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현 Jihyun Jung
조각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기
: 있는 듯 없는 듯 부지런한 정지현의 사물들
ARTIST
정지현/ 1986년생으로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는 한예종 조형예술 예술사와 전문사를 졸업하고 갤러리 스케이프(2010),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2011 ), 인사미술공간(2013), 두산갤러리(2016), 아뜰리에 에르메스 (2019), 인천아트플랫폼(2022), 아트선재센터(2023)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22),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2021 ), 아르코미술관(2021 )등 다수 단체전에 참여했다. 김세중청년조각상(2023), 문체부 공공미술 프로젝트〈내 이웃의 의자〉 장관상(2021 ) 등을 수상했다.
〈에브리 해태 2021〉 혼합매체 142×195×64cm 2021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기》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2021
사진 제공:작가
조각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기
: 있는 듯 없는 듯 부지런한 정지현의 사물들문혜진 | 미술비평
〈아무도 모르는 곳〉 강변에 떠밀려 온 사물들 가변크기 2012
〈Thames〉종이 위에 연필 153장 18 × 26cm 2012
선을 긋는 시간 동안 나는 강물의 흐름을, 흘러가는 부유물을, 주위의 작은 변화들을 주목할 수 있었다. …종이의 흔적들은 날마다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이 기록에는… 어떤 목적성이 없었다. 단지 내가 본 것에 대한 기록이었고 거듭해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직감적으로, 적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편이 나아 보였다.1
정지현의 작업을 오래 지켜본 이라도 그의 작업세계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특유의 부지런함의 결과인 남들의 서너 배는 될 엄청난 작업량, 폐플라스틱이나 철사 쪼가리 같은 버려진 물건부터 나무, 스티로폼, 콘크리트, 알루미늄, 3D 프린팅 필라멘트 등 가능한 모든 재료를 망라하는 재료 활용의 폭, 손톱만한 크기의 오브제에서 거대한 수변 광장까지 극소와 극대를 아우르는 규모, 폐물건 콜라주, 주조, 공간설치, VR 조각 등 다종다양한 방법론.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넓은 작업의 특징은 반복보다 새로운 실험을 선호하는 작가의 성향에 기인한다. 결과는 조소의 조형적 가능성을 온갖 각도에서 건드리는 사물의 대향연이다. 작업의 전개가 명백한 대표작을 중심으로 초기작과 후기작이 수렴하는 구조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응집성이 전혀 없이 밀가루처럼 흩어지는 파편의 형태도 아니라는 것이 그의 작업의 특이성이다. 외견상 산포된 작업의 표면 아래 면면히 흐르는 어떤 태도/경향들이 있다. 그것들은 일종의 결절점을 형성하며 연결되기도 하고, 결합하기도 하며, 반복되거나 변주된다. 그 잠재태들을 끌어 올리고 접속의 양상을 가시화하는 것이 이 글의 의도다.
정지현의 작업 궤적은 2016년 두산갤러리에서 열린《곰염섬》을 기점으로 크게 둘로 나뉜다. 전반부에 해당하는 초기작들은 주로 버려진 물건을 주워와 얼기설기 만든 작은 오브제들로, 마치 팀 버튼 영화를 보듯 엉뚱하고 소외된 물건들로 이루어진 공상의 세계는 부산하게 작동하는 키네틱 조각들로 채워져 있다. 학부 졸업전에 기반한《못다 한 말》(갤러리 스케이프, 2010),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에서 열린 개인전 《빗나간 자리》(2011 ), 인사미술공간에서 개최된 《Bird Eat Bird》(2013)가 초기 작업을 대표하는 전시다. 이들 전시에서 작가는 현실과 분리된 인공적인 환상의 공간을 창조했다.《못다 한 말》에서는 전시장 천장 위 빈 공간에 고야의 판화나 호러 판타지를 연상시키는 기이한 세계를 조성했고,《빗나간 자리》에서는 전시장 내부에 가벽을 쳐 비밀의 방을 만들었다.《Bird Eat Bird》는 3층으로 나뉜 전시장의 건축 구조를 활용해 지하층에 미로를 구축했다. 녹슨 통조림통이 삐걱삐걱 파도 소리를 내고, 동물 턱뼈가 공책 스프링에 매달려 덜컹거리며, 장난감 말의 다리가 빨래판을 긁으며 덜그덕거리는 기묘한 폐기물의 천국이 펼쳐진다. 이런 작업은 주로 현실의 폭력으로부터의 도피처, 다른 가능성을 향한 시도, 몽상의 다락방 같은 서사의 차원에서 해독되었다. 