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되(려)는
‘이상한 개인’에게
-P.S 선언문을 쓰자
현시원 연세대 교수
Special Feature
미술 작가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오늘날 한국 동시대 미술에서 작가가 되는 길은 점점 다기화(多岐化)되고 있다.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미술계에서 살아남는지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떠돌지만, 여전히 이들은 작가로 성장하는 길이 막연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전국 미술대학에선 매해 3,000여 명의 순수미술 전공생이 배출되는데, 그중 작가로 성장하는 비율은 10%에 미치지 못한다. 과거 미술대학-화랑-공모전 등으로 이어지던 데뷔 경로는 불투명해졌다.
한편 인스타그램 등 이미지 기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포트폴리오 공유모델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지역 문화재단을 중심으로 한 신진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필두로, 다양한 규모의 미술 공간에서 오픈콜, 공모 등을 통한 전시 기회를 제공한다. 지역과 전국을 대상으로 열리는 아트페어도 수적으로 늘어나 작품을 관객에게 선보일 무대도 다양해졌다. 레지던시는 작업 및 발표를 도모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서로 관심사가 다르고 작업 매체도 다른 작가들과의 교류의 장이기도 하다.
본 특집은 이러한 다변화된 작가 등용문을 분류하고 유형화하기보다는 미술계에 발을 디디고 미술계를 지탱하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에게 ‘미술 작가는 어떻게 탄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각자의 반응을 수집하는 방법으로 ‘작가 되기’의 윤곽을 비선형적으로 파악해 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그려지는 지형도는 작가가 되는 방법을 지시하는, ‘무작정 따라 하는’ 교본이 명백히 아니다.
그보다 작가가 되는 여러 경로를 가시화하고, 작가가 되고자 하는 개개인 독자가 자신의 길을 주체적으로 구상하고 설계하도록 하는 참조점이다. 각자의 환경에서 어떠한 마음가짐과 태도로 작업을 구축하고 사회 속에서 자신을 보여줄 접점을 만들고 드러낼지 길을 찾도록 돕는다.
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이들, 작가이면서 교육자, 지망생들이 궁금해하는 레지던시나 공모를 진행하는 기관, 크고 작은 갤러리, 독립미술공간의 디렉터, 지역 미술계의 큐레이터와 작가, 지원제도 운영자, 월간미술 편집팀 등의 이야기를 인터뷰에 담아내어 지금 우리 미술계에서 ‘작가’가 되는 과정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더하여 자기소개글과 포트폴리오 작성법, 아티스틱 리서치 방법론이나 오픈콜/레지던시 리스트, SNS 사용법 등 작가 활동에 유용한 정보를 정리하여 제공한다.
기획 편집부·강재영
진행 강재영
1 작가는 무엇인가: 작업과 행위
작가란 어렵다. 작가 되기는 더 어렵다. 작가 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능한가? ‘작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우리가 향할 수 있는 방향은 어디일까. 그것은 아마도 담론적으로 ‘작가’에 대해 숙고한 목소리와 개별적인 직접 경험을 살피는 일이 될 것이다. 이론과 경험, 성찰과 현장의 관계를 오가는 일이다. 2025년 현재의 영토를 보는 일이 필요하다. ‘작가’란 변화할 수밖에 없는 가변적 정의이기 때문이다.
‘작가란 무엇인가’를 말할 때 한나 아렌트의 그 유명한 분류는 여전히 유용하다. 우리가 행하는 일을 노동, 작업, 행위로 분류한 것 말이다. 『인간의 조건』(1958)에서 한나 아렌트는 노동(Labor)을 생계에 필요한 업무, 작업(Work)을 창의적이며 보람과 재미를 느끼는 일, 행위(Action)를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발화와 소통의 활동으로 보았다.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흑백 영상에서 한나 아렌트는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무척 많이 피워서 걸걸해질 대로 걸걸해진 목소리로, 우정과 삶에 대해 말한다. 문자로 접했던 그의 생각을 목소리의 물성으로 접하면서 나는 작가란 모름지기 그의 분류 중 작업과 행위 사이에 있는 일을 하는 자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을 굳힌다. 작업을 한 후 본인이 아무리 흡족해한다 한들, 사회적 대화로서의 바깥, 필드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작업을 보고 비평하고, 전시하고 기록하는 담론으로서, 작업을 공적으로 만드는 일은 분명한 행위이다.
