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
ART BOOKS
정소영 기자
공론장으로서 디자인 피력하기
예술 종사자에게는 종종 ‘미술 권태기’가 찾아온다. 너무 많은 예술 정보를 접하거나 혹은 그 해석의 어려움이 누적될 때 미술과 관계된 거라면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은 상태를 빗대어 ‘미술 권태기’라 말한다. 이런 상태에도 작품을 보고 분석해야 하는 기자에게 다시금 예술의 즐거움을 상기시켜주는 책이 있다. 우리가 왜 예술을 사랑하는지를 상기시켜줄 예술을 업으로 생활하는 이들의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6년 :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오브제 작품의 비물질화
루시 R. 리파드 지음 · 윤형민 옮김 · 현실문화 512쪽 · 2023 28000원
현대미술이 어려워진 시기를 추론해보면 개념미술의 탄생부터가 아닐까. 미술사의 맥락과 분리해 개념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설명하는 개념미술은 시각 정보만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에 비물질이 등장하면서 그마저 주어진 시각 정보도 생략됐다.
1968년 『아트 인터내셔널』에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 용어를 처음 사용한 전시기획자이자 미술평론가인 루시 R. 리파드의 책이 초판된 지 50년 만에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책 표지에 적힌 200자 넘는 문구 그대로의 긴 제목을 갖는 책은 1966년부터 1972년까지 6년간 개념미술과 관련해 행해진 주요 사건을 모은 일종의 ‘참고문헌’이다. 각 해 열린 전시나 행사, 작품과 글, 인터뷰를 시대 순으로 수록하고 리파드가 직접 설명과 코멘트를 달아 정리했다. 책의 본문에 리파드는 글을 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대는 혼란스러웠고, 우리의 삶도 그러했다. 우리는 각자의 역사를 만들어냈고, 그것들이 늘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지저분한 비료가 모든 버전의 과거의 근원이 된다.”
시대는 언제나 혼란스러웠고 그 시대 속에서 예술도 그랬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예술과 함께 시대를 살아간 증거가 좋은 비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한 리파드의 책은 가장 사적이면서도 시대를 살아간 이의 기록으로서 객관적이다. 저자의 말처럼 책 전체를 읽는 이를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니기에 친절한 설명도 주석도 없이 메모장의 노트처럼 적힌 문구들은 갑작스러운 엉뚱함으로 독자를 당황스럽게 한다. 하지만 그가 언급하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당시 전시 현장의 기록과 함께 솔 르윗, 로런스 위너, 조지프 코수스와 같은 개념미술 선구자라 불리는 이들의 예술에 관한 생각을 기록한 책은 그 자체로도 의미를 지닌다.
리파드가 전하는 형태가 없어도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 예술은 무엇일까?
껍질 이야기, 또는 미술의 불완전함에 대하여
윤원화 지음 · 미디어버스 216쪽 · 2022 18000원
책의 머리말에 저자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눈에 보이는 것’ 그것이 곧 예술이라면, 폭을 조금 더 좁혀서 시각예술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미술비평가인 저자는 미술계에서 완전히 소화되지도, 그렇다고 벼려지지도 않은 채 예술계에 존재하는 형태 없는 현상과 특징을 껍질에 비유한다. 조개껍데기를 자연의 예술 작품으로 인식하고 비평을 시도한 폴 발레리의 산문에서 기원한 ‘껍질’이라는 단어는 파편적으로 퍼져있는 책의 글을 하나로 엮는 구심점이 된다.
‘껍질’은 그 자체로 틀이기 때문에 형상은 있지만 본질은 없다. 껍질을 통해 그 안의 형태를 추론할 수는 있지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껍질 그 자체로는 원형이 없어 홀로 완성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속이 빈 껍데기는 안과 밖의 구분이 뒤바뀌기도 한다. ‘껍질’이라는 단어에 ‘예술’ 이라는 단어를 대치하기만 하면 동시대 현대미술의 특징이 되는 ‘껍질’을 저자는 현대미술의 특징으로 설명한다.
형태는 있지만 본질은 삭제되고 형태만 존재하는 현대미술은 어렵다. 미술비평가인 저자는 미술에서 정의되지 못한 현상을 연구하고 언어화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디지털화된 세계에서 더 짙게 불거지는 시각 대상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글로 풀어낸다.
집중하지 않으면 정말 글을 읽는 행위만 남는 ‘껍질’이 되지만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현대미술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미술사는 이야기-신생공간이라는 사건과
유지원 지음 · 마티 184쪽 · 2024 17000원
예술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가. 미술관과 갤러리가 아닌 자발적 공동체를 통해 등장한 신생공간을 중심으로 지은이의 직접적인 경험과 아쉬움을 소개하는 책은 주류 또는 비주류의 이분법이 아닌 예술과 함께 시대를 살아간 이의 사적인 기록이다. 더불어 미술 사는 이야기인 이 책은 미술 곧, 작품을 ‘사는(Buy)’ 이유와 예술과 함께 ‘사는(live)’ 이유를 동시에 설명한다.
저자가 활발하게 활동한 2010년대를 기준으로 펼쳐지는 기억과 활동에 대한 추억을 통해 등장하는, 이제는 사라졌거나 혹은 여전히 활동하는 신생공간은 그 시대를 추억하거나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관심 갖지 않으면 알 수 없었던 미술계의 작은 움직임이었던 신생공간의 활동은 돌이켜 보면 지금 미술계의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이야기는 공간의 활동을 넘어 지금의 미술계를 함께하는 사람에 관한 기록이자 이야기였다.
팬데믹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여전히 미술인으로 살아가는 저자는 지금은 사립 미술관 큐레이터이자 신생공간 운영자로 더 다양한 미술인들과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책의 끝에 ‘미술사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미술 사는 일’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을 자각하며 새로운 연결의 지도를 만들어내는 일, 그리고 그 연결로부터 의외의 만남, 의미심장한 사건, 예상치 못한 폭발적인 에너지가 발생할 때 그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감각을 열어두는 일일 테다”
예술이 내 것이 되는 순간
박보나 지음 · 에트르 143쪽 · 2023 17800원
창작을 위해서는 재료가 필요하다. 기자에게 창작은 글을 쓰는 행위이기에 글의 이해를 위해 미술 이야기나 작품 정보 이외에도 책이나 영화, 주변 일상에서 소재를 찾고는 한다.『태도가 작품이 될 때』,『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에 이은 박보나 작가의 세 번째 에세이인 책은 작가의 삶에서 발견한 생각과 감각, 작가적 관점과 비슷한 태도를 보이거나 영감을 준 작품을 함께 설명한다.
책은 큰 갈래를 갖거나 목표를 정하지 않고 작가의 하루와 같이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간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작가는 미술 창작에 도전한 20대 중반 이후 미술이 아닌 것들에 대한 갈망의 상실을 고백한다. 미술 권태기와 비슷하지만 미술이 아닌 것에 대한 열정이나 갈증으로부터 멀어짐의 우연에 별도의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끝내 찾게 된 잊었던 것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은 미술, 음악, 문학과 같은 범주적 의미에서 ‘예술’의 의미를 상기하며 마무리된다.
삶에서 미술 권태기를 만날 때, 되묻게 되는 질문은 결국 “예술은 삶에 필요한 것인가”이다. 각자의 답은 다르겠지만 저자의 삶의 곳곳에 스며든 예술이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폭넓게 감동시키는지를 발견할 때 비로소 다시금 왜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지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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