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고: 시대의 전유와 점유
김봉태 전현선 박경률 윤영빈
Special Feature
이 장에서는 회화 작업을 지속해 온 작가 4명의 글을 소개한다. 작가들은 디지털 기반의 다양한 매체가 범람하는 오늘날, 여전히 붓과 안료로, 손과 몸으로 행위의 흔적을 화면에 남기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전달한다.
색의 경이로움
김봉태 작가
〈그림자연작 79-16〉캔버스에 아크릴릭 100×127cm 1979
〈그림자연작 기념비 I〉캔버스에 아크릴릭 121×76cm 1979/2015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며 오티스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당시 미국 서부의 강렬한 빛, 그리고 원시미술의 기하학적 시각 언어로부터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1960년에 한국 초기의 앵포르멜 영향을 받아들여 추상표현주의적인 작품을 실험했으며 이후 기하학적 조형을 중심으로 작업을 전개해 나갔다. 나는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 근본적인 교차점을 찾고자 했으며,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이어갔다. 이를 반영한 〈그림자 연작〉(1960년대 중반~1980) 작업에는 공간과 공간을 나누는 수평선을 기준으로 기하학적 형태와 그림자가 어우러진다. 그 후〈비시원 연작〉(1980년대 초반~1990년대)을 통해 한국의 전통적인 상징 오방색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동양 사상과 서양의 기하학적 접근을 결합해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미적 요소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관념이라는 거대서사적 관점이 색과 면이라는 회화적 기본 요소로 전환되었을 뿐만 아니라 회화와 조각의 중간단계인 독립적 입체 조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비시원 연작〉 이후 색채와 형태를 독창적으로 엮어내어 시각적으로 더욱 다채로운 표현을 추구하였고 이러한 탐구는 〈창문 연작〉(19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으로 이어진다. 다양한 사각형의 색면과 주변을 감싸는 테두리는 입체감을 지니며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연결된 형태로 배열되어 창문의 격자 구조를 연상시킨다. 특히 테두리는 사선으로 색이 나뉘어 동적이면서 각 요소 간의 관계를 부각하고 색면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는 관람자에게 마치 각각의 색면으로 만들어진 창문을 통한 미지의 세계, 그리고 시각적 경험과 삶의 방향이 바뀔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단순한 회화를 넘어 경험적 공간을 창조한다.
2000년대 후반부터 변화된 〈춤추는 상자〉(2000년대 중후반)와 〈축적 연작〉(2010년대~)은 기하학적 추상 형태보다 구상적으로 접근하고 빛을 투과하는 플렉시 글라스의 반투명한 특성을 활용하고자 했다. 빛이 재료를 투과하면서 생성된 색상은 시각적 상호작용을 통해 3차원적인 상자의 입체성을 더욱 강조하고 공간의 개념을 심화시켰다. 이를 통해 일상 속에서 무심히 간과했던 박스라는 사물에 독창적으로 접근하여 사물과 공간을 새롭게 바라보고 일상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긍정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나는 평생의 작업 대부분에서 색채와 형태, 선에 의한 기하학적 형상을 탐구해 왔다. 이러한 기하학 형태, 선에 형상은 화면에서 평면성보다 입체성을 띠는 회화로써 추구됐다. 그러므로 나의 작품은 회화와 조각 사이에 있으며 2차원성과 3차원성,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016년에 나의 개인전을 기획한 박수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기획의 글에 “그의 작업은 한국 미술계에서 드물고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조류에도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조형을 이루고자 하는 치열한 작가 의식과 종국에 도달하게 되는 자유로움이다”라고 썼다. 나에게 색은 그 자유로움 속에서 경이롭고 긍정적인 힘으로 연결해 주는 생명과도 같다.
본 원고는 김봉태 작가가 《한국 현대미술 작가 시리즈 김봉태》(2016.5.25~7.10) 전시 기획글(박수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제21회 이동훈미술상 본상 수상작가전 김봉태》(2024.8.6~9.22) 전시 기획글(허혜지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및 작가 인터뷰를 기반으로 작성했다.
