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소정 변관식: 몽유강산
《소정 변관식: 몽유강산》 소암기념관 전시 전경
소정 변관식: 몽유강산
이동국 |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전쟁과 예술
전쟁은 세계를 파괴하면서도 다시 살아나는 계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이다. 일제강점 36년과 6·25전쟁 3년과 같은 식민시대와 전쟁을 겪어내면서 한국은 문명의 패러다임 자체가 동에서 서로 뒤바뀌었다. 그 결과 왕(王)이 주인인 봉건왕조 조선에서 민(民)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내재의 전통서화 또한 외래의 서구미술과 한반도라는 용광로에서 충돌 화해하면서 서화미술로 확장됨과 동시에 근대와 현대의 한국미술 탑을 쌓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서화와 유화 조각 사진 같은 미술이 각자도생 하면서도 다종다기한 제3의 예술 꽃을 피워낸 지층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의 전쟁 속에서 변화된 한국의 서화미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서귀소옹과 20세기 서화거장 Ⅶㅡ소정 변관식 : 몽유강산》의 화두인 필묵(筆墨)과 서화의 경우만 해도 부정과 긍정이 교차한다. 부정적인 관점에서, 망국 분단과 같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예술 또한 쇠퇴와 단절로 간주되었다. 진홍섭 변영섭 강경숙 이완우의 공저 『한국미술사』 중 「1910년 이후의 한국미술」에는 “1910년 이후의 한국미술은 1910년 이전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평가하거나, 1910년 이전 연장선상에서 논의하는 일은 전혀 무의미한 일이다”라고 기술했을 정도다. 서예는 말할 것도 없지만 다 같은 그림인 동양화와 유화도 그야말로 물과 기름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미학적으로도 관념적이고 사의적(寫意的)인 서화와 눈에 보이는 대상의 사실(寫實)에 무게중심을 둔 유화 조각 사진으로 나누어졌다. 하지만 시각을 달리하여 현재진행형인 남북분단을 인정하더라도 망국과 전쟁을 극복한 관점에서 보면 한국미술의 근대와 현대는 ㅡ서화에서 미술로 대세가 기울어진 가운데에서도 단절보다 도약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하면 내재의 전통서화와 외래의 서구미술은 상호 간 교통을 통해 ‘서화미술’로 지평을 넓혀왔다. 더욱이 유화 조각 사진을 사의적인 관점에서 파악해보거나, 서화를 사실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라는 용광로에서 전개되는 필묵의 사실성과 유화의 사의성,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서화미술일체의 ‘사실적 사의성 내지는 사의적 사실성’은 한국근현대예술의 독자적인 시각언어로 자리매김된다.
분단시대 소정 소암의 필묵노래
이런 맥락에서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1899~1976)과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 1907~1997)의 예술성취는 지금까지 필묵서화 울타리 안을 넘어 식민지, 전쟁시대, 서구미술과의 공존 속에서 비교 평가되어야 제대로 간파된다. 이유는 예술의 운동장 자체가 동에서 서로 기울어지고 뒤바뀐 한국미술의 근대, 현대라는 시공에서 필묵전통의 절대미를 고수하면서도 외래미술의 조형과 미감을 필묵으로 녹여내어 작가가 실존하고 있는 시대성을 독보적으로 필획에 펼쳐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정이 시서화일체 (詩書畵一體)에 기반한 서적(書的)필획으로 전통산수를 현대의 풍경산수로 재해석해냈다면, 소암은 텍스트와 이미지의 일체인 서(書) 안에서도 이미지에 방점이 찍힌 추상표현주의를 방불케 하는 서(書)의 미감으로 한라산의 영(靈)과 기(氣)를 현대적으로 ‘그려’냈다. 이런 맥락에서 소정의 필묵 행보는 반동적이다. 사서화동원(書畵同源)을 기저로 하는 고졸한 미감의 둥글둥글한 필획으로 금강산을 ‘써내는’ 소정의 필묵은 동시대 동양화 양대 산맥인 청전 이상범의 ‘제화시 배제’ 행보, 즉 동양화의 현대화를 위해 내세운 서(書)와의 결별 행보와는 정반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금강산은 말할 것도 없지만 〈상림霜林ㆍ안자雁字〉, 〈洗劒雪初 세검정의 첫눈〉 등과 같은 1960~70년대 완성기 소정의 풍경산수에서는 점과 획, 점획의 무수한 중첩과 얽힘 후에 비로소 묵직하게 드러나는 형상 뒤의 기운을 본다. 여기에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구절양장 같은 시공을 압축해낸 유장한 ‘S’자의 공간 경영은 겸재와 단원, 오원 소림 심전의 사의적인 전통산수와 서구의 사실적인 풍경들이 소정의 필묵용광로에서 녹아나온 결정이다. 더욱이 분단시대 다시 갈 수 없는 금강산은 소정의 기쁨이고 슬픔이자, 꿈속에서만 그려지는 애달픈 ‘님’으로 다가온다. 