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래 Mire Lee

이미래: 열린 상처의
끝에는 애틋한 장력이

Artist

이미래/ 1988년 출생인 이미래는 산업폐기물로 이루어진 키네틱 구조물과 점액질, 액체와 같은 비정형 오브제를 조합해 유사 장기처럼 보이는 비체를 창안하고 촉각을 감정으로 변화시켜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감각을 자극한다. 개인전 《이미래 : Open Wound》(테이트 모던, 2024 ), 《캐리어즈》(아트선재센터, 서울, 2020 ) 등을 개최했고 《Black Sun》(뉴욕 뉴뮤지엄, 2023 ),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2022 ), 제15회 리옹 비엔날레(2019 ) 등에 참여했다. 테이트 모던을 배경으로 선 이미래

《이미래 : Open Wound》테이트 모던 전시 전경 2024
사진 : 테이트(벤 피셔) 제공 : 현대자동차

이미래: 열린 상처의 끝에는 애틋한 장력이
전민지 미술사, 미술비평

(로비로) 들어가며
한껏 달라붙은 살갗과 짓무른 내장, 어딘지 위태로워 보이는 기계에서 애처로이 떨어지는 점액. 이는 희미하게 스러져 가는 생명체의 잔해일 수도, 헐겁게 숨을 내쉬는 유기체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다. 수평과 수직의 둔탁한 선이 공백을 메우는 런던 테이트 모던 터바인 홀에서 《이미래 : 오픈 운드(Mire Lee : Open Wound )》는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이자 상황극이 된다. 한국 작가 최초로 현대 커미션(Hyundai Commission)에 선정된 이미래는 미술관의 거대한 로비를 대형 설치 작품과 함께 활성화하며, 생경한 조각적 언어로 공간을 압도한다. 전시 공간의 일부분으로서 이미 천장에 자리하고 있던 크레인에는 7m 길이의 산업용 동력 기계 장치가, 천장의 금속 사슬 49개에는 작가가 ‘피부’라 칭하는 천이 대거 매달려 있다. 이 천 조각물은 로비 중앙부에서 끈적이는 액체에 젖었다가, 뒤편으로 이동해 건조되고 전시 기간 중 다시 가운데 공간에 가득히 걸린다. 이러한 순환적 과정으로 인해 ‘피부’를 감상하는 데에는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린다. 반복적이고 느린 주기 속에서 전시의 주인공은 머지않아 무대가 되고, 무대는 거듭 주인공이 된다.

“물리적 공정과 재료의 물성에 대한 깊은 관심” 1으로부터 10여 년 전 출발한 이미래의 작업세계는 유기체와 기계, 신체의 경계에 당도했다. 이를 위해 작가는 그간 이질적 요소를 혼합해 조각의 물리적 한계를 실험하며 생명과 죽음의 감각을 발산해 왔다. 금속 구조물과 점액질의 재료가 혼재된 이번 전시 역시 신체 내부에 감춰진 장기나 혈관, 곳곳에 흐르는 체액을 직접적으로 상기시킨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무생물 -사물이지만, 유기체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전시장 자체가 유기체가 되어 호흡하기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와 동시에 공간 중심부에서 유일한 동력원으로 작동하는 모터는 생명체의 심장을 자처한다. 이로써 어딘지 그로테스크한 천이 목전에 늘어진 채 너덜거릴 때, 관객이 마주하는 장면은 기괴하고 기이하다. 여기에서 괴물성(monstrosity)과 기괴함(monstrousness)이라는 단어가 모두 라틴어‘monstrare(보여주다, 조언하다)’에 어원을 둔다는 점을 우선 짚어야 할 것이다.2 그렇다면 이미래의 괴이함은 무엇을 드러내고, 결론적으로 어떤 것을 암시하는가?

상황() 1: 중력이 말해주는 
테이트 모던에서의 근작으로부터 시작한다. 작가가 연출한 상황이 벌어지기 직전, 전시장의 중력은 시각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로비에 들어선 이들이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크레인에 얽힌 체인과 그 사이에서 세로축을 길게 그리는 천 조각들이다. 이들은 중력에 의해 높은 곳에서부터 아래로 끝없이 늘어지며 작업의 무게, 나아가 공간에서의 장엄한 존재감을 스스로 전경화한다. 관객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하향적 힘을 따르며 위에서 아래로 뻗어가기를 반복한다. 각각의 조각은 특정한 위치에 고정되어 있는 듯 보이나 그로부터 마치 종유석이 자라나듯 반복되는 수직의 시선은 관람자와 설치물 간 관계를 재차 확인시킨다. 이처럼 유형의 존재로 변환된 무형의 에너지는 물리적 조각을 독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된다.