그림, 그림이라는 세상, 붓을 든 손
전현선 작가
1 캔버스를 어떤 ‘세상’이라고 가정해 본다. 편평하고 넓은 대지가 있다. 그런데 그 땅은 무한하지 않다. 사면이 경계로 둘러싸여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상의 끝이 존재하고, 그다음은 추락이다. 뒷면도 존재하지만 뒷면은 존재하지 않는 땅으로 여겨진다. 이 하얗고 넓은 대지를 수직으로 세운다. 그러면 이 낯선 세계가 그것의 물질적인 조건과 한계를 지우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그 가능성은 같은 양의 두려움도 데려온다. 나는 흰색 앞에서 본능적으로 생기는 두려움을 애써 모른 척하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몇 개의 선을 긋는다. 이 선들은 내가 구축할 화면의 기초가 된다. 빨래를 널기 위해 빨랫줄을 치듯이. 2차원의 평면에 붓으로 선을 그었는데 그것은 3, 4차원 정도로 내 머릿속에서 진화하고, 내 눈과 손은 그 진화 과정을 따라가기 위해 부지런히 시간에 쫓기듯 움직인다.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누군가는 더 고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비교적 수월한 삶을 살듯이 그림도 각각의 운명을 지닌 듯이 천차만별이다. 그렇다고 뭐가 좋고 나쁘다는 구분이 없다. 어떤 규칙을 세울 수도 없다. 때론 어렵게 완성해 나간 그림이 좋을 때도 있고, 막힘없이 순식간에 그려 낸 그림이 좋을 때도 있다.
그림의 완료 시점을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컵에 물을 거의 다 채운 후에, 긴장하면서 조금씩 더해가는 심정이다. 그렇게 그림을 마무리해 나갈 때 갑자기 아쉬움이 몰려온다. 하나의 캔버스가 가진 한계인 그 면적, 어찌 되었든 그 주어진 크기 안에서 표현이 일단락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시점에 이 캔버스를 다른 캔버스와 연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후속편에 넘기는 영화들처럼. 나도 무턱대고 또 다른 캔버스에 잔가지들을 넘긴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그림은 한 점 한 점 늘어난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아 포토샵 속에서 가상의 조합을 시도한다. 직사각 형태로 생성한 판 위에 그간 그린 그림들의 이미지를 얹고 크기를 알맞게 조절해 퍼즐을 만들어본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정답을 찾아 헤매는 느낌이다. 최선과 차선을 반복 또는 번복하는 사이에 그림의 조합이 어느 정도 결정된다. 그리고 나는 상상해 본다. 실제 공간, 실제 벽, 실제 크기, 실제 그림이면 어떤 느낌일지 머릿속에 떠올려본다. 컴퓨터 속에서는 뭐든지 가능하지만 현실로 끄집어내려면 많은 제약이 따르고, 물리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처음으로 무릎 인공관절을 개발하는 개발자의 심정으로 캔버스들을 연결하여 세울(또는 눕힐) 장치를 고안한다. 최대한 예쁘고 세련된 형태를 떠올린다. 그런데 사실 이 장치들은 그림이라는 주인공을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고 뒤로 물러나서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전시의 오픈을 앞두고 작업실이라는 온실 속에 있던 그림들은 마침내 전시 공간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던져진다. 그리고 사고실험으로만 시도해 봤던 회화-설치를 공간에 구현한다. 캔버스 한 개는 혼자 서 있을 수도 없을 만큼 나약하지만 두 개 이상이 되면 달라진다. 나는 0에서 1보다 1에서 2로의 변화를 더 좋아한다. 캔버스 두 개는 연결 장치의 도움을 받아 각도를 이루며 공간 속에 스스로 선다. 그리고 세 개부터는 독특한 형태까지 이루어 나갈 수 있다. 그다음은 그림의 개수와 전시 공간의 조건에 달려있다. 물리적인 연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나면, 각각의 화면들은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어 발화하기 시작한다. 아주 오래전에는 대륙들이 붙어서 하나로 연결된 판게아(Pangaea)였다. 그것처럼 캔버스 속 지평선과 시간들이 연결되어서 원래 하나였던 것이 된다.
그렇게 회화-설치는 만들어진다. ‘그림 병풍’, ‘그림 동굴’, ‘그림 연결하기’ 등으로 조심스레 불러본다.
2 나는 붓의 역할을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한다. 뻣뻣한 붓, 부드러운 붓, 닳은 붓, 망가진 붓을 이용해 내가 그리려는 대상의 표면과 질감을 창조해 내듯이 그려 나간다. 그럴 때 나의 오른팔이 로봇의 팔인 것처럼 붓을 들고 캔버스 천을 두들긴다. 그런데 로봇 팔은 약간 어설프고, 그런 어설픔에서 나오는 실수들이 그림을 풍부하게 만든다. 그리고 가끔 나는 내가 오래된 그림판 프로그램이나 고장 난 프린터가 된다고 상상한다. 그런 것들을 동경한다. 프린터가 고장났을 때 만들어내는 이상한 결과물들이 회화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디지털 이미지가 지닌 매끈함과 생동감을 따라잡고 싶다. 디지털 이미지를 실현해 주는 액정 뒤의 수많은 불빛이 회화에도 필요할 때가 있다.
