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  Jaeho Jung

정재호의 헤테로토피아

ARTIST FOCUS

정재호/ 1971년 출생. 서울대 동양화과 학부 및 석사 졸업. 현재 세종대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선정. 개인전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초이앤초이 갤러리, 2023 ), 《창과 더미》(상업화랑, 2020 ), 《열섬》(인디프레스, 2017 ), 《혹성》(갤러리소소, 2011 ), 《아버지의 날》(갤러리현대, 2009 ), 《오래된 아파트》(금호미술관, 2005 ), 《청운시민아파트》(갤러리피쉬, 2004 ), 《보다》(공평아트센터, 2001 )외 다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금호미술관, OCI미술관 등에 작품 소장

〈금화시민아파트〉 한지에 먹, 목탄, 아크릴 132 × 194cm 2005
제공 : 작가

정재호의
헤테로토피아

우정아 |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정재호가 그린〈난장이의 공〉은 헤테로토피아적이다. 그의 그림 속 현실 풍경이 디스토피아적이지 않고, 그 가운데 뜬금없이 떠있는 로켓은 유토피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헤테로토피아’는 미셸 푸코가 보르헤스의 문장을 분석하면서 ‘유토피아’와 상반된 공간으로 제안한 고유 개념이다.푸코는 헤테로토피아가 언어를 전복하고, 명명을 거부하며, 문장을 구성하는 통사법조차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불안을 야기한다고 했다. 확실히 정재호의 그림은 마치 푸코에게 보르헤스의 문장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웃음을 유발하다 곧이어 모호한 불편 혹은 불안을 야기하는데, 그 근저에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구분이 명확하던 시대, 추구해야 할 이상과 배척해야 할 현실 사이의 경계선이 확실히 존재하고, 따라서 투쟁의 대상이 확고해서 오히려 위안을 주던 이데올로기의 시대로부터 벗어난 탈-서정성이 있다. 물론 정재호의 그림은 충분히 서정적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서정성은 디스토피아여야 할 서울의 쇠락한 빈민가 풍경이 계급적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대신 오히려 퇴행적 노스탤지어를 자아내고, 유토피아로의 도피를 보장하는 로켓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비장함보다는 오히려 키치적인 가벼움을 보여줘서 일어나는, 일탈적 서정성이다.

〈난장이의 공〉한지에 아크릴 400 × 444cm 2018

〈발명왕〉 한지에 아크릴 81 × 123cm 2012

정재호의 작품에 로켓이 처음 등장한 건 2012년작 〈발명왕〉에서다. 철판을 두드려 만든 퉁퉁한 유선형 기체에 납땜 자국이 선명한 동그란 창을 내고 그 끝에 빨간 노즈콘을 부착한, 로켓의 원형이라 할 이 로켓은 한국 명랑만화의 거장 윤승운이 1975 년 어린이 잡지『어깨동무』에 연재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요철발명왕』에서 유래했다. 만화책의 표지에는 서울의 주택가 골목에서 들뜬 모습의 요철이가 반짝이는 원색 로켓을 발사하기 위해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한지에 수묵채색으로 번안한 정재호의 고색창연한 로켓은 별들이 쏟아지는 아득한 우주를 배경으로 메마른 달 표면에 온전히 착륙해 고요하다.

만화 속 발명왕 요철이 반복되는 실패에도 비밀의 연구실을 포기하지 않았던 건, 반드시 발명에 성공해 부모에게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기 위해서였다. 20세기 말까지 한국의 SF적 상상력은 이처럼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기반 위에서 작동했다. 그러나 SF라는 장르에서 실제 팬들이 느끼는 더 강렬한 감정은 ‘경이감 ( sense of wonder )’이다. 무한한 우주, 무수한 별들, 시공간을 가르는 UFO 와 외계인처럼 현실 세계에서 접할 수 없는 낯설고 놀라운 존재와 그 존재가 열어주는 온갖 미지의 가능성은 경이감이라는 대단히 특별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2 요컨대『요철발명왕』을 비롯, 개발경제시대 대한민국의 아동 및 청소년용 판타지 서사가 넓은 맥락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하나의 문화적 장치였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독자들이 경험했고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경이감 또한 단순히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고 요약하기는 어렵다. 그 세대적 경험이 이미 이전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경험했던 경이감은 지극히 순수하고 원초적인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정재호는 폭발적으로 밀려 들어오는 대중문화와 그 혼종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아날로그로부터 디지털 세계로 전환하던 시기의 가운데 있었던 엑스 세대였다. 어린 시절부터 정재호의 일상에는 TV, 만화, 잡지가 있었고, 이들을 통해 접하는 대중문화에는 이미 국경이 없었다. 온 가족이 모여 컬러TV를 보던 그의 세대는 점차 개인용 컴퓨터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청소년기에 칠판을 보며 손글씨를 썼다면 성인이 된 뒤에는 프로젝터로 파워포인트를 보고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했다. 도서관의 색인카드를 하나씩 꺼내 보며 자료를 찾던 그들이 인터넷의 온라인 세계로 대거 이주한 뒤에는 적극적으로 가상의 세계를 구축했다. 웹 1.0 시대를 열었던 1970년대생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온라인 정보와 콘텐츠의 생산자이자 이용자로서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가 성장하는 데 기반을 닦았다. 진짜 화성으로 가겠다는 일론 머스크가 1971년생인 게 그저 우연은 아닌 것이다.3