중력의 존재는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에 의해서도 인식되는데, 이는 작품 일부를 이루는 액체가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며 강한 낙차를 형성하는 것에 기인한다. 이때 낙차는 단순히 물이 떨어지는 현상을 보여준다기보다, 공간을 지배하는 중력의 방향성을 드러내는 요소로 작용한다. 감상자는 액체가 둔탁하고도 고요히 떨어지는 소리를 통해 전시장의 깊이와 높이, 넓이를 인식하며 규칙적인 운동성을 보다 감각적으로 체현하게 된다. 더불어, 모터가 작동하면서 줄이 느리게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작품의 리듬감은 한층 공고해진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공간을 가로지르는 사운드는 설치물에 규칙적인 맥박을 부여한다. 이러한 소리가 축적되며 점차 생성되는 리듬은 중력이 공백의 시공간을 조율하는 듯한 효과를 강화한다. 이곳에서의 초침이 움직일수록 청각을 출발점으로 둔 입체감이 한 겹씩 포개어지고, 전시장은 곧 동적 공간으로 전환된다.

《이미래: Open Wound테이트 모던 전시 전경 2024
사진: 라리나 페르난데스 제공: 테이트

상황() 2: 연극하는 조각, 수행하는 무대
이미래의 조각은 그곳에 놓여 있지만, 놓인 것에 그친 적 없다.쉼 없이 변모하는 유기체로서 대규모 기계 장치는 지속적으로 작동하고, 이로 인해 작품은 묘하게 ‘수행 중’인 상태를 유지한다. 그곳이 어디든, 작품이 전시되는 공간은 이러한 조각의 퍼포먼스를 위한 무대로(오)작동한다. 이번 테이트 모던 커미션에서도 관람객은 연극 무대의 1열에 초대된다. 키네틱 조각이 숨을 내뱉고 다시 들이마시는 순간, 그리고 그들이 특정한 소리와 함께 미동하는 순간마다 관객은 설정된 연극의 한 장면에 몰입하게 된다. 다만 작품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하고, 가끔씩 불안정하다. 마치 무대 위에서 배우가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듯, 작가가 거친 패브릭으로 창조한 ‘몸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연극을 멈추지않는다.3 이는 그저 정지된 형태로 감상 ‘당하는’ 전통적 조각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작가의 세계에서는 오래전 분화된 것이다. 이미래의 조각은 그 어떤 문장도 말하지 않지만, 미세하게 계속되는 생명력의 흔적이 시각적 혼란을 경유해 관객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가?

한편, 각각의 몸을 구성하는 피부와 살갗은 아트선재센터 개인전 《캐리어즈(Carriers )》(2020 )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작가는 장기와 체액을 연상시키는 소재 및 질감을 통해 기시감과 거부감을 동시에 현현하는 작품을 목도하게 했다. 이 탐구를 기반으로 작가가 축조해 온 조각의 형상이 대체로 점액질의 동물적인 무언가라는 점에서,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의 ‘비체(abject)’ 개념이 여러 번 호출되었다.4 비평가 이연숙이 분석한 바와 같이 실리콘과 pvc 호스, 펌프, 거푸집 등을 통과해 가닿는 촉각적 요소, 즉 끈적거림은 “실존적 구역질을 유발”하기도, “비체적이고 여성적인 소유욕”을 드러내기도 한다.5 마찬가지로,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를 위한 작품 〈Endless House : Holes and Drips〉(2022 )에서 작가는 세라믹과 유약을 활용해 끈적한 피부라는 층위를 더했다. 강한 점성의 액체가 투석기를 닮은 펌프 시스템을 거쳐 저장소로 흘러 들어가고,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유약은 점차 축적되어 초현실적이고도 생체적인 물성을 창안해 낸다.