나는 어릴 때 디지털 이미지를 수집하고 프린트하는 취미가 있었다.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저장하면 그것은 내 것이 된다. 실제로 어떤 물건을 갖는 것이 아닌데도 그것 이상의 충족감이 들었다. 그때부터 ‘이미지’라는 것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요즘은 기술이 발전해서 해상도가 깨지는 일이 매우 불쾌하게 다가오는데, 생각해 보면 과거에는 그런 저해상도마저도 쾌감이 일었던 것 같다(물론 기억의 미화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난 저해상도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
전현선〈Into the Woods to Lose Our Way〉 캔버스에 수채화 30점 조합, 원기둥 형태
회화 1점 400×600×700cm(캔버스 구조), 350×ø35cm(기둥) 2025
아트바젤 언리미티드 전시 전경 2025
사진: Andrea Rossetti 제공: 작가, 갤러리2, 르롱갤러리, 에스더쉬퍼
그리기의 시간—디지털 시대, 회화가 살아 있는 방식에 대하여
박경률 작가
인공지능 기술은 이제 특이점에 도달했거나 근접해 있다. 우리는 시각예술을 ‘그리는 것’보다 ‘생성하는 것’에 더 가까운 환경 속에 살아간다. 이미지가 더 이상 물질이 아닌 데이터로 존재하고, 창작이 물리적 행위가 아닌 명령어로 치환되는 지금의 시기를 어떤 이는 창의성의 위기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시점을 미술의 본질이 위협받는 순간이라기보다, 예술 정의의 외연이 확장되는 시기로 이해하고 싶다.
나는 회화를 이미지 생산의 도구로 보지 않는다. 회화는 하나의 사건이며 실재다. 붓질은 세계를 재현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세계와 직접 접촉하는 물리적 흔적이다. 물성과 시간, 몸이 개입하는 이 본능적인 행위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충돌하며 고유한 존재로 남는다. 그래서 나에게 붓질은 ‘그린다’기보다는 ‘두고 놓는다’는 행위에 가깝다. 회화는 시각적 결과물이 아니라 감각의 축적이며, 붓과 안료, 몸의 움직임을 통해 지속되는 그리기의 시간이다.
이러한 태도는 내가 말하는 ‘조각적 회화’ 개념과 연결된다. 나는 회화의 구성 요소들—붓질, 여백, 물성, 형상—을 모두 평등하게 바라본다. 화면 위의 개별 붓질은 낱개의 조각처럼 기능하며, 완성된 그림 또한 전시장이라는 실재 공간에 놓이는 순간 다시 하나의 오브제가 된다. 중력, 빛, 감상자의 시선, 시간과 같은 외부적 요소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재배치된다.
“목적 없는 붓질이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을까.”이 질문은 작업 내내 나를 사로잡는다. 디지털 환경에서 이미지는 언제나 목적을 가진 결과로 존재한다. 그러나 회화는 오히려 목적이 사라졌을 때 본질을 드러낸다. 어떤 붓질은 실패로 끝나고, 어떤 흔적은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무목적성과 반복을 감내하며, 비로소 보게 될 새로운 것을 늘 기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술적 가치를 ‘사건’과 ‘마주침’ 속에서 찾는다. 이때의 사건은 정교한 의도나 구조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돈오(頓悟)’처럼 단번에 일어나는 깨달음에 가깝다. 예기치 않은 관계의 발생, 붓질 사이의 충돌, 감상 중에 발생하는 인식의 변화—이 모든 것이 예술적 사건을 구성한다.
따라서 예술은 고정된 형태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거울에 비쳤다가 사라지는 장면/이미지처럼 특정한 순간에 드러나고 다시 흐려진다. 회화는 고유한 물성을 지니면서도 인식 차원에서 스스로의 형식을 부정하며, 우리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전이되는 현상으로 존재한다.
〈생활〉 캔버스에 유채 140×340cm 2025
〈만남의 광장〉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시트, 자연광 가변 설치
《SeMA 앤솔러지: 열 개의 주문》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2023
돌 옮기기
윤영빈 작가
〈드라이브 모양 드라이브 (비 내리는 밤에)〉캔버스에 유채 112.1×162.2cm 2024
〈깨짐 모양 깨짐〉 캔버스에 유채 91×91cm 202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먼 기억 속에 돌을 줍는 내가 있다. 정확히는 돌을 줍던 나 자신의 시점과 감각이 아니라, 나였다는 어린이가 기록된 비디오테이프 속 한 장면을 기억한다. 진분홍 옷을 입고 흙바닥에 주저앉아 노란 보따리에 돌을 마구 담고, 그 무거운 걸 신나게 끌고 다니던 아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돌처럼 굳어진 이미지들. 나는 여전히 눈앞을 가득 메운, 새롭고 진귀하며 아름다운 이미지의 광채에 쉽게 매혹되고 정신없이 담아두기를 반복한다. 생각을 앞지르는 시선, 질감 없는 명료함, 정제된 형상들이 무한히 새로고침 되는 루프 속에서 나는 상상력을 잃어버린 채, 단지 눈앞에 놓인 것들을 좇으며, 의식에 기입된 장면만을 되풀이해 보기에도 바쁜 사람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걸까?