이같은 해석은 일면 초기작의 특징을 잘 서술해주지만, 이야기의 역할은 실상 본질적이지 않다. 정지현에게 이야기는 전달을 위한 효율적 장치에 가까우며, 작가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인위적인 환상의 공간을 연출하는 것이다. 인공 환상은 현실과의 차이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냄을 의도한다. 누구나 현실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관습적으로 그렇다고 합의하는 연극의 작위성처럼, 솔기를 감추지 않으면서도 만들어진 세계의 설득력이 실제 못지않은 몰입력을 부여하는 그런 허구 세계의 창출이 정지현이 구현하고 싶었던 무언가다.2
인공 세계에 대한 관심은 결국 만드는 자로서 작가의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버려진 물건들의 집적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도, 벤야민식의 과거 소환도, 아카이브의 구축과도 거리가 멀다. 주섬주섬 끊임없이 무언가를 수집하는 것은 쓰레기로 보이는 것에서 조형적으로 흥미로운 구석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정지현은 늘 손으로 만드는 구체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왔고, 사물의 색과 형태를 조합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물건(또는그 일부)을 원래 용도에서 떼어내 다른 역할을 부여하는 재조합은 작업 이력 전체에서 발견되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 기존에 있던 것을 재활용해 의미를 전환하거나, 이미 완성된 사물도 다른 맥락에 배치해 전혀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방식은 정지현의 모든 작업에서 계속 되풀이된다. 일례로, 런던 체류 기간에 제작한 초기작〈아무도 모르는 곳〉(2012)은 템스 강변에 떠내려온 쓰레기로 배를 만들어 강에 도로 띄운 것이고, 7년 후《다목적 헨리》(아뜰리에 에르메스, 2019)전에 출품한〈무한 메탈〉(2019)은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공사장의 폐기물을 재료로 기하학적 조형미를 도출한 것이다. 기존 작업이 재활용되는 경우도 흔하다.〈Night Walker〉(2013)를 끌던 다리가《하루 한 번》(아트선재센터, 2018)전에서〈바위책〉의 다리로 변형되고, 201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퍼포먼스/설치재료로 쓰인 나무 패널이《행도그》(아트선재센터, 2023)전 출품작〈소매손〉(2023)의 좌대로 바뀐다. 앞선 전시의 구조물이 설치의 재료가 되는 일도 많다.《하루 한 번》전의〈바닥과 입구〉(2018)는 앞 전시에 쓰인 카페트로 바닥을 조각적으로 구성했고,《행도그》전 역시 직전 전시인《서용선:내 이름은 빨강》(2023)에 쓰인 가벽을 비스듬한 좌대로 재사용했다.
이 끝없는 재배치와 재조합, 재활용은 결국 무엇을 향한 것인가. ‘다시(re)’의 방법론은 정지현이 세상에 대해 발언하는 방식이다. 이때 발언은 직접적인 주장이나 의견이라기보다 누구나 살면서 지닐 수밖에 없는 어떤 태도라고 봐야 한다. 작가는 자신의 태도를 ‘아마추어’에 빗댄다. 업으로 해야만 하는 프로와 달리 아마추어는 좋아서 하는 자다. 만들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는 오브제가 다른 무언가가 되는 순간 오브제를 다시 바라보는 것을 즐긴다.3 뻔한 것(cliché)을 낯설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에, 새로 만들기보다 있는 것을 다시 쓰기를 선호한다. 주목할 점은 다시 쓰기의 결과 못지않게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조형적 재구성이나 개념적 의미 부여만큼, 용도를 다한 사물을 되살린다는 전환 자체가 작가에게 중요하다. 그것이 초기작이 대체로 키네틱인 이유다. 멈춘 사물에 움직임을 주면 사물은 살아난다. 개개의 오브제를 만들어서 그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무언가를 어떤 식으로 다시 만드는지를 전달하는 것이 더 긴요하다. 전시장에 작업을 가득 채우는 특유의 방식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가 의도하는 것은 작업 하나하나의 조형성이나 메시지가 아니라, 복수의 작업에서 간취되는 제작의 태도다. “풍경으로 메시지를 무마시키려고 했다”는4 작가의 말은 반복을 통해 드러나는 고유의 입장이나 관점, 정서가 개별 오브제보다 중요함을 암시한다. 작업을 촉발하는 동기가 만들기에 대한 애정이고 제작의 방법론이 재조합이라면, 정지현이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확히 무얼까.
