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흥순 IM Heung-soon
자연사적 감각학
-임흥순 새롭게 읽기
Artist
사진 : 반달 BANDAL Doc.
임흥순/ 1969년 출생.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활동하는 영상설치 미술가이자 영화감독으로, 가천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환생》(뉴욕, MoMA PS1, 2015 ),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7 ), 《고스트 가이드》(더페이지갤러리, 2019 ), 2022 타이틀 매치 : 임흥순 vs. 오메르 파스트 《컷!》(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2 ), 《기억 샤워 바다》(제주4 · 3평화기념관, 2023 ) 등 16회의 개인전을 개최했고, 2002년과 2010년 광주비엔날레, 2015년 샤르자비엔날레와 베니스비엔날레, 2016년 타이베이비엔날레, 2018년 카네기인터내셔널 등 다수의 국제 미술행사와 영화제에 초대됐다. 첫 장편영화 〈비념〉(2012 )을 시작으로 총 여덟 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위로공단〉(2014 )으로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려행〉(2016)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판타스틱 관객상을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내 주요 미술관을 비롯해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노르웨이 스타방에르미술관, 아랍에미레이트 샤르자 아트 파운데이션 등의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등대〉 故 김동일이 떠서 만든 132개의 뜨개를 활용한 설치 9개 가변 설치
《임흥순 : 기억 샤워 바다》 제주 4 · 3평화기념관 전시 전경 2023
자연사적 감각학-임흥순 새롭게 읽기
곽영빈 미술비평, 예술매체학
『파도와 차고세일』은 임흥순이 또 다른 영상 작가인 오메르 파스트와 함께 했던 전시《컷!》의 연계도서다. 해당 전시는 북서울시립미술관의 대표 전시로 자리 잡은 ‘타이틀매치’시리즈의 하나로, 책 제목은 두 작가가 내놓은 신작 제목인〈파도〉와〈차고세일〉을 이어붙인 것이다. 여기서 인상적인 건 책의 표지다. 각자가 자신의 신작을 대표하는 이미지라는 데 동의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흥순이 고른 것은 ‘사마귀’로 밝은 노랑과 녹색을 띤 몸체의 상반신, 특히 머리와 왼쪽 다리가 확대되어 있는데, 우리의 주의를 놓고 경합을 벌일만한 다른 이미지나 배경이랄 것은 없다. 그런데 왜 사마귀일까?〈파도〉에서 이 곤충은 영상 카메라와 마이크에 붙은 일종의 불청객으로 등장하지만, 소위 ‘극적인(dramatic)’ 역할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각진 얼굴이 강조된 표지에서처럼 클로즈업 될 때조차, 교미 도중 수컷을 잡아먹는다는 섬뜩한 사실이 전경화되지도 않는다. 이 곤충의 위상과 함의는 어설픈 상징주의가 아니라,〈파도〉를 넘어 임흥순의 작업 전반에서 넓은 의미의 자연이 형성하는 다채로운 지형 속에서만 포착될 수 있다.
가령〈파도〉의 다른 장면에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자신을 “곤충처럼 취급해서”, 즉 “내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짓밟”았다는 베트남 여성의 발언이 나온다. 이는 표지에 등장한 사마귀를 카메라나 마이크 같은 기계나 인공물의 대척점에 선 자연(스러운 것)의 기호로 간주하려는 유혹을 좌절시킨다. 5· 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게 죽임을 당한 아들의 시신을 처음 보았던 때를 더듬으면서, “세상에, 엊그제까지 팔팔했던 자식이, 몸에서 이런 벌레가 나오는데”라고 탄식하는〈좋은 빛, 좋은 공기〉(2018) 속 어머니의 말 또한 이 연장선에 놓인다.
그렇다고 곤충이 부정적인 것의 알레고리인 것도 아니다. 해당 전시 개막을 맞아 가진 공개 대담 행사에서 임흥순은 어린 시절 “유독 움직이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고 운을 떼면서 “움직이는 것이 곤충이었고 자연이었”다고 덧붙인 바 있다. “그때는 단순히 곤충의 움직임이 좋았는데 그 움직임이 저에게 살아있는 것으로 다가왔”으며, “생명, 살아있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자신의 생각은 이때부터 배태된 것 같다고 곱씹으면서 말이다.1 물론 “살아있는 것”과 “생명”에 대한 그의 가치 부여가 그 자체로 놀라운 건 아니다. 그 두께는 유년 시절, 이른바 ‘산동네’였던 답십리에서 그가 목도했다는, 목매달아 자살한 젊은 남성의 시체가 남긴 트라우마의 잔상 속에서 획득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움직이는 것”으로 규정된 곤충과 자연이 그에게 낭만주의적인 ‘삶’과 ‘생명’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그 움직임에서 죽음과 삶을 계속해서 떠올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2 “움직이는 것”은 삶과 죽음 중 하나가 아니라, 그 둘을 동시에 소환한다는 것. 이 점이 중요하다. 베트남 여성을 “곤충” 취급한 한국군과 시신이 된 아들의 몸에서 나온 벌레를 보고 망연자실한 어머니의 입장은, 참상의 반복으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와 증언을 담는 카메라와 마이크에 생뚱맞게 달라붙은 사마귀와 겹칠 듯 미세하게 갈린다.
