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로 가는 질문들

노상호·류성실·신민·민예은·이두원
Interviews

강재영 기자

Special Feature

작가를 포함하여 미술계에 걸친 총 여덟 주체에게 작가로 가는 길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여기엔 작가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질문뿐 아니라, 작가가 되기 위해 마주해야 할 여러 관문을 어떻게 통과해 나가야 할지 묻는 현실적인 질문도 있다. 작가를 키우는 아카데미, 레지던시, 미술관, 독립공간 등의 주체와 지역 미술계를 지탱하고 있는 이들, 또한 지원 제도 담당자와 월간미술 편집팀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작가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여러 갈래의 선택 속에서 길을 열어간 사람들은 각기 다른 순간에 ‘작가’라는 이름을 자각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예비 작가들에게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참조점이자, 자신만의 길을 찾을 용기를 건넨다.


노상호 〈더 그레이트 챕북 3〉 캔버스에 유채 117×91cm 2025

노상호

언제 처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나?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다. 그림 노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고3 때 갑자기 떠올랐고,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창작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때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다. 미술 자체에 관심이 생긴 것은 싸이월드나 웹사이트 등을 통해 즈지스와프 벡신스키(Zdzisław Beksiński)와 제니 사빌(Jenny Saville)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였다.

‘나도 이제 작가구나’라고 자각한 때는 언제였나? 그 계기가 있다면?
대학교 4학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우스갯소리나 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와중에 나를 스스로 증명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사람을 설득할 수 있어야 무언가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전시를 준비했다. 마침 동기였던 김동희가 학교 안에서 몰래 운영하던 공간 ‘프리홈’의 제안을 받아 그곳에서 첫 전시를 하게 되었다. 그 전시를 즐겁게 본 한 친구의 제안으로 다른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고, 또 그 전시를 재밌게 본 비평가가 다른 전시를 제안했다. 특정한 계기라기보다는 전시와 제안이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등단’을 하고 있던 셈이다.

《젊은 모색 2014》(국립현대미술관)에 참여할 때, 운송 기사님이 내 작업을 스펀지까지 깔아가며 정성스럽게 다루는 모습을 보고 ‘나도 이제 작가구나’하고 생각했다. 미술관에서 ‘작가님’이라는 존칭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작가가 되기 위해 해본 것 중 추천할 만한 일이 있다면?
작가와 기관, 전시에 관한 리서치다. 작업을 하다 고민에 빠질 때 나보다 먼저 고민했을 사람들의 결론이나 행보가 궁금해 리서치를 한다. 작업과 연관된 선택이나 커리어 패스를 고민할 때도 리서치가 큰 도움이 된다. 리서치는 끊임없이 나의 선생을 찾는 일이다.

작가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작업의 완성도나 내용뿐 아니라 ‘직업’으로서 내 삶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 고민할 때 리서치를 주요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작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실행력이 아닐까. 하고 싶은 것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힘, 꾸준히 애정을 갖는 태도 모두 실행력에서 비롯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그림을 그려야만 다음 그림으로 나아갈 수 있고. 전시 또한 열어야지만 고민하던 주제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계속하는 사람, 곧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레지던시, 오픈콜, 기금 신청 준비의 노하우가 있다면?
예를 들면 내가 10m 폭의 공간을 한 번도 활용해 본 적이 없거나 그만한 크기의 작업을 만들어보지 않았다면, 그 정도 규모의 공간에는 지원하지 않는다. 내가 그 정도 규모를 소화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지원하는 편이다. 기금 규모도 마찬가지이다. 5000만 원을 써본 사람이 되어야 5000만 원의 기금을 타기 쉬워진다.

마치 ‘경력 만들 곳은 없는데 경력자만 뽑는’ 상황처럼 허망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다만 10m의 공간을 써본 적 없어도 포트폴리오에서 10m의 공간을 채울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5000만 원을 써본 적 없어도 이 사람은 5000만 원 정도는 알차게 쓸 것 같다는 인상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떨어지는 것이 문제는 아니지만, 떨어지고 나서 멘털 관리가 힘들다면 작업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진 작가로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지원 제도는 무엇이었나?
난지창작레지던시에 입주한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공간을 선배 작가들과 함께 사용하면서 들은 조언과 함께 나눈 대화가 지금도 종종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며 뒤늦게 공감되는 부분도 많다.

