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우 Hyungwoo Lee

더하고 덜고 가만히 놓기

Artist

이형우/ 1955년 경기도 안성 출생. 홍익대 조소과와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 입체조형과를 졸업하고 로마 국립미술학교 조각과와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조각과에서 수학했다. 1982년 로마의 Porto di Pipetta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1997년 42세의 나이에 제47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되며 국내외 관심을 받았다. 원화랑, 최정아갤러리, 예술지구P, 노화랑 등에서 지금까지 총 19회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을 시작으로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카이스트, 관훈미술관, 금호미술관, 성곡미술관, 갤러리현대, 학고재, 선화랑 등에서 열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사진:이정우

더하고 덜고 가만히 놓기
안소연 미술비평

천장이 높고, 한쪽 벽으로 얕은 산이 내다보이는 창문이 나 있고, 긴 직육면체의 반듯함을 보여주는 조각가 이형우의 작업실은 얇은 나뭇결이 고요하게 내려앉은 무제의 풍경을 받치고 있다. 편백나무 표면을 대패로 얇게 깎아서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양감을 덜어낸 대팻밥이 수북하게 쌓이면, 이형우는 그것을 물질 상태로 되돌아간 무른 재료 삼아 다시 조각적 형태로 일으켜 세우거나 회화적 평면에 물성을 표현한다. 대부분 ‘무제’로 이름 붙인 그의 작업은 언어적인 침묵의 실존만큼이나 아무런 형상을 가시화하지 않은 채 존재하는 ‘형태’와 ‘무게’와 ‘공간’에 대한 물음에 다가간다. 이는 198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된 그의 초기 작업부터 지금까지의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조형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994년 작가노트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언급했던 ‘있음(the there is)’에 대한 사유와 성찰은 형태의 ‘순수함’과 ‘완전함’에 대한 (비가시적) 포착을 발견하는 실존적인 경험에서 해답을 찾아갔다. 30여 년 전 여섯 개의 면을 지닌 육면체를 토대로 수백 개의 서로 다른 형태와 무게와 공간을 드러내는 조각의 배열을 시도했던 그는, 이제 대팻밥을 덩어리로 압축하거나 낱낱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통해 형태와 무게와 공간에 대한 (비가시적) 포착을 또다시 실험하고 있다.

1. 더하고
〈무제〉(2023)는 커다란 육면체 덩어리다. 대패로 켜 낸 띠 모양의 대팻밥을 육면체로 응축시킨 이 형태는, 비유해 보자면, 소조의 방식으로 갖추어진 셈이다. 10여 년 전 이형우는 교토에 잠시 체류하던 중 우연히 접했던 대패질로, 조각가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어떤 물성의 가벼움과 새로운 형질로 해체된 물질의 유연함에 직관적으로 매료되었다. 조각가가 잘 빚어놓은 소조 원형으로부터 (제 소임을 다하고) 다시 물질로 무심하게 되돌아온 흙의 존재처럼, 이형우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수북하게 쌓인 대팻밥을 바라보며 또다시 형태를 구축하는 자리에 가져다 놓을 만한 조각적 상황을 떠올렸다. 그는 이내 나무 합판으로 육면체의 틀을 만들어서 물에 갠 석고를 몰드 안에 붓듯이 아직 생나무의 물기를 머금고 있는 대팻밥을 틀 안에 꾹꾹 눌러 담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소조적 변형의 과정은, 원형 몰드 안에서 석고가 단단히 굳기만 하면 온전한 형태가 되는 것처럼 물기가 모두 빠져나가 완전하게 응축된 육면체를 바닥으로부터 단단하게 일으켜 세운다.

