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밀가귀(細密可貴)’ 고려나전
이광배 리움미술관 학예연구원
Antique Art
《세밀가귀》 고려 나전 리움미술관 전시 전경 2015 제공 : 리움미술관
공예 왕국, 고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은 보통 줄여서 『고려도경』 이라고 하는데 서긍(徐兢)이 1123년에 중국 송(宋)나라 휘종(徽宗)의 명을 받고 200명이 넘는 사절단과 함께 고려에 와서 1개월 남짓 머물면서 견문한 고려의 여러 가지 실정을 그림과 함께 곁들여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의 기록만 보더라도 12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문화를 선도했던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의 눈에도 당시 고려 나전의 탁월한 예술성은 상당한 감동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기술한 ‘세밀가귀’란 말은 이 후 고려 나전을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다. 중국 대륙과 맞닿아 있는 한반도의 지리적 여건으로 예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중국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로 인해 중국의 입장에선 언제나 우리를 변방의 속국들과 마찬가지로 미개한 민족으로 인식하며 대부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일관된 시선을 고려하면 그들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아가 실물의 역수입까지 이루어졌으며, 그 사실을 역사로 남긴 유일한 시대가 바로 고려였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만큼 당시 동아시아 전반에서 고려가 선점했던 문화예술 분야가 중국을 비롯해 다른 국가들 보다 월등히 우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진한 감동을 전해주는 것이 바로 ‘가치 있는 아름다움의 실현’이라 일컬어지는 공예 분야이다. 감상이 아닌 실제 용도가 분명히 존재하고 장식이 그 용도를 침해해선 안 되는 기본 가치를 존중했던 고려인의 공예 정신은 오늘날 고려를 공예 왕국으로 불려지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전 · 함 : 깨달음을 담다》 경함 및 사경 리움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사진 : 김상태
“이난진지자, 세밀가귀(而螺鈿之子, 細密可貴)”
“(고려의) 나전 솜씨는 세밀하고 정교하여 귀하다 할 만하다”
— 서긍(徐兢,1091~1153),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23권, 풍속(雜俗) 토산조(土産條)
공예 왕국 고려의 탄생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 삼국과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 지혜와 역사가 오랜 기간 축적되어 완성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전 시대에서 왕과 국가의 권위를 위한 예술의 주도권이 고려의 지방 분권 체계에선 자연스럽게 귀족과 호족들에게로 확산되었고 그 수요층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이다. 더불어 나라를 지키기 위한 호국불교의 성격에서 개인의 안녕과 극락왕생으로 그 신앙의 형태가 옮겨가면서 개개인의 신앙과 취향이 반영된 실내 봉안용 불교 미술품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일반 미술품, 건축 의장 등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 개성과 창의력이 돋보이는 고려 공예미의 특질을 보다 명확하게 한다. 공예를 아낀 고려의 면모는 여러 역사 기록에서 확인되는데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바로 나라의 공식 법과 제도로 장인(匠人)들을 관리 및 육성하였으며 관직의 부여와 급여 역시 상당히 높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국가에 소속된 장인들은 현재로 환산해 보면 4인 가족이 1년간 충분히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연봉으로 제공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조선시대 기록에서처럼 천대 받던 장인들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만큼 우리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공예 장인의 대우가 가장 높았던 시기 역시 바로 고려였으며 이를 기반한 기술의 전승과 발전은 최고의 명작들을 만들어 명실공히 공예 왕국을 이끌었던 것이다.
