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빛, 대기, 숨결을 돌보는
오로민경 Minkyung Oro
Up-and-Coming Artist
1988년 출생. 빛, 그림자, 에너지, 관계 등 우리를 움직이는 작은 것들의 힘을 탐구 하고 이를 소리, 공기, 조명 등 여러 감각 매체와 기술을 활용하여 공간 안에서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미디어 설치뿐 아니라 사운드 퍼포먼스 및 연극, 영화, 공연 등 다양한 장르에서 협업하고 있다. 개인전 《폐허에서 온 사랑》(아트잠실, 2022), 《영인과 나비: 끝의 입자 연구소에서 온 편지》(팩토리2, 2019) 등 개최. 단체전 《여기 닿은 노래》(아르코미술관, 2024), 《음소거된 물의 소리: 진동의 걸음》 (산지천갤러리, 2024), 《우리가 바다》(경기도미술관, 2024) 등 참여. 다큐멘터리〈돌들이 말할 때까지〉 (2022, 감독 김경만) 등에 음악감독으로 참여. 울산과학기술대 사이언스윌든 선정작가(2019) 등 선정. 경기도미술관에 작품 소장. 사진:박홍순
〈기울어진 테이블〉 가구협업 스튜디오 에어 진동 스피커, 테이블, 혼합매체
《초대의 감각》 탈영역 우정국 전시 전경 2021
사진:지로 사진 제공:작가
어둑한 공간. 바닥에 놓인 건반 앞에 앉은 사람이 있다. 주변에는 나뭇가지와 풀잎, 선풍기, 수조, 작은 돌, 싱잉볼과 칼림바 같은 이국적인 악기들이 놓여 있다. 삼삼오오 모인 관객들 앞에서 퍼포머는 공연의 시작을 알리듯 조용히 촛불을 켜고, 장소의 기억을 담은 작은 돌을 건반 위에 올린다. 돌이 자신의 무게로 건반을 누르며 소리를 내고, 그 옆에서는 악기뿐 아니라 기능을 갖지 않는 일상의 조각들이 하나둘 겹쳐져 새로운 울림을 만들어낸다. 신중하게 눌리는 건반에 따라 새소리, 풍경이 부딪히는 소리, 도로의 소리, 바람에 나뭇가지가 스치는 소리,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신시사이저의 전자음과 함께 공기의 결을 흔든다. 선풍기가 돌아가며 작은 조명과 모터가 달린 나비 모형이 바람을 일으킨다.
이 소리들은 작가가 분쟁의 자리를 따라가거나 로힝야 난민을 만나기 위해 떠난 여정 속에서, 혹은 동료와 연대의 정을 나누던 현장에서 채집한 것들이다. 2021년 보안여관에서 열린 퍼포먼스〈돌, 빛, 결〉에서부터 2024년 경기도미술관의 세월호 10주기 추모전 《우리가 바다》의 개·폐막 퍼포먼스까지, 협연자와 구성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20여 분간 이루어지는 그의 사운드 공연은 항상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의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관객들은 누구도 정의할 수 없는, 각자의 경험 속 어느 순간과 공명한다. 작은 빛, 대기, 숨결, 공기, 그것들이 일으키는 미세한 울림과 함께.
작은 것들의 힘: 빛, 그림자, 돌멩이, 움직임
오로민경은 한결같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탐구하고 그 속에서 자신과 동료를 지키는 법을 고민해왔다. 그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것은 ‘작은 것들’이다. 빛, 그림자, 공기, 소리 등.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데 필수적임에도 그 영향과 힘을 종종 잊어버리는 것들이다.
졸업 직후, 그는 도로 위 빛의 형태를 따라 분필로 채워 넣으며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좇는 〈붙잡다〉(2010)를 선보였다. 그 빛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남겨진 흔적은 순간을 포착하려는 시도 자체가 가진 힘을 보여주었다. 같은 해, 아현동 재개발 지역에서 작업한 〈그 때 담다〉(2010)는 사라지는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철거될 예정인 건물의 외벽과 창문 너머로 비친 풍경을 상자 안에 담아냈다. 빛의 자리를 따라 작은 구멍을 내고, 그 틈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빛으로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작은 상자 속에는 그림자 연극처럼 남겨진 공간이 있었다. 이 작업들은 ‘사라지는 것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그 대상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는 그의 작업 방식의 초석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오로민경은 ‘고정된 형태로 기록하는 것’보다 ‘변화하는 과정 자체를 담아내는 것’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 〈마음 듣기〉(2010, 부산 오픈스페이스 배)에서 그는 시계 초침의 움직임을 소리로 전환하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놓치고 있는 미세한 진동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작업은 훗날 그가 연출해내는 공간과 소리에 대한 감각에서 닮은 점이 있다.