그가 포착한 새로운 육면체의 응축은 2015년 ‘에치고-츠마리 아트 트리엔날레’에 참여한 이후 앞에서 언급한〈무제〉를 최근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특별전시《모든 섬은 산이다》(2024)에 출품하기까지 지속해 온 조각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무제〉를 비롯한 일련의 대팻밥 육면체 혹은 원기둥의 응축은, 그러한 “형태의 포착”을 통해 전개된 조각적 과정을 겪으면서 이중의 원형(나무원통/합판몰드) 으로부터 빠져나온 제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원형적 형태’에 대한 이형우의 오래된 사유를 환기시킨다. 아무런 무게도, 부피도, 모양도 가늠하기 어려운 낱낱의 대팻밥을 쌓고 더하면서 임의의 형태에 다다른 조각가는, 이를테면, 가시성의 범주 가장자리로 밀려난 ‘물질’ 상태의 재료가 시각적 존재로 포착될 수 있는 ‘형태’에 이르도록 조형적 단서를 발견해준 셈이다. 그는 종종 ‘형태의 최소화’를 통해 일련의 형태 포착에 대한 연속적인 변화와 성취를 말하곤 했다. “사물의 껍데기를 파괴하여 그 열개(裂開)를 통해 도달된 사물의 내면을 작품으로 만들어 보이게끔 하려는 것”에 명분을 두고 순수한 ‘원형적 형태’의 (재)포착에 몰두했던 그는 그 행위의 반복적 시도와 실패를 결핍이 아닌 채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93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연 7회 개인전에서 이형우는 당시 형태에 관한 자신의 문제의식을 조각설치로 공간에 펼쳤다. 흙, 돌, 나무를 재료로 서로 다른 추상적 형태 600개를 만들어서 전시장 바닥에 줄 맞춰 가지런히 배열한 그는 조각-설치의 지난한 수행적 행위를 내세우기보다는 각각의 형태들이 발밑에서부터 저 사각 공간의 사방 모서리까지 길게 펼쳐진 풍경을 말없이 바라볼 한쪽 가장자리 정도만 타인(관객)에게 내어줬다. 이형우는 테라코타, 석조, 목조로 정육면체 안에서 포착한 기하학적 형태를 만들어 수평적으로 연속하는 배열 안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결국에는 가시성을 초과했다. 가만히 서서 시선 아래로 각각의 크기와 무게와 모양을 갖춘 ‘원형으로서의’ 형태에 하나씩 이르다 보면, 한곳에 머무를 수 없는 형태(들)의 고원과 마주한 채 끝없는 ‘더함’의 장소로 나아가는 자신(의 눈, 발, 허리, 무릎 등)을 발견한다. 그는 이 경험에 대해 회상하며 스스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서로 다른 600개의 추상적 형태들이 (충만하게) 이어져 있는 서정적 풍경과의 대면이었다고 말한다.

이형우는 1997년 47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참여했다. 흙, 돌, 나무, 청동 등 조각의 고전적인 재료를 주로 사용해 왔던 그는 가시철조망을 이용해 실로 짜듯 구와 원기둥 같은 입체를 반복해서 만들었다. 사람의 키 높이를 훌쩍 넘는 크기의 구를 만들어 〈완전한 있음〉(1997)으로 이름 붙인 그는, 창작의 과정과 완성 사이를 긴밀하게 잇는 조각의 ‘재료’와 조각가의 ‘실행’에 주목했다. 조각의 연금술이 그러하듯, 재료와 형태 간의 마술적인 변환을매개하는  조각가의 신체와 그 역량은 물질(눈)과 사유(마음) 사이에서 진동하는 형상의 출현을 마치 (비가시적) 원형과의 만남처럼 포착해 낸다. 뻣뻣하게 말라비틀어진 것 같은 철조망을 털실처럼 부드럽게 매만지면서 이형우는 하나의 덩어리로 수렴되는 원초적인 물성을, 그것이 추구하는 순수한 형태를, 그 형태가 바닥에 완전하게 놓이는 충만한 순간을 내심 기대했을 테다.

〈무제〉 연작 작업 이미지 2024
사진:이정우

2. 덜고
2020년 이형우의 개인전 《오동나무》는 통나무를 해체하여 얻은 목판을 이용해 속이 빈 기하학적 형태로 구축해 놓은 각각의 조각을 가지고 “질량의 최소화”라는 조형적 실험을 다룬 전시였다. 앞서 하나의 육면체 안에서 수백 개의 주름 접힌 형태를 포착했던 그는, 그것과 대구를 이루듯 텅 빈 공백을 감싼 임의의 윤곽들을 공간 속에 일으켜 세울 (최소한의) 평면과 그들의 3차원적 결속 가능성을 진지하게 살폈다. 이형우는 편백나무나 참나무 등 나무의 성질을 파악 하여 그 물성이 (또 다른) 순수한 형태의 출현에 기꺼이 다가갈 수 있도록 물질과 형태 사이를 매개하는 조각적 행위에 집중해 왔다. 이때는 오동나무의 가볍고 무른 성질을 이용해 조각의 무게라는 비가시적 요소에 관한 시각적 접근을 시도했다.