외견상 산포된 작업의 표면 아래 면면히
흐르는 어떤 태도/경향들이 있다. 그것들은
일종의 결절점을 형성하며 연결되기도
하고, 결합하기도 하며, 반복되거나
변주된다.
《곰염섬》 두산갤러리 서울 전시 전경 2016
〈애돌개〉 apmap 2018 제주 설치 전경 2018
〈더블데커〉 알루미늄 프레임, 철, 형광등, 선풍기 320 × 380 × 130cm 2018
《김세은, 박민희, 정지현:하루 한 번》 아트선재센터 전시 전경 2018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작가의 성향상, 정지현이 작업에 임하는 자세를 직접 밝힌 글은 많지 않다. 〈Thames〉(2012 )를 제작하면서 쓴 작가 노트는 정지현이 세상과 사물에 대해 취하는 입장을 드러내는 희소한 자료다. 런던 체류 시기 매일 30분 이상 템스 강가에서 흐르는 강물을 기록한 이 작업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드로잉 15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묘사라기보다 수행에 가까운 단순한 노동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일은 무용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목적성이 없는 행위의 반복은 의외로 가치가 있다. “돌이켜보건대 세상의 한쪽에 서서 일상 풍경의 한 지점을 꾸준히 바라본다는 것의 가치는… 얼마만큼 그 순간을 기억하고 매만지느냐에 따라 그 빛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덧붙여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대해서 일관성이 관건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판단을 유보한 채 이 일을 지속해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5 별 생각하지 않고 일단 꾸준히 행하는 지속은 일차적으로 반복이지만, 차이는 그 반복에서 발생한다. 매일 똑같이 흐르는 강물이 지형을 바꾸고, 어제와 오늘 느끼는 바람과 햇빛의 미세한 차이가 계절의 변화를 만든다. 플라토미술관에서 선보인〈종이 낙하 장치: 전보다 조금 무거워진〉(2014)은 이런 태도를 잘 보여준다. 8분에 한 번씩 종이 울릴 때마다 흑연이 조금씩 묻은 종이들이 일정량 바닥으로 떨어진다. 종이에 흑연이 묻어 나오는 정도는 시간과 장치의 우연한 조합이지만, 그 작은 엇갈림에 따라 종이에 새겨진 글씨는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한다.6 흑연이 묻은 정도에 따라 조금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진 종이들은 헛웃음을 유발한다. 공들인 거에 비해 허망한 결과에서 나온 실소일 수도 있지만, 진지하면서도 덧없는 인쇄 행위와 장난스럽지만 시적인 문구가 의외의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되든 안 되든 무언가를 열심히 시도하지만 실은 별것이 아니라는 헛헛한 태도는 정지현의 작업 전반에 배어 있다. 마지막 순간에 단 한 번 분사되는 물과 빛으로 무지개를 만드는 〈별안간 무지개가〉(2013), 글씨나 그림의 패턴대로 부지런히 깜박이며 지나가지만 장노출로 찍은 사진이 아니면 아무 결과도 남기지 못하는〈Night Walker〉 (2013/2017), 너무 느려서 움직이는지 아닌지 헷갈리는 키네틱 조각 〈애돌개〉(2018 )는 썰렁 개그 같은 농담을 우리에게 건넨다. 그 농담은 가볍지만 무겁고, 허술하지만 단단하다. 소극과 적극, 무심과 열심, 자조와 희망 사이를 넘나드는 중도적 노선은 세상에 거리를 두고 있지만 보기보다 관심이 많은 개입적 관찰자의 태도다.
