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무 Jeongmu Yang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 ①
양정무, 미술사를 플레이하다
심지언 편집장
The Interview
양정무 교수는 학자이면서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강의실을 넘어 방송과 유튜브, 대중 강연과 책을 오가며 미술사의 지평을 확장해 왔다. 난해하고 멀게 느껴졌던 미술사와 인문학을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고 동시대의 감각 속으로 불러들이는 일, 그것이 그가 지난 시간 동안 몰두해 온 것이다. 학문은 점점 더 전문화되고 콘텐츠는 더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 양 교수는 이 둘을 가로지르는 질문을 던진다. 깊이 있는 콘텐츠는 어떻게 대중과 만날 수 있는가. 인문학은 어떤 태도와 방식으로 발화되어야 하는가. 월간미술 창간 50주년을 맞아 시작하는 인터뷰 시리즈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특유의 감각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콘텐츠 제작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온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 첫 번째 주인공으로 양정무 교수를 만났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 학사 및 석사 졸업,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예술연구소 소장, 한국미술경영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존스홉킨스대와 메릴랜드미술대에서 방문 교수로 미술사를 연구하고 서양미술을 상업주의와 연결한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1~8권(2016~2024),『그림값의 비밀』(2022), 『벌거벗은 미술관』(2021) 등과 번역서로 『신미술사학』(1998) 등이 있다. 현재 한예종 미술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차이나는 클라스’, ‘ 어쩌다 어른’ 등 다수의 방송에 출연했고 출판, 강연 등을 통해 인문학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사진 제공: 양정무
연구자이자 교육자
미술사학자이자 교육자인 동시에 최근 ‘미술 스토리텔러’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본인의 활동을 소개 부탁드립니다.
요즘 대중적인 강연, 방송 등을 하고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저의 정체성은 미술사학자입니다. 미술사라는 학문을 하는 직업인이 요즘 몇 명이나 있을까 싶습니다만, 저에게는 미술사학자라는 타이틀이 가장 중요합니다. 작품을 연구하고 미술을 통해서 사회의 변화와 그 과정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어요. 근본적으로 미술사라는 학문이 가지고 있는 매력에 여전히 열광하고 있는 연구자입니다.
학창 시절 미술사라는 학문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와 이 학문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어려서부터 역사를 무척 좋아했고 유물이나 시각 이미지를 통해서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공부하지 않아도 성적이 잘 나오는 과목이 하나씩 있잖아요. 제겐 역사가 그랬습니다. 관심이 있으니까 공부가 잘됐고 수업도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고학과 미술사를 전공으로 택했는데, 고고학을 공부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미술은 근현대적인 현상인데 고고학은 인류 등장부터 다루기 때문에 작가나 작품을 광범위하게 보는 시각을 가지게 했다고 생각해요.
미술사는 공부할수록 새로운 세계가 보이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요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내가 던지는 질문의 수준과 방향에 따라 새로운 점을 깨닫게 해주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세계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렇게 흥미진진한 세계를 나만 알고 있기 아쉬워 그 매력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글을 쓴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재직 중인 한예종은 창작자를 길러내는 교육기관입니다. 인공지능(AI) 기술이 날로 발전하는 상황 속 디지털 네이티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요?
요즘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으며 노트북으로 정보를 실시간 검색하고, AI를 활용해 이미지를 생성하거나 데이터를 요약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AI를 통한 정보 검색과 활용은 이제 막을 수 없고, 글쓰기에도 상당 부분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 자체는 분명 긍정적이라고 봅니다.문제는 정보의 양이 아니라, 그 정보를 어떻게 판단하고 해석하느냐죠.
동시에 중요한 점은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원래 교육의 본질적인 가치는 계속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리포트 과제보다는 구술 또는 대면 시험의 비중을 높이고 있어요. AI 도움 없이 강의실에 앉아서 정해진 시간 안에 문제에 답하는 방식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파편화된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보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사유한 내용을 논리적인 문장으로 꿰어내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토론 수업도 늘렸고요. 그리고 팩트 체크, 학문에서 기본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교수님의 주요 연구 분야인 르네상스 시기는 인문주의가 예술로 꽃피운 시대였습니다. 동시대 미술은 지나치게 자본과 유희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이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시대가 회복해야 할 인문주의적 정신은 무엇일까요?
