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미술 포럼
‘기록하는 잡지, 비평하는 잡지’
노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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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편집자들의 목소리
기록과 비평, 그리고 매체의 시간
노재민 기자
아트코리아랩 아고라 6층
10.17(금) 14:00~17:00
창간 50주년을 앞둔 월간미술이 10월 17일 아트코리아랩에서 ‘기록과 비평, 그리고 매체의 시간’을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한국미술 전문지로서 반세기 동안 현장을 기록하고 비평을 생성해 온 『월간미술』의 역할을 돌아보고, 변화하는 매체 환경 속에서 미술잡지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였다.
첫 번째 세션 ‘미술잡지와 미술비평’에서는 심지언 월간미술 편집장이 ‘50년의 대화, 월간미술 현장 기록사’를 발표했다. 그는 1976년 『계간미술』로 시작해 1989년 월간지로 전환된 이후,『월간미술』이 한국 근대미술의 발굴과 정리, 북한미술 및 월북 작가 연구 등 미술사 형성에 기여한 과정을 살폈다. 또한 한국미술의 일제 잔재 청산, 예술성과 가격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수용 논쟁 등 주요 지면 이슈를 통해 잡지가 시대의 논쟁을 공론화해 온 기록을 공유했다. 뒤이어 『월간미술』이 장르별로 집중 탐구한 궤적을 훑으며, 미술계 현장의 변화와 실태를 진단했다. 마지막으로 『월간미술』 속 한국미술의 세계화 연대기를 되짚었다.
이어 김정현 비평가는 미술비평이 잡지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분석했다. 그는 『월간미술』의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비평의 ‘위기’ 담론이 반복되어 온 현실을 지적했다. 또 비평의 내적 논리보다 이를 수용하는 환경의 위기에 주목하며, 잡지와 비평이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발표 후 안진국 비평가의 사회로 진행된 토론 ‘오늘날 미술비평은 어디서 발화되는가’에서는 월갈미술대상 비평부분 수상자인 유원준, 이진실, 문혜진 비평가가 참여해 비평의 역할을 논의했다. 패널들은 전시 서문과 리뷰 중심의 글쓰기 관행이 비평의 자율성을 약화시켰다고 지적하며, 평가와 이론화를 포함한 비평의 본질적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작가 지원 중심의 제도적 구조가 비평을 주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한 비평 환경의 필요성에 대하여 공감대를 형성했다.
두 번째 세션 ‘확장된 잡지의 역할과 변화’에서는 박지수『보스토크』 편집장과 함연선 『마테리알』 편집인이 참여해 독립잡지의 운영 구조와 새로운 발행 전략을 소개하며, 각자의 매체 실험을 공유했다. 정소영 월간미술 기자의 사회로 이어진 토론 ‘발간 형태의 변화와 의미’에서는 비평의 매체적 특성, 인쇄 매체의 물질성, 지속 가능성과 독립성 등에 대해 논의했다.
이번 포럼은 한국미술 현장과 함께 성장해 온 『월간미술』이 지난 50년의 기록을 통해 잡지의 사회적 의미를 재확인한 자리였다. 또한 변화하는 미술 생태 속에서 매체의 역할을 다시 묻고, 비평과 기록이 공존할 수 있는 방향을 탐구했다.
오늘날 미술비평은 어디서 발화되는가?
온라인 플랫폼의 확산과 정보의 속도가 비평의 형식을 바꾸어 놓았다. SNS의 짧은 반응과 홍보성 리뷰가 범람하는 시대, ‘비평’은 여전히 유효한가. 월간미술은 이런 물음을 가지고 10월 17일 ‘기록하는 잡지, 비평하는 잡지: 미술잡지와 미술비평의 역사와 변천’ 포럼을 진행했다. 비평가 안진국을 모더레이터로 월간미술대상 비평부문 수상자 유원준, 이진실, 문혜진이 참여한 이번 토론은 ‘오늘날 미술비평은 어디서 발화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중심으로, 비평의 정의와 역할, 그리고 잡지가 비평의 장으로서 지닌 의미를 짚어보았다.
