상〉,〈프로방스의 밤 시골길〉 등은 오지 않았으며, 〈감자 먹는 사람들〉은 석판화로 대체됐다. 정작 미술관 대표작들은 구경조차 어려운 셈이다.
전시의 짜임새도 꽤나 단조롭다. 고흐의 일생을 나열할 거면 좀 더 깊이 있게 구성했어야 했다. 관람객 관리와 통제에도 신경 써야 했다. 상대적으로 고가인 2만4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한두 시간의 대기까지 감내하며 전시장에 들어섰지만 좁고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사람만 보다가 나왔다는 관람평이 드물지 않다. 이 역시 수익에만 치중하니 나타나는 양상이다.
반 고흐 전시와 함께 한가람미술관 2층에서 진행 중인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2024.11.9~3.27)도 아쉽긴 매한가지다. 카라바조의 〈도마뱀에 물린 소년〉을 포함해 10점의 카라바조(미켈란젤로 메리시) 작품이 출품되었는데3, 가장 잘 알려진〈성 토마스의 의심(의심하는 도마)〉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작가의 그림이다. 원본은 독일 포츠담 상수시 궁전에 있다.
〈과일 껍질을 벗기는 소년〉 또한 ‘추정’으로 되어 있다. 카라바조의 작품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반 고흐 전보다는 낫다. 100여 점 남아 있는 카라바조의 작품 중 1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만으로도 전시의 무게가 있다. 전시장 한편에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체험할 수 있도록 꾸민 것도 눈에 띈다. 특히 카라바조 외에 발리오네, 카라치, 구에르치노, 젠틸레스키 등과 같은 바로크 시대를 호령한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고, 한국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귀도 레니의〈황홀경의 성 프란체스코〉는 뜻밖의 수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블록버스터 전시가 3월까지 열린다.《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이다. 이번엔 서양 근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사조 중 하나인 빈 분리파를 다뤘다. 에곤 실레를 상징하는〈꽈리 열매를 한 자화상〉을 필두로 그의 유화 10여 점과 구스타프 클림트의 초상화 등 오스트리아 레오폴트미술관 소장품 총 191점을 내걸었다.
하나, 레오폴트미술관 상설전시의 이름을 딴 이 전시에서 역시 미술관의 알짜 소장품에 속하는 에곤 실레의〈은둔자들〉이나〈추기경과 수녀(애무)〉, 클림트의 〈죽음과 삶〉 등의 작품은 볼 수 없다. 때문에 레오폴트미술관에서 접한 실레와 클림트를 생각하고 가면 실망할 수 있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들이 직접 현지로 날아가 작품을 조사, 선택하는 등 기획에 관여하고, 실레의 드로잉을 집중해서 볼 수 있도록 한 원형공간처럼 전체적인 구성도 짜임새 있다.
1900년대 빈의 미술사를 살펴보기에도 적절하다. 대형 화면으로 상영되는 클림트의 분리파 전시장 벽화 ‘베토벤 프리즈’는 빈 분리파에 대한 이해를 도우며, 일상 속 사물의 아름다움을 목표로 했던 당시 비엔나 디자인공방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아돌프 로스, 오토 바그너 등의 수준급 공예품들도 마주할 수 있다. 나아가 표현주의 시대를 연 신예술가 그룹의 오스카 코코슈카나 막스 오펜하이머, 각자 독립적이면서 클림트의 영향을 받은 실레의 작품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일회성 소비문화’를 조장하는 전시들
한국을 찾는 블록버스터 전시들의 공통점은 반세기에서 수백 년 전 죽은 서구 망령을 소환한 뒤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몇 달 내내 박제한다는 것이다. 미술관의 경우 학예 및 전시 역량과는 무관한 외부 기획사의 주도로 치러지는 사례가 많으면서 기관 본연의 학문적 기능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도 분모가 같다. 전시장 임대 기관은 흥행을4, 기획사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전통적 공식도 동일하다.
물론 이들 전시도 순기능이 있다. 미술사적 위치를 재확인케 하고 대중주의적 미술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장이라는 측면, 그리고 언론보도에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굳이 비싼 경비를 들여 외국까지 가지 않더라도”5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명작이라 칭송받는 작품의 물성과 시각적 감각을 체험할 수 있는데다, 미술계 내부의 자기 재생산적 성격도 장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단점도 만만찮다. 외국 유명 미술관 소장품을 돈 주고 빌려와 재탕하는 ‘땅 짚고 헤엄치기’식 기획이나, ‘브랜드 장사’에 치중해 특정 작가와 작품만을 단순 복제하는 현상은 경험의 질 저하와 더불어, 예술의 다양성 및 실험성을 축소시키고 서구미술 중심의 편협성을 심화시킨다.
이 중 왜 여는지에 대한 메시지도 희미하고 인문학적 고민 따위도 없는 형식의 반복은 예술적 진보를 가로막으며, 대중성에만 초점을 맞춘 기획은 작품의 본질적 의미보다는 ‘보는 재미’에 머물 수밖에 없게 만든다. 따라서 현재 한국에 소개되는 블록버스터 전시 다수는 ‘일회성 소비문화’ 조장에 앞장서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록버스터 전시라도 상업성과 공공성의 균형이 필요하다. 그것이 만약 미술관이라면 더욱더 고유의 정체성과 학문적 신뢰성을 해치지 않는 방향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동일한 스타일의 전시를 이 나라 저 지역에 ‘Ctrl+V(복사 붙여넣기)’할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나 지역의 모더니티가 반영된 맞춤형 기획 역시 요구된다.
비판적 담론 형성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대형 상업전시들은 대개 미술품의 상업화가 우선될 뿐 동시대가 직면한 의제와의 관련성을 찾기 힘든데, 단순히 ‘인기 전시’에 치중하니 오늘날의 사회적·정치적 이슈를 담아낼 틈이 없다. 하지만 ‘일회성 소비문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우려면 미적 즐거움의 제공을 넘어 사회적 쟁점과 비판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마땅하다. 미술이 자본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결론은 같다.
1 2000년대 초반, 국공립미술관까지 가세한 대형 상업전시가 과잉이다 싶을 만큼 열리자 그에 비례하여 작품 임대료 등이 부쩍 높아지는 부작용이 생겼다. 쓸데없이 작품의 몸값만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인데, 이는 결국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푯값 상승, 빠른 회전을 위한 과밀도의 관람환경, 전시환경의 부실 등이 발생하는 원인이다.
2 이후 대전시립미술관(3.25~6.22)에서 순회전을 갖는다.
3 이 작품은 한국·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기념한 《내셔널갤러리 명화전》(국립중앙박물관, 2023)에도 나왔다.
4 국공립미술관의 경우 방문객 수가 운영 평가의 바로미터다. 그래서 한때는 셀 수 없이 많은 상업전시들을 유치했다. 그러나 대관료 및 미술관의 역할 논란, 국내 작가들의 전시기회 박탈, 큐레이터십 부재와 공공기관으로서의 신뢰 문제 등으로 미술관에서의 대형 상업전시는 현재 많이 줄었다.
5 사실 비싼 경비를 들여 현지를 방문하는 것은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 나라 혹은 도시의 문화와 생활 등을 보다 폭넓게 향유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굳이 비싼 경비를 들여 외국까지 가지 않더라도”는 블록버스터 전시의 명분으로 보기엔 다소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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