작가로 생존하기 위한 본인만의 방법은 무엇인가?
늘 시각예술과 관련한 다른 일을 병행해 왔다. 일러스트레이터, 아트디렉터, 3D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익힌 기술과 경험은 내 작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현실적인 팁이 있다면?
전시를 겁내지 말라는 것이다. 잘 정리되고 완결된 뒤 전시해야 한다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순간은 오지 않는다. 전시 자체가 작업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또한 전시를 ‘기다리는 태도’도 경계해야 한다. 공모에 뽑히지 않거나 기금이 지원되지 않으면 전시를 못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주 작은 공간이라도, 작업실이나 집이라도 전시는 가능하다. 전시라는 행위 자체에서 나오는 힘이 있다. 그것조차 어렵다면 온라인 전시라도 시도해 보길 권한다.


류성실

언제 처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나?
사실 선언이 먼저였고, 실제로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보다 뒤였다. 내가 예고에 갓 입학했을 당시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잘나가던(?) 장래희망은 디자이너 아니면 작가 두 가지였다. 그때 나의 진실된 꿈은 부자랑 결혼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었지만, 솔직하게 말하기가 어려워 얼버무리듯 ‘나도 작가가 되겠다’고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 정작 작가가 뭘 하는 건지도 잘 몰랐는데, 나중에는 ‘작가가 되겠다’는 친구 무리랑 어울리면서 점차 나도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다. 당시에는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이나 ‘더호러스(The horrors)’ 같은 밴드를 좋아했고, 그 경로로 알게 된 크리스 커닝햄(Chris Cunningham)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나도 이제 작가구나’라고 자각한 때는 언제였나? 그 계기가 있다면?
갓 대학을 졸업하고 운 좋게 작가 콜렉티브(이자 나의 친구들이기도 한) 업체(eobchae)를 통해《미러의미러의미러》(합정지구, 2018) 전시에 끼어든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작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처음엔 겸연쩍었는데, 지금은 익숙해진 것 같다. 오히려 최근 반년간 작업을 쉬고 다른 일들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역설적으로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수시로 깨닫곤 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 해본 것 중 추천할 만한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주변을 보면 꾸준함이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나는 꾸준히 해내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다만 몇 년 전 ‘이 일을 계속할지 말지’를 고민하면서 스스로 다짐한 게 있다. ‘재미없으면 하지 말고, 해야 하면 재밌게 하자’는 거였다. 작업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다 보니 영 재미가 없어져서 올해는 작업 대신 다른 걸 많이 하고 있는데, 작업보다 싫은 일을 매일같이 하려니까 요즘은 작업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가장 재밌다.

작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도 모르겠다. 꾸준함?

레지던시, 오픈콜, 기금 신청 준비의 노하우가 있다면?
주변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지원금/레지던시 소식을 공유하면 그걸 보고 같이 썼다. 방법을 잘 모르던 시절에는 친구들이랑 피드백을 나누는 과정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레지던시·기금·오픈콜에 떨어졌을 땐 어떤 마음이 들었나?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떨어질 만한 것들만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신진 작가로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지원 제도는 무엇이었나?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프로그램은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고 기뻤던 건 학부 졸업 후 처음 받은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이다. 200만 원을 지원받았는데, 작업의 구상, 구현에 큰 동기부여가 됐다.

작가로 생존하기 위한 본인만의 방법은 무엇인가?
특별히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시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요즘은 재미를 잃지 않고 살아갈 방법을 고민한다. 얼마 전부터 집 앞에서 땅콩빵을 팔기 시작했는데, 일상이 대단히 즐거워졌다. 한 봉지 만 원, 두 봉지 만팔천 원인데 손님들이 사주면 눈물 날 만큼 고맙다. 누군가 내게 돈을 줘서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 게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요즘은 땅콩빵 옆에 무화과도 쌓아놓고 같이 판다. 무화과는 한 박스에 이만 원(영암 산지 직송)이다.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현실적인 팁이 있다면?
작업 아카이빙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 종합소득세 같은 세금을 내야한다는 것,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몸은 소모품이라는 점. 이런 사실들을 나는 몰랐던 것 같다.


