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엘 샤키 Wael Shawky
와엘 샤키: 논쟁적 역사와 신화의 번역과 중재
Artist
와엘 샤키/ 1971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생. 현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미국 필라델피아를 오가며 중동 지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탤벗 라이스 갤러리(2025, 예정), 대구미술관(2024), 베니스비엔날레 이집트관(2024), 벨기에 루벤의 M Leuven (2022), 텍사스 포트워스 현대미술관(2021), 토리노의 카스텔로 디 리볼리 현대미술관(2016)과 메르츠 재단(2016), 뉴욕의 모마 PS1(2015), 런던의 서펜타인 갤러리(2013), 베를린의 KW 현대 미술관(2012) 등의 전시가 있으며, 주요 그룹전으로는 샤르자비엔날레(2025, 2019, 2013), 이스탄불비엔날레(2015, 2005), 카셀 도큐멘타(2012), 광주비엔날레(2012), 베니스비엔날레(2003) 등이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도하 마타프 아랍 현대미술관, 샤르자 예술재단, 국립현대미술관, 구겐하임 아부다비 미술관, 바르셀로나 MACBA, 캐나다 국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팔레르모 명예 시민권(2017), 샤르자비엔날레상(2013), 루이비통 영화 작품상(Kino der Kunst, 뮌헨, 2013), 아브라즈 캐피탈 아트 프라이즈(두바이, 공동 수상, 2012), 쉐어링 재단 예술상(베를린, 2011), 제25회 알렉산드리아비엔날레 대상(2009)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의 The Center for Possible Studies에서 레지던시 작가(2011)로 활동했다.
《와엘 샤키: Drama 1882》 제 60회 베니스비엔날레 이집트 국가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바라캇 컨템포러리, 스페어 셈러 갤러리, 리슨 갤러리, 갤러리아 리아 루마
와엘 샤키: 논쟁적 역사와 신화의 번역과 중재
주하영 미술비평, 전남대 교수
Ⅰ. 들어가며: 이집트와 중동의 상충하는 시공 속으로
와엘 샤키(Wael Shawky)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역사와 사회, 종교를 가로지르며 아카이브와 기억 그리고 전설과 신화를 통해 우리의 욕망과 믿음의 체계를 비판적으로 해체하고자 한다. 드로잉, 회화, 영상, 설치를 포함한 다양한 그의 작업은 찬란했던 고대 이집트의 유물 발굴에서부터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간의 충돌을 다룬 십자군 전쟁(1095~1272), 이집트의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적 혼돈 그리고 최근 중동 지역에서 발생한 지정학적 충돌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고정관념과 인식의 구조를 첨예하게 파헤치고 있다.
샤키는 최근 브라질 출신 총감독인 아드리아노 페드로사 (Adriano Pedrosa)가 기획한 베니스비엔날레(2024)의 이집트 국가관 대표로 〈드라마 1882 (Drama 1882)〉(2024) 를 선보이며, 미술계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그의 작업은 이집트의 근대 민족주의 운동이었던 우라비 혁명(Urabi revolt, 1879~1882)을 소환하며, 영국의 제국주의적 야욕과 식민의 폐해를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건과 문헌/구술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며, 민족주의자 아흐메드 우라비(Ahmed Urabi)가 이끌었던 저항운동과 서구열강의 침략에 맞선 이집트의 상황을 동시대 정치적 혼란과 연계하여, 진실과 허구, 그리고 가상과 실재 사이에서 역사의 다층성에 대해 탐구했다. 또한, 2024년 대구미술관 해외교류전으로 진행된 개인전 《와엘 샤키 Wael Shawky》 (2024 )에서는 신작 〈러브 스토리 Love Story〉(2024)를 선보이며, 한국 전통 설화와 춤, 그리고 판소리를 통해 신화적 상상과 물질문명에 대한 그의 관심사를 확장했다. 샤키는 동시대 사회의 물질주의를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가시적인 현실과 비가시적인 정신적 혹은 비물질적 세계가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살폈다.
샤키는 이집트 근대화의 격변기 속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하여 유년 시절을 보내고, 이집트와 미국에서 교육받으며, 서구의 자본주의와 권력의 폐해를 몸소 경험한 예술가다. 또한 그는 레반트 지역을 둘러싼 이주와 정착, 침략과 방어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영토와 종교분쟁, 그리고 이념을 둘러싼 갈등과 반목을 직접 목도하게 되었다. 그런 샤키가 이집트와 중동 지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체하고, 전통과 신화에 도전하게 된 것은 역사적 사건의 기록과 문헌, 아카이브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삭제되고, 편집되고, 재생산되는 지식과 권력의 암묵적인 관계가 있음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역사, 정치, 종교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과 경험의 차이는 샤키의 작업에 중요한 주제가 되었고, 이후 그는 만들어진 신화와 전설에 대한 대대적인 해체 작업을 벌이며 그만의 해석을 하게 되었다.