일시: 10월17일 14시~17시
장소: 아트코리아랩 아고라 6층
모더레이터: 안진국 비평가
토론자: 월간미술대상 비평부문 수상자 3인 | 유원준, 이진실, 문혜진
진행·정리: 정소영 기자

Q ‘ 미술비평’ 혹은 ‘미술평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안진국 저는 미술창작스튜디오의 프로그램 일환으로 작가님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자료 조사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가론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비평문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접하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작가들이 전시할 때 전시 서문을 요청하곤 하는데, 그것을 비평문이라고 이야기하거나 평론이라고 하는 경우도 자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글들이 비평문일까요? 저는 이런 글들이 비평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비평이 무엇일까라는 고민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비평가들이 생각하는 비평이 궁금합니다. ‘미술 비평’을 어떻게 정의하고 계시는지요?
유원준 비평의 지평은 굉장히 넓은 것 같아요. 비평이라는 활동 안에서 여러 가지 활동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비평의 정체성이 약화된다 혹은 비평의 활동 내지는 행위의 정의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건데요. 개인적으로 비평에 관한 지금까지의 개념과 정의가 현재 비평 활동의 행위들을 모두 담고 있지는 못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비평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계속하다 보면 다시 원점으로 회귀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간에 비평의 활동을 좀 더 다각화하고 지평을 넓히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미술) 비평의 위기를 이야기하다 보면 계속 제 자리에서 쳇바퀴 돌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에너지를 비평이라는 활동을 다각화하고 더 세부적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지평을 만드는 데에 기울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이진실 몇 년 전까지는 미술비평가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보다는 그냥 ‘미술에 대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많이 소개했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미술에 대한 글에는 굉장히 여러 가지 성격이 있고 특히 청탁에 따라 태도 면에서 굉장히 달라지는 부분이 있거든요. 전시 서문을 요청받을 때도 있고 작가론을 요청받을 때도 있고, 월간지로부터는 전시에 대한 리뷰를 요청 받을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미술비평에 해당한다라고 할 수 있죠. 모든 성격의 글을 한 사람이 다 작성할 수 있다는 식보다는 그 가치가 분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작가들이 요즘엔 비평가보다 큐레이터한테 글을 받길 원하는 것 같은데요. 비평가의 글이 작가 입장에서 좋은 글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큐레이터에게 글을 받으면 나중에 같이 전시를 할 수도 있으니 그런 것 같아요. 많은 큐레이터들이 작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어서 큐레이팅과 큐레토리얼, 비평 사이를 교차하는 분들이 요즘 가장 많은 비평을 생산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 미술 비평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시대적으로 그 영역이나 역할이 변화하는 비고정적인 영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혜진레지던시 매칭글, 서문, 리뷰, 논단혹은 뭐 작가론 그 모든 것이 저는 비평의 하위 범주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비평에는 여러 단계가 있는데, 작품의 결을 비평가가 대신 읽어주기 위해 작품을 최대한 자세히 보고 그것을 기술하는 단계가 있을 것이고, 그 다음은 해석의 과정이 있는데요. 해석은 당대 미술사나 어떤 이론들과 맞물려서 작품의 의미를 만들어 주는 과정이고, 그 다음은 판단이나 평가의 측면이 있고, 마지막에 이론화가 되는 과정이겠죠. 마지막 이론화의 단계는 논단 정도가 됐을 때 이론화가 되는데, 비평의 종류마다 기술과 해석, 평가, 이론화의 비중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금의 한국미술 비평 같은 경우는 판단과 이론화 과정이 매우 약화되어 있고 작품의 기술과 해석이 많아진 형태니까요.
이전에 한 미술관에서 진행한 비평연구모임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오신 분들이 비평가 지망생 혹은 막 활동을 시작한 신진 비평가 들이었거든요. 그럼에도 다수가 리뷰와 서문의 차이를 잘 몰랐습니다. 그런 현상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한국의 비평계가 어쩌면 작가론에만 편중되어 있어, 냉정한 평가와 판단 그리고 이론화의 고차원적인 비평의 측면이 약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안진국 이런 질문을 드린 이유는 누가 비평문을 의뢰하는냐에 따라 비평문 작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문이나 작가론 의뢰는 대부분 작가나 작가와 연관된 갤러리나 미술관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작가나 작가 관계자가 의뢰자인 상황이고, 그에게 원고료를 받는 입장에서 비평가가 과연 작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비평문을 작성할 수 있을까요. 저는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평문의 작성과 원고료 지급에 관여된 역학관계가 개선이 되어야 그나마 비평의 꼴을 갖춘 비평문이 작성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Q 미술비평가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안진국 앞에서도 나온 이야기이지만 저는 미술비평가의 역할은 다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이론과 당대 문화, 시대정신, 그리고 예술가의 작업 방향성 등을 두루 분석하여 새로운 시각을 말이나 글로 풀어내는 사람이 미술비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미술비평가는 미술이론가와 미술사학자, 문화연구자, 심리분석가 등의 다양한 성향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하고, 이것이 미술비평가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세 분은 미술비평가를 어떻게 정의하고 계시나요?
