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금형 Geumhyung Jeong
정금형의 작업실과 그레이박스
이진실 미술비평
Artist

정금형/ 무용가, 퍼포머, 안무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호서대 연극영화과 및 한예종 무용원을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연출과 애니메이션 전공을 수료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Toys, Selected》(커낼프로젝트, 2025), 《Under Constructure》(ICA, 2024), 《Upgrade in Progress》(FMAV 모데나 비주얼아트재단, 2020), 《Homemade RC Toy》(쿤스트할레 바젤, 2019), 《스파 앤 뷰티 서울》(송은 아트센터, 2018) 등이 있다. 단체전 《The Gatherers》 (MoMa PS1 2025),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 《The Milk of Dreams》(2022), 《인간, 일곱 개의 질문》(리움미술관, 2021),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하루하루 탈출한다》(2021),《The Promise of Total Automation》(쿤스트할레 빈, 2016), 뉴뮤지엄 트리엔날레 《Surround Audience》(뉴욕, 2015), 《동아시아 페미니즘: FANTasia》(서울시립미술관, 2015), 제10회 광주비엔날레 《Burning Down the House》(2014) 등에 참여했다.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2016), 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 우수대안시각상 등을 수상했다. 인천아트플랫폼(인천, 2021), 델피나파운데이션(런던, 2017) 등의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사진: Walter Wlodarczyk 제공: Canal Projects
정금형의 작업실과 그레이박스
이진실 미술비평
2022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 전후로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정금형은 이제 공연예술가라는 정체성 못지않게 퍼포먼스 전시를 선보이는 시각예술 작가, 나아가 설치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부여받고 있다. 물론 지금도 공연예술계로부터 러브콜이 끊이지 않지만, 지난해 런던 ICA에서의 개인전 《Geumhyung Jeong: Under Constructure》를 비롯해 올해 뉴욕 모마PS1의 단체전《The Gatherers》(4.24~10.6), 캐널프로젝트(Canal projects)에서의 개인전 《Geumhyung Jeong: Toys, Selected》(5.9~11.22) 등은 정금형 작업의 무게 중심이 분명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전시들은 정금형이 등장하는 공연 퍼포먼스라기보다 기계, 혹은 로봇이라고 일컬어지곤 하는 그녀의 인형들의 방대한 진열을 거듭 전경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퍼포먼스란 언제나 하나의 ‘과정’이고 우발적이며 움직이는 유동성을 지닌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또한 그녀의 전시가 언제나 ‘관객성’의 조건과 양상을 실험하는 새로운 시공을 창출한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이토록 표면화된 사물들의 조립과 배치의 과정—그것이 의료용 마네킹과 헬스 기구로 이뤄졌든, 스파숍의 기물과 도구들로 구성되었든, 배터리와 바퀴에 연결된 구동체들의 행렬적 나열이든—은 나름 ‘수행적’인 성격을 드러내며, 정금형 작업의 핵심에 자리하는 신체적 수행성을 다른 방식으로 확장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16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개인소장품》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 전경 2016
사진: 남기용 제공: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Spa & Beauty〉 2017《Remaining Radical Cities》 타이베이 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Anpis Wang 제공: NTCAM
인형, 장난감, 유령들의 시간
그러나 조립 및 완성, 혹은 새로운 탄생을 기다리는 부품들의 진열, 재활과 망가짐 사이에서 진동하는 괴팍한(idiosyncrasy) 수집품들의 수장고로서 작업대/작업실의 실체를 전시장으로 옮겨 놓은 최근 전시들은 움직이는 인형과의 은밀한 파트너십, 섹슈얼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던 과거의 작업 양상과는 분명 또 다른 국면을 만들고 있다. 물론 정금형의 작업에서 전시의 포맷이 강화된 것은 작가의 순전한 의지라기보다 미술계의 더 잦은 호출, 그리고 동시대 미술관으로 넘어온 퍼포먼스의 다변화적 양태 속에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일 테다. 그녀의 작업이 이벤트성 공연에서 디스플레이 포맷으로 본격 전환한 기점은 아마도 2016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개인전 《개인소장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전까지 라이브 퍼포먼스를 통해 마네킹, 진공청소기, 운동기구, 굴삭기 등을 동원하며 조종자와 조종하는 사물의 성애적인 관계를 다루던 정금형은 이 전시에서 자신의 다양한 인형과 도구들을 ‘수집과 소장’의 맥락으로 펼쳐 보였다.