오동나무는 가벼운 목재 특성상 전통적으로 가구, 악기, 관 등을 제작하는 데 많이 쓰였다. 이형우의 조각은 이러한 특정 목재 사물과는 무관하지만, 옷이나 이불, 책, 그릇 등 무언가를 담도록 속이 비어 있는 가구나 소리가 공명하도록 텅 빈 울림통을 지닌 악기와 한 사람의 육체가 똑바로 누울 만큼 온전히 비워놓은 관처럼 내부에 비가시적 공백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이 텅 빈 공백에 양감을 제시하는 오동나무 판재의 추상적인 결속은 그가 앞서 모색해 왔던 (비가시적) “형태의 포착”이라는 문제의식을 다시 조명한다. 오동나무 몸통에서 끄집어낸 가볍고 무른 물질로서의 판재는 부피와 질량의 반복적인 감축을 통해 하나의 형태가 물질로 환원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는다. 형상은 소거되었으나 원형의 본성을 물질 감각으로 기억하고 있는 평면 목재는 다시 조각가의 사유와 행위를 경유하면서 추상적인 (최소한의) 형태로 포착되어 임의의 시각적 대상으로 장소 안에 놓이게 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하이데거의 조각에 관한 논의를 인용하며, 조각이 장소와 결합하면서 비가시적 영역이 개방되는, 그러한 공백을 새롭게 정의하는 ‘드러냄’의 작용에 관해 말한 바 있다. 조각을 사유했던 그에게도 공백은 “결핍이 아니라 작용”이다. 매끄럽게 마름질한 오동나무 판재에서 정사각형, 직사각형, 마름모꼴, 사다리꼴, 원 등의 평면도형 및 그 변형의 형태들을 잘라냄으로써 이형우는 또다시 물질을 일으켜 형태의 단위로 눈앞에 세운다. 이후 평면도형의 모서리를 연결해 비로소 중력에 대응하며 바닥에 일으켜 세운 다면체의 조각은 선명한 표면 못지않게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텅 빈 공백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동시에, 하나의 입체를 이루고 있는 도형의 연속적 배열 탓에 공간을 내부와 외부의 시각적 범주로 경계 짓는 조각적 표면에 대해서도 환기한다. 이처럼 다면체 조각의 가볍고 얇은 표면은 역설적이게도 내부의 커다란 공백을 지시함으로써 시각적 부재를 조각의 무게와 동일시하며 그 가벼움을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1990년대 중반 무렵, 이형우는 내부를 덜어낸 조각의 형태에 몰두했던 때가 있었다. 통나무를 크게 토막 내서 세로 단면으로 내부가 보이도록 형태를 잡은 후에 속을 파내 나무껍질로부터 일정한 두께만 남긴 것부터, 높이만 일정하고 모양과 크기는 다양한 육면체 상자를 나무 합판으로 만들어 수직 수평의 대열에 맞춰 배열한 조각 설치 작업도 있다. 내부를 덜어낸 이 (나무의/사물의/조각의) 껍질들은 조각에 있어서 형태의 기원에 관한 시각을 일깨워준다. 꽉 닫힌 고전적인 조각의 표면은 그 내부로부터 구축된 조형 원리에 의해 양감과 동세를 반영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조각의 내부와 표면의 관계를 전복/단절시킨 현대조각의 다양한 시도들과 견주어 볼 때, 내부 공백을 드러낸 이형우의 조각은 표면의 내부를 또 다른 표면으로 인식시키면서 스스로 주형(mold)의 위치로 이동하는 마술 같은 상황을 전개한다. 사물의 껍질이 됐든, 추상적인 다면체의 표면이 됐든, 내부를 완전히 덜어낸 이형우의 조각은 잠재적인 형태의 포착을 함의하는 원형의 틀로서 일련의 (비가시적) 형태를 감싼 조각적 위상을 갖는다.

