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보람 Boram So
소보람의〈기억극장: 미생물편〉을 읽기 위한 매뉴얼
양효실 미술비평
Artist

사진:박홍순
소보람/ 1984년생. 한예종 미술원 조형예술과, 파리국립예술학교(ENSBA) 졸업. 개인전《그vs그것》(요즘미술, 2024), 《그vs그것》(명산여관, 2017) 등을 개최했으며, 단체전 《진격하는 B급들》(전북도립미술관, 2025), 《백 개의 주머니로 만든 하루》(금나래 갤러리, 2024),《이퀼리브리엄》(팔복예술공장, 2023), 《제로원데이01서식지》(에스팩토리, 2023), KFA22 아덴버그 쿤스텐페스티발(네덜란드, 2022), The Brain Mixologist(A tale of a Tub, 네덜란드, 2021) 등에 참여했고, 제26회 이흘라바 국제도큐멘터리 필름페스티발(체코, 2022) 실험단편 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2022년 아시아문화전당 레지던시(광주), 2022년 라베끄 레지던시(스위스 라 투 드 페), 2020~2021년 얀 반 에이크 아카데미 레지던시(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 2017년 관두미술관 레지던시(대만 타이페이), 2017년 전북도립미술관 창작스튜디오(완주) 등에 참여했다.
소보람의〈기억극장: 미생물편〉을 읽기 위한 매뉴얼
양효실 미술비평

〈기억극장: 미생물편〉종이에 연필, 이미지 콜라쥬 80×60cm 2024
제공:작가
들어가며
나는 2024년 소보람의 개인전 《그 vs 그것 2024》을 놓고 비평문 「시적인 것은 폭력의 구조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썼다. 작가는 2016년 운전 중에 로드킬을 당한 사슴/고라니를 다시 치는 사고를 겪었고, 그 후 자신과 신체 사이즈가 거의 같았던 죽은 사슴과 그 옆에 웅크리고 있던 살아 있는 어린 사슴이 교대로 혹은 함께 꿈에 찾아와 자신을 비난하는 박해를 계속 겪었다. 작가는 왜 사슴(들)이 자신의 꿈에 찾아오는지, 무슨 요구(말)를 하는지 알고 싶어서 우선 로드킬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조사를 시작했고, 그 뒤에는 유럽 및 아시아 전역의 사슴 신화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 조사를 하며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근대적 폭력에 대한 미적 개입·수정과 범·트랜스-문화적 공통성 내지 보편성에 기반한, 근대적 인간학으로부터의 탈주를 동시에 모색 중인 작가의 2024년 개인전을 한 눈으로 개괄하기는 불가능했기에 나는 전시장 왼쪽 벽에 설치된 ‘로드킬 파트’를 갖고 리뷰를 끝냈다. 자신이 늘상 마시는 차의 찌꺼기(썩은 물)에서 미생물이 증식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시작된 엄청난 프로젝트가 메인 전시였지만 나는 그 부분은 이후에 다뤄보겠다고 약속했고, 이번 글에서도 그 약속은 열린 미래로 보존된다. 전시에서 내가 다룬 부분은 근대성의 구조가 어떻게 직접적으로건 상징적으로건 동물과 같은 타자에 대한 폭력과 학살에 기반한 것인지를, 침묵과 공백을 내포한 알레고리적-시적인 형식을 통해 전달한 내용이었다. 이번 글은 그 전시에 ‘회화’로서 걸려 있었지만 못 보고 지나쳤던, 나의 작가 리서치 후반부에 우연히 눈에 들어온 작품 〈기억극장: 미생물편〉에 대한 것이다. 읽을 수 없을 만큼 작은 글씨로 쓴 중앙의 텍스트와 볼 수 없을 만큼 사소하고 흐리게 연필로 그린 좌, 우의 드로잉으로 구성된 삼면화이다. 나는 작가와 계속 대화하고, 계속 필사하며 거의 안 보이고 거의 안 읽히는 이 작업에 서서히 매료당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전시장에서 단박에 만날 수 없는, 안 걸려 있는 것처럼 걸려 있는 작품은 작품인가? 혹은 바로 그렇게 전시되는 것이 그 작품의 생존 가능성, 말걸기의 형식 자체였을까? 나는 지금으로서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이 없으며 단지 하나의 작품을 읽기 위한 공부를 한 뒤에 그 작품에 비로소 매료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을 뿐이다.