신민

작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자기 작업을 좋아하는 것. 미술계는 기획부동산 같은 측면이 있어서, 나만은 내 작업을 좋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리저리 휩쓸리다 이른바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와서 공허해진다. 공허해지지 않으면 계속 버틸 수 있다.

레지던시·기금·오픈콜에 떨어졌을 땐 어떤 마음이 들었나?
심사는 인간이 하기에 이해충돌인 경우도 많고 공정하지 않은 경우가 시쳇말로 ‘드럽게’ 많다. 하지만 심사하는 사람도 대부분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위태위태한 아트피플이다. 내버려두고 묵묵히 내 형편에 맞춰서 하고 싶은 작업을 하다 보면 누군가 알아봐 주리라 믿는다.


민예은 〈완벽한 세계〉 혼합 매체 가변 크기 2025
《완벽한 세계》 금천예술공장 전시 전경 2025

민예은

언제 처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나?
어릴 때부터 화가가 꿈이었다. 그러던 중 수학책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을 보게 되었는데, 화가로만 알던 다빈치를 과학과 수학의 영역에서 다시 만난 경험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것만으로는 작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 끝에 공과대학에 진학했지만, 미술에 대한 열망은 여전했다. 결국 프랑스로 유학을 결심했고, 학업을 이어가면서도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마음가짐으로 교수들이 내준 과제를 두세 배씩 해내곤 했다.

‘나도 이제 작가구나’라는 걸 자각한 때는 언제였나? 그 계기가 있다면?
대학원 마지막 학기, 교수님이 모셔온 외부 전문가와 대화를 나눈 것이 인연이 되어 졸업 한 달 만에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됐다. 거주 가능한 작품을 만드는 ‘카반 프로젝트’였다. 갓 졸업한 학생에겐 흔치 않은 기회였고, 여기에서 〈가구오두막〉을 선보였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의 디렉터, 평론가, 큐레이터, 작가, 교수 등 다양한 전문가들을 만났고, 그들이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면서 비로소 내가 작가가 된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스스로 선언했을 때보다 누군가가 인정해줄 때 더 강하게 작가라는 사실을 느낀다.

작가가 되기 위해 해본 것 중 추천할 만한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나는 나름의 멘토와 롤모델을 두었다. 그분들은 자신이 롤모델이라는 사실을 모를지라도 말이다. 대화 속에서 중요하다고 느낀 부분은 반드시 메모했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는 “이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떠올리며 해결책을 찾았다. 또 전시를 준비할 때마다 “이번 전시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라는 각오로 임했다. 후회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들이 자연스럽게 다음 기회로 이어졌다.

작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작가 활동은 단순히 작품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구상과 제작, 전시 준비와 실행,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정 속에서 수많은 관계가 형성된다. 그 관계들은 나로 하여금 더 넓게 생각하고 상대를 배려하며 의견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했다. 또한 변화와 한계 속에서 어떻게 타협하고 해결할 수 있는지도 알려주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깨달은 가장 중요한 태도는 마음의 여유다. 조급할 때는 보지 못하고 놓치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흘려보내는 선택이 의외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결국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동시에 상황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라고 생각한다.

