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동하는 미술
관훈갤러리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10.16~2024.11.5
나무아트갤러리 《뭥》
2024.11.27~2024.12.9
2기적팩토리 《사물의 언어》
2024.11.20~2024.12.11
Sight&Issue

윤진섭 《사물의 언어》 마지막날 진행된 퍼포먼스에서 윤진섭(가운데)이 샘의 영정을 들고 있다.


〈샘의 장례식〉 퍼포먼스 참여자들이 안양 평촌 학원가를 행진하는 모습
제공: 윤진섭
약동하는 미술
강재영 기자
지난해 연말, 한국 현대미술이 자라난 곳 서울 인사동과 안양 평촌 학원가에 위치한 한 복합문화공간에서 지나쳐 보내기 아쉬운 전시가 연이어 관객을 맞았다. 2024 서울미술공동체(이하 서미공) 창립 40주년 특별전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박불똥 개인전 《뭥》, 윤진섭 개인전 《사물의 언어》가 바로 그 전시다. 한국 현대미술장의 한 장면이었으며, 긴 시간 미술계를 이 모습 저 모습으로 운동하게 해온 이들이 여전히 미술 주체로 약동하는 현장을 소개한다.
열림굿으로 시작한 서미공 40주년 기념전
서미공은 ‘그림동인 실천’, ‘횡단’, ‘목판모임 나무’, ‘에스파’, ‘시대정신’, ‘벽화기획 십장생’, ‘억새’ 등 다양한 소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던 당시 민중미술계의 연대 활동을 지향했다. 1983년 대성리에서의 토론회로 시작된 서미공은 1984년 공식적으로 발족하며 《을축년 미술대동잔치》와 같은 전시를 통해 대중적 미술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특히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은 검열과 탄압 속에서도 민중미술의 상징적 사건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전시는 이후 ‘민족미술협의회’ 발족으로 이어지는 서미공의 역사와 업적을 조명한다. 전시는 2023년 구성된 서미공 연구팀에 의해 꾸려졌다. 최민화, 손기환, 류연복, 박진화 등 서미공의 주축이었던 작가들의 구술채록을 추진했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 형태로 선보이게 된 것이다.
전시는 서미공의 활동을 총체적으로 재조명한다. 1층에는 서미공의 역사를 보여주는 포스터와 자료 아카이브가 마련되었으며, 2층과 3층에는 서미공에 참여했던 작가들의 1980년대 작품과 최근작이 함께 전시되어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개인화되고 한편 가장 넓게 연결되어 있는 21세기 현재, 공동체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삶의 예술’을 주창했던, 이른바 ‘공동체 미술’이라 할만한 민중미술의 흐름을 조망하는 것은 시의성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 대한 연구 기반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다. 전시는 지금 이 시점 한국 동시대 미술에서 공동체와 연대에 관한 중요한 참조점이 되었다.
2024년 10월 16일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개막식에서
광대패 모두골의 열림굿 모습(왼쪽)과 관훈갤러리 전시 전경
제공: 서울미술공동체
뭥?
박불똥은 지난 40여 년간 포토몽타주 기법으로 자본주의와 대중 욕망을 날카롭게 조명하는 등 민중미술을 지탱해온 작가다. 5년 만에 열린 이번 개인전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전시 제목이다. 작가는 문학과 미술이 서로 어깨동무하며 어두운 군사독재 시절 함께 저항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마치 힘을 잃은 듯 보이는 현재의 문학적 발언과 미술 실천에 모종의 감정을 느꼈던 듯하다. 스마트폰으로 끄적여 만든 일상의 일면쯤으로 작업을 소개하면서도, 디지털 문명이 고도화된 현재 “과연 ‘그림’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뭥’은 그러니까 자조적인 일성이 아니라 관객과 미술에 던지는 질문이자 시급한 요청일지 모른다.
작가는 전시 기간 갤러리에서 33명의 관객에게 직접, 유상으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대학 시절 실기실에서 친구들의 초상을 그리던 경험이 바탕이 됐다. ‘사진’이라는 현실을 매체로 선택하고 의도적으로 그리는 행위를 멀리해왔던 그는 이번 퍼포먼스에서 잊고 있던 그리기 행위를 다시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 사람당 1시간 30분간의 사생을 통해 완성된 초상화를 전달한다는 처음 계획과는 달라졌지만, 그리면서 진행한 관객과의 인터뷰, 디지털 시대 초상의 의미를 재고하는 일종의 보고서를 만들어 선보일 계획을 밝혔다.
전시 포스터와 박불똥《뭥》전시장에서 작가가 초상화 퍼포먼스를 벌이는 모습(오른쪽)
제공: 박불똥
샘의 장례식
2024년 11월 20일부터 12월 11일까지 안양 2기적팩토리에서 열린 윤진섭의 초대전 《사물의 언어》는 일상의 사물들을 예술적 오브제로 승화시키는 작가의 독특한 미학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행위예술가 등 다방면에서 활동해 온 윤진섭은 도마, 삽, 이불 뭉치 등 흔히 볼 수 있는 사소한 사물을 통해 새로운 미적 경험을 제안했다. 작품들은 ‘사물의 언어에 대하여’, ‘나는 왜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갖는가?’ 등으로 나뉘어 전시되었으며, 사물에 깃든 의미와 인간의 내면 사이의 연결고리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전시 마지막 날이었던 2024년 12월 11일 오후 4시, 마르셀 뒤샹의 대표작 〈샘(Fountain)〉(1917)의 장례를 치르는 퍼포먼스가 열렸다. “2023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윤진섭의 자택에서 사망”한 ‘샘’은 고요한 학원가 지하에서 미술사학자와 많은 미술인이 함께하는 가운데 다분히 한국적인 의례와 함께 역사화 되었다. 길에서 펼쳐진 상여 행렬의 뒤로 학생들은 ‘뉴스에 나오는 거냐’며 신기해하며 따랐고, ‘여기서 이런 걸 왜 하는 거냐’라며 항의하는 행인도 있었다. ‘샘’의 탄생은 현대미술의 탄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작가가 기획한 이번 행사는 한 세기 넘게 통용되어 온 현대미술의 시각언어에 종언을 고하는 것으로 보였다.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