미술이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할 때는 현실과 부딪칠 때 입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현대미술이 현실과 자꾸 멀어지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동시대 미술은 자폐적으로 미술계 내에서만 보는 경향이 있어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큰 매력은 작가와 시대,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같이 어우러지고 있다는 점으로, 비판도 있고 도전도 있고 서로 교류가 있었죠. 지금은 그 분리가 너무 크다고 느껴요. 진정 우리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작가가 얼마나 있을까요?
강의실을 벗어난 미술사
저서『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시리즈(이하 난처한 미술 이야기)가 미술 서적으로 드물게 30만 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습니다. 이 책을 기획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이 시리즈는 원시 시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인의 눈높이로 미술 통사’를 써보겠다는 제 오랜 꿈에서 시작되었어요. 르네상스 미술사를 전공했지만 학부 시절부터 전공 외에도 현대미술 수업을 꾸준히 청강하며 지식의 폭을 넓혔고, 도서관보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접하며 보낸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미술관, 박물관 가이드를 가장 재미있게 인도하는 학생으로 유명세도 탔습니다. 본격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출판사 사회평론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서입니다. 2014년부터 강의했는데 횟수를 20회로 늘려 보자는 출판사의 제안으로 자연스럽게 렉처 북으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2016년도에 책으로 출판되기 시작해 원시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서양미술사의 방대한 흐름을 인류의 문명사와 연결하여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인문 교양서 시리즈입니다. 현재 8권까지 출간됐고 늦어도 내년 초까지 9, 10권 완간이 목표입니다.

1994년경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유학시절
『난처한 미술 이야기』는 독자가 궁금해할 법한 질문을 중간중간 배치하고, 이에 답하는 형식의 대화체를 활용한 문답 구성으로 방대한 미술사를 마치 과외받으며 공부하는 듯한 몰입감을 줍니다. 이 책의 독자층은 어떻게 설정했나요?
이 책에는 ‘난처한 군’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미술을 알고 싶어 하는 인물이죠. ‘난처한 군’은 실제로 강의실에서 마주쳐온 질문들의 집합체로, 독자가 중간에 던질 법한 의문을 대신 말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쉬운 내용이 아니라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주는 것입니다. 한국 독자들은 텍스트 훈련이 잘되어 있어서 깊이 없는 글은 금방 알아보거든요. 깊이를 갖춰야 하는데, 그것을 우리의 눈높이와 문제의식으로 녹여내는 것이 과제였어요. 미술에 대한 교과서적 성격을 갖고있으면서 재미도 있어야 했죠. 그래서 대화의 매력을 이용했습니다. 원래는 청소년과 일반교양 독자를 대상으로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30대 이상 성인 교양 독자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기존 미술사 서적과 차별화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설정한 기획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미술사라는 학문이 유럽과 북미에서 유래되어 한국어로 쓰든 영어로 쓰든, 우리에게는 늘 외국어로 느껴진다고 생각됩니다. 미술사의 논의 구조자체가 수입된 것이다 보니 번역투의 문체나 서구 학계의 서사 구조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죠. 저는 거기에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획의 핵심 원칙은 ‘우리 식의 논리 구조’를 세우는 것이었죠. 한국의 독자들이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의 작품 앞에 섰을 때 느끼는 특유의 막막함과 궁금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높이, 우리의 논리 구조로 풀어가려고 했습니다. 서구 미술사를 우리말로 옮길 때 발생하는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가 최대의 과제였어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함께 나란히 서서 박물관을 걷는 듯한 대화체 형식을 택한 것도 그런 배경입니다. 전문 용어를 일상어로 번역하되, 그 안에 담긴 사유의 무게는 잃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방송을 통해 인문학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는데요, 방송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고 그 과정에서 생긴 관점의 변화가 있는지요?
제가 다양한 글을 쓰고 있고, 또 저서인 『난처한 미술 이야기』를 대중에게 알려야 할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미술사라는 학문이 정말 재미있거든요. 지치지 않는 호기심을 끄집어내는 세계인데, 사람들이 더 많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죠. 방송 경험을 통해 미술을 보는 시야가 확실히 넓어졌습니다. 평소에는 제 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읽고 공부하는데, 방송을 준비하며 평소에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던 작가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되어 예전보다 훨씬 넓게 보게 되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책장이 많이 두터워졌고 방송 이후에도 그 작가를 더 공부하게 되었어요. 더불어 대중의 관심이나 초심자들이 갖는 질문이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방송은 대중에게 단시간에 소구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콘텐츠 측면에서는 한계도 있었을 텐데요.
