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연출가
진해정
Behind a work 15
1985년 출생.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소수자들의 삶을 그려낸 문학 작품들을 무대에 올린 〈퀴어한 낭독극장〉 시리즈, 성소수자 청소년의 자살 사건을 다룬 〈네가 있던 풍경〉 등으로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소수자의 삶에 주목해 왔다. 〈로테르담〉은 2020년 월간 《한국연극》이 선정한 ‘공연 베스트 7’에 오르기도 했다.
진해정은 2016년부터 창작집단 ‘프로젝트 이어’를 통해 입양인, 여성, 성소수자 등의 목소리를 담아왔다. 2022년 두산아트센터의 ‘DAC Artist 2022’에 선정된 그는 지난 6월 5일부터 27일까지 ‘두산인문극장 2022: 공정’ 프로그램에 참여해 새 연극 〈웰킨〉을 무대 위에 올렸다. 〈웰킨〉은 《차이메리카》로 로렌스 올리비에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루시 커크우드의 신작 《웰킨》을 연극화한 작품이다. 오로지 여성들의 목소리와 몸짓으로만 채워진, 작지만 큰 무대를 만들어낸 진해정 연출을 만났다.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야 할 거예요.
땅에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을 테니까.
〈웰킨〉 공연 장면
루시 커크우드의 《웰킨》은 여성의 인권과 출산이라는 문제를 통해 불공정한 세태를 비판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내용과 의미를 간략히 설명한다면.
루시 커크우드는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인간들의 삶을 통해 불공정한 세태를 직시해 온 작가다. 《웰킨》은 루시 커크우드가 2020년에 발표한 신작으로 18세기 영국 여성의 모습을 토대로 성별, 노동, 계급, 종교, 법의 공정성에 대해 질문하는 작품이다. 18세기 영국의 외딴 지역에서 마을 유지의 딸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용의자로 지목된 21세의 샐리 포피는 자신이 임신 중이라며 감형을 탄원한다. 임신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해 나이, 계급, 인종이 다른 12명의 여성이 법정의 작은 다락방에 모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웰킨(Welkin)’은 ‘The Heaven or Sky’, 즉 하늘, 천국, 창공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는 아니다. ‘웰킨’의 의미와 희곡의 내용을 어떻게 연결 지어 해석했는지 궁금하다.
‘웰킨(Welkin)’은 영국인들에게도 낯선 단어다. 그래서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기보다는 원어 그대로 사용해서 생경한 느낌을 유지하기로 했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 《웰킨》은 하늘과 땅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땅에 있는 현실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늘을 볼 수 있는 순간들은 과연 누구에게 주어져 왔는지를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작품 초반 열두 명의 여성 배심원이 등장하기 전 두 장면이 특히 흥미롭다. 오로지 남성들만 하늘을 올려다보고, 여성들은 허리를 구부린 채 집안일을 한다. 여성들의 시야는 닫혀 있다. 일련의 사건을 거치고 마지막 장면에 도달해서야 여성들은 비로소 하늘을 바라본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되고, 그 모습 속에 무대는 암전된다. 웰킨(하늘)은 자유와 사유를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상징인 셈이다.
《웰킨》은 시대적 배경과 나라가 다르기 때문에 한국 관객들에게는 낯선 느낌을 주는 희곡이다. 이 작품을 연극으로 무대 위에 올릴 때 한국 관객들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고려했는지.
번역 단계에서부터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18세기 영국’이라는 배경부터, 조어를 즐기는 작가의 개성까지 여러 면에서 녹록지 않았다. 희곡 자체의 특성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한국 관객에게 닿을 수 있는 지점을 풍부하게 구현하기 위해 동시대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려 애썼다.
등장인물의 수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각 인물이 거의 동등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작품의 큰 매력 중 하나였다. 인물마다 입체적인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 큰 과제였지만, 배우들의 선택에 많이 기댔다. 무대에 머무는 인물이 많은 데 비하여 무대 자체가 크지 않기 때문에 나는 큰 차원의 동선과 미장센을 위주로 연습을 진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배우들이 발견하는 세부적인 인물 해석을 함께 담아내려 했다.
15명의 배우와 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많은 분량의 대사에 비해 무대미술은 최소화되어 있다. 배우들의 연기와 조명, 소리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연극인만큼 배우들과의 소통 과정이 중요했을 것 같다.
심채선 무대디자이너와 이야기를 나누며 무대를 채우기보다는 비우기로 결정했다. 배우들의 몸과 말, 사운드디자이너(지미 세르)의 소리와 조명디자이너(신동선)의 빛, 잿빛의 의상(오수현)과 여러 소품(장경숙)으로 작품과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연출 작업을 시작한 지 5년 차다. 이번 프로덕션의 배우들은 나보다 훨씬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각자의 개성이 확고한 배우 15명과 소통하며 연극의 얼개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연출자로서도, 창작자로서도 많이 배웠다. 배우 및 스태프들과 많은 논의와 합의를 거쳤고, 그 시간들이 작품의 결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배우분이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이 연극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웰킨〉이었던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다음의 대사들이 이 연극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우리의 몸보다 멀리 떨어진 혜성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알고 있다는 게요.”