그렇게 나는 정신없이 그러모은 무더기 속에서 언젠가 일부를 솎아내고 비닐 속에 정돈하고는 ‘투명 회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형식의 출현은, 각종 쇼윈도와 상품의 포장지, 휴대전화의 액정처럼 모든 것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는 시각 환경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작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세계의 부품들을 옮겨와, 소속을 전환하고, 접고, 자르고, 다시 인접한 사물들과의 관계를 조정하고 다듬는 일. 그것만이 넘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무엇 하나를 더하거나 빼지 않으며 이루어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개입이자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이처럼 명확한 운반, 확실한 재현은 회화라는 더디고 번거로운 방식을 통과하여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나는 투명 회화를 제작하던 방식처럼, 가공된 이미지들이 짜깁기된 풍경을 태블릿 스크린에 띄우고 최대한 가깝게 흉내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물감의 건조 속도와 조합할 수 있는 색의 한계, 붓의 탄성이 남기는 자국, 캔버스의 요철과 크기 등 회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복제에 가까운 완벽한 모사와 전달을 목표로 삼았던 나의 노력을 자꾸만 미끄러지게 했다. 눈과 손과 도구와 시간을 거치며 발생하는 이탈과 흔적의 연속이 그림을 만들며 동시에 멀어지게 했다. 이것은 실패일까?
투명 회화는 분명 세계의 일부를 여과 없이 담아낸다. 그러나 그 간편함이, 너무도 매끄럽고 정확한 재현이 어떤 저항이나 마찰을 발생시키지 않았기에 투명 회화를 너무도 쉽게 다시 세계로 편입되게 한다. 투명 회화가 재료를 조리하지 않은 채 하나의 접시에 담아내는 샐러드와 같다면, 회화는 이질적인 재료들을 빻고, 녹이고, 섞어 하나의 표면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돌을 갈아 만든 잼을 화면에 문질러 만드는 토스트처럼. 이 번거로운 과정을 통해 시간은 회화 안으로 스며들고, 회화는 다시 시간 속으로 자신을 침투시킨다. 그렇게 섞이고 엉겨 만들어진 표면은 원래의 이미지와는 조금씩 어긋난 다른 무언가로 태어난다.
나는 한때, 나의 회화를 이미지를 단순히 운반할 뿐인 수동적 행위로 여겼다. 오로지 모방이라는 과정만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창작을 창작이라 부를 수 있을지 아직도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다만 반복적인 흉내내기의 미끄러짐 속에서 문득 운반 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돌이켜본다. 우리는 국제 배송을 통해 먼 세계의 물건을 받아들인다. 그 배송은 단지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의 상자 속에는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의 감각이 함께 도착하며, 그사이에 기다림이 놓이고, 그 대가로 새로운 연결이 발생한다. 회화의 운반도 이와 같다. 회화는 이미지의 비선형적인 시간을 품고, 상상할 수 없었던 낯선 것들을 내 앞에 도착시키는 일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왜 이것을 다시 보게 되는가?
회화는 여전히 혼자의 일이지만, 그 안엔 언제나 다수가 머무르고 있음을 느낀다. 색의 원료가 되는 물질, 물감을 만든 사람, 그것을 유통한 사람, 붓과 캔버스, 이미지의 원저작자, 디지털 장비, 그 모든 도구와 환경이 그림 속에 남아 있다. 그러니까 돌멩이가 잔뜩 든 가방에 잠식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나는 여러 존재의 힘을 빌려 나의 선택을 벗어나는 움직임을 행하며 예상치 못했던 곳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회화의 운반이 수동적인 재현이 아니라, 감각의 경계를 확장하는 능동적인 실천임을 깨닫는다.
이것은 마치, 세계의 구조를 다시 묻는 일과 같다. 몇 초 안에 반응을 끌어내지 못한 콘텐츠는 SNS 알고리즘에 의해 사장되고, 생성형 AI는 수천 장의 이미지를 몇 분 만에 쏟아낸다. 창작의 맥락과 시행착오는 삭제되고, 우리는 언제나 압도당하는 쪽이다. 무수히 많은 이미지가 너무 빠르고 매끈하게 편집되어 도착하는 지금, 회화는 여전히 느리고 불완전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다시 옮긴다. 나는 회화가 유통망에 쉽게 실리지 않는 감각과 가려진 이미지, 불편하고 비경제적인 장면들까지도 끝끝내 실어 나를 힘이 있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회화는, 그 이동 불가능성마저 감당해내는 마지막 운송 수단일 수 있다. 즉, 아무도 주문하지 않은 것을, 비용과 시간을 들여도 도착하지 않을 듯한 무언가를, 시스템에서 누락된 장면들을 오히려 굳이 되새기려는 태도. 그것이 회화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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