〈내금강 마하연 가을 색〉, 〈외금강 구룡폭포의 농익은 가을〉, 〈해금강 총석정의 늦가을〉, 〈눈 입은 외금강 만물상〉, 〈외금강 대성암 매화 독경소리〉만 보고 들어도 소정은 금강산을 노래하다 자신이 금강산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소정의 그림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시각 청각 그리고 시(詩)언어까지 다층적으로 관계한다. 〈상림霜林ㆍ안자雁字〉의 제화시를 보면 “霜林着色皆成畫 서리 내린 숲 단풍 모두 그림이 되고, 雁字徘空半草書 허공을 배회하는 기러기 초서(草書)를 쓰누나.” 하고 시(詩)와 서(書)가 그림과 삼위일체로 한 화면에서 노래한다.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즉 ‘시(詩)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시(詩)가 있다’는 데에서 소정 그림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이런 사실은 소정이 자주 화제로 삼은 “왕우승(王右丞, 王維, 699 ~ 759)이 시(詩)를 지으면 형체가 없는 그림이고, 그림을 그리면 말 없는 시인데, 대체로 품격(品格)이 빼어나고 사유(思惟)가 고매하기 때문이다 (王右丞作詩爲無形畵 作畵爲不語詩 大都品格超絶思致高遠也)”고 하는 데에서도 증명된다. 소정의 육화된 관념산수와 금강산과 같은 산수풍경은 ‘같고도 다른’ 사여불사(似如不似)의 사실 너머의 사실세계로 유화 조각 사진의 사실적 사의와 좋은 대비를 이루며 근대와 현대를 가로지른다. 이 지점에서만이 “우리는 피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되어야 하겠으며, 모방적으로 되지 말고 독창적이 되고, 공상적으로 되지 말고 현실적이어야만 되겠다.”는 소정의 무수한 되뇌임은 오늘날 한국미술 모두를 각성시키면서 현실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소암은 어떠한가. 〈령(靈)〉 〈동(冬)〉 〈능운(凌雲)〉과 같은 작품 역시 서(書)로서 서(書)를 넘어서면서 시대사회와 자연을 서(書)로 녹여낸 경지다. “나는 한라산 넘어갈 때 올 때 다 공부해요. 초목과 모든 것이 다 이렇구나 생각해요. 쑥대나무 백양나무는 쭉 올라가고 소나무는 구불구불하고, 구름도 그래요. 그러니 이걸 배우다 보면 자연히 통합니다. 나는 지금 들에 가는 걸 좋아해요.” 그야말로 소암의 야일(野逸)한 필획 그 자체가 자연의 결정임을 여기서 확인한다. 소암이 필획(筆劃)으로 펼치는 제주의 바람 산(山) 언덕 파도 나무의 기운(氣韻)은 그 자체가 서구추상과 다른, 글씨 쓰기를 넘어 글씨가 그림이 된 언예일치(言藝一致)의 경지라는 점에서 기존 전통서예의 한계를 깨고 있다. 요컨대 내재적인 관념전통이 외래적인 사실경향을 품어내면서 전개되는 근대적 현대적 의미에서 ‘자연이연(自然而然)’의 물아일체경지 창출 지점은 2023년 기계시대 한가운데에서 더 크게 보인다.
사실적 사의 내지는 사의적 사실
이러한 소정 소암의 필묵성취는 식민지와 전쟁으로 점철된 한국미술 근대의 화두였던 ‘향토색(鄕土色)’ 문제를 뒤집어 극복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정 소암이 산(山)이 되고 조국강산이 되면서 통일노래로 승화한다. 이와 동시에 6·25전쟁 후 불어닥친 서구 추상미술 광풍의 대척점으로 자리매김된다. 오히려 내재의 전통서화와 외래의 유화 조각 사진이 물질단계의 이질성을 넘어 사의라는 차원에서 불이(不二)의 관계로 도약한다. 붓과 먹은 물론 오일과 브러시, 사진기와 필름은 모두 도구 재료의 관점에서 보면 물질이다. 하지만 이들 물질이 ‘자연과 사물에 감응하여 발동하는 인간의 희로애락과 같은 정(情)’, 즉 ‘감물도정(感物道情)’을 서, 서화, 유화, 사진과 같은 예술의 그릇에 담아내는 순간 다 같이 물아일체의 경지로 도약한다. 서화의 필묵사의가 유화 조각 사진의 ‘미술사의’로 확장 도약된 공간이 한국의 근대와 현대가 된다. 이 점에서 소정 소암의 필묵언어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한국미술의 전통과 근대 현대의 단절이 아니라 계승과 도약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당연히 동시대 여느 작가들의 묵수적인 필묵서화 운용과는 구별되며, 여기서 유화 사진을 액면 그대로 전통과 이질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배타적인 태도도 불식된다. 요컨대 이 지점에서만이 진정으로 외래의 서구미술을 내재의 전통서화로 녹여내면서 ‘객체로서 머물러 있는 서구미술이 아니라’ 주체로 확장 소화된 한국미술로서 근현대의 정체성과 세계성을 동시에 획득해낸다. 이제 필묵서화의 기계시대 당대성 획득 문제, 즉 ‘기계사의 (機械寫意)’는 전적으로 2023년을 살고 있는 우리의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소정 변관식 〈금강산 보덕굴〉 종이에 수묵담채 46.6×72.4cm 1960년대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소장
소정 변관식 〈금강사계 6곡병〉 종이에 수묵담채 1960년대 인주문화재단 소장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