이후 송은 아트센터에서의 《스파 앤 뷰티 서울》(2018)를 비롯해 이탈리아, 덴마크 등 유럽에서 가진 퍼포먼스 전시들, 2022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마치 조립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위에 놓인 부품들처럼 작업대 위에서 조립되었거나 조립되기를 기다리는 로봇, 마네킹, 인형들의 해부된 사지와 장기들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많은 공연이 취소되고 관객 대면 자체가 난관이 되었던 코로나19 팬데믹을 경유한 후, 아마도 그녀에게는 짧은 라이브 퍼포먼스로는 충당할 수 없는 시공적 과제가 더욱 요구되었을 것이다. 즉 전시장이라는 공간에 장시간 동안 (그녀 대신) 뭔가 자리해야 했을 것이다. 정금형의 작업은 갈수록 그녀의 진짜 신체, 혹은 그 신체와의 실제적인 상호작용보다 그녀를 대변하는 인형들, 파트너들이 증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 유사-신체들이 발산하는 시각적 힘과 잠재력에 대한 이야기로 이동하는 것 같다. 전시장을 점령한 그녀의 행위자/퍼포머들은 조립되기를, 움직이기를, 역할을 부여받기를 기다리는 기계들, 로봇들, 인형들, 분신들이다. 이제 정금형의 퍼포먼스 전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사물들의 배치와 영상이 담긴 모니터들이고, 이곳은 퍼포먼스의 현전성보다는 반복과 재활성화를 암시하는 유령적 시간성이 지배한다.
오늘날 미술관 안팎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 전시들은 공연 형식과 전시 형식이 혼종된 새로운 프로토콜을 장착하고 있다.1 클레어 비숍에 따르면 2008년 이후 미술관에서 퍼포먼스의 부상은 극장의 ‘블랙박스’와 미술관의 ‘화이트큐브’가 융합된 ‘그레이박스’라는 새로운 시공과 관객성을 창출했다. 그리고 이러한 혼종성의 프로토콜로서 대두된 새로운 종류의 관람성과 현장성(liveness)은 사실 동시대 디지털 기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비숍이 주목한 그레이박스의 프로토콜 가운데 하나는 미술관에서 펼져지는 퍼포먼스가 이전과는 다른 시간 체제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미술관 퍼포먼스는 그 고유한 안무의 시간성—일시적이고 특정한 시퀀스들로 이루어지는 현장 이벤트—에서 더 공간적인 시간, 즉 자율적인 관람, 비동기화된 타이밍, 그리고 온전히 정적인 주의 집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전시의 시간성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전시의 시간성으로 이주한 퍼포먼스는 동시대 관람의 지각적 조건이라 할 디지털 기술과 감각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말하자면, 움직이는 조각과 같이 포토제닉한 느린 움직임을 선보이거나, 관객이 어느 각도에서, 어느 장면을 마주하든 간에 소셜미디어에 올릴 수 있는 다채널 오페라의 상황을 연출하거나, 미술관의 운영시간에 맞춰 반복적인 ‘루프’를 구동시키며 퍼포머의 움직임 자체를 타이머에 동기화시키는 것이다. 설치미술가이자 안무가인 마리아 하사비(Maria Hassabi)가 그러한 루프 속에 작동시킨 자신의 퍼포머들을 ‘작은 기계들’이라고 묘사했듯이,2 오늘날 미술관 퍼포먼스에서 퍼포머의 신체와 기계 사이의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깝다.
