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오형근 왼쪽 얼굴
오형근 개인전 《왼쪽 얼굴》 전시 전경 2022
오형근 왼쪽 얼굴
최하림 | 에이라운지 어시스턴트 디렉터
익명의 얼굴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운다. 형형색색의 배경이 SNS에서 한때 유행했던, 개개인의 매력을 극대화해준다는 한 증명사진 업체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여기에 모인 얼굴들은 무표정의 ‘벌거벗은 얼굴들’이다. 어깨선까지 확대해 찍은 초상 사진은 조도가 높은 공간에 놓여 얼굴의 윤곽, 피부결, 눈동자의 색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일상적인 옷차림과 단색의 배경 등 연출이 최대한 배제된 누군가의 얼굴을 전시장에서 세심히 바라보는 경험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전시장을 가로질러 작업에서 멀찍이 떨어지고 나서야 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확실히 미적으로 탁월하게 포착되진 않았지만 불쾌함을 과도하게 유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엇갈린 눈동자, 알 수 없는 표정, 특정할 수 없는 모호한 기준으로 모인 군상은 늦은 퇴근길 지하철에서 마주한 사람들처럼 평범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왼쪽 얼굴》은 오형근이 2006년부터 이어온 ‘불안초상(不安肖像)’ 시리즈를 중간 결산하는 의미에서 외부에 처음 선보이는 자리이다. 1층 프로젝트 스페이스에 마련된 《아트 선재 파일: 오형근》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인물 사진을 통해 한국 사회 속 특정 집단을 소환해온 오형근은 허구와 진실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이미지를 조작해 존재를 정의하는 요소들이 실로 얼마나 유약한지 오랫동안 폭로해왔다. 초상 사진은 사회의 주류가 아닌 고립되고 소외된 집단이 가진 불안정한 정체성을 표출하는 극적인 수단이었다. 때문에 오형근의 초상 사진은 대상의 성격, 취미,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암시하는 화장법, 의상, 장신구 그리고 소품 등을 통해 해당 인물에 대한 정보를 유추하는 읽기의 과정을 수반한다. 대표작 〈이태원 이야기〉와 〈아줌마〉는 한국 체류 외국인과 교포들의 주 생활권인 이태원이라는 특수한 장소와 아줌마들 특유의 복장과 머리 모양, 짙은 입술 화장을 극대화해 인물의 정체성을 단편적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왼쪽 얼굴》 속 사람들은 보통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배경은 소거되었고 그들을 대변하는 통일된 외형적 특성 또한 읽을 수 없다. 표정조차 희미한 얼굴들에는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만 남아있다. 《왼쪽 얼굴》은 작가의 작업실이 위치한 이태원을 중심으로 만난 젊은이라는 느슨한 틀로만 꾸려졌다. 오형근의 다른 시리즈가 제3의 성이라 조롱받았던 ‘아줌마’, 성인과 어린이 사이 모호한 정체성을 부여받은 ‘소녀’ 등 경계에서 부유하는 사람을 주제로 했다면 이번 작업의 대상들은 특수한 집단으로의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변두리의 사람들을 데려왔다.
그러고는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의 외형적 틀을 최대한 벗겨내 관객 앞에 세웠다. 모든 것이 비워진 자리는 평등하다. 그 위로 남성과 여성의 기호만이 뒤섞인다. 입구 왼쪽에 위치한 〈지지〉와 가장 안쪽의 〈동건〉은 생물학적 눈, 코, 입만 화면을 가득 채워 성별을 인식할 요소를 가능한 한 많이 제거했다. 하얀 피부결과 고운 턱선의 〈동건〉과 까무잡잡한 피부에 굴곡진 광대를 가진 〈지지〉. 유일한 언어 정보인 그들의 이름만 성별을 구분할 뿐, 관람자가 의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각적 정보는 뒤바뀌어 있다. 수수께끼는 전시장 정면 안쪽에 있는 〈지웅〉으로 이어진다. 창백한 피부, 둥글고 작은 두상, 앙상한 날개뼈만 편집한 화면의 옆에는 상반신이 잘린 여성의 둔부가 걸려있다. 분절된 두 신체는 마치 연속하는 것 같아 〈지웅〉의 남성성을 교란한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짧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유정〉의 퉁명한 얼굴과 그 오른쪽에 놓인 지웅의 전면 나체는 경험적 정보만을 가지고 인물을 구분하고 식별하려는 읽기의 시도와 과정을 바로 비웃는다.