문혜진 비평의 스펙트럼이 넓듯이 비평가도 하나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비평가 중에는 전시기획을 하면서 글을 쓰는 분도 있고 저 같이 연구자와 비평가의 중간 정도에 있는 사람도 있죠. 근데 그것들은 개인 성향의 차이인 거죠.
앞서 나온 큐레이터의 미술 비평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큐레이터의 글쓰기와 비평가의 글쓰기가 뭐가 다를까 생각을 해 봤는데요. 큐레이터 분들 중에서도 비평적인 시각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지만, ‘이 글을 비평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비평가의 글은 자기 관점이 들어가 있지 않은 글은 없는 것 같습니다. 간단한 작가와의 매칭 비평 글을 쓴다 하더라도 자기 관점에서 그 작업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나 견해가 분명히 들어가 있고, 비평가의 입장이 확실하게 서 있는 글을 만들어 내는 거죠. 반면에 큐레이터의 글은 작가 관점에서 작품을 설명해 주는 글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비평가는 당대의 현장에서 작품의 살결을 훨씬 가까이 느끼면서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미술 현장의 맥박과 동향을 파악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 이 것이 비평가의 이상적인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시대에는 작품의 살결을 느끼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까지는 되는 것 같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시대 비평이나 역사 비평의 부분이 굉장히 약하다고 생각해요. 정부 비평 지원 사업의 자문으로 참여하면서 비평의 중요성과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는 비평문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하지만, 결국 기금도 실적이고 사업이기 때문에 당장의 결과가 도출될 수 있는 작가 조사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비평가의 수가 작가의 수보다는 적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기금에 기대하는 마음을 놓으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아쉽습니다.
이진실 공교롭게 기금을 신청하는 기간에 이런 질문을 받다보니 생각이 많아지는데요.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공공기관의 비평 지원 방식이 거시적으로 미술 현장을 볼 수 있는 담론을 생산한다든지, 제도 비판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의 토대를 마련하는 방식이 아니라 작가의 작품집으로 기금을 지원 받는게 가장 좋은 구조이기 때문에 거기서 한계를 많이 느낍니다. 한편으로 요즘 고민되는 부분은 미술비평에서 미술사적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느냐라는 부분이에요. 요즘 젊은 비평가들 중에는 “우리에게 역사는 필요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미술이론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글들도 굉장히 많이 등장하죠. 그래서 이것이 단순히 감각적, 묘사적, 기술적인 비평의 경향이라기보다는 미술이론을 지금 우리와 상관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때 흔히 ‘우리’라고 하는 세대가(같은 세대의 작가일 수도 있는 것이고 작품일 수도 있고 비평가 스스로일 수도 있겠죠) 미술사적인 지식 혹은 미술 이론적인 토대 철학이 필요 없다고 선언할 때는, 권위에 반발하는 일련의 움직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포럼에 함께하고 있는 『마테리알』도 기존의 지적 권위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출발했으니까요. 이런 젊은 친구들과의 대화의 장, 또는 그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이 부재해서 미술 비평이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유원준 말씀하신 것처럼 전시 서문 같은 경우에 비평가가 원고료를 받고 글을 쓰게 되면 비평의 입지가 아무래도 줄어들죠. 그래서 비평가분들이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블로그를 가보면 훨씬 더 재미있는 글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 하는데요. 미술 비평의 범주 그리고 미술 비평가로서의 정체성은 현대 미술 자체가 저변을 확대하면서 함께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저는 비평의 위기를 자꾸 얘기 하는 것은어떤 측면에서는 비평의 영역 내지는 비평가가 관여할 수 있는 범주가 너무 확대되기 때문에 거기서 양산되는 위기 의식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렇게 보자면 비평의 위기가 아니라 비평가의 위기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비평가의 권위의 위기겠죠. 그래서 지금은 비평이 만약에 어떤 하나의 시각을 가지고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지칭하는 글쓰기를 포괄한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댓글도 일종의 비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제 그 비평을 담는 플랫폼이나 매체가 바뀌는 거죠. 그래서 비평의 문제 혹은 위기는 문자의 위기 내지는 인문학의 위기와 같은 각종 위기들과 연동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 가지 시각들이 비평가라는 혹은 비평의 행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더욱 다양하게 시도해봐야 된다고 생각하고요. 미술사의 지식이 없건, 철학의 지식이 없건 나름대로의 특정한 시각으로 하나의 대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도 재미있겠죠. 다만 그런 여러 가지 비평이 있을 때 그 비평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열어놓고 각 비평이 지닌 장단점을 천천히 같이 바라보고 숙고해 볼 여유도 생기길 바랍니다. 현재의 상황은 그러한 행위들을 펼쳐낼 장소가 없다라는게 현실적인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Q 각자의 연구 주제는?