방송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기는 어려웠습니다. 조금이라도 어려워지는 걸 꺼리니까요. 또한 시청률에 매몰되어 새로운 실험을 원하지 않습니다. 비극적인 이야기보다 희극적인 이야기를 원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죠. 모나리자, 미켈란젤로, 반 고흐 이야기만 하는 안정 지향적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내용의 압축률이 높고 PD와 작가들이 흐름을 잡으니제가 재미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많이 편집되더라고요. 대신 편집본의 검수는 꼭 제가 합니다. 내용의 정확성과 엄밀성은 챙겨야 하니까요.

저서인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시리즈로 8권까지 출판되었으며 현재 9, 10권을 집필중이다
미술사라는 같은 재료를 가지고 책이라는 고해상도 매체와 방송과 유튜브라는 저해상도 매체에 담아낼 때, 매체별로 생략하거나 집중하는 정보의 기준이 다를 것 같습니다.
미술의 강점은 모든 사람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죠. 그런데 미술사학자는 미술사학자만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죠. 전문가나 비전문가나 반 고흐에 대해 얘기한다면 비슷한 얘기를 할 텐데,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방송 경험을 통해 결국 깊이 있는 정보는 글로 풀어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대중은 쉬운 것만을 선호하진 않고 고급 정보를 존중하거든요. 문제는 그 고급 정보를 어떻게 소화하게 하느냐인데, 이건 콘텐츠를 제작하는 우리 모두의 고민이겠죠.
방대한 콘텐츠를 제작하다 보면 기획의 매너리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미술사 밖의 영역에서 연구와 콘텐츠 기획 등에 아이디어를 빌려오는 곳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교우 관계입니다. 다양한 사람을 일대일로 만나 대화하며 아이디어를 많이 얻습니다. 대중을 만나면 작가 친구가 한 명 있어야 한다고 추천하는데, 작가들에게는 반대로 기업인을 만나야 한다고 권합니다. 또 기업인도 작가를 만나야 하고요. 그럴 때 활력과 사회적 다이너미즘이 생깁니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 서로 다른 관점을 나누는 것이 인식의 전환에 도움이 됩니다.
길을 여는 콘텐츠
본인 기준 좋은 콘텐츠란 어떤 것인가요?
기본은 정확성입니다. ‘그로브 세계미술 대사전(Grove Dictionary of Art)’, ‘옥스퍼드 미술사전’과 같은 기준점을 중시해요. 그리고 길을 열어주는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엉킨 문제를 풀어주고 핵심을 짚어줄 수 있고, 그다음 단계로까지 인도하는 콘텐츠가 의미있지 않을까요?
최근 숏폼이나 자극적인 영상 콘텐츠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이 긴 호흡의 인문학 콘텐츠에 위협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기회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인문학의 저변을 넓히는 부분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이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이 있어야 물고기가 있고 대중이 있어야 독자가 있는 건데, 다양한 독자층이 생기니 다양한 매체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죠. 오히려 숏품의 시대일수록 긴 호흡의 콘텐츠가 왜 필요한지가 더 분명히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깊이 있는 텍스트와 서사는 여전히 필요하고, 앞으로 더 중요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AI 시대, 인간 기획자만의 ‘한 끗’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I가 제일 못하는 게 경험을 얘기하는 것이잖아요. AI는 경험이 있을 수 없으니까. 원래 저의 글쓰기 방식은 다른 사람들이 양정무 개인에겐 관심이 없다는 전제하에 내 이야기를 최대한 배제하고 정보와 쟁점 중심으로 메시지를 담아내는 건조한 방식이었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저도 글쓰기 방식을 바꿔서 저의 경험이나 시각에 비중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런 새로운 환경이 필자를 글쓰기 앞에서 더 솔직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월간미술』은 올해 50주년을 맞았습니다. 학창 시절부터『월간미술』을 접하셨을 텐데요, 교수님께 『월간미술』은 어떤 기억 또는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월간미술』은 한국미술의 연대기를 써 나가고 있는 중요한 매체입니다. 저에게 『월간미술』은 우리 미술계를 써 내려온 일기이자 미술계의 실록과 같습니다. 얼마 전에 『계간미술』 시절 기자로 재직하셨던 선배님 몇 분을 만났는데, 지금은 모두 미술계의 큰 어르신이 되셨죠. 아직 『계간미술』 시절을 그리워하더라고요. 50년을 이어온 잡지로서 정보의 확산을 넘어 여론의 방향을 열어가는 매체가 되길 바랍니다. 한국 미술계가 나아가야 할 지점을 제시하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월간미술』이 해주길 오랜 독자로서 바랍니다.