어떤 작가들은 장(field)의 ‘선수’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변화하는 속도에 맞추어 ‘현재주의’의 가속도를 뛰어넘어 시대의 아이콘이 된다. 더군다나 2025년 지금과 같이 이미지와 상품,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시대에 작가는(미술가는) 가속도로 질주하는 움직이는 동력의 파노라마 자체가 되기도 한다. AI(인공지능)로 인해 영원히 사는 ‘영생의 아이콘’이 되는 듯도 보인다. 한편 한나 아렌트의 다른 책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2019)을 펼쳐 보면서 한 땀 한 땀 수놓은 듯 써 내려간 당대 작가들에 관한 아렌트의 다차원적 시각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아렌트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서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를 살아냈던 여러 작가의 삶과 작업을 비춰낸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 하더라도 어둠을 밝히려고 하는 수많은 삶과 저작(물)이 있다고 말한 아렌트는 소설가, 철학자, 사상가 등의 작업과 행위에 대해,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살았고 시대의 움직임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세계와 공공영역의 투쟁 속에서 무엇을 사유하고 만들었는지에 대해 쓴다.
그는 발터 벤야민이 사후 극도로 유명해진 작가라면서 글 서두에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소문의 여신 파마(Fama)에 대해 적는다. “사후의 명성은 세상 사람들의 무분별이나 문단의 부패 탓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기묘한 것이다.” 맞다. 작가가 한평생 작업을 한다 한들, 당장 필드에서 승인을 받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꿈 세계가 갇힌 순진무구한, 몰입의 무아지경 상태에 빠져, 예술계와 무관해 보이는 ‘나이브(naive)’한 작가로서 활동한다고 해도 자신의 성찰성을 부지불식간에 인식할 수도 있다. 아렌트는 사후의 명성은 동료들의 가장 높은 평가에 따라 이뤄진다며 벤야민이 동료에게 썼던 편지를 인용한다.1
“이미 가라앉고 있는 돛대의 꼭대기에 기어 올라가 난파선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구조신호를 보낼 기회를 갖는다.
—발터 벤야민이 숄렘에게 보낸 편지(1931년 4월 17일자)2
이렇듯 작가 자신이 아닌, 타인–동료의 감식안과 판단력이 그만큼 작가에게는 결정적일 수도 있다. 이것은 모순적이다. 나는 젊은 작가들이나 나이 든 작가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타인의 승인을 받거나, 나의 가능성을 타인에게 묻는 일이 어느 정도 유의미할까 종종 의심하곤 했다. 그래서 멘토라든지, 피드백이라든지, 프로모션이라든지 혹은 1:1 매칭 등이 지닌 단기적이며 불가해한 추동력과 신자유주의적 교환 관계로부터 어떻게 하면 멀어질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지원 기금의 기한 연도를 1년이 아닌 2년으로 확장한다거나, 지원의 ’주체‘에 다른 방점을 찍는다거나, 결과물이 아닌 과정 지향적 제도를 만들어보자는 등의 의견을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현장에서 냈던 것으로 안다. 도대체 어디에서 작가에 관한, 작가를 둘러싼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2 작가의 정의: 개인
다시 정의로 가보자. ‘이미 가라앉고 있는 돛대의 꼭대기에 기어 올라가 난파선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작가(미술가)’로 정의될 수 있을까를 살펴보면서 말이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있다. 작가라는 ‘개인’이 없던 시대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가변적이라는 사실이다. 분야가 미술이든, 소설이든, 음악이든지 간에. 미셀 푸코의「저자란 무엇인가」(1969), 롤랑 바르트가 쓴 「저자의 죽음」(1967)에서도 작가는 ‘창조적 개인’이 아니라 ‘담론을 조직하는 기능’을 하는 사람으로 재정의되었다. 그러니까 개인과 개인의 사이에서, 작가는 텍스트를 읽어내는 독자의 존재와 상호작용하는 각도에서 비치기도 하였다.