1. 카밀로의 기억극장
이탈리아 르네상스 철학자 길리오 카밀로(Giulio Camillo Delminio)는 1519년에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근 25년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인간의 이념을 한자리에 불러와 관리할” 이상적인 건축적 구조물일 ‘기억극장(Theatre of Memory)’을 설계하고 후원자를 찾아 지으려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문인, 철학자, 웅변가, 마술사, 유대 신비주의 철학자(kabbalist) 등등”을 도맡은 카밀로는 일생 파우스트적인 앎을 추구하며 유럽 전역을 여행하고 온갖 분야를 아우르는 공부를 수행했다. 그의 공부는 각기 다른 분야, 체계에서 차이에도 불구하고 발견되는 어떤 공통성-보편성이었다. 가령 숫자 7은 점성술에서는 7개의 행성으로, 창세기에서는 7일로, 피타고라스에서는 제1원칙의 7(음계)로, 카발라 전통에서는 최초의 신성한 이름 7개 등등으로 계속 등장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하나의 구조-앎에 천착한 것이 아니라 앎의 다양한 구조들을 넘나들며 다르게 번역되는 어떤 ‘인간의 이념’에 매료되었다. 카밀로가 지으려고 설계한 “기억극장”은 그가 읽고 기억하는 거의 모든 지식, 체계를 한자리에 모아 놓은, 요즘 식으로라면 도서관이나 인터넷이라고 불릴만한 저장소였다. 카밀로는 후원자를 찾지 못했고, 죽음을 기다리며 침상에서 구술한 논문 「극장의 이념(L’Idea del Theatro)(1550)」에 극장의 해부도를 남겼다.
하단 중앙의 무대를 축으로 방사선 형태로 올라가는 그리스 극장 형태를 그대로 갖고 온 카밀로의 극장의 객석은 7줄과 7열, 49개의 구획으로 나누어진 형태이다. 놀라운 것은 카밀로의 극장 무대에는 단 한 명의 관객이 위치하고 객석에는 ‘모든 인간의 이념’이 배치된, 뒤집힌 형태라는 점에 있다. 보고 읽고 즐기는 자인 관객 한 명, 어쩌면 카밀로일 관객의 눈에 단박에 들어올 우주와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모든 것을 보고 기억하는 카밀로의 기억을 외화한 극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카밀로가 49개의 섹션을 어떻게 채우거나 구성하는지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는데, 우선 극장 맨 아래에는 구약 잠언에 등장하는 솔로몬의 “지혜의 7개의 기둥(7 Pillars of Wisdom)”이 49개 섹션의 고정점으로 설치된다. 그리고 첫째 열은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달-달의 여신 다이애나(Diana), 수성-발이 빠른 신 머큐리,금성-미의 여신 비너스, 태양-태양신 아폴론, 화성 전쟁신 마르스, 목성-최고의 신 주피터, 토성-농경의 신 사투르누스(Saturnus)가 배치된다. 첫 열의 7자리를 점성술, 그리스-로마신화, 연금술 등등이 중첩된 이름들, 눈에 보이는 별과 상상한 신화와 투사한 환상이 뒤얽힌 이름들이 차지한다. 맨 위에 나 있는 극장 밖으로 나가는 문 바로 아래 7번째 열, “기억극장에서 최고로 높은 등급을 차지한 이름”인 “프로메테우스”에는 “귀하고 천한 예술들”, 말하자면 “불을 훔쳐 인간에게 신의 지식과 예술 및 과학을 가르친” 프로메테우스의 르네상스적 능력들-이름들이 배치됨으로써, 신화-마법-종교적으로 연결된 이 세계의 인간, 신과 대등한 인간 프로메테우스를 클라이맥스로 극장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카밀로의 기억극장은 근대적-과학적 인식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전의 앎을 총망라한 것이고, 비진리 비이성으로 신비-신화를 축출하기 전 앎의 배치방식을 구현한 시각적 구현물이다.