〈파도〉3채널 FHD 비디오 흑백/컬러 5.1채널 사운드 48분 40초 2022
국적과 시간, 종을 넘나드는 교차에 내재하는 이 미묘한 간극은 그의 초기작인 〈내 사랑 지하〉(2000 )를 일종의 시차 속에 소환한다. 제목이 웅변하듯, 오랜 세월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 캄캄한 지하에서 살던 작가의 가족은 드디어 지상의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갈 수 있게 된다. 말 그대로 ‘볕 들 날’이라 할 수 있을 이사 과정의 흥분과 소회를 담은 이 작업에 대한 일종의 후일담을 우리는 〈교환 일기〉(2015~2018 )에서 듣게 되는데, 이에 따르면 작가의 가족이 기르던 세 마리의 거북이는 임대아파트로 이사 후 얼마 있다 죽어버린다. 장수(長壽 )의 상징이자 염원을 담은 동물의 이 아이러니한 죽음은, 작가의 아버지 역시 형편이 좋아져 이사한 후에 세상을 떴다는 사실은 물론, “거북이처럼 느린 심장을 닮고 싶은데 왜 토끼처럼 빠른 심장박동을 가졌는지 모르겠”다는 작가 자신의 한탄과도 겹쳐진다. 한 장면에서 그는 “당신과 나, 자연과 우리가 함께 부를 수 있는 이런 노래는 어떨까 해요”라고 읊조리는데, 이때 화면에는 생뚱맞게 일본의 괴수 영화에 나왔을 법한 장난감 같은 공룡과 괴물이, 조악한 기계장치를 통해 움직이며 내는 괴성이 들린다.3
인간과 자연의 제자리와 이주, 혹은 자리 옮김을 둘러싼 이 에피소드들의 함의는 사실 〈숭시〉(2011 )에서 이미 감지된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1947년 제주에는 전례 없이 많은 올챙이들 때문에 소와 말들이 물을 먹을 수가 없었다”거나 “바다에서는 멸치잡이 그물에 쥐떼가 걸려 올라왔고, 감이나 동백 열매의 씨앗이 거꾸로 앉았다”, 혹은 “대나무에 꽃이 많이 필수록 그 집의 피해가 컸고, 미친개가 많이 생겨나 사람들이 물려 죽기도 했다”는 문장들을, 으스스해 보이는 풍광들을 배경으로 읽게 된다. 이 얘기들은 2만5000~3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망자를 낳은 4 · 3 사건이 시작된 1947년 제주 여기저기서 목격되었다고 전해진 불길한 자연현상들이지만, 올챙이나 쥐, 또는 미친개나 감 자체가 제주어로 ‘흉사(凶事 )’를 가리키는 ‘숭시’라 하기는 어렵다. 이는 ‘재앙’을 뜻하는 ‘disaster’가 제자리에서 벗어난(dis-) 별(자리)들(aster)을 가리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4
임흥순 × 모모세 아야 〈교환일기〉 단채널 FHD 비디오(스마트폰 ) 컬러 사운드 64분 2015~2018
그렇다면 임흥순은 ‘자연’에게 제자리를 되찾아 주려는 낭만주의자인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그의 작업 전반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일련의 모형, 또는 박제(taxidermy )된 동물을 떠올릴 때 제기된다. 가령 〈교환일기〉에는 방금 환기한 ‘자연사박물관 속 기계 공룡’뿐 아니라, 콘크리트 바닥으로 된 길거리에 수십 마리의 비둘기들이 모이를 먹는 듯한 장면이 나오는데, 자세히 보면 그중 살아 움직이는 비둘기는 단 한 마리뿐이다. 사실 박제가 가장 명시적으로 전경화된 건 〈고야〉(2021 )다. 『파도와 차고세일』의 표지를 장식한 사마귀와 같은 클로즈업을, 〈고야〉는 사슴과 고라니, 청설모와 멧돼지 등 온갖 동물들을 망라하며 보여준다. 약간 과장하면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에 나오는 유명한 부엉이 박제가 떠오를 정도인데, 이는 이 작업이 남과 북의 접경지대인 파주시 장단지역과 ‘생태공원’ 조성 후보지로 꾸준히 언급되는 DMZ(비무장지대 )를 배경으로 삼는다는 사실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고야〉 2채널 FHD 비디오 컬러 5.1채널 사운드 40분 58초 2021
하지만 ‘자연과 인공’이라는 모순과 이항대립은,〈고야〉에서 인터뷰한 두 가지 집단, 즉 장단지역이 고향이었던 이들과 거기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이주해 들어와 살고 있는 주민들이 그리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착하지 못할 때만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다. 이 대립의 허구성은 벌레에게 좀먹은 것으로 보이던 나뭇잎이, 대북방송용 확성기가 있던 건물이 형해화된 결과물인 구부러진 철근 덩어리와 시각적으로 유사하게 병치되는 장면은 물론, 천연의 자연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알려진 DMZ와 인근 지역의 기후 역시 기후위기의 영향 속에 현저하게 바뀌는 중이라는 증언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환기된다. 무엇보다 한국의 그 어느 곳보다 ‘자연 친화적’인 이들 공간에의 출입이, ‘분단’이라는 지극히 인위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을 통해 엄격하게 제한된다는 자명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규정되는 자연’이라는 근원적인 의미에서 이 작업을 벤야민과 아도르노가 따로 또 같이 천착했던 ‘자연사(Naturgeschichte)’적 계보에 귀속시킬 수 있도록 해준다.
