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데이 긴 꼬리
아르코미술관 & 아르코예술극장
8.26~9.7
정소영 기자
Sight&Issue

홍은주의 〈내가 환희에 겨워 울고 있을 때, 그녀는 절망에 잠긴 듯 보였다〉프레젠테이션
‘긴 꼬리’(롱테일) 법칙은 기존 마케팅의 정설로 불리는 파레토의 법칙 즉, 상위 20%의 지출이 하위 80%의 비율과 동일하다는 이론에 반박하는 용어로, 80%의 비주류가 상위 20%를 압도할 수 있다는 변한 시장성을 나타내는데 쓰인다. ‘긴 꼬리’라는 이름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한 아르코데이는 미술시장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 현실에서 주류로 분류되는 소수의 작가에 의한 미술계의 흐름이 과연 올바른가 하는 자조적 목소리에서 시작됐다. 거센 물결을 막아서서 올바른 방향성을 논할 수 있는 힘. 공공기관이기에 해야 했던 시도인 아르코데이는 지금의 흐름을 다시금 바라보고, 시장의 흐름이 아닌 예술 고유의 가치를 극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온전히 경험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의의를 지닌다.
전시장이 아닌 무대 위에서의 작가 프레젠테이션
작가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조차 선별된 소수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불합리에서 조금은 벗어나 최대한 많은 수의 청년 예술가를 통해 대한민국의 청년예술 실태를 공유하고 논하고자 선보인 10팀의 작가와 큐레이터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극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작품을 재해석, 재표현했다.
10팀을 한가지 갈래로 그룹 지을 수 없지만 지금이라는 시대성과 표현 방법의 신선함, 기술 그 자체이기보단 그 이면의 사회적 문제와 고정된 규율과 제도에 대한 재해석, 인간과 비인간 존재 간의 관계 재고를 논하는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동아시아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전통 인형극은 인형이 인간의 신체 연결된 분리된 타자이자 또 하나의 생명체로서 기능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소재이자 예술 표현 방법이었다. 홍은주는 전통적인 인형극의 형태가 아닌 인체 사이즈와 동일한 인형과 그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을 동시에 무대에 선보이며, 인간과 인형의 분리와 삭제가 아닌 두 대상의 대칭과 조화의 모습을 퍼포먼스로 펼쳤다. 〈내가 환희에 겨워 울고 있을 때, 그녀는 절망에 잠긴 듯 보였다〉는 퍼포먼스로 연결된 인형에게 가해지는 폭력적 태도와 동시에 인형에게 느끼는 연민과 위로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사물, 그 안에서의 새로운 인간성과 관계에 대한 물음을 제시한다.
극도로 통제된 빛과 소리, 그리고 제한된 동선과 한정된 무대라는 장치는 극의 몰입성을 높이는 장치로서 작동한다. 완성된 무대를 위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소리, 예를 들어 장 막이 바뀔 때 자동 커튼이 내려오는 소리, 인물이 등장할 때 발걸음 소리, 조명의 조리개가 열리고 닫히는 소리, 여기에 관객의 움직임에 따른 통제할 수 없는 미세한 소리까지. 사운드 아티스트 서민우는 극장에서의 이런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무대 〈장면들〉을 연출했다. 배우가 무대 밖으로 나와 관객과 만나고 무대 밖 관객이 연출된 무대로 소환되는 과정에서 관객은 연출된 가상의 공간에서 깨어나 현실과 이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서민우는 이런 규제와 제약의 틀을 벗어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무대 장비 반입을 위해 설치된 로딩 도어를 열어 순식간에 몰입된 무대에서 건물 밖 현실과의 교차를 이뤄낸다. 열린 문을 통해 무대 밖 일상의 소음이 무대 위로 쌓여 하나의 음향효과가 되는 공연이자 연출로서의 무대는 공간에 쌓인 제도의 통제와 해제, 그리고 이를 통해 전하는 소리와 소음 사이를 아주 천천히 느끼게 한다.
이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직업군인 AI 트레이너가 갖는 윤리적, 정치적, 신학적인 고민과 인공지능 트레이닝 과정의 질문이 담긴 박아름빛의 〈나쁜 것을 말해 줄게〉는 기술 발전의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인력의 노동과 트레이닝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인종, 성차별, 세대 간 혐오 등의 사회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불편함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영상작품을 상영했다. 실제 AI 트레이너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불편한 질문들은 포용성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져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현실을 직면하게 한다.
10팀의 프레젠테이션 이후 진행된 네트워킹 프로그램은 긴 꼬리의 구성원들이 만들어가는 견고한 네트워크를 위한 핵심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한 키아프와 프리즈 서울을 찾은 국내외 미술 관계자들과 신진 미술인들의 만남은 이번 아르코데이가 발생시킬 또 다른 가능성으로 그 자리를 빛냈다.

컵케이크와치와와의 작품을 공연 형식으로 번안하여
무대 위로 확장한 김진주의 〈백프로로〉 프레젠테이션

원정백화점의 〈세계의 많은 것들이 쌓여있다〉 프레젠테이션
아티스트 라운지: 콘택트 피드
무대 위 실험이 완성된 작품의 다른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아티스트 라운지: 콘택트 피드’는 과정 그 자체를 드러냄으로써 긴 꼬리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얀 벽에 걸린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전시가 아닌 테이블 위의 제작 과정 노출을 통한 진행형의 전시형태는 예술의 역사 안에서 아이디어와 과정 역시도 예술이 되는 맥락을 동시대에 다시 소환하며 또 다른 방식으로 예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아티스트 라운지에 참여한 김재아&박현진은 다양한 신체의 감각을 프로젝트를 통해 드러내는 기획자와 작가로 구성된 팀이다. 사진 작업을 시도하는 박현진이 시각장애인인 조향사의 감각을 사진으로 표현한 과정을 소개하는 테이블에는 조향사의 향료를 필름과 섞어 현상해 만들어낸 결과물과 함께 조향사의 향을 동시에 펼쳐놓았다. 김재아&박현진은 시각 매체인 사진을 관객이 시각 이외의 향을 맡는 후각과 사진을 직접 만지는 촉각을 동원한 다감각을 통해 사진의 감상방식을 변화시켰다.
전자음악가 안벼리는 아날로그 필드 레코딩, 디지털 음을 혼합한 사운드 아트를 선보였다. 예술과 기술을 중심으로 자연과의 관계 속에 개입된 인간 탐구를 지속하는 작가는 현장성이 삭제된 음원과 스크립트만을 테이블에 놓았다. 이어폰으로 들리는 음원을 통해 작가의 방식을 각자의 상상으로 채워나가는 경험의 작품은 인간의 무한성과 음원의 재생 방식인 되감기를 전시로서 표현했다.

아르코미술관 공간열림에서 진행된 ‘아티스트 라운지-콘택트 피드’

아르코데이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네트워킹 파티
이미지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긴 꼬리의 가능성
아르코데이는 소수의 거대 담론이나 시장의 대세에 편입되지 않은 다수의 목소리를 무대와 테이블이라는 하나의 인위적 공간에 펼쳐놓음으로써 지금 이 시대가 공유하는 감각을 가시적으로 공유하게 했다. 이는 ‘긴 꼬리’라는 이름처럼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개별적이고 다채로운 실천들이 모여 동시대 예술의 지형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음을 증명한다.
* 본 기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월간미술이 공동으로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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