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時]差 [市]差

강민형 독립큐레이터, 바림 디렉터

Special Feature

최근의 한국 예술계 흐름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공립미술관, 사립미술관, 문화재단 등 한국 각 지역에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의 형태로 국내 작가뿐 아니라 해외 작가를 초청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대도시 대부분에 비엔날레가 생겨, 지금은 20개 이상이라고 한다. 문화예술 활동의 국제무대 진출을 의식한 한국 정부의 시도가 성과를 내는 것일까.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으로 개별적인 세계가 평평해지면서, 그것이 한층 쉬워졌는지도 모른다. 세계 미술계에 진출하고 싶다는 이 욕망, 자본을 향한 이 뚜렷한 흐름은 어떤 이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을 선사하지만, 나에게는 생경하다. 이러한 해외 지향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한편, 이 모든 것이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동안 서울 외 지역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혹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지속가능한 독립성을 구축하는 것과 지역 특성에 입각하는 것은 때로 다르다. 후자의 경우, 종종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근서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소멸하는 지역을 문화예술로 살리겠다는 그간의 여러 노력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2014년 나는 광주광역시에서 바림[1]이라는 예술공간을 개관했고, 지난 10년 동안 광주와 서울을 평균적으로 2주에 한 번에서 길게는 한 달에 한 번 오가며 두 도시의 시간을 동시에 겪었다. 2015년 KTX 호남고속철도가 개통된 이후 시간의 감각이 크게 바뀌었다. 물리적인 거리는 같지만 시간이 줄어드는 묘한 감각은 서울을 떠나야만 알 수 있는 경험이었다. 가까워진 서울은 오히려 나에게 더욱 극심한 시차감을 가져왔다. 서울의 큐레이터와 예술가들은 해외 동향을 의식하고 적응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 마치 파도가 올 것을 알고 있는 서퍼처럼 빠르게 파도를 타고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예를 들어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배리어 프리, LGBTQIA+의 권리 등, 미술계에서 자주 보이는 이러한 주제는 물론 디테일이나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대주제 면에서 유럽의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고, 국공립미술관, 비엔날레의 인프라 등, 형식 면에서도 유사함이 있었다. 이것이 피부로 와닿으며 시차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물론 광주의 자랑이라 할만한 광주비엔날레도 크게는 서유럽의 흐름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주로 유럽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감독을 초청했으며, 최근에는 국가관 시스템을 도입하여 형태 면에서 더욱 유사하다. KTX가 시간을 삭제했지만 오히려 서울과 광주의 시차를 느낀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도 드러난다. 다시 말해, 국제적인 움직임이 있고, 그것을 적극적이고 빠르게 받아들이는 서울이 있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이상할 정도로 시차가 없지만, 오히려 서울 외 지역과 서울 사이에는 시차가 있다는 것이다. 바깥 세계가 안의 세계보다 더 가깝다는 묘한 느낌, 그로 인한 시차, 그리고 제트 래그(Jet Lag)된 신체가 존재한다.


[1] 바림은 강민형이 2014년부터 2024년까지 광주광역시에서 운영한 독립 공간이다. 바림에 대한 더욱 자세한 정보는 URL(https ://barimart.wordpress.com/)로 확인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 계정은 @barimgwangju