〈좋은 빛, 좋은 공기〉 단채널 2K 비디오 컬러/흑백 5.1채널 사운드 110분 2020
2022 타이틀 매치: 임흥순 vs.오메르 파스트
《컷!》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2022
가령 한국의 광주 민주화항쟁과 아르헨티나의 반독재투쟁 과정에서 희생된 실종자들을 병치시키는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우리는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 세력이 자신에게 저항한 수많은 시민들을 비행기에 실어 바다에 떨어뜨려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터뷰에 응한 전문가에 의하면 이중 단 “1% 정도만 해변에서 발견되어 신원 확인이 됐”다고 하는데, 이 장면 직후 곧바로 이어지는 빙하와 눈부신 바다의 영상은 내가 다른 곳에서 “증언과 이미지 사이의 괴리”, 혹은 “페르/소나”라 규정한 문제틀이 임흥순의 작업 전반에서 갖는 무게와 중심성을 오롯이 증명한다.6 즉 이토록 아름다운 산과 바다에서 시체를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얼핏 자명해 보이는 사실을, 임흥순은 그의 초기작인〈비념〉(2012)에서 최신작인〈파도〉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불투명성’, 혹은 ‘역사의 비가시성’이라는 차원에서 꾸준히 세공해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해일을 통해 마을 전체를 깊은 수심에 집어넣었던 구럼비의 물이 갑자기 빠지는 과정에서 바위와 건물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비념〉), 여순항쟁(1948) 과정에서 바다에 수장된 사람들 역시 가시적 기록으로 남겨지지 못했다.(〈파도〉). 이는 가시성과 비가시성, 기억과 증거(의 부재)라는 문제가 임흥순에게 ‘자연’을 매개로, 그러나 지극히 역사적이란 의미에서 ‘자연사적으로’ 탐구되어왔다는 사실을 오롯이 증명한다.
급진적 역사가인 차크라바르티가 적절히 지적한 논점의 연장선에서, 임흥순에게 인간사(Human History)는 자연사(Natural History)와 중첩되면서 분기한다.7 “정당하게 역사라고 불리는 모든 역사는 인간사의 역사”8일 뿐이라 단언하면서, 자연사와 인간사를 철저히 분리하려 애쓴 역사가 콜링우드(R. G. Collingwood)처럼, 인간 없는 자연을 가차 없이 기각하는 이들에게는 “어떠한 바위도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도, 옮겨질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콜링우드와 같은 이들에게 “이는 바위가 그것을 생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심과 언어를 떠나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의 관심과 목적의 맥락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인간적 개념이기 때문이다.”9
임흥순의 작업에 대한 새로운 독해는, 이처럼 사마귀와 동물, 인간과 바다는 물론, 구멍 난 나뭇잎에 근접하는 철근의 잔해와 박제된 동물에 가까운 DMZ 의 생태환경을 아우르는 ‘자연사’적 지평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임흥순 콤플렉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2-2023 작가 조사-연구-비평 사업’의 일환으로 임흥순 작가의 연구서『임흥순 콤플렉스』가 제작되었다. 『임흥순 콤플렉스』는 임흥순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기존의 비평이주제 중심의 분석에 편중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시작하여, 서사와 이미지 연결의 고유성 및 창조성을 구명할 것을 목적으로 삼아 기획됐다. 자료집은 임흥순의 대표 작품 일곱 점을 연구 해제한 하이라이트 7선, 예술 세계를 집약적으로 분석한 네 편의 비평, 1998년부터 2023년까지 26년에 걸친 임흥순의 궤적을 연도별 사건, 활동, 주요 전시, 작품을 중심으로 정리한 아카이브 1998-2023으로 구성되어 있다. 월간미술은 그 중 곽영빈이 작성한 비평의 편집본을 실었다. 이현인이 총괄 기획을, 송가현이 책임 연구를, 우지현이 아카이브 조사·분석·정리를, 권정현이 편집·교정·교열을, 고아침이 번역을 맡았다. 곽영빈, 남수영, 송가현, 아디나 메이, 현지연이 비평과 해제를 작성했으며, 다운라이트 앤 오시선이 디자인 및 제작을 담당했고, 밤과 호두에서 출판했다.
*본 기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2-2023 작가 조사-연구-비평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임흥순 콤플렉스』 자료집의 일부를 재가공하여 수록한 것으로, 월간미술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작가 연구팀의 협력으로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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