안진국 미술 비평가들도 각자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도 다르고, 추구하는 방향도 다릅니다. 그래서 비평가들의 연구 주제를 들어보면 시대 정신과 당대 비평가들이 주목하는 지점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세 분은 현재 어떤 주제를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진실 이번에 ‘아르코 크리틱 랩’이라고 젊은 연구자들과 ‘젠더’를 주제로 비평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젠더 이슈는 저에게 가장 관심 있는 주제이고 애정하는 작품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에 큰 불만은 없지만, 때론 토큰처럼 이용되고 있구나 싶을 때가 있어요. 아시다시피, 페미니즘이 미술과 문학 등 문화예술에서 엄청 붐업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많은 페미니스트 작가들도 비슷한 고민을 할 텐데, 한 비평가/작가를 특정 주제에만 한정하는 것은 불만스럽지요. 누구나 더 복잡하고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페미니즘이 과연 비판이 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동료들과 토론을 하고 있어요. 페미니즘 미술이라고 해서 여성 미술가들을 상찬하고 주목받지 못한 여성 미술가들을 발굴하는 차원으로만 국한되는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그런 수준을 타파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 제가 사실 최근 박사 논문을 로잘린드 크라우스로 썼거든요. 크라우스는 굉장히 보수적인 비평가이고 이론가입니다. 매체와 소위 ‘형식 비평’이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이런(페미니즘과 같은) 주제 비평과 모순적이거나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될 수 있을 텐데요. 미술이 그런 차원에서 정교한 언어를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매체(또는 형식)와 관련해서 고민하며 연구해나가려고 합니다.

문혜진 저는 대체로 기술 매체 그리고 제도, 구조가 지속적인 관심사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비평과 잡지 구조에 관한 글을 좀 썼고 그 바람에 홍역도 겪었지요. 매체에도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작가론으로는 영상이나 사진, 혹은 미디어 쪽을 회화나 조각보다는 훨씬 많이 썼던 것 같습니다. 근데 연구적 관심사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크게 두 개일 것 같아요. 첫번째는 미술계 범위를 넘어서는 부분입니다. 관심사가 좁은 의미의 작품에서 이미지로 확장이 되면서, 좀 더 넓은 시각 문화의 관점에서 갈수록 커지는 이미지의 힘과 성격을 규명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지 분석의 주도권이 미술에 있었죠. 이미지 생산의 주체는 절대적으로 미술이었고 그것을 분석하는 것이 미술사였는데, 이제는 미술계 외부의 시각문화가 너무나 거대해지면서 미술사가 무력해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 유통, 감상을 주도하는 기술 미디어 환경,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을 포함해서 기술 미디어 환경이 이미지의 존재 방식을 어떻게 수용하고 활용하는지 그리고 이런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원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작년에 썼던 원고들이 이와 관련된 글들이기도 한데요. 워낙 큰 주제여서 우선 일차 연구의 측면에서 작가론들을 썼었는데 정희민, 김희천, 정지현 작가에 관한 글을 썼었습니다. 그들의 작품이 기술 매체와 이미지의 관계를 다루고 있거든요.