정금형의 작업에서도 인체와 기계의 거리는 지극히 가깝고 그 관계는 자주 착종되기에 이르지만, 라이브 타임으로 펼쳐지는 정금형의 퍼포먼스는 여전히 안무적 시간성을 고집하고 있다. 그녀의 퍼포먼스에서 인체는 오로지 그녀 자신의 몸이고(다른 퍼포머를 고용하지 않는다), 그녀의 몸은 아플 수 있고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최근 국내에서는 그녀의 퍼포먼스를 아주 드물게만 만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퍼포먼스 전시들이 ‘작은 기계’들을 움직이며 전시장을 점령하고 있다면, 정금형의 퍼포먼스 전시는 기다리는 인형들의 시간으로 고요하게 루프되고 있다. 대신, 정금형이 직접 등장하고 수행하는 퍼포먼스에서 그녀는 관객들에게 ‘관람’이 아닌 ‘목격’을 요청한다. 그녀는 공연을 보는 이들을 관객보다 ‘증인’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진술한 적이 있는데,3 이러한 증인들은(극장의 관객에 비하자면) 언제나 한정된 소수이며, 촬영이 금지되고 오롯이 자신의 눈과 귀로 그녀의 말과 몸짓에 집중해야 한다. 안무가이자 무용 이론가 안드레 레페키(André Lepecki)에 따르면 오늘날 퍼포먼스의 관객은 ‘관중’과 ‘증인’으로 구분될 수 있다. 레페키 또한 동시대 퍼포먼스에서 증인을 요청하는데,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관중(spectator)’과 달리 증인은 퍼포먼스에서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체현하고 감정적으로 접촉하고 나름대로 번역하는 자이자 미래의 관객들에게 자신의 “주관적-육체적-정동적-역사”를 전달하는 매개자/매체이며, 나아가 퍼포먼스를 함께 책임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4

〈Removed Parts: Restored〉혼합 매체 2025《The Gatherers》뉴욕 MoMA PS1 전시 전경 2025
사진: Kris Graves 제공: MoMA PS1

〈Toy Prototype〉조각과영상 설치, 알루미늄 프로파일, 의료 시뮬레이터, DC 모터, 아두이노 보드, 조이스틱 등 다양한 재료 가변 크기 2021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The Milk of Dreams》 전시 전경 2022
사진: Andrea Avezzù 제공: La Biennale di Venezia
욕망의 실패, 도착을 상연하기
2016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가진 〈가이드투어〉 이래로 정금형은 여러 차례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를 벌인 바 있다.〈스파 앤 뷰티 시범〉, 〈비디오투어〉, 〈화재대비시나리오〉,〈컨디션체크〉 등 렉처 퍼포먼스라 하기에는 동적이고, 공연이라 하기에는 설명이 너무 많은 그런 퍼포먼스들에서 그녀는 완벽한 각본보다 몇 가지 규칙을 실행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퍼포먼스를 시작하며 그녀는 지금 ‘우리’가 자리한 장소를 환기시키고(건물 도면을 공개한다든지), 화재 시 비상탈출 방법과 대피로에 대해 과도한 디테일을 곁들여 설명하곤 한다. 그리고 퍼포먼스를 위한 규칙 몇 가지를 소개한다. 하지만 그 규칙은 언제나 깨질 위험이 있고 그녀 스스로 위반하기도 한다. 그 규칙은 관객의 믿음이나 집중을 자아내는 일련의 수단일 테지만, 게임의 규칙처럼 완고하게 지켜지기보다 깨지는 순간을 예감케 하며, 준수보다는 위반과 실패의 순간에 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색다른 코드를 발생시킨다. 퍼포먼스의 각본과 진행은 완벽해 보이지 않고, 그녀 스스로 “각본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도 한다. 그녀의 퍼포먼스에서는 언제나 그런 사소한 위험/모험이 동반되고 상연되며, 관객은 이를 그저 지켜보는 자가 아니라 그녀의 내밀한 의식에 동참하는 이들로서 그 모험을 다소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 나눠 갖는다. 무엇보다 이런 퍼포먼스들은 대개 사소한 기술적 문제를 일으키거나 우발적인 상황으로 인해 어색한 순간을 발생시킨다.
이런 퍼포먼스는 대개 ‘확인’, ‘과정’, ‘훈련’, ‘시나리오’와 같은 명칭을 달고 있다. 제목들은 마치 완벽한 실행에 대한 작가의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연기와 무용을 전공한 정금형이 인형, 가면, 헬스 기구, 의료용 마네킹, 원격 장치 등을 무대에 올린 이래로 거듭 맞닥뜨리는 ‘실패’와 ‘기술적 문제’에 대한 심리적 예방접종에서 파생된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 반복되는 실행들을 통해 ‘실패’는 예방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상연의 대상, 아니 퍼포먼스 그 자체가 된다. 그녀는 원래의 용도와 설계에서 벗어난 인형들, 로봇들과 상호작용을 꾀했던 자신의 작업이 “끊임없는 실패와 해결책 찾기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깨달은 건, 제가 ‘실패’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 실패가 아닐 때가 많았다는 거예요.”5
올해 초 정금형은 자신의 부천 작업실에 사람들을 초대해 ‘작업 보고회’ 형식의 작은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이때 정금형은 옆에 세워둔 그녀의 로봇을 원격 조종해 어떤 움직임을 선보이려 했는데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기어이 작동하지 않자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을 던져버렸다— 이것이 의도된 각본이라면 그야말로 그녀는 철저히 실패의 상연을 목표로 한 것 아닌가. 실패의 실행으로서 퍼포먼스는 관객들에게 그녀의 욕망과 좌절의 순간으로, 즉 아주 은밀한 비밀로 초대받은 듯한 느낌을 안겨 준다. 2024년 런던 ICA 전시에서도 그러한 은밀한 공간이 마련된 것 같다. 전시장의 작은 방 안에 폐쇄회로 티비(CCTV)처럼 설치된 모니터들은 그녀의 로봇들이 끊임없이 실패와 발전을 거듭하는 실험의 순간들을 반복 재생했기 때문이다.