1 푸코는 1967년 3월 파리 건축연구회에서 발표한 논고「다른공간들」에서 시작하여『말과 사물』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출판물을 통해 헤테로토피아의 개념을 설명했다.「다른 공간들」은 Michel Foucault Of Other Spaces: Utopias and Heterotopias Architecture/Movement/Continuité(Oㅋctober, 1984) trans. Jay Miskowiec참조. 이를 포함한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관련 글은『헤테로토피아』미셸 푸코 지음 이상길 옮김(문학과 지성사, 2014) 참조
2 박상준「21세기, 한국, 그리고 SF」『오늘의 문예비평』 59 (2005) p. 47

《먼지의 날들》 갤러리현대 전시 전경 2014

〈청춘〉 한지에 아크릴 78 × 121cm 2012

정재호가〈난장이의 공〉을 그리기 위해 올라섰던 세운상가는 단지 실패한 대도시의 암울한 디스토피아가 아니었다. 198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세운상가와 이를 축으로 늘어선 청계천 기계공구 상가에서는 상인들이 모이면 순식간에 인공위성도 쏘아 올릴 수 있다는 전설이 회자됐다. 4 1990년대 세운상가는 해금 (解禁) 이전에도 이미 일본의 최신판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지구상의 어떤 엔터테인먼트도 실시간으로 직수입해 해적판으로 유통하는 놀라운 신문물의 발산 근거지였다.『요철발명왕』과 애니메이션〈돌아온 아톰〉을 거쳐 사이버펑크에 눈을 뜬 정재호는〈블레이드러너〉에 매료됐고, 일본 아니메의 전설〈아키라〉에 빠져들었다.5 20세기 말에 등장한 사이버펑크에서 그리는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는 빈부격차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동양풍의 도시 외관, 대표적으로 허름한 홍콩형 아파트 외관에 가득 붙은 녹슨 실외기로 묘사된다. 정재호의 오래된 도시는 압축적 경제개발시대 대한민국이라는 과거에서 온 근대의 유령과 사이버펑크의 묵시록적 미래에서 날아온 종말의 전령, 양자의 혼종이다.

〈발명왕〉은 2014년 개인전《먼지의 날들》에서 대체로 같은 크기(80×120cm)의 액자로 표구된 여러 점의 회화와 함께 질서정연하게 벽에 걸려 전시됐다. ‘아카이브 회화’라고 불리는 이 연작은 정재호가 4· 19혁명이 일어난 1960년부터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졌던 1980년까지의 20년간 출판된 각종 사진과 영상을 수집해 이미지를 추출해 회화로 번안한 결과물이다. 여기엔 신문기사, 정부출판물, 한국영화의 장면들이 있고, 이렇게 수집된 ‘아카이브’에서 정재호는 “그가 알고 있는 스펙터클을 기준으로” 장면을 선택해 그림으로 그렸다.6 그러나 그가 선택한 이미지들—그레이하운드, 영화 속 여주인공의 스틸컷, 화재, 진열된 의수, 저울, 버려진 건물, 짓다 만 마천루, 불붙은 타자기, 나란히 놓인 다이얼식 전화기, 폐허가 된 아파트 놀이터 등—사이에서 한눈에 띄는 소재의 일관성은 없다. 이러한 서사의 불가능성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 일률적인 프레임, 질서정연한 배열이라는 디스플레이 형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먼지의 날들》은 지난 세기의 유토피아적 기획이 실패했음을 증명하는 이미지들일 뿐 아니라, 그 표면적 형식은 더 나아가 거대 서사의 가능성 또한 명운을 다했음을 보여준다.

정재호의 그림은 처음에는 웃음을 유발하다
곧이어 모호한 불편 혹은 불안을 야기하는데,
그 근저에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구분이 명확하던 시대, 추구해야 할 이상과
배척해야 할 현실 사이의 경계선이 확실히
존재하고, 따라서 투쟁의 대상이 확고해서
오히려 위안을 주던 이데올로기의 시대로
부터 벗어난 탈-서정성이 있다.