영국의 여성 역사가 프랜시스 예이츠(Frances Yates)의 책 『기억술(The Art of Memory)』(1966)은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Simonides)부터 16세기 후반 우주의 무한성을 주장하며 인간중심주의에 도전한 신학자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를 거쳐, 17세기 초의 과학적 방법론과 라이프니츠를 아우르며 “기억술”, 즉 “인간 정신의 구조와 우주 구조는 무한하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믿음에 기반한 기억 시스템의 역사적 계보를 다룬 논픽션 작품이다. 특히 르네상스 시기의 밀교(esotericism), 연금술, 신비주의 등등의 비주류 인식론을 집중 파고들며 연구한 예이츠가 보기에 인쇄술이 등장하기 전 기억은 거듭 훈련을 통해 연마해야 하는 능력-예술-상상력의 문제였다. 구체적 장소와 상상의 이미지를 마음에 새기는 정교한 기억 시스템을 발명했던 그리스인들의 기술-능력이 르네상스 시기 오컬트(occultism)에서 부활했다고 보는 예이츠의 『기억술』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선고받고 화형당한 조르다노 브루노이지만, 카밀로의 ‘기억극장’도 3장에서 3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상세히 다뤄진다. 이후 지금까지 카밀로의 기억극장에 대해 예술, 인공지능,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관심의 부활은 많은 부분 프랜시스 예이츠의 책 덕분이다.

《소보람: 그vs그것 2024》요즘미술 전시 전경 2024 
〈기억극장: 미생물편&그리스로마신화편〉 종이 위에 연필, 이미지 콜라쥬 80×60cm(×3) 2024
2. 소보람의 기억극장
소보람의 〈기억극장: 미생물편〉은 각각 80×60cm 크기의 작품 3점을 묶은 작품이다. 가운데 카밀로의 기억극장과 작가 자신의 미생물 파트를 연결한 텍스트가 있고, 좌우로 그리스 로마신화와 미생물의 이미지들이 병치되는 일종의 삼면화이다. 카밀로를 따르면서 확장하는 이 작품은 우선 작가가 필사하며 읽은 아리엘 골란의 책 『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Myth and Symbol)』을 시작으로 한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아시아 캅사스 지대를 중심으로 2만5,000~1만5,000년 전 시기부터 지금까지의 온갖 문양들을 연구하며 ‘신석기 시대 초기 농경문화를 지배한 종교적 세계관의 복원’을 시도한 아리엘 골란의 책은 작가가 추적하고 있던 사슴 신화가 어떻게 그리스와 고대 이집트 문화 안에서도 반복적으로 변주되었는지를 상술한다. 이후 작가는 『황금가지』를 읽고 중국 고대 및 한국 신화의 동물 이미지를 리서치하는, 비체계적이고 심지어 무작위적인 읽기 가운데 카밀로가 그랬듯이 문화적-지역적 차이-다양성을 넘어서는 어떤 보편적 이념들을 발견하는 비약/앎에 도착한다. 물론 작가의 읽기가 더 넓고 무한한 데 카밀로는 최소한 그리스로부터 시작된 유럽 민족의 문화에 자신의 기억-읽기를 제한했다. 소보람의 지역과 맥락을 넘나드는 읽기는 지구촌을 아우르는,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지도 그리기라는 점에서, 더 지독한 지식욕으로 보이기도 한다. 가령 한국 민화나 설화에 등장하는 눈이 셋 달린 상상의 개 삼목구(三目狗)나 뿔이 셋 달린 사슴 삼각록(三角鹿), 그리스 신화의 삼미신(三美神)과 저승문을 지키는 머리가 셋인 개 케르베로스(Kerberos)와 같이, 범문화적으로 공유되는 3이라는 숫자의 신비주의적 특성이 작가의 독학을 통해 우리에게 도착한다. 