《Geumhyung Jeong: Toys, Selected》 캐널프로젝트 전시 전경 2025
사진: Izzy Leung 제공: Canal Projects

《Geumhyung Jeong: Under Constructure》 런던 ICA 전시 전경 2024
사진: Rob Harris
이러한 실패, 곧 불완전함은 정금형 퍼포먼스를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 공연된 〈심폐소생술 연습〉부터 〈Under Contruction〉과〈Toy Demo〉에 이르기까지, 의료용 마네킹, RC 장난감들의 움직임을 안무하고 그것을 또 자기 몸으로 번역하거나 친밀하게 상호 작용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리비도가 부여된 어떤 대상을 활성화시키고 소생시키고자 하는 반복적인 열망, 좌절, 분노를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과도할 정도로 진지하게 전달한다. 정금형의 퍼포먼스 전시가 자동인형(automata)을 구현하는 것처럼 보이고, 최근에는 백색 인간 스켈레톤 모형을 이용하면서 인간적 형태와 인공적 형태의 결합을 꾀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녀의 작업은 유기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의 수렴, 인간과 기술의 관계 탐구보다는 오직 한쪽의 구조, 즉 인간의 욕망이 지닌 허약한 구조만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과 기술의 상호성이나 전통적이고 도구적인 기계 관념을 넘어서는 포스트휴먼적 공존은 정금형의 작업에서 유아적이고 자폐적이고 어설픈 코미디가 된다.
정금형의 사물들이 흔히 기계, 로봇이라고 불리지만, 그것들은 정확히 기계도 로봇도 아니다. 의료용 마네킹, 미용 훈련용 마네킹, 동력 장치, 바퀴, 무선 조종 장난감들이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분해되고, 기형적으로 조립되고, 오작동하게 되는 ‘도착적(perversive)’ 신체들이다. 유사 오토마티즘으로 구현되는 상호 관계 또한 도착적이다. 장난감, 마네킹의 움직임은 오토마티즘 나아가 ‘능동성’을 가장하는데 그 능동은 오직 정금형의 수동적인 만족을 위한 것으로 설계된다. 초기 퍼포먼스에서 사용된 마네킹과 장치들은 그녀에게 다가오거나 그녀를 떠받치고 빨고 벗기고 쓰다듬는 식의 에로틱한 파트너로 작동했었다. 퍼포먼스 때마다 그 전복된 수동성을 위해 정금형은 그야말로 진지하게, 아니 과잉이다시피 온 힘을 다한다.
현재 그녀의 전시에서 등장하는 장난감들은 10여 년 전 ‘소장품’들에 비하자면 꽤나 확장된 스케일, 복잡성, 정밀성을 장착한 것 같다. 외양으로 보자면, 로봇 공학과 인공지능에 맞닿은 산업적 면모가 부각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여전히 정금형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의 DIY를 지속할 것이고, 또 다른 차원의 인형 극장을 도모할 것이다. 확장되고 변모하는 그녀의 장난감들이 이 유머러스하고 나르시스적이면서 도착적인 시나리오를 또 어떻게 변화시킬지 궁금하다.
*본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 기고이다.
1 Claire Bishop Disordered Attention: How We Look at Art and Performance Today Verso(London, New York) 2024 Chapter.2 참고
2 위의 책
3 현시원 “어쩌다 보니 커져버리는 것들: 공연예술가 정금형 인터뷰” 웹진 『춤인』(2016.09.29) http://choomin.sfac.or.kr/zoom/zoom_view.asp type=out&zom_idx=115&div= (최종검색일 : 2025.9.8)
4 Andre Lepeki Singurlaritie: Dance in the Age of Performance Routlege 2016 p.175
5 현시원 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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