《먼지의 날들》에서 많은 이의 눈길을 끈 작품은 청년 네 명이 어항 같은 헬멧을 쓰고 달 표면에 어정쩡하게 선 뒷모습을 그린〈청춘〉이다. 원본은 1973년 9월 13일 경찰에서 대대적으로 실시한 장발 단속으로 젊은이들이 연행돼 북적이는 명동파출소를 찍은 한 사진이다. 이 사진에 대해 정재호는『요철발명왕』을 읽으며 밝은 미래를 꿈꿨던 어린이들이 “정신과 신체를 억압하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로 내몰렸다고 탄식했다.7 그러나 파출소를 가득 메운 청년들 중 하얀 나팔바지를 멋스럽게 차려입고 무심히 손가락을 넣어 엉덩이에 낀 바지를 꺼내는 이의 뒷모습은 엄혹했던 한 시절의 인권 탄압 현장을 몸개그로 바꾸는 반전이다. 비좁은 파출소에서 이 넷을 도려내서 친절하게 헬멧을 씌워 달로 보낸 정재호는 원본 사진을 인용하되 일부만을 추출해 다른 맥락에 삽입하고 매체를 바꿔 전용했다. 불편함 뒤에 터지는 웃음은 억압적 사회에 대한 비판과 한탄의 적실성을 의심케 한다. 감탄과 애정의 감정이 없이 이 그림이 가능했겠는가. 전시장에서〈청춘〉이 무작위로 선별된 듯 보이는 여타의 이미지들 가운데 놓인 결과, 우리가 전통적으로 사진에 부여해 왔던 증거로서의 현실 재현 능력과 사실주의 회화에 부여해 왔던 사회비판 능력은 필연적으로 중화된다.


3 박한우「일론 머스크와 울고 있는 한국의 70년대생」『대구신문』(2022. 1. 5). 이런 관점에서 2003년에 서비스를 시작한 블로그 이글루스에 오랜 기간 글을 남기다, 2023년초 이글루스의 서비스 종료로 갈 곳을 잃은 정재호의 상황은 마치 오래된 아파트가 철거를 맞고 주민들이 강제 퇴거 명령을 받는 현실 상황이 가상의 공간에서 재연된 것 같다
4 《청계천 기계공구상가-붕어빵틀에서 인공위성까지》(청계천박물관, 2021.12.10~2022.4.10)
5 류정화· 김제희· 박혜정· 송채정· 조윤지, 정재호와의 인터뷰 2022.10.3
6 정재호 ‘강연을 위한 메모들_이글루스에 남긴 작가 노트’(2023.3.19)
7 정재호 ‘청춘_이글루스에 남긴 작가 노트’(2016.5.17)


〈청운동기념비 1〉 한지에 먹, 목탄, 아크릴 182 × 454cm 2004

〈북악기념비-정릉스카이아파트〉 한지에 먹, 목탄, 아크릴 132 × 388cm 2005

정재호의 작품은 근대적 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에 남긴 모순과 폐해에 대한 비판이거나 사회 참여적 리얼리즘이거나 행동주의로 요약될 수 없다. 그가 그러한 회화의 정치적 권능과 윤리적 당위성을 확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틀림없이 민주화에 투신했던 학생운동의 대의를 존중하고 정치적 행동으로서 민중미술의 역할에 동의했지만, 이미 탈정치화 시대, 경제적 풍요 속에서 자유로운 문화를 누리며 성장한 그의 세대에게 학생운동이란 투쟁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애정, 약자에 대한 배려, 인류에 대한 보편적 휴머니즘”에 기반한 윤리로서 설득력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8 따라서 같은 크기로 균일하게 걸려있는 ‘아카이브 회화’의 표면 위에서는 혁명의 불꽃과 신파극의 여주인공이 등가의 이미지로 존재한다. 이미 재현의 틀 안에서 유통되는 이 모든 이미지는 결코 현실이거나 실재를 보여 주지 않는다. 결국 모든게—역사적 경중이나 개인사적 의미와 무관하게—표피적 이미지로 변환되어 유통되고 소비되는 빠른 사이클 안에서 종국에는 소멸하는 미디어 사회에 대해 정재호는 투쟁 대신 투항을 선택했다. 그의 회화는 이미지의 위선이나 허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이들을 관객에게 지도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려는 태도, 그것이《먼지의 날들》이 보여주는 현실성의 윤리적 방식이다.


8 정재호 ‘미대에서의 정치수업_이글루스에 남긴 작가 노트’( 2006.5.31)

총괄 기획자 류정화, 책임연구원 김제희와 연구원 박혜정, 송채정,조윤지가 모인 ‘미술연구모임 평평 (이하 평평)’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2-2023 작가 조사-연구-비평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연구 출판물『정재호: 밝은 미래』를 제작했다. 평평은 정재호의 작업을 관통하는 네 개의 주제어로 얼굴(Facade), 장면 (Scene), 유령(Ghost), 풍경(Landscape)을 선정하고, 개인전과 주요 단체전을 통해 발표된 약 200여 점에 이르는 작품들을 시기에 따라 정리하되, 해당 시기를 관통하는 주제에 맞추어 재편하여 도판들을 수록했다. 또한 기존의 비평문들을 분석하고, 작가의 작업 노트와 작업과 관련한 자료들을 토대로 작가와의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먼저 선행 연구자들의 글을 대표해,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개인전에 맞추어 발표된 심소미의 글과 2021년 한국예술연구 33권에 수록된 최석원의 글을 재수록했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노트와 자료들, 인터뷰 등을 토대로, 신정훈, 우정아, 평평의 연구자들을 통해 작성된 새로운 비평문들을 수록했다.

월간미술은『정재호 : 밝은 미래』에 있는 글 중 미셸 푸코가 제안한 개념인 ‘헤테로토피아’를 통해 정재호의 아파트 회화, 아카이브 회화, 최근의 을지로 풍경화들을 차례로 해석한 우정아의 글을 축약하여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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