한 개인이 기존 시스템을 상대로 벌이는 일종의 존재 투쟁, 힘의 약하고 쎈 것, 작고 큰 것 간 질서를 뒤집는다. 매체적, 물질적으로는 자신의 회화, 조각, 드로잉, 설치, 공간 등으로 구분될 수 없는 특정한 ‘방법론’을 구사한다. 그것은 집단이 공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 개인이 사적인 작업-행위를 통해 공적으로 나아갈 때 발생하는 것이다. ‘작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상길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나로서(부르디외) 그나마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작가의 정의는, 역설적이지만, 사르트르가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18세기의 작가들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성장 환경과 계급에서, 아니 모든 환경과 계급에서 벗어나고, 역사적 상황을 반성적, 비판적으로 인식한다는 단 한 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그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글쓰기는 “매 순간 인간이 역사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움직임, 한 마디로 자유의 행사”나 다름없었다. 어떤가? 당신이 보기에, 나는 작가였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작가였는가?”3
부르디외는 말년에 ‘공공 작가’가 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2025년 현재 생겨나는 문제는 ‘상황을 돌파’하고 ‘자유를 행사’하는 개인 주체가 어떤 방식으로 변모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무엇보다 1960년대 말 롤랑 바르트가 ‘작가의 죽음’이라고 말할 때의 그 ‘개인’은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4 누구나 쓸 수 있고, 찍을 수 있고, 덧붙일 수 있고 태그(tag)할 수 있는 시대에 작가란 어떤 개인/개인들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나의 질문과 연결된다. 즉 개인은 여전히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방대한 양의 데이터, AI와 동행하는 지금 생활에서 개인은 제도, 집단, 공동체 안에서 여전히 주권을 가진 존재일 수 있는지 존재 방식에 관한 의문이 든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동시대’ 작가들은 각각 다른 시간대를 산다. 과거 미술작가들이 시대감각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데 기초했다면, 오늘날 작가들은 자신의 다이어그램을 각각 그린다. 그들은 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20세기와 21세기 초반의 조각, 형상, 생태계, 잔여물들을 탐구하고 그것으로 또 다른 조각물을 구축한다. 아카이브와 아카이브에 반대하는 실천으로서 새로운 지도와 ‘가는 길’을 만든다. 눈앞에 놓인 시각적 형식으로서 회화의 미래를 당대적으로 탐구 수집하여 회화로 된 알파벳(기본 단위), 문법을 창작한다. 자신의 몸을 미디엄 삼아 작업의 안(퍼포밍)과 전시장에서 자신의 생산물들을 관찰한다. 세계화, 지역화라는 이분법적 분류에서 넘어서 가까운 교류를 통해 아시아를 질문한다. 때로 낡은 사진 필름이 매체가 되고 ‘빛’이 재료가 된다.5
나는 작가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 하나의 단위(unit)로서 문제를 발생시키는 사람일 수 있다고 본다. 화가 에이미 실먼(Amy Sillman)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단위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고 말했고, 이어서 자신에게 단위는 ‘문제(trouble)’라고 답했다. 이 문제는 세계가 변하는 속도와 방식에 관한 자신의 질문일 수도 있고, 눈앞에 놓인 작업 재료의 몇 밀리미터 오차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결국 작가는 한 시대의 해답이 아니라, 특정 시간대를 교란하며 지나는 이상한 개인으로 남는다.
3 경험들
끝으로 지난여름 내가 경험한 가까운 사례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글을 시작할 무렵 광화문 교보생명 건물 외벽에는 최승자의 시가 붙었다.
“이상하지,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최승자 〈20년 후에, 지(芝)에게〉중
시의 문구보다 ‘20년 후’의 누군가에게 보내는 제목이 기억에 남았다.
경험 1. 마치 편지처럼 보이는 말투로 쓴 김환기의 일기는 칼에서 붓으로, 자신의 매체를 재결정하려는 결심의 순간이 드러난다.
“[…] 역시 붓을 써야겠어. 칼로 완성했던 것 다시 붓으로 고쳐요. 동양 사람의 체질은 역시 모필(毛筆)이 맞고 거기서 미묘감(微妙感)이 오는 것 같아. 어제는 어쩐지 뒤숭숭해서 거리에 나갔지. 우연히 레이몬드(Raymond)라는 화가를 만났어. 내 스케치북을 보였더니 경이적인 태도였어. 너무 동양적인가? 물었더니 그렇지 않대. 대단히 오리지널하대. 쬐끄만 작품이 우주감(宇宙感)을 준대. 묘한 색깔이래. 가다가 진지하게 내 그림을 보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기쁘고 용기가 나요. 나 우선은 다작(多作)보다도 알뜰한 그림을 만들래. 금년은 4, 5폭에다 정열을 쏟을래”
—김환기의 일기(1963년 12월 11일자) 중6
자신의 그림을 보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기쁘고 용기가 난다는 작가. 김환기는 레이몬드라는 이름의 화가를 만났고 그가 말한 ‘우주적인 깊이’에 탄복하며 ‘알뜰한 그림’을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일기를 쓴 1963년 12월 11일은 아마도 이제 막 뉴욕에 당도했을 때이다.
오늘날, 가장 비싸게 팔리는 작품의 창작자가 된 김환기. 나는 인공지능과 대화하고 질문하느라, 미래에 ‘인간 사이의 대화’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 과학자가 전망하는 시대에, 그가 거리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와 나눈 대화에서 촉발된 감각으로 ‘용기’를 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한다. ‘뒤숭숭하다’고 짧게 표기된 단어 하나 안에, 작업하기의 불투명함과 낙망, 좌절과 갈등의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으리라 생각한다.
경험 2. 2025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기획한 다니엘 무지추크(Daniel Muzyczuk)의 강연 ‘천사와 악마들. 조율과 세계 건설’을 듣게 됐다. 단지 슬라이드 몇 장으로 구성된 강연이었지만, 작가가 되려는 ‘이상한 개인(들)’을 위한 강령처럼 느껴지는 흥미로운 강연이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실과 비현실이 같이 간다.