프랑스 유학 중 ‘도서관의 원형’으로 회자되던 카밀로의 기억극장을 우연히 접한 작가는 이후 네덜란드 레지던스 내 도서관에서 예이츠를 경유해서 다시 만난 뒤, 카밀로의 기억극장은 “별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여러 문화의 민속학과 고고학을 아우르는 체계화된 도식”으로, 예이츠의 논픽션 작업은 “아리엘 골란의 연구에 상응하는 유럽 미술의 예제(例題)”로 상대화해서 자신의 기억극장 섹션에 포함해 들인다(2024년 개인전에 포함되어 있던 사슴/고라니를 둘러싼 서구의 제국주의적-박물관학적 재현을 추적한 파트는 기억에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신화 문화에 대한 접근이 늘 근대적 폭력의 문제로 돌아오려는 더 큰 프로젝트의 일환임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기억극장: 미생물편〉에 국한해서 이 글을 쓰겠다고 했고, 작가의 미생물 리서치가 왜 유럽 중심의 카밀로의 상상력 도식과 연결되었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우연히 마시고 잊어버린 찻물에서 미생물이 배양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이후, 작가는 스스로 조건화한 환경에서 미생물을 배양하고 그 변화 과정을 예술가의 상상력과 미메시스 능력을 통해 기록하는 리서치 기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작가는 과학자의 문장에 자신의 상상력을 섞은 “35억 년 전 산소가 없던 원시 지구에서 남조류가 발생시킨 산소로 인해 멸종하는 과정에서 땅속으로 숨은 최초의 유기체이자 이름 없는 혐기성 미생물”이란 문장에 사로잡힌다. “이산화탄소 포화도가 높았던 과거 지구 환경에서 살았던 최초의 미생물”을 자신의 작업실 수조 안 미생물로과 동일시하면서 작가는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으로서의 미생물”은 어쩌면 “산소가 줄어들고 있는 미래의 지구 환경에서도 다시 출현할 것이다”라는 상당히 근거 있는 희망까지 ‘가설’로 붙들고 미생물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지구의 인간이 문제일 뿐 지구 행성의 생명은 인간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계속 살아있을 것이라는, 이 너머에 대한 희망이 잘 안 보이고 잘 안 읽히는 작업에 매진 중인 작가의 확신, 미신, 희망이다(‘별에서부터 유래한 시간을 관통하는 물질’인 미생물의 무늬, 생존, 퍼포먼스를 추적하는 작가의 작업을 (내가) 단박에 읽거나 알아볼 수 있었을까?)
〈기억극장: 미생물편〉의 가운데 텍스트는 우선 카밀로가 참조한 그리스 로마신화 옆에 소보람이 찾아낸 미생물들의 이름이 병치되어 적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가령 카밀로의 “게자리(Cancer)” 옆 소보람의 미생물 파트에는 “암세포(cancer)”가 배치된다. “황도 12궁 중 하나로 6월 21일부터 7월 22일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의 별자리”(네이버 참조)인 라틴어 캉케르를 소보람은 “게자리가 ‘달의 집’인 것은 달이 세상의 중심인 이곳에 위치했다는 고대의 믿음에서 비롯된다”로 설명·보충하고 자신의 미생물 이름 “암세포(Cancer)”에 대해서는 “부은 정맥이 게의 다리를 닮아 종양의 어원으로 적용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식으로 한자리에 모인 ‘인간 이념’에 대한 카밀로의 배치도에 비인간 미생물들의 이름이 대등하게, 버젓이 배치된다. 라틴어는 서구적 사상의 출처로서, 신화적 세계관을 반영한 고대의 언어로서, 이미 그 자체로 시적인, 근대적 타락 이전의 원형적 사유를 증거하는 유물, 증거로 전유된다. 나는 어느 날인가는 온종일 작가의 기억극장, 일종의 ‘성좌(星座)’처럼 내재적으로 연관되고, 직선적으로 읽을 수 없고, 이미지적으로 증폭/중첩되는, 하나의 전체를 읽고 보고 음미하며(diviner)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가운데 기억극장을 다시 이미지적으로 보충하는, 좌우의 작가의 이미지 콜라주인 그리스 로마신화의 도상-이미지들과 미생물들의 형상들을 번갈아 가며 보고 즐겼다. 당연히 이것은 예술가의 유희-실험-전복이므로 동시에 많은 규칙들, 무질서들, 변칙들이 공존하는 허술한/읽기에 저항하는 배치도였다. 