아카이브 이론가인 테리 쿡(Terry Cook)은 기록물과 아카이브를 ‘권력’의 관계로 논하며, 아카이브는 객관적이지도 진실하지도 결백하지도 않다고 역설했다. 그는 기록물이 오히려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 동시대 사회의 권력과 지식을 표상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지적했다. 쿡이 말하는 아카이브란 과거의 역사와 기록의 객관적인 지표나 집적물이 아닌 권력에 의해 진술되고, 기록된 것이다. 즉, 샤키는 이러한 역사적 기록과 아카이브, 그리고 기억의 불완전한 틈에서 글로벌 정치와 만들어진 신화, 그리고 파편화된 경험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삭제된 기록과 기억을 되찾고 회복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다. 이는 역사와 사건, 신화와 상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번역의 가능성과 복잡한 층위에 대한 탐구와도 같다. 이 글은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2025년 2월 25일 진행된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다.
《와엘 샤키: Drama 1882》 제 60회 베니스비엔날레 이집트 국가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바라캇 컨템포러리, 스페어 셈러 갤러리, 리슨 갤러리, 갤러리아 리아 루마
〈러브 스토리〉(스틸) 4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10분 9초, 8분 4초, 8분 41초, 7분 44초
제작 지원: 대구미술관 2024 제공: 작가, 바라캇 컨템포러리
Ⅱ. 인터뷰: 욕망과 부조리의 변형과 해체
이번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는 초기 비디오 작업인 〈동굴(암스테르담) (The Cave (Amsterdam))〉 (2005), 〈알 아크사 공원 (Al Aqsa Park)〉(2006), 그리고 〈텔레마치 시리즈 (Telematch series)〉 ( 2007~2009)를 다시 주목한다. 이 세 작품을 특별히 선택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우선 세 작품은 다른 상태로의 전이나 전환(transition)과 연계되어 있다. 이는 세속적인 자본주의와 물질세계, 종교적 열망,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분쟁, 그리고 이집트 근대화의 과정과 격동기에 드러난 나의 관심사를 연결한다. 우선〈동굴〉은 일종의 자화상이자 개인과 집단, 사회적 체계의 모순을 다루고 있으며, 〈알 아크사 공원〉은 세속적인 삶과 종교적 의미 간의 끝나지 않는 투쟁을 다룬다. 〈텔레마치〉 시리즈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정치와 사회 시스템의 충돌과 부조리를 다룬다. 이런 전이 혹은 변화의 과정에서 어떻게 내가 사회를 번역할 수 있는지 탐구한다.
〈알 아크사 공원 (Al Aqsa Park)〉(2006)은 초기 흑백 애니메이션 작품이며, 예루살렘에 위치한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을 배경으로 한다. 최근 불거진 이스라엘-하마스 간의 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지역 자체가 재조명되고 있는 상황에서, 〈알 아크사 공원〉 역시 새롭게 다가온다. 당신의 작업에서 ‘바위의 돔’은 놀이기구(tilt-a whirl)를 형상화하여, 높낮이를 달리하며 위태롭게 회전하고 있다. 이 작업은 마치 중동 지역을 둘러싼 끝나지 않는 갈등과 반목 같다. 이에 대한 부연 설명 부탁한다.
알 아크사는 예루살렘 구(舊)시가지 중 사원이 있는 성지 밀집 구역을 말한다. 이곳은 이슬람교와 유대교 및 기독교, 세 종교의 성지로, 예언자 무함마드의 승천 장소이자 솔로몬의 성전이 위치하던 곳이며, 유대인의 성전산(Temple Mount)이다.
알 아크사 단지에서 중요한 ‘바위의 돔’은 이 작품의 중심이 된다. 바위의 돔 사원에는 실제로 큰 바위가 존재하는데, 이는 쿠란과 성경에 모두 등장하는 신성한 장소이다. 이 종교적 공간이 내 작업에서 마치 세속화된 놀이공원의 기구처럼 기울어져 돌아간다. 어느 방향으로 기울지 모르는 상황에서 회전하는 ‘바위의 돔’ 사원의 모습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현재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 갈등에 대한 해석으로도 볼 수 있다.