“저 애를 위해 그럴 수 없다면, 다음 혜성이 올 때 이 방에 있을 여자들을 생각해보자구요. 그 여자들이 우리를 얼마나 한심해할지, 얼마나 부끄러워할지를요. 선택권을 쥐고도 이 아래 있는 판사들이랑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지금 이 꼴을요.”
이 연극을 정의할 수 있는 대사를 하나 꼽아본다면?
〈웰킨〉은 어떤 방법도 없다며 현실에 순응해왔던 인물들이 예상치 못한 사건을 만나고 거치며 그들 스스로 끝내 방법을 찾아내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깊고 강렬한 대사가 유독 많은 작품이지만, 주제와 연관된 인상적인 대사를 굳이 꼽자면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야 할 거예요. 땅에선 더 이상 방법이 없을 테니까.”
샐리 포피가 하늘을 바라보며 한 독백도 인상적이었다.
샐리는 유아살해에 관여를 한 사람이다. 상당히 복잡다단한 성격의 인물인데, 탄원까지 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싶어하지만 투표권을 쥔 배심원들에게는 호감을 얻으려는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불가하게 보였던 인물이 독백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결핍과 욕망을 드러내게 된다.
샐리가 하늘을 바라보며 섹슈얼하고 로맨틱한 판타지를 들려주는 독백 장면은 이 인물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끔찍한 살인마로 보였던 샐리가 지루하고 남루한 현실을 벗어나게 해줄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 열두 명의 배심원과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샐리의 독백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존재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여성들이 공유하도록, 그리하여 여성들 내면에 있던 금기시된 욕망을 직면하도록 인도한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공포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20년간 말을 하지 않던 사라 홀리스가 숲에서 출산을 했을 때 마주쳤던 악마를 묘사하며 진실을 토로하는 장면이 상당히 강렬했다.
사라 홀리스가 보았던 악마는 미지의 것이 아니라 여성 안에 있는, 그들 스스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어두운 그림자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사라의 말들은 아이를 낳기 전부터 출산까지의 과정을 현미경으로 세밀히 들여다보는 대사들이다. 사회적으로 발화가 금기시됐던 공포로 오랫동안 입을 닫아버렸던 인물이 아이에게 느꼈던 본능적인 두려움을 고백함으로써 출산과 모성에 대해 그간 조명되지 않았던 측면들을 제시하는 장면이다.
〈웰킨〉이 페미니즘 작품으로서 한발 더 나아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샐리 포피라는 인물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샐리는 여성의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가장 예민하게 인식하는 인물이지만, 남성 의사에게 가장 의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이 많은 것을 박탈당했기에 자신의 비도덕적 행동도 용인된다고 생각한다. 루시 커크우드는 샐리라는 여성의 다층적인 성격을 통해 ‘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고 믿는 언더도그마의 오류를 경계한다. 그러한 과감한 선택들이 〈웰킨〉 곳곳에 담겨 있다.
여성 혹은 소수자는 약자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옳아야 한다거나 도덕적으로 선해야 한다는 관점을 직간접적으로 취하는 작품이 많은데, 이제는 그와 같은 단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드라마의 본질은 인물에 대한 당위적 판단이나 사회-정치적인 발화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자리한 복잡다단한 심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다. 페미니즘 담론의 드라마들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2022 두산인문극장 프로그램의 주제가 ‘공정’이다. 과연 공정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내가 소수자의 처지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공정을 말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하는 거대하고 이상적인 단어다. 연출자로서 생각하는 공정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공정이라는 단어는 어떠한 사태 속에 놓이는가에 따라 그 함의가 굉장히 달라진다. 지금의 의견으로는, 다양한 시선들이 동등한 무게로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어야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웰킨〉이 두산아트센터의 제작 지원으로 ‘공정’이라는 주제 아래 상연되어 작품에 담긴 의미가 보다 풍성하게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공정’의 테마와 작품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는지 질문을 상당히 많이 받았는데,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곧 공정과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진 작품을 고를 때 플롯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이제는 나만의 연출적 발전을 시도할 수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다음 작품으로 염두에 둔 것은?
그동안의 작업에서 가장 염두에 뒀던 부분은 텍스트의 플롯이었다. 연출적 스타일을 내세우기보다 텍스트 자체를 충실하게 구현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고, 작업적으로도 그 부분에 주력을 해왔다. 앞으로의 5년은 나만의 연출적 비전을 실험해보고 구축해가는 일에 목표를 두려 한다. 차기작에 대해 아직 결정된 사항은 없지만, 텍스트가 놓여 있는 시공간, 텍스트를 통과하는 배우의 몸과 말, 어쩌면 텍스트와 무관할 수 있는 지점 등을 탐구하며 전과는 다른 작업 과정을 겪어보려 한다.
글: 염하연 기자
사진: 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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