폴란드 우치에 있는 슈투키박물관 디렉터인 그는 미술관 소장품을 기반으로, 작가들이 파헤쳐놓은 비현실의 공간을 구조화했다. 즉 악보처럼 보이는 드로잉을 도판으로 보여줌으로써, 이것이 구체적인 스코어(악보)로도 기능하면서, 동시에 연주하지 않은 잠재성의 상태에서도 독립성을 획득하는 상태로 보였다.
둘째, 디테일과 큰 그림이 동시에 있다.
추상에 대한 감각으로서 큰 그림은 설명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 팍 치고 들어가는 디테일에서 온다. 디테일은 오랜 친구이기도 한 작가 문성식이 조선시대 화가 정선의 그림을 스스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내게 들려준 단어이기도 했는데, 강연 안에서도 음악과 회화의 관계, 천사와 악마라는 거대한 수사가 구체적인 작업을 통해 이해되는 순간이 있었다.
셋째, 물질성이 있었다.
강연 도중 들려주는 사운드와 도판의 물질성, 인공지능이 만들어주는 어수룩함이 없는 프로페셔널한 프레젠테이션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물질성이다. AI와 협업, 함께 살기, 국가는 전국민을 ‘AI 전사’로 만들겠다고 선포했지만, 이 선포가 뛰어난 손가락과 말할 수 없는 암묵지에 의해 생겨난 피아니스트의 시간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넷째, 구체적인 인용이 있었다.
정확함의 표상이자 지금 눈앞의 것이 다른 시간대로 연결되고 물 건너 이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격차로서의 인용. 그는 피타고라스를 인용했던가? 반드시 인용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따옴표를 밝히는 구체성으로서 대상에 대한 음영이 생긴다.
다섯 번째, 학제 간 융합이 있었다.
‘학제 간 융합’이라는 말은 하나의 유행어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 하지만 아방가르드와 뮤제올로지(Museology), 작가의 드로잉 작업 사이를 오가면서 ‘간 학제적’인 문틈을 열어젖히는 것이 있었다. 때로는 닫아버려도 상관없다.
그 외에도, 이 강연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설명하지 않고 구조를 보여주는 점이었다. 작가들의 작업을 살아있게 만드는 신선함과 명료함의 기술은 작가가 사회와 감각을 관통하는 지성으로서 유의미한 작업을 만들어 나가는 하나의 ‘선언’이자 ‘추신(post script)’이다.
작가 미엘레 래더맨 유켈리스(Mierle Laderman Ukeles)가 쓴 「메인터넌스 예술 선언문」7처럼, ‘나는 예술가이고 나 자신이고 엄마이고 집안 청소를 하는 사람이고…’ 라는 자신의 목소리를 다듬지 않은 채로 내뱉을 힘도 필요하다. 작가가 되(려)는 매 순간 자신의 작가로 갱신되고 있는 ‘개인’이 쓴 선언문이 가진 애매한 명료함의 힘을 믿는다.
끝으로 이 이해 불가능한 사건과 방향으로 점철된 2025년에도 여전히 ‘작가가 되(려)는 ‘이상한 개인’에게 편지를 쓰고도 싶었다는 마음을 덧붙인다. 많은
편지가 사실은 자신에게 들려주고픈 일기이며, 그것이 끝내 출판되거나 발송되지 못한 대화였지 않을까. 덜 이기적이고, 덜 상투적이며 제도에 맞서면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이상한 개인’이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또한 믿어본다.
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한길사 2019 p.273
2 위의 책 p.299
3 이상길 『상징 권력과 문화 부르디외의 이론과 비평』 컬처룩 2020 p.386
4 현시원 「‘개인’의 위치: 2010년대 미술가/개인의 존재 방식과 사회적 발언」 『근현대미술사학회 논문집』vol.36 2018 pp.285~305
5 이 단락은 2023년 초 내가 쓴 메모에서 왔다. 첫째 한국미술과 인터내셔널의 관계, 1990년대 한국이 ‘제3세계’의 대안을 찾았다면 오늘날 어떤 영토와 독립성을 관계로서 ‘현재’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수많은 정보와 속도 과잉 속에서 미술이 삶의 방법론을 바꾸고 사회와 협응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식은 무엇일까. 셋째 이미지, 데이터와의 관계. 큐레이터로서 전시 만들기와 연구의 관계. ‘연구’라는 말을 새롭게 하기. 22세기 미술은 동시대 현실 사회의 변화 안에서 어떤 힘 있는 언어를 발굴해낼 것인가
6 환기미술관 편 『Whanki in New York : 김환기의 뉴욕일기』 환기재단, 환기미술관 2019 pp.18~20 목표로 해야 할 것인가. 둘째 현재는 언제인가의 문제. 과거와 미래의
7 https://queensmuseum.org/wp-content/uploads/2016/04/Ukeles-Manifesto-for-Maintenance-Art-196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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