주로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진 귀고리, 컬러 렌즈, 립 틴트 등 자기표현 수단도 여기저기 흩어져 혼란을 일으킨다. 상의를 입지 않고 흉부는 두 팔로 교묘하게 가린 채 두 손으로 하관을 받친 남성의 손톱에는 노랗고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다. 도발적인 눈빛을 내뿜는 남성과 달리 하트 모양의 문신이 새겨진 가슴을 그대로 노출한 〈민영〉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컬러 렌즈를 끼고 쇄골 아래 곡선 모양의 문신을 드러내고 있는 남성의 부드러운 눈매, 희고 고운 피부에 장밋빛 틴트를 바른 남성의 아랫입술에 맺힌 물방울은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계속해서 흐린다. 혼성의 모티프는 마침내 여성과 남성의 신체를 섞은 혼종을 탄생시킨다. 언뜻 남성의 몸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잘려나간 얼굴, 살짝 멍울진 가슴, 하얗고 근육 없는 팔, 그리고 하반신을 가리고 있는 어색한 손은 남성의 기호를 은닉하고 여성성을 덧붙인 새로운 신체를 표방한다.
그렇다면 오형근은 주변인으로서 퀴어만을 주목하는 걸까. 전시장 한편에 붙어있는 안내서에 따르면 《왼쪽 얼굴》은 다른 방향으로써 왼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겨진(left)’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의미의 영역에 편승하지 못해 그것들 사이에 남아있는 익명의 누군가를 모두 포함한다. 때문에 사진 속 얼굴들은 어떤 집단을 대표하기보다는 단어로 정의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수많은 ‘어딘가’를 대변한다. 즉 의도적으로 성별의 기호들을 혼재시킨 오형근의 초상 사진은 구조의 바깥을 그린 풍경화와도 같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불안’은 틈바구니에서 갈팡질팡하며 부대끼는 군중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불안은 이를 바라보는 사람이 먼저 느끼고 종용하며 그들에게 투영한다. 그러니까 주류 또는 주류가 만들어준 이름표에 속하지 않는다는 불안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하고, 나의 울타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 이물질에 공포와 초조함을 느끼고 바깥으로 밀어내는 행위가 선행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떠밀려 나온 존재들에게 비로소 타인에 의해 두려움이 주입된다.
결국 ‘불안초상’은 작업 속 얼굴들에 나타나는 불안감만을 포착한 것이 아니다. 《왼쪽 얼굴》들을 다시 살펴보자. 그들의 표정은 다분히 일상적이거나 결연하고 당당하다. 부끄러움 없이 덤덤히 관객을 바라본다. 어두운 조명 뒤로 숨지도, 두려움에 눈을 감거나 구태여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시장에 들어서면 갑작스레 스친 서늘한 공기에 털이 곤두서듯 불편함을 느낀다.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그들과 멀어진다. 불안은 오히려 습관적으로 인지해온 외형의 기준을 벗어난, 언어를 빗나가는 존재들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관객의 두려움에 속에 있다. 마침내 불안은 전시장에 서서 얼굴들을 인식하고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가 좌절된, 유리에 비친 우리의 얼굴에 서려 있음을 발견한다.
오형근 〈민하(Minha)〉(사진 오른쪽) 20171024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7
오형근 〈유정(Youjeong)〉(사진 왼쪽) 20170113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7 아트선재센터 전시 전경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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