대팻밥을 육면체나 원기둥 몰드 안에서 응축시킨 최근 작업도 형태에 관한 조각적 반전을 함의한다. 텅 빈 공백이라는 주형 내부의 공간을 시각화하는 이 무제의 다면체 조각은 물질과 형태의 연속적인 순환을 떠오르게 하면서, 이 한시적인 존재의 ‘있음’을 증명하는 형태와 무게와 공간에 대한 지각과 인식의 순간을 확장시켜 놓는다. 이번 개인전 《편백나무》(2025)에서 이형우는 하나의 (조각적) 덩어리로 결속시킨 대팻밥을 또다시 해체하여 어떤 형태의 알아차림, 말하자면, 시각적 형태의 (다른) 출현을 보고자 했다.

위 왼쪽 〈완전한 있음〉 철조망 Ø250cm 1997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치 전경 1997 제공: 노화랑
오른쪽 〈무제〉 나무 90×110×110cm 2023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특별전
《모든 섬은 산이다》 전시 전경 2024 사진: 권현정 제공: Bf

아래 왼쪽 《편백나무》 노화랑 전시 전경 2025 사진: 이정우
오른쪽 《오동나무》 노화랑 전시 전경 2020 사진: 이정우

3. 가만히 놓기
2001년 그의 개인전 서문에 평론가 유재길은 「원초적 형태와 사색적 절대 공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테라코타로 제작한 개별적인 형태들을 원의 구조 안에 결속시킨 조각 설치 작업에 대해 이형우는 여전히 〈무제〉라고 이름 붙였다. 철조망에 비하면 한없이 유연한 점토를 주무르며, 그는 물기 먹은 점토를 손으로 빚고 누르고 구부리면서 그것이 최소한의 형태와 공간을 포착하는 순간에 주목했다. “커다란 원형의 바닥에 자연스럽게 놓인 흙덩어리들”이라고 묘사한 서문의 한 문장을 읽으며 나는 포착한 형태들을 공간 속에 배열하고 있는 조각가의 몸을 상상했다. 한 손에 쥘 만한 흙덩어리들을 원의 구획 안에 몸을 구부려 가만히 내려놓는, 조각가의 침묵과도 같은 행위.

이번《편백나무》전에서 작가와 회화적인 평면/표면에 입체적인 질감과 양감을 얹은 〈무제〉 연작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 행위에 대한 나의 물음에 그는 “가만히 놓는다”는 간결한 답을 내놓았다. 완전한 정지 상태의 긴장을 드러내곤 하는 공간 배치의 질서는, 늘 그랬듯이 그 표면적인 침묵 너머에서 스스럼없이 일어나는 형태와 무게에 대한 느슨한 순응에 가깝다. 나무에서 마른 잎이 떨어져 땅 위로 가라앉는 것에 비유하면서 그는 임의의 구역 안에 흔적처럼 내려놓은 형태, 크기, 무게에 대하여 (조각적) 매개자의 수행을 환기시킨다.

이형우는 자연스럽게 서로 응집한 대팻밥을 다시 낱낱으로 떨어뜨려 그 물질 단위 자체를 최소한의 형태로 포착함으로써 회화적 평면과 결속시켰다. 캔버스에 색을 올리고 그 위로 먹이나 물감을 흡수한 ‘나뭇결’을 가만히 내려놓으면 또다시 정면을 향한 사각의 공간과 채색된 질량의 결속으로 그가 다다르고자 했던 비가시성의 가시화, 그러한 시각적 성취를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종이 위에 글자를 적는 행위처럼, 검은 먹을 잔뜩 머금은 붓으로 텅 빈 종이 위에 점과 선을 그리는 행위처럼, 디디-위베르만이 종이 위에 만년필로 ‘쓰는’ 행위에 도달하기 전에 백색(허공의 공백) 두께를 관통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낱낱으로 해체된 대패 나뭇결은 스스로의 체적(體積)만을 가지고 공백의 두께를 가로질러 채색된 사각 틀 위에 내려앉는다.

여섯 개의 면을 가진 육면체라는 틀 안에서 비가시적인 형태의 가능성을 수백 개의 덩어리로 성취했던 것처럼 조각가 이형우는 물질과 형태 사이를 순환하듯 왕복하면서, 또한 응축과 감축, 팽창과 확대 등의 조형적 변환의 개념을 어떤 대상과 공간에 지속적으로 부여하면서, 일종의 현시하는 공간적 틀과 그 모서리에서 출현할 시각적 존재에 대해 상상한다. 이때, 더하고 덜고 가만히 놓기는 그가 스스로 부여한, 형태와 무게와 공간을 가늠하는 최대한의 명백한 행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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