그 다음은 역사 연구 파트인데요. 석사 논문 주제를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에 대해서 썼는데 이걸 쓰면서 한계를 많이 느꼈습니다. 90년대라고 하더라도 텍스트 자료도 충분치 않아 구술 인터뷰에 많이 의존을 해야 되는데, 살아계신 분들이 많다보니 인터뷰가 가능한 장점도 있었지만 객관성을 확보하기가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그나마 90년대 초중반 시대는 저하고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한 다리 건너서 아는 분들이었지만 90년대 중후반만 넘어가도 직접적으로 아는 분들이 등장하다 보니 객관적 연구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총론은 지금 당장 연구가 어렵지만 관심이 떠난 것은 아니라서, 현재는 각론으로 기술 매체와 관련해 한국 미디어 아트사 연구에 흥미가 있습니다. 관련해서 2018–2019년 김세진, 유비호, 박화영, 함양아에 이어 올해 홍성민, 서현석, 노재운, 양아치 작가의 작가론을 쓰고 있습니다.
유원준 조금 전 이진실 비평가님이 본인을 미술비평가라고 소개하는 것에 대한 부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저도 스스로 제가 미술 비평가인가라는 질문을 하는데요. 저는 어떻게 보면 기술 매체 비평을 하기 위해서 미술을 이용하는 사람 같아요. 기술 매체 비평을 지속 하면서 해당 논의들에 부합하는 작가들을 찾는 거죠.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작가의 작업을 통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저의 시도가 예술작품의 내용을 심층적으로 해설하고 해석하는 일반적인 미술 비평과 반대의 경우가 좀 많아서 이 점은 지금도 고민입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 예술에 관한 논문과 책을 쓰고 있고 이를 미술안에서 비평의 언어로 담론을 생산해 내고 전개하고 있는데, 이와 부합하는 작업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논문을 투고할 때도 제 연구가 어디에 더 적합할지도 고민하게 되죠. 논문을 쓰다보면 기술에 관한 이야기 중심으로 흘러갈 때도 있다보니 매체 비평, 기술 비평은 제 연구에서는 늘 혼재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다양한 분야에서 미술비평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더 많아지는 것을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입장인데요. 아마도 저 역시도 그러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를 미술계나 미술비평의 지형에서 아웃사이더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바램이 있다면 조금 더 다양한 논의를 전개할 수 있는 환경이나 매끄러운 연결점들이 언제쯤 형성될 수 있을까. 스스로 좀 더 열심히 탐구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반성하고 있습니다.
안진국 지금 말씀해주신 연구 주제가 모두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들이네요. 저 역시 미술비평가로서 신유물론이 미학으로 가능한가를 다각도로 살피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비평가는 이전의 비평가와는 조금은 다른 고민과 연구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Q 비평의 장이자 공간으로서 미술잡지 또는 다른 미술 비평의 장에 관한 생각 혹은 우려가 있다면?
안진국 마지막으로, 비평의 공간에 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의 비평가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비평을 펼칠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평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비평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나 공간이 축소되고, 그와 함께 대중이 무게감 있거나 전문적인 글에 거부감을 갖는 지점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잡지와 같은 매체에서 가벼운 토크 형태의 내용들을 다룰 수 밖에 없는 상황이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비평의 공간이 축소된 상황에서 숏폼 같은 짧고 자극적인 비평이 가능할까요? 저는 이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비평가님들과 비평의 장(場), 공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월간미술』과 같은 미술전문잡지가 대표적인 비평의 장이 되고 있는데요, 미술전문잡지 또는 다른 미술비평의 장이 보여주는 우려 사항이나 개선해야 할 지점이 있다면 의견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혜진 안타깝지만 물리적으로는 크게 마땅한 묘안은 없는 것 같아요. 미술전문지라고 할 수 있는 잡지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웹진도 있지만 10년, 15년 전과 비슷한 구조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미술의 비중이 눈에 띄게 늘어나지 않는 한 비평의 장이 획기적으로 확장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다만 전시회가 과거에 비해서 엄청 많아졌잖아요. 제가 글 썼던 작가들의 전시도 다 못 가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하는데요. 최근 역설적으로 오프라인 잡지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훗날 2010년대 혹은 2020년대 한국 미술계를 연구한다고 하면, 예전에 비해 굉장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중요한 전시를 다 보지 못하니까요. 과거에는 그래도 중요한 전시는 모두가 봤기 때문에 공론 형성이 가능했고, 그에 대한 의견이 모이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2020년대에 어떤 전시가 중요하냐라고 물어본다면, 잡지에 실린 것 외에 인스타그램에서 회자된 전시가 중요한 자료겠지요. 하지만 인스타그램은 휘발되는 매체라, 그 자료들이 10년 후에도 연구를 할 때 남아 있을지 보장이 되지 않습니다. 요새 누가 인쇄 잡지를 보냐 이런 말도 많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차 참고 대상은 여전히 인쇄 잡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쇄 잡지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시대의 속도에 안 맞는 매체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연구 자료로 남는 것은 잡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최근에 다시 하고 있습니다.