즉, 〈알 아크사 공원〉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형적인 시선을 넘어 또 다른 이슬람권 중동 지역 국가들이 직면한 문제를 심층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국가, 영토, 정치, 종교의 상충하는 이미지들과 함께 이 작품을 경험하는 사람 모두에게 다양한 해석과 토론의 기회를 주고 싶다.
〈동굴 (암스테르담) The Cave (Amsterdam)〉(2005)은 자본주의, 상품화,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세상과 종교적 신념의 대립, 즉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초월적인 것)의 대립으로 보인다. 슈퍼마켓에서 경전을 암송하며 천천히 걷는 모습은 마치 랩을 하며 움직이는 모습과도 같다. 영상에 자막이 없다면, 〈동굴〉은 다른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이 부분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자세히 듣고 싶다.
또한 이 작업은 〈디지털 교회 (Digital Church)〉(2007)와 연결해 볼 수 있는데, 비슷한 방식으로 당신은 가톨릭교회에 들어가 쿠란의 아랍어 성가를 따라 기도한다. 〈동굴〉과 〈디지털 교회〉의 차이를 알고 싶다. 즉, 권력과 지식, 자본주의와 종교 사이에서 당신이 과연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 궁금하다.
〈동굴〉은 이스탄불, 암스테르담, 함부르크에서 촬영된 세 가지 버전이 있다.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촬영하고 제작되었다. 이스탄불 작업이 가장 먼저 시작되었는데, 당시 그곳에서 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었다. 우선 〈동굴〉은 나의 자화상과도 같다. 슈퍼마켓을 배경으로 내가 직접 출연해 쿠란의 18번째 장(章)인 “동굴(Al Kahf)” 편을 암송한다. 내가 암송하는 ‘동굴’은 어린 시절에 배운 것이며, 이교도의 박해로 인해 동굴로 몸을 숨긴 일곱 명의 현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인들은 굳건한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200~300년 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 다시 깨어나 다음 세상에 그들의 믿음을 전파한다. 시공을 가로지르는 믿음은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간에 사람들의 이주와 이동, 정착과도 연계된다. 슈퍼마켓에서 쿠란을 암송하는 상황은 성(聖)과 속(俗)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으로 보이지만, 동시대 자본주의 시스템과 우리의 신념에 대한 은유이자 비판적 성찰이기도 하다.
또한, 〈디지털 교회〉는 가톨릭 성당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그곳에서 나는 쿠란의 아랍어로 된 성가를 따라 기도하며, 성녀 마리아의 삶에 대한 한 구절을 인용한다. 내가 마리아의 삶을 쿠란에서 택한 이유는 이슬람과 가톨릭 두 종교에서 비슷하게 존경받는 성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두 맞수 종교 사이의 평화공존이 이해의 부족으로 무너지게 된 점, 그리고 배타주의가 우리의 삶에 미친 영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알 아크사 공원〉(스틸) 비디오 애니메이션, B&W, 10분 2006
제공: 바라캇 컨템포러리
〈동굴 (암스테르담)〉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자막, 12분 45초
2005 《와엘 샤키: 텔레마치와 다른 이야기들》 바라캇 컨템포러리 전시 전경 2025
제공: 바라캇 컨템포러리
〈텔레마치 시리즈 (Telematch Series)〉(2007~2009)에 대한 질문이다. ‘텔레마치’는 1970년대 독일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목에서 차용하였으며, 두 가지의 상충하는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개념을 통해 젠더, 사회적 계급,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기반 등을 자세히 연구한 작업이다. 작품은 다섯 가지의 에피소드인〈텔레마치 마켓 (Telematch Market)〉(2007),〈텔레마치 사다트 (Telematch Sadat)〉(2007),〈텔레마치 교외 (Telematch Suburb)〉(2008),〈텔레마치 피난처 (Telematch Shelter)〉(2008),〈텔레마치 십자군 (Telematch Crusades)〉(2009) 로 이루어지는데, 다섯 시리즈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알고 싶다. 또한, 이 시리즈는 디지털 애니메이션, 필름,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와 기법과 방식이 사용되었는데, 어떤 의도였는지 알고 싶다.
이 시리즈는 이집트의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혼란스러운상황과 이집트를 통치했던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재임:1956~1970), 안와르 사다트(Muhammad Anwar El Sadat, 재임: 1970~1981), 호스니 무바라크 ( Hosni Mubarak, 재임: 1981~2011)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상황과 많은 사람들의 이주와 정착 그리고 침략과 방어의 복합적 관계로 얽혀있다.