혼자만 새벽에 눈을 뜨는 것 같은 물리적 시차적응의 후유증은 예술계에서 일하는 모두에게 체화된 감각일 것이다. 이 감각을 정의 내리고 해소하는 것이 바림의 목표이자 종착지인지도 모른다. 2014년 바림이 처음 개관했을 때, 당시 고시원이었던 공간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로 활용했고, 따라서 초기에는 물리적인 장소에 반응하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그러다 우후죽순 기획 없이 공간뿐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고, 바림은 리서치 중심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로컬리티에 방점을 두었다. 2017년 광주광역시의 예술가를 대상으로 진행한 큐레토리얼 레지던시, 베트남 하노이와의 교류, 2018년 광주광역시의 두 예술공간 ‘다오라’, ‘뽕뽕 브릿지’와 공동 기획한 대안적 아트페어, 안과 밖 그리고 지역과 국제를 주제로 한 국제 레지던시, 광주비엔날레의 일환으로 진행한 인도네시아 예술그룹 루앙루파와의 워크숍, 2019년의 리서치 레지던시, 울산광역시에서 진행한 울산 마이너스 워크숍, 2020년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과 김화용 작가와 함께 진행한 제로의 예술 공공예술 프로젝트, 2021년 팬데믹으로 인해 새로운 연결 방법을 찾아야 했던 삿포로 텐진야마(天神山) 아트스튜디오와의 교류, 전시가 아닌 예술 표현 방식을 논한 ‘전시 금지 연구회’ 등, 이런 예시를 통해 로컬리티를 물리적 지역에 가두지 않는 접근 방법을 고민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2022~2023년에는 ‘탈(脫 )현지화’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탈 현지화 신드롬〉(2022), 〈최소의 지정학〉(2023)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지역을 표면적으로 읽기보다는 물리적 장소에서 벗어나 지정학적 단위로서의 ‘로컬’을 읽어내고자 했다. 현지화라는 단어에서 시작한 이유는 내가 통역사로서 경험한 현지화(localization : 일대일 번역이 아닌 문화적 맥락을 번역한다는 용어)의 함정과 현지라는 단어에 묘하게 섞여 있는 차별적 시선, 언뜻 국제화/세계화와 반대어로 쓰이는 듯 보이지만 사실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려는 목적을 비춰보면 결국 동일어인 이 자본주의적 언어가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가 각자 살고 있는 공동체에 적용시켜, 과연 진정한 현지화는 무엇을 뜻하는지, 현지화 이후에는 현지에 무엇이 남는지에 대해 논해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의도치 않게 ‘로컬’한 기획이 어느 순간 국제적 흐름과 연결되는 뜻밖의 배움을 목격한다. 예를 들면, 광주라는 장소성과 지역성에 고착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소를 떠나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작가들과 리서치를 하다 보면, 그것이 어느새 반대쪽 세상에서 자신의 땅을 지키려는 원주민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이다.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연결되는 우연한 퍼즐의 경험을 통해, 지역성(로컬리티 )은 향토성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 아닌, 반대로 지역을 포괄하는 지역 바깥의 흐름을 읽는 초지역적(trans-local) 시점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결국, 바림은 광주인에게는 광주 같지 않은 공간으로, 서울인에게는 무엇보다 광주 같은 공간으로 보이지만, 이제는 그러한 지역적 구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호하다.

〈탈 현지화 신드롬〉 워크숍 진행 장면 2022 제공 : 바림

〈최소의 지정학〉 워크숍 진행 장면 2023 제공 : 바림

뚜렷한 지역성을 실감하던 초기 활동이 배움에 가깝다면, 모호해지는 지금 순간은 탈배움에 가깝다. 돌아보면 『월간미술』 2020년 1월호 지상전시 지면에서도 나는 KTX를 언급했다. “길이 놓이고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소통, 통신, 이동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기는 동시에 돌아보면 모든 지배자는 도로를 뚫고 철도를 놓았다”고 말하며 “통신과 철로를 비유로, 중앙으로 집중되는 권력의 역방향, 다방향을 생각하는 프로젝트”를 제시했다. 덧붙이는 말로 “로컬리티를 찾는 최근의 경향과는 조금 다르다. 지역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프로젝트가 아닌, 놓이지 않았던 길을 새로 건축하자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라고 마무리한 기억이 있다. 여전히 나는 그 KTX를 타며 창밖으로 보이는 주어진 강제적 풍경을 도시의 진짜 풍경으로 착각한다. KTX 철로가 놓이지 않은 길을 탐색하고자 하는 탈중심적 활동은 지역에 고립되지 않으면서 초지역성을 연구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지역 도시 안팎을 오가는 여정에서 지역에 대한 폭넓은 시각이 태어나길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이 응집된 바림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의심하며 새로운 풍경을 동료들과 함께 그리는 배움과 탈배움의 장이다.

중심에 속해 있지 않은 지역에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쉬이 지역을 떠나 상경하여 중심의 무언가를, 말하자면 서울의 대학을 나와 서울에서 입지를 찾는 것으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출세는 세상으로 나간다는 뜻으로, 여기서 세상은 중심 세계를 뜻한다. 출세에서 말하는 ‘세상’은 더 다양해질 수 있을까. 철도와 도로가 아직 뚫리지 않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찾는 것은 나에게 일종의 탈중심적 배움이다. 올해 2월, 바림의 물리적 공간을 닫으며 출판한 책 『어떤 예술 공간의 기록』 (2024)[2]에서 나는 2010년대 신생 공간의 유행 이후의 흐름을 “hit and run”(치고 빠지는)으로 부르며, 미술계의 젊은 세대가 지속가능한 물리적 공간보다 발 빠르고 응집력 있는 온라인을 선호하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수많은 온 · 오프라인 공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고 적었다. 온라인은 지리적인 장소로부터 자유롭기에 언뜻 모든 활동이 탈중심적으로 보이지만, 주로 온라인을 통해서 모든 것을 소통하는 지금, 온라인 속에서도 중심과 탈중심의 경향은 점점 더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바림도 곧 온 · 오프라인을 오가는 어떤 새로운 배움과 탈배움을 찾아 ‘출세’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길 바라고 있다.


[2] 책의 내용은 바림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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