레지던시, 오픈콜, 기금 신청 준비의 노하우가 있다면?
나는 매해 지원한 레지던시·오픈콜·기금 신청서를 모두 보관한다. 종목별·연도별로 정리하고, 파일명 옆에 합격 여부를 표시한다. 이후 선정·탈락 이유를 비교 분석하며 서류를 계속 보완한다. 물론 모든 결과가 서류만으로 결정되진 않지만, 타당성을 어떻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기관의 서류 포맷에는 평가 기준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 반영해 내용을 충실히 쓰려고 하지만, 설명이나 설득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평소에도 주변에 조언을 구하고, 포트폴리오 리뷰나 피드백 기회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신진 작가로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지원 제도는 무엇이었나?
특히 레지던시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동료 작가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관계자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할 귀중한 기회였다. 혼자 고민하던 문제를 나누며 공감하고, 조언을 주고받는 과정이 내 작업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2015년 뉴욕주에서 열린 트라이앵글 아티스트 워크숍은 내 미술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25개국의 작가들과 교류하며 시야가 확장되었고, 지금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해외 프로젝트는 기금 없이는 참여하기 어렵기에, 기금은 안정적인 활동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레지던시·기금·오픈콜에 떨어졌을 땐 어떤 마음이 들었나?
나 역시 여러 번 떨어졌다. 심지어 경력이 두터운 작가들도 생각보다 탈락 경험이 많다고 했다. 선정된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때마침’이라는 요소도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정 시점에 기관이 원하는 성향의 작가상과 본인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실패에 더 냉정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늘 두 방향으로 계획한다. 선정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 선정되면 계획대로 진행하고, 떨어지면 오히려 공부와 작업 정리의 기회로 삼는다. 이렇게 하다 보니 실패의 후유증은 점점 줄었고, 다음을 준비하는 힘으로 전환되었다.

작가로 생존하기 위한 본인만의 방법은 무엇인가?
아이들과 지내는 것을 좋아해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는 아동 대상 강의를 많이 했다. 지금은 작품 판매, 강의, 아티스트피 등이 주요 수입원이다. 동시에 생활에서는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절약하는 습관을 유지한다.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현실적인 팁이 있다면?
잘 풀리지 않을때 어떻게 보낼지가 중요하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기회가 이어져 지식을 쌓는 시간으로 보냈지만, 더 일찍 알았다면 여유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불안에 시달리며 시간을 낭비했다. 미리 준비한다면, 잘 안 풀리는 시기조차 자기 발전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고 불안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두원 〈Moonlit Night: Tiger and Frog〉 울 위에 혼합 매체 175.3×96.5cm 2025

이두원

언제 처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나?
2살 때 이모가 유학 중이던 프랑스 낭트의 시골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부엉이가 많은 숲 근처에서 부엉이의 집과 춤추는 모습을 상상해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렸는데, 한국에 돌아와 보여주자 모두들 칭찬해주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받은 강렬한 인정이었다. 더 많은 칭찬과 주목을 받고 싶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그림과 시 쓰기에 몰입하게 되었고, 그것이 작가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나도 이제 작가구나’라고 자각한 때는 언제였나? 그 계기가 있다면?
2006년 대흥동 갤러리 소굴에서 연 단체전《그리고 쓰다》에서 작품이 모두 판매되었을 때였다. 그림과 바꾼 300만 원의 감격은 잊을 수 없다. 그 돈으로 인도와 네팔을 여행하며 현지의 재료로 80여 점을 제작했고, 귀국 후 같은 공간에서 첫 개인전 《슬프게 화가 난다》를 열었다. ‘열받는다(Anger)·날아간다(Flying)·태어난다(Birth)’라는 의미를 담은 제목처럼, 그 전시는 나를 작가로 각인시킨 순간이었다. 이후 그림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첫 레지던시인 이중섭 창작스튜디오에 입주했고, 자연 속에서 작업하며 교류한 인연으로 상업 화랑 개인전까지 이어지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작가가 활동을 지속하게 한 힘이 있다면?
나의 길은 등반가가 산을 오르내리며 루트를 개척하는 과정과 닮았다. 수많은 시도와 실패 속에서 재료와 색감, 구도를 스스로 찾아야 했다. 고독할 때도 많았지만, 배고픔이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다. 호랑이가 사냥 전 힘을 비축하듯, 나는 머릿속 이미지를 폭발적으로 쏟아내야 했다. 성공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 과정 자체가 길을 열어주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시각을 지키며,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가는 태도다.

레지던시, 오픈콜, 기금 신청 준비의 노하우가 있다면?
내가 겪어본 건 레지던시 면접과 포트폴리오 심사였다. 그 과정은 입시미술처럼 일정한 공식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어렵고 학구적인 단어로 작업을 포장하거나, 상업적이지 않아 보이기 위해 아트페어 경력을 지우기도 했다. 나는 이런 방식을 배제했다. 작업계획서에도 “내일 무엇을 그릴지도 모르는데 1년 계획을 세운다면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라고 솔직하게 적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포장이 아니라 지금의 작업과 태도에 정직하게 임하는 것이었다.