우선, 〈텔레마치 사다트〉(2007)로 시작해 보자. 이 작업은 이집트의 근대화 과정에서 암살당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개혁파의 대립을 우회적으로 다룬다.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카이로에서 1981년 제6회 10월 군사 승리 행군(October military victory parade) 도중 벌어진 대통령 암살 사건에서 비롯된다. 나는 당시 텔레비전을 통해 이 상황을 목격했고, 암살 장면은 여전히 충격으로 남아있다. 이 작업에서 주목할 부분은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로 피라미드 모양의 ‘무명용사 기념비’를 세운 점이다. 이 기념비는 사다트 대통령이 1973년 10월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집트인과 아랍인을 기리기 위해 지었고, 1981년 암살된 후 그의 무덤이 되었다. 〈텔레마치 사다트〉에 등장하는 기념비는 실재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이를 통해 역사적 상황과 현재를 연결하고 싶었다. 또한, 나는 이 비극적 상황을 어린이들을 통해 풍자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다. 나는 아라비아반도의 내륙 사막에 사는 유목민인 베두인(Bedouin)족 어린이들을 섭외하여, 약 한 달 동안 트레이닝시키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하지만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연기의 기술을 요구하지 않았다. 연기 경험이 없는 어린이들, 그리고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린이들의 행위와 재연을 통해 오히려 역사가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지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베두인 어린이의 등장은 〈텔레마치 피난처〉(2008)에도 계속된다. 이 작품에는 이집트의 서부 사막에 거대한 진흙 구조물을 만들어 어린이의 무리가 계속해서 같은 장소로 반복해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쾌하지만 상징적인 이 작업은 아랍인의 반복된 이주와 정착의 어려움, 그리고 유목문화와 농경사회의 역사를 재조명하며,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삶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한편, 〈텔레마치 십자군〉(2009)에는 무슬림 케냐인 소년들이 나귀를 타고 해변을 따라 깃발을 들고 행군한다. 이들은 가상의 십자군 요새에 둘러싸일 때까지 행군을 멈추지 않는다. 이 작품은 11세기 성지 탈환을 요구하는 서유럽 기독교인의 군사 캠페인을 다시 언급하고 있으며, 아랍 무역 상인들이 14세기에 항구를 세운 곳인 케냐의 섬 중 라무(Lamu)의 해변에서 촬영되었다. 라무는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무역로가 개설된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로 인해 포르투갈, 터키, 잔지바르, 오만, 독일, 영국의 끊임없는 지배를 받아왔다. 한동안 노예무역항으로 번영했지만, 노예무역이 사라진 뒤 라무는 급격히 쇠퇴했고, 1963년 케냐로 반환되었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지닌 라무에서 소년들과 함께 십자군 전쟁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 이유는 라무 자체가 논쟁적인 역사를 반영하듯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가 혼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혼종적 상황은 하나의 역사, 서사, 진실이 아닌 우리의 역사와 삶에 다층적인 내러티브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전반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텔레마치 시리즈〉는 시노그라피(scenography)와도 같다. 연극이나 필름에서 오는 단순한 무대장치를 넘어, 다양한 사운드와 조명, 공간을 구성하며,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든다. 작품에 등장하는 어린이, 마리오네트, 인형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텔레마치 쉘터〉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4분 26초 2008 《와엘 샤키: 텔레마치와 다른 이야기들》
바라캇 컨템포러리 전시 전경 2025 제공: 바라캇 컨템포러리
그럼 〈알 아라바 알 마드푸나 (Al Araba Al Madfuna)〉(2012~2016)로 넘어가 보자. 이 작업은 삼부작으로 〈알 아라바 알 마드푸나 I〉(2012), 〈알 아라바 알 마드푸나 II〉(2013), 〈알 아라바 알 마드푸나 III〉(2015~2016)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2012년에 제작된 첫 번째 에피소드를 살펴보면, 사막과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고 어린이 연기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어린 연기자들은 성인들의 행동과 말투를 흉내 내며, 터번을 쓰고, 콧수염을 붙이고, 이집트 고대 유물 발굴에 관해 이야기한다.
〈알 아라바 알 마드푸나〉는 고대 유적 도시를 방문했던 당신의 경험에서 시작된다고 알고 있다. 고대 도시의 유적지이자 북부 이집트의 옛 수도에서 영감을 얻고, 촬영된 이 작업은 지하에 묻힌 보물을 찾으려 땅을 파고, 연금술과 영적 행위를 통해 선대의 비밀을 찾아가는 마을 주민들의 기이한 활동에 주목한다. 이런 보물찾기가 어떻게 이집트 소설가인 모하마드 무스타갑(Mohamed Mustagab)의 글과 연계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는지, 그 제작 과정을 알고 싶다.