가령 맨 왼쪽 14번째에 적힌 “안티바이러스”에 대응하는 시각적 이미지는 맥아피 안티바이러스의 로고 이미지이다. 일종의 유희-농담처럼 보이는 이 로고 이미지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그러나 ‘감성적 인식’의 치밀한 정합성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텍스트와 거의 모든 이미지를 평등하게 읽고 보아야 하는 이 탈중심화된 배치도의 거의 한가운데에는 그리스 로마신화의 “황금가지 삶과 영혼”이 적혀 있고 그것에 대응하는 소보람의 미생물은 “무(無)였다. 이러한 변칙을 놓고 작가는 “박테리아에게 영혼이 있을까? 한자 무(無)는 ‘춤을 추다’에서 비롯했다. 박테리아는 경계가 없고 자유로운 상태를 향하여 움직이고 이동하는 춤추는 몸이 아닐까?”라고 보충 설명을 달았다. 없을무(無)는 저쪽의 그리스-라틴어에 버금가는 이곳의 갑골문자에 대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가 반영된 것으로, 작가는 한자가 주술적 힘을 보유하고 있던 시대, 인간학이 도통 등장할 것 같지 않았던 세계를 소환해 근대적 폭력에 대한 수정이나 개입을 타진 중이다. 작가는 그리스 신화의 ‘최초와 최후=영원 알파와 오메가’에 대응하는 자신의 미생물로 ‘불멸의 해파리(Turritopsis nutricula)’를 대입한다. 불멸의 생물로 불리는 이 존재는 “홀로 성적 성숙에 도달했다가 미성숙 단계로 돌아감을 반복하여 죽음에 다다르지 않고 생존한다”는 작가의 설명을 따라 우리는 필멸의 인간이 상상해 낸 환상으로서의 불멸과 계속 미성숙으로 돌아가서 삶을 영위하는 한낱 해파리의 기이한 불멸의 삶을 대비시킬 수 있게 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어린이문화원 개관 10주년 기념 전시
《판타지 인벤토리》의 〈너의 기억극장〉 설치 시안 2025
나가며
나는 카밀로의 〈기억극장〉에 대해서건 소보람의 〈기억극장: 미생물편〉에 대해서건 사실 100분의 1도 읽지 못한 것으로 사료된다. 직선적이고 체계적인 지식화(환원에 기반한)가 아닌 동심원-나선형적인 증폭과 비약에 기반한 이들 두 몽상가의 만들고 음미하는 작업에 인쇄술 이후의 언어로 대적하거나 번역하는 것이 턱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시와는 다른 시 쓰기, 경제적 효율성에 기반한 소통의 수단이 아닌 범신론적인 세계의 관계성을 체현한 언어로 이 세계를 긍정하는 말하기를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글쓰기라면 내 글과는 달라야 한다. 그런데 이 글의 초안이 내 머릿속에 있을 무렵 작가에게서 놀라운 이야기가 전달된다. 작가의 〈기억극장: 미생물편〉을 입체적 건축 형태로 구현해 줄 후원자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오는 11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어린이문화원 개관 10주년 기념전시《판타지 인벤토리(Fantasy Inventory)》에서 소보람의 기억극장을 만나게 될 것이다. 어린이들이 관객이기에 어른은 기어서 보도록 구조화된, 길이가 장장 10m에 달하는 극장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물론 소보람의 ‘미생물’ 파트 옆으로 ‘ACC 어린이문화원 공연 섹션’이 첨가된 채로. 그 부분은 이미 작가가 텍스트와 이미지로 구현해 놓았다고 하니, 이 미개봉 상태의 제 3섹션은 광주에 가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만물이 신비와 비의로 가득 찬 세계의 행위자인 아이들에게 작가가 구현한 기억극장은 보고 돌아다니며, 절대적 차이와 상호적 관계를 음미하고 즐기는 경험일 게 분명하다. 우리 근대인은 거기서는 동물처럼 기어야 할 것이라니, 이런 퇴행이나 이런 배제는 카밀로의 뒤집기나 땅속으로 숨어든 최초의 미생물을 떠올리며 즐길 수 있을 것이고.
* 본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 기고이다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