레지던시·기금·오픈콜에 떨어졌을 땐 어떤 마음이 들었나?
며칠간은 슬프고 화가 나지만, 결국 믿어야 할 것은 자신의 작업이다. 나는 화가를 야구 투수에 비유하곤 한다. 한 경기에서 무너질 수 있지만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구속이 안 나오면 제구를 다듬거나, 구종을 늘려 극복할 수 있다. 슬럼프에 빠져 시간을 흘려보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작가의 선택이다. 중요한 것은 재능보다 멘털, 꾸준한 노력, 자기 작업을 객관화할 수 있는 메타인지 능력이다. 실패는 다음을 준비하는 과정일 뿐이며, 그 속에서 작가는 단단해진다.

신진 작가로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지원 제도는 무엇이었나?
사실 나는 자력으로 버틴 경우가 많아 외부 지원 제도의 혜택을 크게 받아본 적은 없다. 그래서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지원서를 쓰는 시간보다 작업일지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자생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외부 지원이 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주가 되고 작업이 부차가 되어버리면 주객이 전도된다. 결국 스스로 작업을 지속할 힘을 기르는 것이 가장 큰 자산이다.

작가로 생존하기 위한 본인만의 방법은 무엇인가?
화가의 삶은 달콤하게 포장된 길이 아니다. 야생에서 스스로 성과를 내고,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며 각자도생해야 한다. 좋은 기회는 흥미로운 삶과 작품이 어우러질 때 찾아온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붙잡아 커리어를 오래 유지하는 것이다. 사실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다. 후배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팁이 있다. 작품을 판매할 때 아무리 돈이 급해도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 한 점은 반드시 남겨두라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그 가치는 열 배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을 ‘그림의 고금리 대출’이라 부른다.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팁이 있다면?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유명 작가나 인맥 네트워크는 프리랜서에게 소속감과 안정감을 줄 수 있지만, 결국은 자신의 작품으로 승부해야 한다. ‘셀럽 작가’가 목표가 아니라면 인간관계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 좋다. 둘째, 요리사가 자기만의 재료와 조리법을 갖듯, 작가도 자력 발전소를 만들어야 한다. 자기만의 언어와 방식을 구축해 두는 것이 긴 호흡의 작업과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


노상호는 홍익대 판화과 학사, 서울과기대 조형예술과 석사를 졸업했다. 인터넷·매체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카본지 드로잉과 회화로 재조립하는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홀리》(아라리오갤러리 서울, 2024), 《The Great Chapbook II》(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2018) 등이 있으며, 《젊은 모색 2014》(국립현대미술관, 2014) 등에 참여했다.

류성실은 현대 물질주의적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을 탐구하며, 한국의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양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독특한 블랙 코미디 스타일을 활용하여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로 문화 현상을 재해석한다. 2021년 제19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받았다.

신민은 서비스직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종이 군상을 통해 재구성한다. 감자튀김 포장지 위에 그려진 검은 머리망을 한 여성 노동자들은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 각자의 노동을 주장한다. 2025년 아트바젤 홍콩의 MGM 디스커버리 아트 프라이즈를 받았다.

민예은은 프랑스 클레르몽 메트로폴 고등 미술학교 순수미술 학·석사를 졸업했다. ‘집’의 기호와 물질성, 실내/실외 · 물질/사고 사이의 경계가 흐릿한 공간과 비선형적 시간을 시각화하는 설치 작업을 한다. 주요 개인전으로 《예측할 수 없는 투명함》(대안공간 루프, 2019) 등이 있으며, 다수 단체전에 참여했다.

이두원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세계를 여행하며 경험과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한다. 천연 직물 위에 밑그림 없이 선을 그려내는 실험적 회화로 알려져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 《Doowon and the Golden Fish Submarine Arrive in New York》(ACA 갤러리, 뉴욕, 2025) 등이 있으며, 뉴욕 아모리쇼, 키아프 서울 등 국내외 아트페어와 기획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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