더 나아가 ‘그로테스크(grotesque )’ 역시 자주 거론되는 개념 중 하나인데, 이는 단순한 기괴함이나 날것의 감정으로부터 초탈한 다층적 개념에 가깝다. 특히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 )의 이론을 빌리자면 그로테스크한 몸은 ‘생성하는 몸’으로서 우주의 생성 원리를 반영하고, 고립된 자아와 세계를 통합해 새로운 가치 형성을 가능케 한다.6 추함으로 인한 불쾌감은 도리어 기존 질서를 재구성함으로써 의미의 한계를 확장해 내는 생산적 육체성을 구현한다. 이미래의 무대 역시 ‘생성하는’ 그로테스크의 맥락에서 혐오와 매혹의 감정을 교차시키며 재조직된 신체라는 낯선 관념을 제시한다. 이처럼 억압되거나 배제된 것들은 비틀리고 뒤틀린 모습으로 현실-비현실, 생명무생명의 경계에 돌아와 안정된 틀을 교란하고 있다. 억눌린 존재는 이렇게도 은밀히 귀환하여 변형된 움직임을 수행한다. 그들의 아크로바틱한 안무에 배태된 창조적 가능성을 예민한 촉수로 발굴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Black Sun》 뉴욕 뉴뮤지엄 전시 전경 2024
제공 : 뉴뮤지엄 사진 : 리오 라사니

〈구멍이 많은 풍경 : 영도 바다 피부〉2022 《물결위, 우리》부산비엔날레 전시 전경 2022
사진 : 김상태 제공 : 부산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상황(극 ) 3 : 노동, 노동자, 노동력
이곳은 노동의 장소다. 터바인 홀에는 기념비적 과거가 서려 있다. 작가는 화력 발전소로 사용되던 테이트 모던의 역사를 꺼내어 건축물의 산업적 유산을 수면으로 끌어올린다. 특히 비계(飛階 ) 구조물은 산업화의 흔적과 그 속에 깃든 인간의 움직임을 되새김질한다. 이는 복구되지 않은 폐공장 건물의 일부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부산비엔날레 출품작 〈구멍이 많은 풍경 : 영도 바다 피부〉(2022 )와도 연동된다. 같은 해 독일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한 개인전 《Look, I’m a fountain of filth raving mad with love》(2022 ) 역시 건설 현장에 도사리는 감상을 콘크리트와 철근 구조로 풀어내어 그 취약함을 노출한다. 이로써 작가는 기계적 생산의 공간인 공장에 응축된 “인간 노동의 집합성, 노동자의 익명성, 인간의 꿈”을 발굴한다.7 그뿐만 아니라 기념비성이 본질적으로 어리석음이나 비극, 나아가 폭력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를 투과하는 슬픔을 강조한다.8 과거 회고의 과정은 기억의 재조명으로 나아가고, 서로 다른 밀도로 기입된 역사는 희생된 이들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살아난다.

이제 전시 공간은 노동자가 존재하고, 노동력이 수반되는 노동의 터가 된다. 한가운데에서 천천히 회전하는 산업용 터빈은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모사한다. 그가 ‘일하는’ 과정은 실리콘 튜브를 거쳐 액체를 펌프질하는 단계, 하부의 거대한 트레이에 이를 다시 모으는 단계, 이미래의 피부 조각이 이 액체를 흡수하도록 하는 단계 등을 포괄한다. 그와 동시에, 실제 인간 노동자가 작업에 동참한다. 테이트 모던 전시가 이전 작업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전시 테크니션의 가시적 개입이다. 이전에는 배후에서 보이지 않았던 조력자들이, 이제는 전시 과정의 일부로 관람객에게 드러난다. 이들은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액체에 흠뻑 젖은 피부 조각을 바닥에 내리고, 전시장 뒤쪽에 자리한 ‘건조 구역’으로 옮긴다. 이때 관람객은 여전히 전시를 감상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미적 대상의 소비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과정과 시간, 노동이 시각화된 유지보수의 현장이다. 기계 노동과 인간 노동이 교차함으로써 탄생한 물질적 흔적은 무대의 이면에 새겨지고, 작품의 표면에 스며들어 육화된다. 또한 전시에는 일종의 ‘소스’와 같은 액체가 반고체화된 채 유동하는데, 이는 천을 적시면서도 빠르게 건조되는 특성을 지녀 정기적인 교체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그저 작업의 한 요소라기보다 목적이 뚜렷한 기술적 설계와 협업의 결과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의뢰받은 협업자들의 모습, 메틸셀룰로스 등 물질 실험을 한결같이 이어간 작가의 손이 불투명한 유령처럼 전시장을 배회하고 있다.