작품의 등장인물인 어린이들은 연기 수업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에 투입된다. 미숙한 연기를 통해 오히려 작품의 주제가 더 잘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의 대화는 어른의 목소리로 더빙되었고, 이들은 현인(賢人)과도 같이 오랜 고대의 전설을 이야기하듯 사건을 전개해 나간다.
‘유물 발굴’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특히 이집트 안팎에서 모두 주목을 받았는데, 흥미롭게도 현재 이 도시의 사람들은 몇십 년째 땅굴을 파며, 보물찾기에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곳에서 주민들과 몇 주 동안 시간을 보내며,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연금술과 영적인 힘을 사용하는 커뮤니티를 목격했다. 보물찾기는 마치 샤먼이 주관하는 제의적 행사와도 같이 맹목적인 믿음과 허황한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즉, 이 작품은 물질계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초월적 혹은 사후세계와 연결된다. 이렇게 영적인 삶과 세속적인 일상의 독특한 결합은 비단 이집트의 상황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내 대부분의 작업이 소설이나 이론가의 글에서 영감을 받는다. 이번 작품이 이집트 소설가인 모하마드 무스타갑의 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무언가에 대한 맹신적인 믿음이 어떻게 사회와 인간의 삶을 지배할 수 있는지 풍자적으로 접근한 방식에서다. 또한, 만들어진 신화와 전설에 대한 도전은 내 작품이 다양하게 번역되고 해석될 수 있게 한다. 이는 하나의 현상이 어떻게 다양한 문화와 예술과 만나 변형될 수 있는지 살핀 부분이기도 하다.
Ⅲ. 번역과 중재 너머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번역을 언어가 아닌 문화를 옮기는 작업이자 협상 과정이라 보며, 번역자의 선택에 의해 단어, 개념, 의미가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지 살폈다. 에코는 번역이란 것이 모든 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닌 일부를 다듬는 행위임을 강조하며, 이 과정에서 더해지고 삭제되는 현상이 일어나며, 이는 두 언어의 절충이 아닌 협상의 과정임을 피력했다.
샤키의 작업은 문헌과 구술사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조사 작업을 바탕으로 하며, 이를 통해 물질세계의 욕망이 어떻게 현실 속에 반영되고, 이를 초월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세계는 무엇인지, 또한 정신과 육체, 물질과 초월적 세계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때로는 모순되고 부조리한 면이 드러나는 그의 작업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맥락에서 어떻게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 살핀다. 그는 자신을 해석자이자 번역가라 여기며, 기록된 문헌과 구술사, 그리고 아카이브를 참조하되, 그 안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잠재적 욕망과 부조리를 탐구하고, 특정한 맥락으로 이를 전환하여, 그만의 내러티브로 이를 표상하고자 한다. 즉 샤키가 다루는 사건과 현상은 그가 역사적 기록과 아카이브 속에서 무엇을 고를지 타협하는 과정이자 피상적 혹은 내재적인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이었다.
샤키는 역사를 재연하고, 과거를 전유하고, 현재를 재설정하면서 중첩된 내러티브와 이미지를 만든다. 샤키의 작업은 특히 신화와 전설, 역사적 사건을 가로지르며 기존의 기록과 아카이브, 경험과 기억에 저항하며, 전통적인 필름 방식이나 연극적 양식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드라마와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미술과 연극, 영화적 양식을 전유하여 다중적 차원과 시제 속에서 긴장감을 형성하며 새로운 영화적 사유를 제안한다. 특히, 역사와 신화, 전설 그리고 개인과 집단의 경험이 기억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진실과 거짓, 실재와 허구 사이의 모호한 관계에 주목하며, 그 경계에서 발생하는 분명히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함을 탐구한다. 따라서 와엘 샤키의 작업에는 이집트와 중동 지역에서 발생한 갈등의 상황을 넘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물질계와 정신계를 넘나들고 가로지르는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존재한다.
한편, 샤키는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과 환원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고 있다. 그는 2010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매스 알렉산드리아(MASS Alexandria, 2010~현재)라는 대안학교를 설립하여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있으며, 매년 30명의 젊은 예술인을 선발하여 다양한 워크숍 및 교육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을 인정받아 올해 9월 카타르의 수도인 도하에서 매스 알렉산드리아 분교를 설립할 계획이다. 이는 중동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리라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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