유원준 정말 오래전 일이긴 한데요. 월간미술 기자 면접 시험을 봤었어요. 대학원 때인데요. 과 교수님의 추천으로 면접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때 너무 호기롭게 ‘월간미술은 너무 오래된 매체인 것 같다. 월간미술의 매체 형식을 바꾸실 생각은 없냐’ 이런 얘기를 거침 없이 했죠. 당연히 떨어졌고요. 나중에 당시 편집장님과 술 자리를 갖게 되면서 월간미술이 가진 역사와 전통을 들었었는데요. 오늘 다시 심지언 편집장님의 발표를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어린 마음에 호기를 부렸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편집장님이 술을 마시면서 제게 “네가 한번 새로운 매체 형식을 만들어봐”라고 해서 만든 것이 ‘앨리스온’이라는 온라인 비평 채널이거든요. 그리고 그 온라인 채널 안에서 지금으로 치면 온라인 스트리밍이라든지 영상과 같은 각종 매체를 다양하게 실험 해봤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더라구요. 저는 지금의 위기가 미술 비평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긴 호흡을 가지고 숙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비평의 영역을 넘어 시간을 요해서 읽고 습득해야 되는 무언가에 대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들이 너무 어려워지고 있다라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수식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족 사진이 이러한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과거에는 가족 사진이나 어릴적 사진을 인화해서 앨범에 보관을 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나 스마트폰으로 모두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면서 디지털 스토리지 안에 저장을 합니다. 보관이 훨씬 용이해진거죠. 그런데 역설적으로 지나간 과거의 사진들을 보관하거나 찾는 것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앨범을 다시 뒤척이는 그런 순간들이 누구한테라도 찾아올 거라고 생각을 하고 그런 지점에서 미술 잡지의 역할은 지속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술 잡지를 평가하는 기준이나 잣대, 환경은 조금 바뀔 필요가 있다라는 생각은 들어요.
이진실 가벼운 리뷰 성격의 글, 또는 작가, 전시를 칭찬만 해주는 글, 홍보성 글 말고 좀 더 무게 있고 담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글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합니다만, 미술월간지에 그런 비평을 위한 공간을 전부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 힘든 점들이 있다고 봅니다. 이제 막 최저 원고료의 수준을 살짝 벗어난 정도로 운영되고, 잡지판매 수익 구조가 안나서 광고에 의존해야 하고, 매달 갤러리, 미술관의 홍보 일정과 맞물려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생리적인 구조가 있잖아요. 때문에 월간지에게 계속 이런 담론적인 장을 마련하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기보다 대안적으로 그 바깥에서 월간지와는 다른 속도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비평의 장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장이 ‘앨리스 온’이나, 더 도전적인 『마테리알』이나 또 다른 무크지 형태들, 또 『보스토크』와 같은 잡지가 될 수 있겠지요. 다만 그 장을 누가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가 문제인 거죠. 좀 오랫동안 그걸 밀고 나갈 동력이 없다는 것도 고민이고요. 사실 전 개인적으로 아카데미에 대한 불만도 있어요. 미술 이론을 현실적이고 시대적인 구조로 만들어온 과정을 생각하면 『옥토버』처럼 대학연구소/출판사가 주축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국의 미술 대학들은 그런 든든한 연계 자원이 되고자 하는 관심과 의지가 전혀 없어보이기 때문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