결국 노동은 생산을 위해 요구되는 도구적 수단이 아니다. 이미래의 작업에서는 노동 자체가 조각 매체의 일부로 포함되며, 이를 통해 과정의 지속과 의미의 재조합이 이루어진다. 간단히 정의하기 어려운 범주로서 노동자와 작가의 역할은 이 작업에서 뒤얽혀 있다. 미술사학자 줄리아 브라이언 윌슨(Julia Bryan-Wilson)은 레이먼드 윌리엄스 (Raymond Williams)의 개념을 차용해 미술 일(art work)과 미술 노동(art labor)을 구분하며, 예술적 생산 과정의 다층적 의미를 탐구한 바 있다.9 이러한 분석은 예술 작품 뒤에 숨은 노동과 과정의 가치를 인정하고 가시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래의 작업은 이 두 개념 간 경계 한가운데에서 노동과 예술적 창작 과정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드러낸다. 그의 조각은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노동과 시간이 축적된 흔적이자 끊임없이 생성과 변형을 거듭하는 존재로 발현된다. 본인의 신체 가까이에 조각을 두고 ‘열린 상처’를 소성하는 이미래의 노동-행위는 추측하건대 치유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진액이 흐르는 상처는 완전무결한 새살이 돋기를 기다리는 대신,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하며 창작과 소멸의 순환적 관계에 온전히 자신을 의탁한다. 동일한 이유로, 전시에 이미 굳건히 장착되어 있는 노동 시스템은 창작 과정에서 소리 없이 소모되지 않고 물질성과 시간성을 연성한다.

《이미래: Open Wound》 테이트 모던 전시 전경 2024
사진 
: 테이트(벤 피셔) 제공 : 현대자동차

(로비를) 나가며
이번 현대 커미션을 기획한 큐레이터 앨빈 리(Alvin Li)는 인터뷰에서 작가가 공간과 우연성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로 다루는 것에 관해 언급했다.10 계획과 우연 사이에서 관객은 정제된 답을 찾지 못하겠지만, 그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경험의 선택지라는 것이다. 이는 명확한 결론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작가적 태도와도 연결되는데, 이로써 이미래는 불확실성을 작업의 본질적 요소로 삼는다. 구태여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미래의 작업은 실패라는 잠재적 가능성을 수용하고 이를 작업 과정 및 결과물의 필수 요소로 통합한다.11 새어 나오는 액체, 뚫린 구멍, 유약한 연결부 등 완전하지 못한 부분은 어떤 측면에서 매체화된다. 이들은 그간 어떤 노정을 밟아 지금에 이르렀는가? 투박해 보이는 요소는 사실 치밀한 설계와 항상성 속에서 유기적 존재로 거듭난 것들이다. 이러한 작업은 작가와 재료 사이에서 여태껏 존속하는 상호작용, 혹은 협상의 결과물이다. 실패와 시도의 흔적은 그러므로 마침표를 쉬이 허락하지 않는, 끝없는 이야기와도 같다.

공간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아물지 못한 상처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 한때 괴물성을 지니는 것으로(만) 보였던 것, 이들은 모종의 이유로 애틋하게 느껴지는 장력을 걸머진다. 그 애틋함은 실패를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확정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껴안고, 이 둘 사이의 긴장을 불안정하게나마 유지하는 데서 생겨난다. 열린 상처들은 완결되지 않은 형태로 놓인 채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유보한다. 긴장을 감당하면서도 그로부터 의미를 생성하는 극적인 사례로서, 이미래의 작업은 다시금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제 역할을 수행한다. 주연과 조연이 일제히 등장하는 이 장면에서 당신은 무엇을 직면하는가? 그 열린 상처의 끄트머리는 어떤 얘깃거리를 쏟아내는가? 앞서 허락되지 않았던 마침표는 서서히, 그러나 기이하게 물음표의 세계로 재편된다.

*본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2024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기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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