움직이는 작은 오브제들이 가득 모인 허구 세계는 《곰염섬》전을 끝으로 사라진다. 《곰염섬》은 초기 작업의 완성이자 후기 작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일종의 분기점을 이룬다. 과거 전시의 가벽을 재활용해 극적인 독립 공간을 구축하고 기존 작업을 가득 쌓아 놓은 이 전시는 고별 무대와도 같다. 관객은 공간의 안팎을 누비며 엄청나게 다양한 크기의 작업 사이에서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하게 된다. 진열대 위에 놓인 자잘한 오브제는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보아야 하지만, 뚫린 가벽 사이로 넘겨다 보이는 원경은 시선을 멀리 주어야 한다. 오페라처럼 가까이 보기와 멀리 보기가 공존하는 이 드라마틱한 전시를 마지막으로, 작가는 어둡고 연극적인 공간 연출과 이야기, 움직임을 다루지 않는다. 사물의 용도를 바꾸는 수단으로 움직임을 도입했지만, 눈을 현혹하는 움직임은 작업을 무대 소품처럼 만들어 의도치 않게 감상을 찰나적으로 만들었다.7 작업을 천천히 진지하게 보기보다 휙 보고 넘기게 되는 것이다. 이후 작가는 인위적으로 물건을 자르고 붙여 변형하는 대신, 대상의 재료나 표면 처리, 제작 기법을 다르게 해 사물의 변화를 도출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풍경에서 사물로 넘어가는 이행의 궤적은《하루 한 번》에 남아 있다. 여기서 정지현의 사물은 함께 전시된 김세은의 추상 회화를 닮기도 하고 그림을 그 안에 품기도 한다. 사물은 독립된 조각이자 회화를 투과하는 창문의 프레임으로 작동하거나, 그림을 가리는 가림막이자 그 자체 색면 회화가 된다. 환경에 반응해 함께 풍경을 이루며 공간을 드로잉하는 방식은 덜 인위적이지만 또 다른 방식의 공간 연출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리 계획된 설계에 따르던 과거와 달리 연출은 즉흥적이고 가변적인 스케치로 바뀌었다. 이와 동시에 그의 사물은 더 이상 무대 소품이기를 그치고 독자적인 조각으로 회화와 나란히 존재한다. 부피와 양감, 규모가 두드러지는 사물들은 이제 완연한 조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정지현의 변화를 공인한 것은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다목적 헨리》(2019 )다. 이 전시와《가우지》(인천아트플랫폼, 2022 )는 후반부 작업을 망라하는 기점이 되는 전시로, 작업의 초점이 잘 짜인 풍경 조성에서 조각 매체 실험으로 이행했음을 선포한다. 작업의 다수가 양감과 무게를 지닌 덩어리고, 폐기물의 활용은 현격히 줄었으며, 최소한의 개입으로 사물의 속성이 바뀐다. 이런 변화는 특히 3D 스캐닝이나 3D 프린팅 같은 자동화 기술을 조각에 접맥시켜 전통적인 조각을 재해석하는 《가우지》에서 뚜렷하다. 갈아내기, 나누기, 시점 바꾸기, 쌓기, 표면 떠내기, 재료 바꾸기, 출력하기 등, 마치 잽을 날리듯 가볍게 치고 빠지는 작가의 개입은 발랄하면서도 은근히 뼈가 있다. 한 예로, 마스코트 캐릭터의 다리를 뒤집어 놓은 〈부츠〉에 적용된 것은 갈아내기와 나누기다. 일반적인 조각 관행에서 감춰지는 속성이 여기서는 드러난다. 여러 겹 덧바른 회화 표면처럼 알록달록한 색이 비치는 〈부츠〉의 표면은 3D 프린팅 출력물의 원색을 감추기 위해 올린 FRP 외장과 퍼티를 갈아낸 결과다. 뒤집힌 다리는 조금씩 틀어서 쌓은 덩어리로 구성되는데, 실제로 나눠 제작하지만 완성되면 이음매를 감추는 조각의 위장은 얼기설기 쌓아 생긴 틈새 때문에 얼결에 폭로된다. 앞에서 보면 넓지만, 옆에서 보면 납작한 〈스웹〉(2022 )은 한쪽 면에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조각의 속성을 꼬집고, 마이욜(A. Maillol )의 〈강(La Rivière )〉( 1943 )의 스캔 데이터를 분할 출력한 〈멀리서 온 토르소〉(2022 )는 표면과 내부의 불일치 문제를 건드린다. 이들은 각기 다른 지점에서 조각의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 반항은 노골적이지 않지만, 흠칫 놀랄 만큼은 따끔하다.