김선기×안소담×이승은×오로민경〈자연 위로의 노래짓기〉
《우리가 바다》경기도미술관 전시 연계 워크숍 전경 2024
사진: RB 크리에이티브
김윤×배민경 〈시시관광〉
‘서촌루나페스티벌’(보안여관)의 일환으로 진행된 서촌 골목길에서의 퍼포먼스 전경 2016
사진: 유용진
끝의 입자를 관측하는 사람
오로민경은 자신의 예술적 실천을 ‘끝의 입자 연구소’라고 부른다. 지층과 우주 사이,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아주 작은 힘과 흐름을 관측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그는 자신을 ‘환경을 만드는 수행자’ 이며, ‘빛과 소리의 움직임, 흐르는 시간에 집중하며 공간과 놀이’ 한다고 소개한다. 이처럼 그의 설치나 퍼포먼스는 빛과 공기, 소리와 사회적 현상 사이를 감각과 단초로 이어간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힘, 우리를 가라앉히고, 공명케 하는, 도시에서는 잃어버린 힘이다.
〈돌, 빛, 결〉(2021)에서는 “말 없는 바위와 빛을 바라보며 시간을 읽는 작업”을 진행했다. 흐르는 물이 만들어내는 반사된 빛과 물결에 의해 침식되는 바위, 점점 부서져 가는 모래알들의 시간을 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듣고 연주했다. 전시장 곳곳에는 작은 LED 빛이 연결되었고, 연주자가 소리를 낼 때마다 함께 깜박였다. 소리와 빛이 결합되며, 관객은 여러 감각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실험은 2024년 〈소리 뒤의 소리 #2: 마른 풀의 노래〉 로 이어졌다. 이 작업은 특히 가청 주파수 대역의 소리를 공유하기 어려운 청각장애인 관객과의 감각적 공명을 고민하며 제작되었다. 그는 마른 풀에서 나는 사그라지는 소리가 ‘서로 다른 몸’을 지닌 ‘우리’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지 질문하며, 그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을 준비하고 있음을 말한다. 즉 물리적 감각뿐 아니라 사회적 감각의 확장의 순간을 설치에서, 퍼포먼스에서 구현해낸다.
사회를 마주하며 생긴 새로운 결들
그의 작업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사회적 사건과의 조우’였다. 2010년 아현동 재개발 현장을 접하며 사라지는 공간의 의미를 고민했고, 같은 해 희망버스를 통해 새로운 방식의 연대를 경험했다. 이후 ‘발렛파킹’, ‘마감뉴스’ 등의 그룹활동과 ‘작은 빛’, ‘분단이미지센터’ 콜렉티브 작업을 통해 예술이 사회적 사건과 직접 연결될 수 있는 방식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예술이 애도와 위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소리와 마음이 필요할까요?”
이 질문은 2023년 〈작은 마음, 강한 위로〉에서 직접적으로 다뤄졌다. 그는 협업자들과 함께 상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고민했다. 소리와 공간이 가지는 치유적 가능성, 그리고 기술을 인간적인 애도와 연결할 방법에 대한 탐구다. 이 퍼포먼스는 단순한 음악 연주가 아니라 기술과 인간, 기억과 미래를 잇는 일종의 공동체적 경험이었다.
〈소리 뒤의 소리#2 마른 풀의 노래〉
아두이노, 사운드 센서, 디씨모터, 선풍기, 혼합매체 2024
《여기 닿은 노래》 아르코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사진: 홍철기
〈땅 아래 서로의 흰 빛〉 아두이노, 사운드센서, 거울, 분해한 새 장난감, 나뭇가지 2024
사진: 주용성
분단을 기억하는 방법: 땅 아래, 서로의 흰 빛들
2024년 진행한 〈땅 아래, 서로의 흰 빛들〉은 오로민경이 오랫동안 고민해 온 ‘분단 감각’에 대한 작업이다.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업은 ‘분단된 사회를 마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 대한 실험이었다.
전시 공간은 불이 꺼진 채로 멈춰 있다. 관객이 테이블 위의 편지를 읽기 위해 조명을 켜는 순간, 공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개의 대칭 구조물을 비추는 빛이 들어오고, 거울 기둥이 회전하며 두 개의 달을 만들어낸다. 새들이 움직이고, 작가가 분쟁지역과 일상에서 채집한 환경음이 울려 퍼진다. “이 작업은 개성 땅 아래 묻힌 고려 시대 유구와 유물에서 출발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묻고 싶은 기억과, 복원하고 싶은 소리는 무엇일까요?” 그는 관객들에게 지금 이 땅에 묻힌다면,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작업은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어떻게 지금이라는 미래를 함께 꿈꾸는 일로 이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한다. 사라지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들리지 않는 것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는 작은 연결의 가능성이다.
강재영×전경호×오로민경〈작은 마음, 강한 위로〉아두이노, 사운드센서, 거울, 모터, 혼합매체
《너에게 가까이》라이브 퍼포먼스 전경 2023
사진: 윤관희
보이지 않는 것들과 공명하며
오로민경은 다양한 삶의 관계 속 복잡한 마음을 돌보기 위해 더 추상적이면서도 섬세한 형태의 작업 구상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말한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떨어지는 한낮의 빛을 생각합니다.”
작은 돌이 건반을 누르고, 사라지는 소리가 흔적을 남기고, 우리가 채 감각해내지 못했던 진동으로 공간을 채운다. 기술과 사회, 자연과 인간,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그는 여전히, 작은 빛과 돌, 공기와 소리를 돌보며 세계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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