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제 솔직해집시다

ART BOOK

노재민 기자

케네스 골드스미스 지음 · 길예경·정주영 옮김 · 『문예비창작: 디지털 환경에서 언어 다루기』 · 워크룸 프레스 · 2023

걸그룹 에스파의 ‘Next Level’과 블랙핑크의 ‘Shut Down’을 좋아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단순히 잘나가는 아이돌의 타이틀 곡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작곡가가 오로지 창조성에 의지해서 만든 노래가 아니라는 사실에도 있다. 전자는 외국가수 애스턴 와일드(Aston wyld)가 부른 동명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것이고, 후자는 파가니니 (Paganini)의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 를 샘플링한곡이다. 미술계로 눈을 돌려보자. 1960년대 말 이후 서구에서 차용을 전략으로 내세우며 전개했던 포스트모더니즘도 좋아한다. 누구나 작품을 재생산할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한 개념미술가 솔 르윗도, 일상의 사물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내거나 일상을 녹음한 그대로 책으로 묶은 앤디 워홀도 획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인용문들을 재구성한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Das Passagen- Werk)」도 특기할 만하다.

케네스 골드스미스(Kenneth Goldsmith)는 음악계와 미술계는 오래전부터 비독창적 천재의 비창조적 작품이 받아들여졌던 것에 반해 보수적인 문학계는 그렇지 않다고 지적하며, 미술계에서 비독창적 천재들의 탁월한 시도가 꾸준히 있어왔음을 예증한다. 소리와 소음, 시와 미술, 글과 말, 재연과 낭독을 두루 관통하며 전위적으로 활동한 이들의 비창조적 작업을 소개하고 아날로그적 방식과 디지털적 방식을 종횡무진 하며 비독창적 천재들이 어떻게 비창조적 글쓰기를 실천해왔는지 다양한 각도로 살핀다. 나아가 글을 처음부터 새롭게 쓰는 고전적인 방식을 넘어 우리 주변에 여러 형태로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들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으로서의 창작 행위를 역설한다.

원래 이 책은 마커스 분(Marcus Boon)과 함께 쓰는 샘플링 프로젝트에서 출발했으나 둘로 나뉘어 「문예비창작」과 마커스 분의「복제 예찬 (In Praise of Copying)」으로 출판되었다. 「문예비창작」의 원서는 2011년에 출판되었는데, 기자는 영문 버전이 공개된 지 10년도 넘었다는 사실을 알고 13년이나 늦게 한글판으로 책의 내용을 접한 사실이 아쉬웠다. 하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를 거론해보려 한다. 문학은 태생부터 다른 사람들의 말을 훔치고 베끼고 도용했다는 점을 되짚어보자. 그것이 언어의 본성이고, 말은 절대로 그 자신만의 것일 수 없으며, 나만의 언어라는 것은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아이가 양육자의 말을 모방하면서 언어를 배우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다시 말해, 언어는 공통의 것이지 누군가의 사유재산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케네스 골드스미스의「문예비창작」은 1,000년은 늦게 출간된 책이고, 기자는 거기에 13년을 더해 그만큼 더 늦은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원제인 ‘Uncreative Writing(비창조적 글쓰기)’과 동일한 제목의 수업을 진행해 왔음을 밝혔다. 그는 학생들에게 독창성이나 창조성 대신 “표절, 신원 훔치기, 다른 목적으로 다시 쓰기, 짜깁기, 샘플링, 강탈,도용”을 강권해 왔는데, 놀랍지 않게도 학생들은 잘 해낸다”며, “그들이 이미 비밀리에 전문가가 된 일이 갑자기 열린 공간으로 나와 안전한 환경에서 탐구되고, 무모함 대신 책임이라는 점 아래 재구성된다” 고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비밀리에 비창조적 글쓰기 분야에서 전문가이지만 쉬쉬하고 있지 않은가. 기자는 이 기회를 빌려 이 글에서도 전문분야를 십분 활용했음을 밝힌다. 보다 더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전유하고, 모방하고, 약탈하고, 복사하고, 붙여 넣고, 배치하고, 인용하고, 다시 쓰고, 공유하자. 소설가 정지돈이 조금 과장도 없이 말하건대 모든 새로운 글은 새롭지 않으며 모든 새롭지 않은 글은 유일하다”고 말하며 우리의 비창조적 글쓰기를 격려하지 않았는가.

노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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