나전, 자연의 빛을 담다
나전칠기(螺鈿漆器)란 목칠공예(木漆工藝)의 여러 가지 장식기법 중의 하나로 조개껍질을 이용하여 칠기의 표면을 장식하는 기법 혹은 그 작품을 말하는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발전되어 왔다. 특히 우리나라의 나전칠기는 2000여 년에 이르는 장구한 목칠문화 전통의 핵심을 이루어 왔으며, 그 중 고려시대 나전이 최고의 예술성과 가치를 자랑한다. 현재 고려 나전은 불교 경전(經典)을 보관했던 경함(經函)을 비롯해 각종 기물을 담은 작은 합(盒) 등으로 전 세계 20여점 밖에 확인되지 않으며 그것도 국내엔 4~5점 정도만이 전해진다. 그 귀한 희소성과 특유의 섬세함, 오색 찬란한 빛깔로 고려청자 및 불화와 더불어 한국의 미를 대표하고 있다. 고려 나전이 이토록 세밀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재료와 장식의 독창성 그리고 인고의 과정을 극복한 장인 정신에서 비롯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인 정신을 언급할 땐 언제나 ‘디테일(detail)’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중 하나인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는 “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라고 말했다. 즉 디테일이 없이는 모든 건축 및 예술 등에서 명작이 탄생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려 나전이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디테일의 완결성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전의 원재료인 조개 껍데기에서 얻어진 자개는 값비싼 보석과 달리 우리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 중 최상의 빛을 내는 것은 통영, 완도 등 남해안 일대에서 공급되었다. 거친 파도에 깎여지고 장인들의 손에 의해 다시 연마된 자개는 그 어떤 보석에서도 얻지 못했던 빛의 스펙트럼을 만들어 냈다. 나전과 함께 사용된 대모(玳瑁, 바다거북 등껍질)는 안쪽 면에 붉은 칠을 하여 색의 다양성과 영구성을 추구하기도 했다. 고려의 장인들은 이러한 재료 특유의 빛깔을 기물을 장식하는데 적극 활용했고 그 기예는 혹독한 수련과 반복된 시행착오의 산물로 완성될 수 있었다. 즉 자연에서 얻은 재료가 인간의 위대한 지혜와 솜씨를 만나 그토록 바라던 자연의 빛을 담게 되는 경이적인 장면을 고려 나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청자동채연화문 표형주자〉 32.5cm(h ) 고려13세기 국보, 리움미술관 소장
〈청동은입사봉황문 합〉 직경 18.3cm 고려 12세기 국보, 리움미술관 소장
고려 나전은 목재(木材) 라는 재질의 한계로 전래 되는 사례는 극히 드물지만 그 면면을 살펴보면 독창적인 장식기법들이 확인된다. 우선, 자개와 함께 은, 동, 황동 등의 금속선을 넝쿨 같은 줄기의 표현이나 기물의 모서리 경계선으로 사용했다. 철사 모양의 단선과 두 줄의 단선을 끈처럼 하나로 꼰, 이른바 착선의 두 형식이 있다. 단선은 꽃 문양의 가지 줄기로 주로 사용하였고, 꼰선의 경우는 기물 주위나 모서리 부분에 장착되어 기체의 보강을 의도하거나 의장 면의 구획을 나누는 경계선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때로는 두 줄이 한 세트인 선 문양이 되어 칠면에 표출된 부분이 마치 화살촉(矢羽) 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 금속선은 잘게 쪼개진 자개들을 긴밀하게 연결하여 복잡할 수 있는 문양 구성에 패턴화된 디자인적 질서를 부여한다.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의 뒷면을 채색한 뒤 기물 표면에 붙이는 대모복채(玳瑁伏彩) 기법을 사용한 것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투명한 대모에 안료를 칠해 붉은빛, 주황빛, 노란빛이 환상적으로 빛나는 다양성을 보여준다.일곱 가지 색이 어른거리는 흰빛의 자개와 붉은 빛의 대모가 어울려 화려함을 한껏 구사하는 것이다. 고려 나전에 사용된 대모복채기법은 색채의 변질을 막는 보호막 기능도 함께 하고 있어 지금까지도 그 아름다운 빛깔을 유지할 수 있게 했고, 중국, 일본에는 없는 고려 나전만의 독창적인 기법으로서 더욱 돋보인다. 마지막으로 고려 나전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기법상 가장 두드러진 점은 대단히 정교한 나전의 절문(截文), 즉 줄음질 기법에 있다. 나전패에서 잘라낸 무수한 절문은 하나하나가 어디까지나 문양 구성을 위한 일부가 되는 것이어서, 대부분의 경우 그 자체가 의장성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형태 또는 다른 형태의 나전 절문의 몇 개가 조합되어 비로소 어떤 종류의 문양이 형성되며 그들이 규칙적으로 배치되거나 전개됨에 따라 하나의 완성된 의장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최소의 단위가 되는 절문의 크기는 사방 1cm를 넘는 것이 없다. 