《다목적 헨리》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 전경 2019 사진 : 남기용 제공 : 아뜰리에 에르메스
〈해치와 월디〉 우레탄폼 2022 《가우지(GOUGE )》 인천아트플랫폼 전시 전경 2022
〈카에루〉 복사된 스피드 클라이밍 15m 벽, 메오토이와에서 3D 캐스팅한 개구리 동상 2024
《드림 스크린》 리움미술관 전시 전경 사진 : 김연제 제공 : 리움미술관
조각이란 무엇인가를 나름 정공법으로 공략한 최근 동향은 설치에서 조각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하다. 여러모로 차이야 확연하지만, 그럼에도 정지현 특유의 성향은 짙게 남아 있다. 작업복을 입은 작가의 몸을 뜬 우레탄폼 조각 〈마이욜 강〉(2019 )은 근대조각의 걸작〈강〉의 열화 버전이다. 엉성하게 팔을 든 조악한 조각상 뒤로 빛이 번쩍이며 연기가 품어져 나오는 것을 본 순간 터지는 웃음을 막기란 쉽지 않다. 감출 수 없는 B급 정서는 녹슨 통조림통으로 가짜 파도 소리를 내던 때와 다르지 않다. 부스러진 스티로폼으로 만든 세상 허접한 배( 〈아무도 모르는 곳〉(2012 ) ), 앞에서는 멀쩡하지만, 뒤로는 신파의 끝장 같은 문장(“너는 내가 흘린 만큼의 눈물”)을 쓰고 있는 전동기( 〈Night Walker〉 ), 시내 한복판에 잘 있는 동상을 급습해 훔친 손들이 자갈치처럼 쌓인 콘크리트 더미( 〈공공의 손 모음〉(2018 ) )는 조용한 딴지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한편, 눈에 띄진 않지만 꾸준한 반복도 은연중 잔존한다. 방점이 행위에서 조형으로 이동했기에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성실한 반복을 통해 발생하는 차이는 근작에서도 여전히 중요하다. 그 자체가《가우지》의 반복인 《행도그》(2023 )에서 생산되는 차이는 꽤나 흥미롭다. 《가우지》에 출품된 〈멀리서 온 토르소〉는《행도그》에서 세 번 되풀이된다. 한번은 똑같이, 다음은 부분으로, 그다음은 색 변화로. 〈멀리서 온 토르소〉는〈멀리서 온〉(2023 )이 되고, 다시 〈멀리서〉(2022 )가 된다. 지지대와 공존하던 껍질이 두 번째 반복에서 사라지고, 알맹이만 남은 스펀지가 세 번째 반복에서 황변된다. 복제가 되풀이되면서 차이가 벌어지고, 외형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제목도 원본에서 갈수록 이탈한다. 가면 갈수록 엉성해지며 조야해지는 ‘멀리 더 멀리’의 풍경은 자문자답을 반복하며 점점 더 대담하게 전통과 세계에 어깃장을 놓는 작업세계의 행로에 묘하게 상응한다.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편이 나아 보인다’에서 출발한 정지현의 반복이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발산하는 광경은 볼수록 놀랍다. 반복은 작업 내부에서, 작업과 작업 사이에서, 이 전시와 저 전시 사이에서 줄기차게 발생한다. 이렇게 출현한 차이는 용도도 뒤집고, 의미도 뒤집으며, 속성도 뒤집는다. 행위가 수행적으로 행위자를 구성한다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통찰은 정지현에게 딱 맞는 금언이 아닐까. 그가 생산한 이 모든 사물은 되든 안되든 지속한 만들기의 소산이고, 만드는 자로서 정지현의 자부심과 애정 또한 이 묵묵한 수행이 낳은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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