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금기 파헤치기

ART BOOKS

노재민 기자

은밀한 금기 파헤치기
「대한민국헌법」 제2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제21조 제2항은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자신이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막상 여러 경우를 따지면서 생각해보면 대놓고 자유롭게 얘기하지 못하는 사례들이 분명히 도처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얘기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언급하는 것, 타인의 저작권을 불법적으로 탈취하는 것, 절대 악이라고 판단되는 인물에게서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묘사될 만한 부분을 발설하는 것 등 셀 수 없이 많다. 가볍게 시작하자면, 대다수의 예의 바른 사람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타인을 특정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뿐인가. 밀레니엄 세대의 영화 애호가라면 토렌트와 시네스트를 한 번쯤은 거쳐 갔을 테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얘기하면 비윤리적인 사람으로 비칠까 터부시한다. 역사적 사안으로 확장한다면, 히틀러와 그를 연상할 수 있는 모든 심벌과 제스처들은 언급 자체를 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안전하다고 판단해버린다.

이달에 소개하는 책들은 그간 잘 이야기하지 않았던 방식을 채택하거나, 음지에서 은밀하게만 얘기되던 주제를 수면으로 올리고, 금기시되었던 것들을 파헤친다.

권은비 지음 · 힘 432쪽 · 2022
18000원

『공동세계 : 공공미술 은닉대본』에서는 권은비 작가가 1년 동안 만난 20명의 공공미술 관계자들(작가, 기획자, 건축가, 철학자, 지자체 도시재생과 공무원, 행정가, 활동가, 지역 주민 등)과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인터뷰는 처음 3명의 인물로 시작하여, 이들이 각각 다른 3명을 소개하면서 점차 확장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인터뷰를 가로지르는 큰 특징 중 하나는 익명성이다. 권은비는 관계자들이 ‘공개대본’과 ‘은닉대본’에 따라 다르게 말하는 점을 간파했다. 구술자가 ‘은닉대본’의 형태로 얘기할 때 사람들 간의 관계나 도시권력구조 등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났다. 저자는 공공미술 공론장이나 공개 토론회에서 들을 수 있는 공식적인 이야기 대신, 익명성을 기반으로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개인들의 ‘말’을 기록했다. 찰나의 ‘말’이 기록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임의적인 편집을 최소화해서 책에 수록했다. 따라서 ‘말’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특성대로 매끄럽지 않으며, 일반적인 표준어와 다르게 표기됐다.

『공동세계 : 공공미술 은닉대본』은 ‘모두가 원하는 좋은 공공미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모두’는 누구이며, ‘좋은 것’은 무엇이고, ‘공공미술’은 어떤 것인지, 결정적으로 공공영역에서 모두를 이야기할 때 배제되는 사람들은 없는지 탐구한다. 한국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대개 제도권 안에서 작동하기에 ‘모든 사람의 대표’로서 공공미술의 모습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승인되거나 배제된다. 핵심 질문은 ‘공공미술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에서 ‘승인된 공공미술을 동의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로 확장된다.

한민수 지음 · 미디어버스 152쪽 · 2024
14000원

『영화도둑일기』는 영화 산업에서 금기시되는 ‘해적질’, 즉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다양한 행위를 조명한다. 저자는 불법으로 간주되는 행위를 통해 영화를 발굴하고 유포하는데, 해적질이 불법임을 인정하면서도 영화 제도의 선택을 받지 못해 관객에게 선보일 기회를 얻지 못하는 영화들이 해적질을 통해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해적질이 영화를 보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짚는다.

책은 한민수가 직접 경험한 영화도둑질 이야기, 자발적으로 수백 편의 자막을 만드는 자막 제작자와의 인터뷰, 영화도둑계의 전설적인 인물과의 대화 등을 통해 동시대 시네필들의 삶을 담아낸다. 그는 동시대 시네필들이 영화와 맺는 관계를 밝히며 영화 애호가들의 열정이 어떻게 해적질을 통해 발현되는지 탐색한다.

해적질은 불법이라는 이유로 그 역할이 크지만 음성적으로 존재해 왔다. 저자는 해적질을 옹호하지만은 않으면서도, 해적질을 배제하고 영화사를 논하면 필연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영화의 경우, 제작 규모 때문에 자본이 많이 투입되며, 그로 인해 작품의 권리와 이익이 창작자나 현장의 노동자보다 기업에 집중되는 현실 속에서 해적질은 사회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영화도둑일기』는 해적질이 만들어내는 틈새와 문화를 탐구하며, 해적질이 영화 비평과 아카이빙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콘텐츠 산업으로 편입되지 않으면 배제당하는 영화들이 생존하는 방법을 다룬다.

프레더릭 스팟츠 지음 · 윤채영 옮김 · 생각의 힘 688쪽 · 2024
37000원

미국의 전직 외교관이자 문화 역사가인 프레더릭 스팟츠(Frederic Spotts)가 쓴 『히틀러와 미학의 힘』은 아돌프 히틀러의 예술가적 측면이 그의 정치적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한다. 저자는 히틀러를 단순한 악의 상징이 아니라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정치가로 재조명하며, 히틀러가 대중을 선동하고 나치즘을 문화적 운동으로 발전시킨 방식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나아가 예술과 정치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 그리고 예술이 어떻게 정치적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 그려나간다.

책에 실린 수많은 인용문과 사진 자료들은 발터 벤야민이 얘기했던 ‘정치의 예술화’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여주는데, 이는 예술과 정치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합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문화는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이자 권력이 추구하는 목적 그 자체였다. 달리 말하자면, 문화는 권력이 열망하는 목적일 뿐 아니라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해당 저서에 관심을 보인 독일 출판사는 거의 없는데, 이는 이 책의 주제가 여러 이유로 금기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0년간 히틀러에 관한 책들은 그의 삶과 경력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중심적 역할을 무시해 왔다. 히틀러는 인종주의만큼이나 예술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후자를 무시하는 것은 전자를 간과하는 것만큼 심각한 왜곡을 낳는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과 인간성에 대한 감각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고급문화가 그것을 향유하는 이들을 반드시 고결하게 만드는 것은 아님을 증명하는 근거로 『히틀러와 미학의 힘』이 인용되기도 했다. 스팟츠의 서술은 예술이 어떻게 파시즘의 무기가 되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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