절문의 나전 꽃잎 표면에 음각의 선으로 잎맥이나 디테일을 표현하여 사실감을 더하는 기법 또한 절문의 나전과 어울려 세밀함을 더한다. 서긍으로 하여금 ‘세밀가귀’라고 말하게 한 것도 정교한 줄음질 문양 제작 기술과 그 구성의 탁월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전 · 함 : 깨달음을 담다》에 전시된 〈고려 나전 경함〉 리움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사진 : 김상태
〈나전국당초문 경함〉(부분 ) 고려 13세기 개인소장 사진 : 김현수
“전함조성도감 이황후욕성장경이구지야(鈿函造成都監 以皇后欲盛藏經而求之也)”
“황후가 대장경을 보관할 경함을 (고려에) 요구해 전함조성도감을 설치하다”
— 『고려사(高麗史)』 27권, 「세가(世家)」(원종 13년 1272년)
신앙과 예술
이미 12세기 중국인들도 감탄했던 고려 나전은 13세기 불교라는 신앙과 만나면서 불교 의장구, 특히 경전을 보관하는 경함(經函)의 제작으로 그 예술적 완성도에 있어 최고 경지를 이룩한다. 이는 신앙과 예술의 위대한 만남으로서 고려 시대 깊은 신심이 반영된 불교 공예의 결정체를 현존하는 고려 나전 경함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조정이 1272년 원나라 황후의 요청으로 경전함 제작을 위한 특별 관청인 전함조성도감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 원나라 황제는 다름아닌 대원 제국을 건국한 세조 쿠빌라이칸(世祖)이며 황후는 귀족들에게 불교를 적극 권장했다고 알려진 소예순성황후 차브이(昭睿順聖皇后察必)로 추정된다. 쿠빌라이칸이 몽골의 대칸에서 대원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지 1년 후인 1272년 당시의 상황으로 고려할 때 원나라 황후의 명에 고려가 받은 압박감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며 이 경함들을 제작하는데 있어서도 상당한 공력을 동원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고려의 이러한 신속한 대응은 체계적인 국가 주도의 장인 관리 시스템과 경함 제작의 자신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더불어 원나라 황실에서 조차 고려 나전의 우수함을 익히 알고 경함 제작을 요청한 것 역시 당시 고려 나전의 탁월한 면모와 높은 인지도를 가늠할 수 있다.
현재 전세계를 통틀어 전함조성도감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규격화된 경함은 단 6점만이 확인되는데 모두 미국, 영국, 일본 등 해외에만 소장되어 있고 국내엔 단 한 점도 없다. 이 6점 중 만들어질 당시의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경함이 바로 일본 개인 소장의 〈나전국당초문 경함〉이다. 그것은 나전의 전반적인 접착도와 구성에서도 확인되지만 그 밖에 손잡이, 경첩, 자물쇠 부분 등의 금속 재료에서도 보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부각된다. 경함 표면은 수만 개가 넘는 나전 조각을 세밀하게 이어 붙인 후 수없이 반복되는 옻칠을 통해 요철이 없는 기면의 매끈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문양의 전체 구성에서도 상호 간 얇은 철선으로 연결하여 아름다운 패턴을 이루고 나전 조각 표면에도 섬세한 선각을 새겨 디테일을 강조하고 있다. 〈전함조성도감〉에서 대량 생산된 경함들에서는 대모복채법을 활용한 선명한 색채감은 사라졌지만 수 만개의 나전과 금속선을 활용하여 표면을 가득 채워 장식해 경전 보관의 기능과 함께 예술성을 동시에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동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나전을 활용한 세밀한 공간 충전의 독창적인 미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세밀함의 극치와 완결성에서 우리는 고려시대 공예미의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고, 동시에 700년 넘게 변치 않고 오색 영롱한 빛을 내며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나전 작품들을 통해 그 위대한 예술적 성취와 교감할 수 있다.
〈나전국당초문 경함〉 25.6 × 47.3cm 고려 13세기 개인소장 사진 :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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