평생 가까이 두고 다시 꺼내 보는 책은 무엇인가요?
이론가로서 가장 큰 이정표가 되는 책은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의 『문명(Civilisation)』(1989)입니다. 이 책은 인류 문명의 지표로 미술을 해석하는 시각으로 제가 통사를 집필할 때 늘 곁에 두고 참고하는데, 제 책을 집필하고 나면 이 책을 꺼내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교차 비교하곤 합니다. H.W. 잰슨의 『서양미술사』(1971)와 같은 통사도 자주 보고요. 또 중요하게 생각하는 책 중 하나가 ‘펠리칸 히스토리 오브 아트(Pelican History of Art)’ 시리즈(1954~1960)인데1, 이 책은 서양미술사를 100년씩 쪼개서 지역별로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쓴 책입니다. 이런 책을 보면 이렇게 많은 미술의 논의와 작가들이 있다는 것에 놀랍니다. 이 책은 저에겐 존경 그 자체입니다.
지금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구조적으로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정부 정책의 부재를 먼저 꼬집고 싶어요. 정부가 바뀔 때마다 내놓는 발전안(案)을 볼 때마다 기대감이 점점 낮아지게 돼요. 정책이 데이터와 연구에 기반하기보다, 그때그때 자문에 의존하는 구조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장기적인 연구와 정보의 축적이 가능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평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도 큰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0년을 돌이켜 봐도 전문적인 비평가의 수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지금 상태라면 미술 비평가라는 직업은 앞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저만 느끼지는 않을 겁니다. 이는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미술계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미술계에서 가장 불편한 단어는?
요즘은 ‘AI’예요. 너무 많은 곳에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항상 불편했던 단어는 ‘시장’입니다. 불편하다기보다 시장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항상 어렵더라고요. 시장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 같지만 그렇게 쉽게 구원하지 않고, 따라가는 건 맞지 않고 그렇다고 안 따라갈 수도 없는 그런 불편한 존재죠.
요즘 가장 많이 고민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난처한 미술 이야기』 시리즈의 출판을 잘 끝내는 것입니다. 남은 두 권은 18세기부터 현대까지 지난 300년간 미술이 걸어온 길을 큰 호흡으로 풀어내는 작업입니다. 지금까지 써온 시리즈의 대단원이기에 작가로서 좀 더 힘을 내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개인적인 고민입니다. 미술사의 매력에 빠져 열심히 달려왔다고 생각하는데, 이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나이가 된 거죠. 어느덧 정년도 생각할 나이인데 대학교수로서 정체성을 내려놓고 나서 학자로서는 뭘 남겨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두산아트센터의 ‘두산아트스쿨: 미술’에서 바로크 미술에 대해 강연중인 양정무 교수
수십만 명의 독자를 열광시킨 화려한 스토리텔링의 이면에는 낡은 원서를 뒤적이며 교차 검증하고 팩트 하나하나를 확인하는 연구자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콘텐츠가 자극적인 숏폼으로 조각나고 지식이 요약된 정보로 소비되는 시대, 양 교수는 역설적으로 ‘텍스트의 힘’과 ‘긴 호흡의 사유’가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좋은 콘텐츠란 기교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진정성에서 출발한다는 본질적인 가르침이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잘 만드는가’를 탐색하는 시리즈가 아니라, 무엇을 믿고 어떤 기준을 가지는가와 같은 기획자적 철학과 자세를 전하고자 한다. 양정무 교수와의 대화는 그 출발점에서 우리에게 의미있는 질문을 남긴다.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콘텐츠는 과연 어떤 깊이 위에 서 있는가.
1 1953년 펭귄 북스의 창립자 앨런 레인과 저명한 미술사학자 니콜라우스 페브너 경의 주도하에 시작된 학술 프로젝트로,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전 세계의 미술과 건축을 집대성한 권위있는 총서이다. 당대 최고의 유럽 및 미국 석학들이 집필에 참여하여 고도의 학술적 깊이를 바탕으로 약 300페이지의 텍스트와 300여 점의 도판을 수록해 전문가와 일반 독자 모두를 아우르는 미술사의 표준을 제시했다. 편집자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